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 국방개혁 실패의 역사① 노태우와 818 군제개편 국방개혁

 

 D&D Focus 2011년 6월호

노태우의 레임덕을 악용

‘818계획’ 좌초시킨 육군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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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작전실패의 충격


1981년 미군의 이란 인질구출 작전, 일명 이글 클로우 작전은 8명의 미군이 사망하는 피해만 입고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처참한 실패였다. 미군은 이 당시 특수 작전을 통제하는 중앙집권화 된 사령부도 없었고, 다양한 임무들 간의 합동연습도 실시되지 않았으며, 어떤 군이 어떤 역할을 수행하기에 가장 적합한지에 관한 아무런 생각 없이 작전을 진행했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미 합참의 무능력과 비효율이었다. 이 당시 브라운 합참의장은 이듬해 퇴임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내 부하는 여비서 한 명 뿐이었다. 나머지 장교들은 각 군에서 파견한 로비스트나 정보원에 지나지 않았다.”

미 합참조직의 처참한 실패는 1983년에 베이루트 해병대 막사에 대한 테러 공격, 그리고 그레나다 침공 작전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났다. 나약하고 무능한 합참은 같은 실패를 되풀이 하면서 각 군 간의 치열한 이권다툼의 무대로만 존재했다. 2차 대전 이후 미 육군과 공군은 동맹을 맺었고 해군과 대립했다. 투르만 대통령조차 “만약 육군과 해군이 서로 싸웠던 것처럼 적과 열심히 싸웠다면 우리는 전쟁을 훨씬 일찍 끝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세 번의 연이은 작전의 실패는 합참개혁에 대한 근원적 개혁을 촉구했다. 1986년의 ‘골드워터 니콜스 법’이 바로 그것이다. 2차대전 중 두 다리를 잃은 니콜스 상원의원은 휠체어를 타고 나와 의회에서 군 개혁의 당위성을 연설했다. 그러나 의회는 이에 우호적이지 않았음에도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했다. 합참의장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는 내용을 핵심으로 한 군 구조 개혁은 1947년 미국의 국가안보법 제정 이래 40년이 걸려서야 겨우 이루어졌다.

전두환 대통령이 집권한 지 얼마 안 되는 시기에 미국에서 터진 일련의 군사적 난맥상은 한국 군부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미국의 군 개혁에 크게 자극을 받은 노태우 대통령은 그가 집권한 1988년 초부터 한국군의 상부구조를 근원적으로 혁신하는 과업에 착수한다. 집권한 직후인 2월 15일. 노 대통령은 출범과 동시에 청와대 비서실 내 안보보좌관실을 신설했다. 최초 안보보좌관실에 참여한 인물은 김종휘 안보보좌관과 김희상 안보정책비서관, 민병석 외교안보비서관 3명. 6공화국의 안보정책인 818계획을 성안한 주역들이다.

안보보좌관실의 개혁의지와 구상이 처음 비춰진 것은 약 두 달 뒤인 5월 6일 오자복 국방장관 업무보고 시. 노 대통령은 이날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국방태세 전반을 점검하여 제2의 창군에 버금가는 자세로 대대적인 자기혁신의 노력을 기울여 달라”고 군 수뇌부에 주문했다. 안보보좌관실은 이미 이날 업무보고에 앞서 2시간에 걸친 상세한 대통령 보고를 가졌었고, 대통령의 ‘혁명적 개혁’이라는 특별한 지침을 얻고 있었다.

혁명적 개혁!

주한미군의 감군과 철수에 따른 국방태세의 근원적인 재정립을 촉구하는 국군통수권자의 강력한 의지를 담은 지침이었다. 이로부터 열흘 뒤인 5월 16일 국방부의 전력증강 업무보고와 7월 7일 이종구 육군참모총장의 초임업무 보고 시 다시금 확인됐다. 이어 7월 14일 최세창 합참의장의 장기합동 군사전력기획서 보고 당시 “제6공화국이 지향하는 바와 같이 국가목표를 마음에 새기면서 참된 합동 군사전략의 수립과 군 구조 개혁, 전력 배비 등이 포함된 장기 국방태세 발전방향을 수립하라”고 대통령이 지시하면서부터 장기 국방태세에 대한 연구가 시작됐다. 바로 이 지시가 제6공화국 5년간에 걸쳐 추진될 국방개혁의 시발점이었다.


