[발굴] 국방개혁 실패의 역사② 김영삼과 21세기위원회 국방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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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의 군에 대한 무관심

보고서 채택도 못한 21세기위원회


편집부



군 구조개혁을 좌절시킨 인사


노태우 대통령의 마지막 해인 1992년 11월. 육군은 장교 정원을 대폭 늘린 새로운 장교 정원표를 가지고 진급심사에 임했다. 그러나 진급심사 결과를 받아 본 당시 김희상 안보정책비서관은 깜짝 놀랐다. 대령 정원이 대통령 지침과 달리 전부 보병병과 위주로 늘어났던 것이다. 격분한 김 비서관은 대통령 지침을 위반한 이유가 무엇인지 즉각 육군에 해명을 요청했다.

여전히 육군은 이진삼 참모총장에서 김진영 참모총장으로 이어지던 이른바하나회 전성시대였다. 역시 하나회에 소속돼 있던 인사참모부장 안병훈 소장은 김 비서관에게 이렇게 반격했다.

“보병은 진급시키지 말라고? 그게 김희상 지침이지, 어떻게 대통령 지침인가? 그런 따위의 지침에 동의하지 않는다."

김 비서관은 육군의 이러한 퇴행적 행태를 대통령에게 보고해야 할지 망설였다. 그러나 대통령선거가 불과 한 달여 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사태를 바로잡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다.

정권 말기까지 군사정부를 탄생시킨 실세들이 육군을 장악하고 있다 보니 더 이상의 개혁은 불가능했다. 결국 보병은 급격하게 팽창했고, 기갑은 약간 증가, 그 밖의 병과는 정체된 형태로 1993년부터 한국군의 새로운 영관급 정원 구조가 정착되었다. 명백히 대통령 지시사항 위반이자 반개혁적인 조치였다.

군 구조 개편이란 흔히 전쟁 양상이 새롭게 변화함에 따라 군의 싸우는 방법이 달라질 수밖에 없어 군의 조직 형태를 바꾸는 것이다. 통상 다양한 군종, 즉 병과 간의 구성비를 새롭게 조화시킴으로써 일련의 부대 편성을 재편하는 것이다. 전쟁 양상이 보병전에서 고속기동전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전쟁 양상이 달라지고 있으므로 보병부대를 줄이고 기갑부대를 늘린다면 당연히 보병병과 장교는 남아돌고 기갑병과 장교는 모자라게 된다. 자연스레 보병병과 장교는 진급과 보직에서 불이익을 받고 기갑병과 장교는 그 반대가 된다.

그러나 군은 일반 기업과 달리 그 인력 운용이 매우 비탄력적이다. 보병 장교가 남아돈다고 정리해고를 할 수도 없고, 기갑 장교가 모자란다고 군 외부에서 충원할 수도 없다. 이른바폐쇄형 인력운용구조다. 이러한 경직성 때문에 군 구조 개편은 변화의 당위성이 있더라도 기존의 인력구조에 쉽게 변화를 줄 수 없는 속사정이 있다.

그런데 1993년에 군은 보병 위주의 장교단을 팽창시킴으로써 그 이상의 변화와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군이 싸우는 방법을 혁신하려고 해도 보병 작전 위주 장교단의 인력구조 자체가 바위처럼 떡 버티고 앉아 그것을 가로막는 주범이 되고 있다.

개혁은 혁명보다 어려웠다. 레임덕이 빨리 찾아온 6공화국에서 노 대통령의 개혁 의지는 군의 기득권에 자꾸만 밀리고 있었다. 앞서 육군이 진급 적체로 어려움을 겪자 정원 증원이라는 대안을 찾게 된 것도 1989년에 군 인사법이 개정되어 장교들의 정년이 크게 연장된 데 기인한다.