‘혁명적 개혁’ 추진 지시


1988년 8월 18일 오전 10시30분, 오자복 국방장관과 최세창 합참의장, 김종호 해군참모총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약 1시간에 걸쳐 용영일 합참 전략기획국장의 ‘장기 국방태세 발전방향 연구계획’ 보고가 진행됐다. 이 자리에는 청와대 측에서 홍성철 비서실장과 김종휘 안보보좌관, 김희상 안보정책비서관, 이현우 경호실장 등도 배석하고 있었다. ‘장기 국방태세 발전방향 연구계획’이 일명 ‘818 계획’으로 불리는 이유도 바로 보고한 날짜를 지칭하고 있다.

용영일 소장이 이날 보고한 내용은 1988년 8월부터 12월까지 1단계로 합참이 군 구조 개편 등 장기 국방태세 발전방향을 연구해 12월에 결과를 보고하고, 이어 1989년 1월부터 12월까지 각 군이 2단계 연구를 진행한 후 합참이 종합 보고한다는 게 핵심이었다. 보고를 받은 노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지침을 내렸다.

“군 구조는 단일군제 또는 이에 가까운 통합군제가 타당하다. 계획 추진을 위해 우수한 인재를 선발해 818 연구위원회를 구성하되, 범군적 공감을 얻기 위해서는 해군과 공군의 입장을 강화하고 해병대의 참여 기회도 부여하라. 또 연구위원회 운용 시에는 불필요한 통제나 너무 많은 지침을 줘 연구 분위기를 구속하지 말고 국방참모본부(현 합참)가 주관해 연구를 추진하되, 국방장관은 군정ㆍ군령의 조정과 방산체제, 연구개발, 국방본부의 조직개편(축소를 의미) 등을 검토하라. 특히 철저한 자기성찰과 혁신으로 제2의 창군을 이루어낼 수 있도록 각 군 및 부서 등의 개별적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말고 이를 초월하는 자세로 연구에 임해 주기 바란다.”

노 대통령은 육․해․공군 본부를 해체하고 통합군을 건설해야 한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 구상은 후에 당시 평민당 등 야당으로부터 6공화국이 내각제 개헌과 더불어 장기집권을 하려는 음모의 일환으로 해석되는 등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군사정권 하에서 국방의 핵심권한이 국방참모총장 1인에게 집중되는 것에 대해 군의 정치적 중립이 훼손될 것이라는 정치권의 우려는 대단했다. 또한 해․공군으로부터는 통합군제도가 실시되면 육군이 핵심직위를 독식하며 해․공군은 더욱 위축될 것이라는 우려를 불러 일으켰다. 또한 통합군제도는 김희상 안보정책비서관 등 일련의 육군 개혁 장교들이 이스라엘의 3차례 중동전쟁의 승리에 크게 감명받은 영향이 컸다. 김 비서관은 군에 널리 알려진 「중동전쟁」을 기술하면서 군내에 통합군제도를 전파하는 메신저였다.

애초 이 계획의 착수 당시부터 우려했던 것처럼 각 군 본부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육․해․공군의 이해가 얽히고, 갈등이 표출되기 시작했다. 과연 육․해․공군의 구분이 없는 통합군 제도가 한국군 제도의 원형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했다. 특히 육군 장교들의 인사권을 갖고 있는 이종구 육군참모총장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 출신의 군 수뇌부에 직ㆍ간접적으로 위축된 육군 위주의 818 연구위원들은 본질적 문제에도 접근하지 못한 채 청와대와 육본의 중간지대에서 애매한 입장을 취하기 시작했다. 보고 기일은 점차 임박했으나, 연구 상태가 부실해 도저히 대통령에게 보고할 수준이 못되었다.

에 대의1988년 12월 13일, 안보보좌관실은 예약된 대면보고를 비대면 보고로 돌렸다.

“국방태세에 대한 근원적 개혁은 시대적 대세다. 이 과업을 이룰 수 없다면 차라리 위원회를 해체하라.”

818 계획을 계속해서 추진한다는 의지를 갖고 있던 노 대통령은 합참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국방참모본부 휘하의 연구위원회를 해체하고 위원회의 위상을 한 차원 높인다는 명분하에 국방장관 직속으로 새로 구성하게 된다. 개혁에 집요하게 반발하는 각 군 총장의 간섭을 최대한 배제시켜 자율적ㆍ창의적 연구 여건을 보장하고자 한 것이다.



미래 한국군 군제는 ‘통합군’


12월 13일 비대면 보고에서는 그동안 연구위원회의 몇몇 의미 있는 연구결과가 보고되었는데, 그 주요 내용은 ▲ 군사전략 측면에서 델브록(Delbruck)의 제한전 군사사상과 손자병법을 참조하여 부전승 억제개념, 군 작전의 유연진축성과 기동마비전 교리, 그리고 화전 양면 동시대비의 필요성이 반영될 필요가 있다는 점이 제시되었고 ▲ 군사력 개선 측면에서는 종래의 북한의 수적 우세 따라잡기 식을 탈피하여 군사전략을 뒷받침할 수 있도록 목표지향적인 군사력 건설하며 ▲ 군 구조 측면에서는 3군 분권적 작전 및 지휘체계에 따른 부작용과 문제점을 해소할 수 있는 합동참모총장제가 제시되었다. 그러나 이 연구가 미흡하다고 판단한 노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의 후속 연도 연구지침을 지시한다.     

“첫째, 상부구조 개편 시 국방참모본부의 장인 국방참모총장(현 합참의장)에게는 그 직위에 상응한 권한(군령권)을 부여하고, 보안사령부와 정보기능을 통합사령부로 구성하는 문제는 신중히 재검토하라. 또 육군 방공사의 공군으로의 전군 조치와 함께 3군 사관학교를 비롯한 교육기관의 조기통합도 신속히 추진하라. 둘째, 과도히 비대화된 국방부 본부 및 직할기관 조직을 축소 개편하면서 고급 사령부로부터 말단 전투단위 부대까지의 조직체계는 물론, 제대의 단위와 수 그리고 부대구조 무기체계 등 전반적인 사항을 검토하라. 셋째, 군 구조와 더불어 인력구조 및 인력운용 계획도 발전시키며, 끝으로 내년도 후속 연구계획을 조속히 보고하라.”

대통령의 조속보고 지시에 따라 이듬해인 1989년 1월 24일 오후 3시30분부터 후속 연구계획이 보고됐다. 비대면으로 보고한지 1개월 만에 급히 재보고하게 된 배경은 노 대통령의 지시도 있었지만, 안보보좌관실의 강경한 개혁의지와 구체적 지침이 기인했다.

이날 보고에는 이상훈 신임 국방장관과 최세창 합참의장, 이종구 육군참모총장, 김종호 해군참모총장, 서동열 공군참모총장, 김재창 합참 작전국장 등 주요 군 수뇌부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용영일 합참 전략기획국장이 818 추진계획을 보고했다.

특히 1시간 동안 진행된 보고는 지난 1988년 후반기 동안 구체적인 연구 성과도 없이 6개월의 허송세월을 보낸 것과 달리, 1개월만임에도 불구하고 연구안을 작성하며 그 안을 실천해 나가는 추진계획까지 보고됐다. 보고를 받은 노 대통령은 연구안의 기본개념과 방향을 승인하고 “가급적 조기에 818 위원회를 재편성 운영하며 계획을 적극 실천해 줄 것”을 당부했다.

노 대통령은 이어 ▲ 방공사의 방공기능은 저고도 방공무기만 육군에 잔류시키고 중고고도 무기체계는 공군으로 전환시키는 2원적 분리방법을 검토할 것 ▲ 각 군 사관학교 및 대학의 교육체계를 재정비하여 합동교육을 확대하는 것을 검토할 것 ▲ 국방부 및 각 군 본부의 행정조직을 필수정책 기능위주로 재정비하고 방산 및 연구개발 체계도 효율성을 높일 것 ▲ 각 군의 제대별 군 구조 연구 시는 최대 전투력 발휘에 중점을 두고 경쾌하면서도 전투형 조직으로 발전시킬 것 등의 추가지침을 내렸다.