개정된 내용을 보면 소령은 43세에서 45세로, 중령은 47세에서 53세로, 대령은 50세에서 56세로 연장되었다. 이렇게 정년을 연장하다 보니 진급에서 누락되어도 남은 정년 기간을 다 채우고 나가려는 인원이 많아져서 후배 기수들의 진급 기회를 잠식해 들어가 2000년에 들어와서는 창군 이래 최악의 인사 적체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 실상을 보면 준장 진급의 경우 한참물이 좋았던육사 20기는 25%, 22기는 29%, 23기는 28%, 25기는 26%로 육사를 졸업한 자원의 최소 4분의 1은 장군이 되었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가 남긴 군 인사법의 유산에 따라 새로운 인력구조가 정착되고 난 뒤로는 29기 16%, 31기 14%, 32기 14%, 33기 13%로 절반 넘게 뚝 떨어지고 38기 이후로는 현재까지 13~15%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이렇게 진급 기회 자체가 줄어드는 것뿐만 아니라 진급 시기도 문제였다. 육사 22기의 경우 41~42세면 장군이 되었지만 27기부터 29기까지는 44~46세, 30기의 경우는 47~48세, 38기의 경우는 50세에 장군이 되었다. 전성기에 비해 9년이나 진급이 늦어진 것이다.



‘관리형 군대’로 군 구조 왜곡

 

군은 오랜 인사적체와 병목현상으로 경쟁 시스템 자체가 흔들리게 되었다. 군 인력의 전반적인 노령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지휘관의 체력이 허약해지고 젊은 패기도 병영에서 감소되기 시작했다. 진급 경쟁에 몰두하느라 장교단은 우울증 환자 병동같이 활기가 없이 창백해졌는데, 이는 2차대전 당시 비슷한 수준의 독일군에게 맥없이 무너진 프랑스 군대가 부활한 듯했다. 역사가 마르크 블로흐는 그의 저서 『이상한 패배』에서 "어제의 동기가 오늘의 경쟁자, 내일은 적이 되는" 프랑스 군대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비판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느린 군대 행정과 진급 경쟁에 골몰해서 줄서고 시기하는 장교단의 문화, 더 이상의 혁신을 거부하는 정체된 관료주의의 폐단 등 전형적인관리형 군대로의 추락이었다.

비대화된 인력구조는 곧바로 군 구조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818 계획에서 꿈꾸어 왔던 경쾌한 군 구조와는 거리가 먼 군령과 군정으로 이원화된 상부구조, 그리고 군 사령부에서 말단 제대까지 다단계로 이어지는 복잡한 지휘 구조는 유사시 군의 지휘 효율을 크게 떨어뜨리는 ‘관리비만․전략결핍’의 한국 군대를 장기간 지속시켰다.

불필요한 조직과 직위도 마구 생겨났다. 90년대 중반 이후 지휘관들은 휘하에 자기보다 나이가 많고 선배인 진급 탈락자를 부지휘관으로 거느리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지휘관들은 부지휘관을 될 수 있는 대로 교육이나 연수를 보내 그 부담을 덜려고 했다. 국방부를 비롯한 합참이나 각 군 본부 등에 셀 수 없이 많은 각종 TF․위원회 등 비편제 조직의 역할이 무엇인지 의심스러운 경우가 한둘이 아니다. 이렇게 한시적인 조직들은 국방 전반에 널려져 있는 ‘깨진 유리창’이었다. 적어도 진급 적기가 경과된 중령․대령이 30%를 넘어서면서 한국군은 점점 더 ‘관리형 군대’로 치닫게 되었다. 이처럼 818 계획은 철저히 왜곡된 군 구조를 탄생시켰다.

평시작통권 환수에 대비하여 합참이 창설되고 급격히 팽창되는 것과 더불어 90년대에 국군지휘통신사령부․ 국군정보사․ 국군수송사․ 국방참모대․ 국방군수조달본부 등 각종 상부조직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것은 818 계획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상부조직이 비대화되면 그에 상응하는 육․해․공 각 군 본부의 기능이 줄어들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818 계획 당시 이종구 육군총장을 비롯한 각 군 총장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려고 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결국 상부의 기능이 강화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각 군에 유사한 기능이 폐지되지 않고 남아 있어 유사․중복되는 양상이 818 계획 이후 적어도 20년 이상 지속되면서 비효율이라는 군의 불치병은 더욱 깊어졌다. 적어도 개혁을 하려는 서울과 이를 거부하는 계룡대 사이에는 20년 넘게 해묵은 갈등이 있었다.

그래서 또다시 군 개혁 문제가 새로 출범한 정권에게 과제로 제기되었다.


북한의 군축공세에 대비


1993년, 군사정권이 종식되고 문민정부가 출범했다. 정권 초기에 하나회 척결과 율곡비리 특감을 계기로 불어닥친 군 개혁 열풍은 국민의 높은 지지 속에 818 계획에 저항했던 다수의 하나회 군 장성들을 역사 무대에서 퇴장시켰다. 당시 40여 명의 고위 장성이 군복을 벗었고, 과거 정치자금으로 악용되었던 무기도입을 둘러싼 부패와 부조리가 낱낱이 파헤쳐지기 시작했다. 오랜 군사정권에 찌들어 있던 국민들은 새로운 정부의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한 군 개혁에 환호를 보냈고 다시는 안보문제가 정치에 악용되는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지기를 학수고대했다.

문민정부 초기에 국방부는 미완의 818 계획을 완결짓고 "21세기 통일 대비신 국방태세를 정비한다"는 목적으로 전군의 대령급 최정예 18명으로 구성된국방개혁위원회를 발족시키고 장관 직속으로 운영했다. 이 위원회의 위원장으로는 국방부 정책실장이 임명되었다. 앞서 80위원회나 818 연구위원회에 비해 다소 격이 떨어지는 소규모 연구위원회였다. 모두 세 명의 위원장이 거쳐 갔는데, 그 중에서도 3기 위원장으로 80위원회 출신인 조성태 장군의 활약은 눈여겨볼 만하다.

조성태 중장은 1군단장으로 부임한 지 불과 10개월 만인 1993년 10월에 권영해 국방장관으로부터 국방부 정책실장 임명 통보를 받았다. 권 장관이 문민정부 첫 국방장관으로 취임하여 의욕적으로 군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차관 재임 시 정책국장으로 근무했던 조 장군을 눈여겨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돌연 12월에 국방부 조달본부에서 포탄도입 사기사건이 터지면서 그 책임을 지고 권 장관이 물러났다. 후임으로 임명된 하나회 출신 이병태 국방장관은 전임 장관이 만든 국방개혁위원회를 해체하는 대신 "각 군별로 개혁안을 만들어 보고하는 것으로 대체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조 장군이 이병태 장관실로 들어가 "국방개혁위원회에는 육․해․공군의 최정예 자원이 모여 있으니 이들로 하여금 우리 군의 미래를 설계할 수 있도록 존치하여 본인에게 그 운용을 위임해 달라"고 건의했다. 이 장관의 승낙을 받아 조 장군이 위원회 명칭을 ‘21세기 국방연구위원회’로 바꾸고 위원회의 미래기획 기능을 더욱더 보강했다.

당시 조 장관이 위원회를 통해 구현하고자 한 것은 통일 이후까지 내다본 한국군의군축감군규모를 기획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조 장관이 이에 관해 구술한 내용을 그가 국회의원이었을 당시 보좌관이었던 여운모 씨를 통해 2010년 1월에 입수할 수 있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21세기 위원회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남북한 간에 군사적 신뢰가 구축되어 실제 감군을 해야 하는 상황이 도래할 경우 우리 군의 규모를 얼마로 감군하는 것이 가장 적당한가를 연구하여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었다. 당시 북한의 김일성은 걸핏하면남북한 군을 10만으로 감축하자. 만일 그것이 어려우면 1단계 30만, 2단계 10만으로 감축하자고 공세적인 제의를 해온 반면 북한의 적화야욕과 전략을 너무 잘 알고 있는 우리 군은 으레북한의 대남적화 전략 포기가 선행되지 않는 한 감군은 있을 수 없다며 거부하는 것으로 일관했다. 참으로 궁색한 논리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고 특히 명분에서 밀리는 형국이었다. 따라서 어떤 형태로든 문제의군축에 관한 우리의 대안을 도출해야 했다."



국방비를 빨아들이는 블랙홀

 

이 연구위원회가 신국방의 개념과 적정 군사력 목표 설정, 국방 조직 정비, 주요 핵심전력에 대한 종합적 정비계획을 작성하고자 했던 취지는 앞서의 위원회들과 대동소이했다. 그러나 이전 정부에서 계속 군 개혁을 지체시킨 결과 국방개혁을 더 이상 방치할 경우 우리 군에 심각한 운용상의 문제가 초래된다는, 보다 절박한 위기의식이 작용했음이 주목된다.

그 위기의식의 실체는 이렇다.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가치관이 다원화되고 개인 욕구의 증가로 군 운용에서도 더욱 높은 수준의 직업성 보장과 복지가 요구된다는 것. 이럴 경우 군대의 운영유지비가 계속 올라가 지금과 같은 추세를 그대로 방치할 경우 2010년경에는 국방 예산이 전부 인건비․복지비․운영유지비로 소진됨으로써 더 이상 군 전력 증강에 소요되는 재원을 확보할 수 없게 되어 미래 전장에서 요구되는 첨단 핵심전력을 구비하기가 요원해진다는 것이다.