이렇게 해서 성과가 없었던 1단계 연구가 마무리되고 2단계 연구위원회가 발족되었다. 그로부터 7개월 후인 1989년 8월 24일 오전 10시30분부터 약 1시간 반 동안 818 계획추진 중간보고가 진행됐다. 이날 보고에서는 이상훈 국방장관과 정호근 합참의장, 이종구 육군참모총장, 김종호 해군참모총장, 정용후 공군참모총장, 용영일 합참 전략기획국장이 보고하고, 홍성철 비서실장과 김종휘 외교안보보좌관, 김희상 안보정책비서관, 이현우 경호실장이 배석했다.

 

 


소아적 발상의 육군 총장


2단계 연구위원회는 국방장관 예하에 조정위원회 8명과 실무연구원 37명이 상주하며 3군의 의견을 조정했다. 또 각 군별로도 이에 상응한 별도 조직을 갖는 등 창군 이래 최대의 개혁논의가 조성되고 있었고, 이날이 바로 그동안 각 군에서 합의 도출한 연구내용을 보고하는 실질적인 첫 번째 날이었다. 818 추진계획의 최초 보고일자는 8월 18일이었으나, 군 수뇌부 및 818 위원회의 하기휴가를 보장하고, 을지훈련을 끝낸 다음 보고하는 것이 좋겠다는 일부 인사들의 건의에 의해 8월 24일로 연기된 터였다.

당시 상부구조 개선문제에 있어 주요 쟁점은 육․해․공 작전기능을 통합한 국방참모본부에 군령권과 자체 인사권을 부여하라는 청와대 지침과 달리 각 군 총장들이 기존의 인사, 군수행정 기능을 전적으로 각 군 본부에서 행사하고, 국방참모본부의 군사력 소요제기 기능조차도 각 군의 영향력 하에 두려는 소아적 자세로 일관함으로써 끝없는 갈등이 지속되고 있었다. 통합군 제도에 대한 계룡대의 집요한 반대가 이어졌다.

특히 이날 보고 시에는 비대한 상부조직의 축소를 위해 군령, 군정기능의 분리에 따라 중첩되거나 불필요한 기능을 과감히 재정비, 육ㆍ해ㆍ공군본부의 인력을 40% 감축하겠다는 818 위원회의 보고와는 달리 20% 감축(실제 이종구 육군참모총장은 2~3%로 축소를 보고했으나, 이상훈 장관이 보고 하루 전날 이를 확인하고 20% 감축으로 고쳐서 보고)으로 후퇴 조정되고, 국방참모본부의 육ㆍ해ㆍ공 비율도 2:1:1로 조정하는 것으로 보고돼 논란이 일었다.

더욱이 이종구 육군참모총장은 예하부대 구조개편 보고에 있어서도 자신의 주도 하에 경기갑사단 창설을 고집하고, 보병사단 개편 시 전차, 항공을 군단급 이상 제대로 전환시켜 사단을 전투위주의 경쾌한 조직으로 개편하라는 청와대 지침이 무색하게 했다. 또한 공군으로 전군 조치하기로 되어 있던 방공포대조차 오히려 대대로 증편했다. 또 수색대대를 기계화 대대로 개편함은 물론 전차대대, 통신대대, 정비대대, 공병대대를 증편하겠다고 보고했다. 뿐만 아니라 기동력이 없는 보병사단의 포병연대를 자주 장갑화하고, 3각 편제로 개편토록 지시된 보병연대는 오히려 4각 편제에 수색중대를 새롭게 창설하는 동시에 통신 중대와 전투지원 중대까지 증편한다고 보고함으로써 818 청와대 지침에 전면 배치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일대개혁을 추진해야 할 818 위원회는 육군본부의 무언의 압력에 계속 위축되어 최초의 개혁의지가 상당부분 후퇴해 있었다. 특히 이종구 육군참모총장의 군내 사조직 관리와 군 인사권 행사 때문에 818위원회 참여자들의 목소리는 점차 낮아지고 퇴색될 수밖에 없을 만큼 818 개혁은 변질되어 가고 있었다. 이러한 외압적인 어려움이 전개됨에 따라 결국 818 개혁은 안보보좌관실의 개혁의지 여하에 따라 진퇴 여부가 가늠되는 어려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 같은 내용을 보고 받은 노 대통령은 진노했다. 노 대통령은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각 군 참모총장 임명 시 개혁을 추진하라고 총장에 보임시켜 놨는데, 자군의 이익만 생각할 뿐 개혁할 의지가 없다면 모두 물러나야 한다.”