당연한 문제의식이었다. 그것은 앞선 정권들에서 계속된 군 개혁의 좌절로 군 구조가 방만해지고 인력이 팽창되면서 군 전반에 거품과 군살이 자꾸 늘어난 탓이었다.

이에 따라 자주국방 역량을 구축하기 위한 3대 전략이 천명되었다. 첫째, 독침 전략이다. 적의 도발 시에 응징하고 보복함으로써 분쟁을 조기에 방지하고 확전을 방지한다는 것이다. 둘째, 땅벌 전략이다. 즉시 반격하고 적지로 전장을 확대하여 우리의 국토 피해를 최소화한다는 것이다. 셋째, 고슴도치 전략이다. 수세적 방어가 아닌 공세적 방어로 침략 세력을 괴멸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억제력을 확보하는 것이 국방의 핵심 정책인데, 문제는 국방 재원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군 구조였다. 1989년 당시에는 운영유지비가 61.9%였는데 그 후 계속 증가하여 1995년에는 70.1%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전력투자비는 같은 기간에 38.1%에서 29.1%로 감소하여 국방 예산의 태반이 인건비를 비롯한 운영유지비 위주로 짜여졌다. 전력투자비 중에서도 신규 사업 비율이 1989년 9.2%에서 1995년에 1.0%로 줄어들었다. 국방이 미래를 설계하는 장기기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병력과 장비 유지에 급급한 상황으로 추락하고 만 것이다.

연구위원회는 현재와 같은 구조가 지속된다면 미군이 철수할 경우 대체전력 확보가 곤란하고 자주국방 태세는 지연될 수밖에 없음을 진솔하게 고백하고 있다. 과거 80위원회와 818 연구위원회가 다 같이 우려했던 상황이 발등의 불로 떨어진 것이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80위원회를 통해 우리 군이 최초로 장기 국방 기획을 시도했던 1977년부터 국방의 발전 방향이자주적 억제력 확보라고 수없이 외쳐 왔건만 어쩐 일인지 국방은 그와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현재의 군 구조로는 억제력은커녕 비대한 몸집을 유지하기조차 벅찬 전형적인 비만형 군대로 추락, 한국적 국방 개념과 작전 개념이 무엇인지 갈수록 모호해지고 미국에 더욱더 의존하는 상황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전력을 제대로 증강하려면 병력을 줄이고 군 구조를 바꿔야 했다. 이는 너무나도 당연하고 핵심적인 진리이지만 가장 외면당하는 진리이기도 하다. 연구위원회는 2002년까지 병력을 50만 명으로 10만 명 줄이는 목표를 제시했다. 그러면서 국방 조직과 기능을 과학화하고 정보․지식화한다는 방향을 제시했다.

그런데 문제는 줄이는 방법에 따라 효과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국방 예산 절감 효과는 순수하게 사병만 10만 명 감축할 경우 1070억 원, 사병과 간부를 군 비율에 따라 함께 감축하면 5528억 원 정도 되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병력 감축에 상응하여 부대까지 감축할 경우 2조 9968억 원이 절감되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부대가 감축되면 부대 장비와 물자, 시설 같은 각종 운영비용이 절감되기 때문이다.


 

통일 이후까지 고려한 군 구조


계속되는 조 장관의 구술 내용.

“21세기 위원회의 가장 큰 업적은 장차 남북 간에 병력 감축을 합의했을 때를 대비해 우리의 ‘50만 감축안’을 기획한 일이었다. 이는 수적으로 별것 아닌 것 같지만, 해․공군 병력은 그대로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육군을 56만에서 35만으로 감축․정예화해야 하는 안이었고, 이를 다시 구체적으로 기획해 보면 육군의 상비 사단을 12개로 절반 가까이 줄여야 하는 어마어마한 개혁안이었다. 이 기획안이 있었기에 후에 노무현 정부에서의 국방개혁 2020이 나오는 모태가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기획안이 갖는 의미로는 우선 ‘비로소 우리도 북한의 상투적인 군축 공세에 실질적 대안을 갖고 대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전력보강 및 증강 과정에서 부대 위치 조정, 건물 신축, 신형 장비 교체 등 막대한 예산이 소요되는 분야에서 장차 남북 간 군비축소 또는 통일 이후에도 유지․보유하게 될 부대․전력 위주로 투자의 우선순위를 획정할 수 있게 해주는 가이드라인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즉 예산의 낭비 방지와 효율적 집행을 가능케 해주는 지침서 역할도 가능했다."

이 연구의 핵심은 명확하다. 병력 감축과 함께 부대 숫자를 과감하게 줄여야 한다는 것. 특히 육군의 숫자를 감축해야 한다. 이와 함께 국군체육부대․간호사관학교와 같은 불요불급 부대를 폐지하고 보급․정비․복지․인쇄 등 육․해․공군이 공통으로 보유한 유사․중복 기능을 대폭 통폐합하며 민간에 아웃소싱하거나 민군복합으로 운영하는 군 운영 혁신안이 제시되었다.

군의 운영을 근원적으로 혁신한다고 할 때 그 핵심 방향은 무엇이었을까? 계속되는 조 장군의 구술 내용.

“그런데 군사력 유지 및 정비 차원에서 보면 우리 군내에 피해갈 수 없는 ‘마의 블랙홀’이 존재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부터 전력증강은 통일 이후에도 우리가 보유하게 될 전력을 확실하게 구분하고 이를 집중적으로 첨단화해야 하는바, 따라서 기존의 재래전력 증강에 추가적인 예산 투자는 철저하게 지양해야 한다. 예컨대 동원 및 향토사단의 편제 장비나 화생방 물자의 경우 규정상 내구연한이 도래하면 자동적으로 전부 폐기하고 새로 보충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는데, 나는 이런 부분은 실제 전쟁이 발발했을 때 동원하거나 유사품으로 대체 가능한 부분은 과감하게 동원계획에 반영하면 된다고 본다. 재래 무기의 전형인 4.2인치 박격포탄의 경우 역시 확보 일수가 약간 부족하다고 해서 수백억 원씩을 투입하고 있는데, 이 역시 유사시 미국 또는 후진국으로부터 다소 비싼 가격에라도 사오면 된다는 생각이다. 하루빨리 첨단화․정예화해야 할 우리 군은 그런 재래식 전력에 돈을 쓸 여력이 없다. 특히 군축 또는 통일기에 해체 대상이 될 부대에 수리 부속은 물론 편제 장비 보충, 탄약 보충, 화생장비 교체, 박격포탄 기준량 확보와 같은 재래 전력을 증강하기 위한 예산을 편성한다면 이는 역사와 국민을 배신하는 행위나 진배없다.

문제는 이러한 구식 관행에 대해 ‘내가 책임질 테니 하지 말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사실상 없다는 점이다. 상당부분의 재래 전력에 대한 추가 투자는 그 명분이 너무나 현실적이고 논리적 하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소요가 무궁무진하여 마치 ‘마의 블랙홀’처럼 투자비를 무한대로 집어삼키는 특성을 갖고 있고, 따라서 불가불 얽매이다 보면 자칫 우리 군이 신예 전력 증강 집중을 통한 첨단화․정예화를 달성하는 데 장애물이 될 것이 분명하다. ‘자동으로’, ‘규정대로’ 재래 전력에 예산을 낭비하는 관행에 개혁 차원의 제동을 걸지 않는다면 우리 군의 미래는 없다."

1995년 3월에 조성태 중장이 대장으로 진급하여 2군사령관으로 부임하기까지 18개월 동안 군 구조 개편의 골격은 거의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한편 위원회의 주축인 육군은 군 구조개편 문제에서 818 계획에서 완결 짓지 못한 육․해․공군의 실질적 통합, 즉 통합군 체제를 만들어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위원장을 지낸 예상호 장군을 비롯해 이재달 장군, 장세용 장군, 임형규 대령과 그의 동기생인 김국헌 대령 등이 통합군제 관철을 위한 활동을 수시로 전개했다. 이들은 818 계획에 따라 작전은 합참의장, 군정은 각 군 참모총장으로 역할분담이 이원화됐는데, 이는 군사조직에 있어 ‘지휘 통일의 원칙(unity of command)’에 위배된다고 보고 각 군의 예하 부대가 상부 지휘권의 이원화로 혼선과 부담이 가중되고 있는 국방 현실을 격렬히 비판했다. 818 계획 이후 각 군의 예하 작전부대들은 참모총장과 합참의장의 지휘를 동시에 받는, 말하자면 머리가 둘 달린 격이었다.