통수권자와 인사권자 사이


하나회를 기반으로 집권한 군사정권이지만 임기 내내 바로 그 하나회가 짐이 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육군본부를 주축으로 한 군 수뇌부는 노골적으로 노 대통령을 비하하면서 개혁에 저항하였고, 청와대 안보보좌관실과 818 위원회에 소속된 장교들은 수시로 협박을 받았다.

보고 직후 818 연구위원회는 그날 자정까지 대통령의 지침을 분석하는 등 이를 구현하기 위해 긴장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상훈 국방장관도 “연구위원회도 직접 내가 통제하고 인원선발도 내가 하겠다. 계획 전체를 다시 작성하라”며 강력한 계획추진의 의지를 표명했다. 반면 합참의 실무자들은 “마음이 후련하다. 그간 육본에 밀려 결국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놨는데, 차라리 일하기 편하게 됐다”고 반색하며 그동안 자신들의 상관 눈치 보기와 무소신을 질책하는 가운데서도 새로운 개혁의지를 가다듬었다.

공군 역시 보고 직후 부장급 이상 긴급회의를 소집한  가운데 정용후 총장이 “처음부터 사심을 버리고 임했어야 했다. 각하가 결정한 이상 공군은 이의 없이 따라야 한다”고 말하는 등 분위기 일신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육군은 총장의 추종세력들이 보고결과에 대해 일체 함구함으로써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고, 다만 총장이 대통령에게 꾸지람을 들었다는 소문만이 돌고 있었다. 진노한 노 대통령의 의중이 알려지면서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청와대로부터 육군에 이르기까지 관통되고 있었다. 개혁에 드리워진 먹구름이 곧 천둥 번개로 내려칠 것 같은 분위기에서 대한민국의 장교단은 대통령과 인사권자인 육군 총장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8월 24일 818 계획추진 중간보고 후 818 연구는 세부적으로 진행되고 있었으나, 지상군과 관련한 제반문제는 약간의 수정만이 있었을 뿐 이종구 육군참모총장을 중심으로 한 육본 수뇌부의 본질적인 방향 전환은 거의 없는 답보상태였다. 이 때문에 이후 11월 중순까지 818 개혁은 가시화 된 것이 전혀 없었고, 더군다나 12월 장군 진급심사를 앞두고는 합참과 국방부의 개혁의지를 품은 장교들조차 자신이 불이익을 당할까봐 노심초사해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 무렵 청와대의 최선임 현역장교는 신양호 국방행정비서관이었는데, 그의 이종구 육군총장을 추종하면서 대통령의 개혁의지를 구현하려는 안보보좌관실과 사사건건 대립했다. 청와대 내의 현역 장교들이 보수파와 개혁파와 분열되어 상당한 긴장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신 비서관은 김희상 대령의 장군 진급에까지 직접적으로 반대를 표명하는 등 청와대 안보보좌관실의 분위기 또한 극도로 암울했다. 당시 신양호 준장은 김희상 대령과 실무자인 윤일영 중령의 군복을 벗기겠다는 극언을 서슴지 않았고, 육본에서도 “안보보좌관실의 김희상, 윤일영은 군으로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발언을 심심치 않게 하고 있었다.

1989년 11월 15일, 이러한 어려움 때문에 청와대 김종휘 안보보좌관과 김희상 안보정책비서관은 국방부에서 각 군 총장이 배석한 제5차 818 계획추진 대통령 중간보고를 전격적으로 취소시킨다. 대통령 앞에서도 노골적으로 육군이 개혁을 반대할 것이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국방부와 합참이 이에 맞서 토론을 하는 지루한 논쟁을 계속한다는 것은 무의미했기 때문이다. 특히 818 연구위원들의 연말진급이 크게 위협받고 있어 안보보좌관실에서 무리한 개혁을 요구할 경우 818 개혁 장교들이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점도 감안한 조치였다. 이렇게 육군에 밀려 중간보고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단지 안보보좌관실은 중간보고 내용을 요약하여 비대면으로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유학성 국방위원장의 무리수


이날 안보보좌관실의 보고 핵심은 818 계획 기본연구를 이 시점에서 끝내고 연구위를 해체시켜 장관 직속으로 1990년 1월부터 818 기획단 및 사업단을 구성, 운영하며 제반 창설 및 개편(국방참모본부ㆍ국군통신사령부ㆍ국군정보사ㆍ국방참모대 창설, 각군ㆍ국방부 본부 및 직할기구 개편)업무를 추진하는 것이었다. 더 이상 무의미한 논쟁을 하지 말고 현재까지 연구된 결과만 갖고 실행단계로 이행하자는 의도였다.

2단계 연구의 핵심은 ▲ 군사전략 면에서 평시에 적정수준의 방위전력과 응징보복 능력을 보유하며 전면전시에는 입체기동전 개념이 도입되고 모든 전력과 수단을 유기적으로 통합한 충격과 마비효과 극대화 ▲ 자주적 방위전력을 단계적으로 확보하고 장기적으로 미국에 대한 의존을 넘어선 독자적인 억제력을 확보하며 한국적 작전환경과 가용재원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하이-로우 믹스’ 개념으로 군사력 소요 판단, 해․공군 비중을 높여 3군 전력의 균형화를 도모, 주한미군 대체전력에 우선순위 부여 ▲ 군 구조면에서 문민통제 원칙 하에 합동군제도를 시행하고 상부구조와 하부구조 개혁하는 것이다.

보고를 받은 노 대통령은 연말 국회에 본 문제를 상정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홍보활동과 함께 국군조직법 개정을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지금껏 문제가 돼왔던 지상군 개편문제는 좀 더 시간을 두고 연구한 뒤 개편할 것을 지시했다.

이러한 청와대 지침에 따라 국방부는 11월 16일부터 26일까지 야 3당 정책위원 등 6회에 걸친 대국회 로비와 역대장관 및 총장 등 군 원로들을 초청해 간담회를 개최하며 11월 27일 국회 국방위원회에 국군조직법 개정을 상정했다. 하지만 각 당 간사 회의에서 상정을 유보키로 합의, 무의로 돌아갔고, 12월 5일 국방위 심의에 재상정했으나 또다시 전문위원 검토보고만 이뤄진 채 야 3당에 의해 거부되며 계류된 상태로 마감됐다.

청와대 안보보좌관실은 이후 국방부의 독자적 노력에는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고 여당인 민정당의 힘을 빌리려 했지만, 민정당 역시 기타 정치현안 처리로 818 문제에 자신이 없다는 의견을 보내와 노 대통령이 직접 나서 정치적으로 해결해 줄 것을 건의한다.

1989년 12월 23일 국방부는 청와대 지침에 따라 1990년도에 추진할 818 사업을 위해 장관 산하에 기획단 22명을 구성하고, 창설 모체요원들로 하여금 각 사업단을 1990년 1월 10일부로 편성, 창설업무를 진행시키겠다는 요지의 ‘818 기획 사업단 편성운영 계획’을 비대면 보고했다. 또 1990년 3월 12일 국방 국방위에 국군조직법 개정을 재상정해 이날 오후 2시18분 국군조직법을 통과시킨다.

당시 유학성 국방위원장은 이날 국방소위 심사활동 결과를 보고하면서 평민당 측 의견을 일부 수렴해 국방참모총장을 합참의장으로, 국방참모본부를 합동참모본부로, 차장 2명을 3인 이하로 정부안에 대한 수정안을 마련했다. 이로써 각 군에 대한 군령과 군정을 모두 장악한 국방참모총장제도 신설은 야당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특히 야당은 12․12 군사쿠테타의 핵심인 이종구 육군참모총장에 대한 거부감을 표출하여 민정당은 이종구 개인을 위해 조직법을 개정한다는 위인설관의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7월 1일오 예정된 합참 창설(이종구 총창의 법적 임기만료가 6월 중순이었음)을 10월 1일로 미루고, 특전사와 수방사를 육군총장 지휘 하에 둔다고 설명한 후 곧바로 개표를 제의했다. 하지만 평민당의 권노갑, 정웅, 조윤형 의원이 뛰어나가 의사봉을 빼앗았고, 유학성 의원은 손 주먹으로 의사봉을 대신하며 국군조직법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통합군 제도는 물 건너가고 엄격한 문민통제를 표방한 9차 개정헌법의 정신에 맞게 3군 병립의 합동군 제도가 사실상 한국군 제도의 원형으로 정립되게 된다. 사실 두 번의 군사 쿠테타를 겪은 우리 헌정사에서 군 권력의 집중은 자유민주 기본질서를 위협하는 요인으로 인식되었다. 적당히 비효율적이고 나약한 합참, 그리고 육해공군의 병립된 구조가 민주적 절차에 맞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유학성 의원의 돌발적 행위는 위헌 논란으로 정치 쟁점화를 증폭시키는 등 오히려 문제를 어렵게 만들었고, 7월 국회에 국군조직법을 재상정하기에 이른다. 당시 표결은 김영선 국방위원장의 진행 하에 찬성 11명, 반대 3명으로 번안 가결됨으로써 7월 12일 오전 10시10분 국회 국방위를 통과했고, 이어 7월 16일 본회의를 거쳐 국군조직법이 개정됐다.