따라서 합참 기능을 통합작전 체제로 전환하여 3군에 대한 지휘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군 상부구조를 바꾸고자 했다. 이와 더불어 각 군 본부는 총사령부 체제로 전환하고자 했다.

이러한 변화는 언젠가 작전권 행사에 대비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1995년 연구위원회가 제출한 ‘21세기 국방태세 연구에는 군 조직의 변화는 21세기 전에 전시작전권을 환수한다는 전제 아래 이루어지고 있음이 명확히 제시되어 있다. 보고서 명칭처럼 21세기형 새로운 국방을 지향하는 핵심 모토는 바로 각 군의 전력을 실질적으로 통합하여 작전권을 단독 행사하는 자주국방의 위상을 확립하면서 동시에 남북 군축과 평화공존, 통일에도 대비하자는 원대한 취지였다.



해․공군의 반발로 보고서 채택 불발


그러나 조성태 장군이 야전으로 가고 난 이후에 통합군 체제에 대해 해․공군이 격렬히 반발하면서 결국 보고서를 채택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해․공군의 경우는 사실상 전 군의 육군화를 초래할 통합군 추진에 반대 의사를 명확히 밝히면서 육군의 군살부터 먼저 줄이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해․공군이 육군에 대한 피해의식 때문에 이러한 주장을 할 수밖에 없는 정황이 이해된다 할지라도 단순히 자군의 피해만을 의식하여 자주국방의 대의를 외면하는 것 역시 소아적 자세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 위원회에 공군 대표로 참여했던 예비역 김성전 중령은 필자에게 한탄하듯 말했다.

“결국 95년에 21세기 국방연구위원회는 보고서마저 채택하지 못하고 흐지부지 연구를 종결한 채 해체되고 말았다. 말은 21세기 통일한국의 위상을 지향하는 국방정책과 전략을 기획한다고 했지만 각 군 간의 갈등으로 제대로 된 연구가 진행될 수 없었고, 청와대나 국방부도 표류하는 위원회를 방치했다. 연구가 종결된 이후에 위원회의 해․공군 장교들이 배제된 채 육군 단독으로 국방장관에게 비밀리에 연구 결과를 보고하는 전횡과 독선이 나타난 것도 연구위원회의 순수성을 의심케 하는 대목이다. 결국 연구위원회는 국방의 대의를 세우는 조직이 아니라 각 군 간의 기득권이 치열하게 충돌하는 전쟁터였으며, 이로 인해 아무런 성과도 남기지 못했다."

이렇게 해서 국방개혁은 또 다음 정권으로 미뤄지게 되었다.

그러면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 시절에 하나회와 율곡비리 척결 이외에는 실질적인 군 개혁과 자주화에 대한 논의가 거의 사라지고 연구의 명맥만 간신히 유지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1993년에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는 등 핵 위협을 가중시키고 1994년에 ‘불바다 위협’ 등으로 안보 위협이 급격히 고조된 탓도 있겠지만 주한미군이 안정적으로 유지된 것도 하나의 요인이라는 점을 배제하기 어려울 것이다. 과거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갑작스러운 주한 미7사단 철수라든지, 노태우 대통령 시절의 주한미군 3단계 철수 계획인 ‘넌-워너 수정안’ 같은 것이 문민정부 시절에는 전부 중지되었던 것이다. 한국군 자주화를 외칠 대외적 명분이 부족했던 기회를 틈타 한국 군부 내부의 기득권자들은 군 개혁에 대한 논의가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도록 원천봉쇄했다.

한편 안보 위기 속에서 군에 대한 근원적 개혁에는 아예 무관심했던 정치권력의 위기관리는 최악이었다. 김영삼 대통령과 그 측근들은 하나회 숙정 이후 군에 대한 관심을 거의 끊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반도 위기관리 문제에 있어 한미 간의 불화도 지속되었다. 어떤 정치권력도 군 개혁을 지원하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21세기 연구회라는 실낱같은 개혁의 흐름은 개혁을 결실을 맺기 위해 또 다른 정부의 출현을 기다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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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월간 군사전문지 <디펜스21+> 편집장, 한겨레 군사사이트 <디펜스21> 전문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