당시 번안 내용은 3월 12일 제149차 임시국회에서 유학성 의원이 제기한 내용 중 특전사 및 수방사를 육군참모총장이 지휘한다는 내용이 삭제되고, 장관의 권한 및 합동참모회의에 관한 조항이 추가되는 선에서 마무리된다. 문민통제의 요건이 대폭 강화된 것이다.



하나회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제7차 및 8차 818 개혁추진 보고는 각각 1990년 8월 18일과 1991년 1월 15일 진행됐다. 제7차 보고에서는 이상훈 국방장관과 정호근 합참의장, 이진삼 신임 육군참모총장, 김종호 해군참모총장, 정용후 공군참모총장, 용영일 합참 전략기획국장이 보고했다. 이날 보고의 요지는 국방부와 합참, 각군 본부의 개편안에 관한 내용이었다.

특히 이종구 전 총장에 대한 국회의 강한 거부에 부딪힌 이종구 육군 총장이 임기만료로 퇴진함에 따라 818 개혁은 순탄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 노 대통령은 이날 새로운 체제의 조기정착과 창설준비에 대한 준비, 최고 사령부인 합참을 중심으로 군이 단결할 것을 강조하고, 기본개념만 확립된 818 사업을 구체화하며 국방부 청사 이전, 전력배비의 재조정, 전력 및 인력구조의 개선 등을 지시했다.

반면 제8차 보고는 비대면으로 진행됐다. 당시 국군조직법의 국회통과로 40여 년간 유지되던 기존 국방조직에 일대혁신이 일고 있었고, 개정된 조직법을 근거로 3군 조직이 합참을 중심으로 한 통합부대의 창설과 3군 본부의 축소개편이 추진되는 등 상부구조 개편이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와 달리 하부구조 개편은 전혀 진행되지 않고 있었고, 상부구조 개편과정에서도 많은 불협화음이 생겨 보완소요가 발생했다.

이에 국방부는 이미 개편된 합참 등 상부구조의 조직을 조기 정착시킨다는 명분하에 평가단을 1단계로 편성하고, 2단계로 기본계획을 수립한 후 하부구조 개선사업단을 출범시켜 개편작업을 계속하겠다는 취지를 비대면으로 보고,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다. 1991년 8월 17일, 818 후속조치 중간보고가 진행됐다. 이날 보고는 이종구 국방장관과 정호근 합참의장, 이진삼 육군참모총장, 김종호 해군참모총장, 한주석 공군참모총장, 천용택 합참 전략기획본부장이 보고했다.

보고의 주된 골자는 1년여의 군 조직개편 기간을 보내면서 나타난 문제점에 대한 보완방향으로, 상부구조의 경우 그동안 합참 창설에 비협조적이었던 각 군 본부가 오히려 통합군안을 제기하는 상황이 전개됐다는 점이 고무적이었다. 그러나 합참도 부분적으로 인사권을 가져야 한다는 청와대 측의 지침에는 각군 본부의 눈치를 보느라 감히 문구를 보고서에 넣지 못하는 촌극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었다. 그나마 발전적인 것은 합참의장의 임무기능을 세부 규정화시킴으로써 군령ㆍ군정의 한계를 명확히 하고, 한미야전사(CFA) 해체와 함께 전력배비 조정이 가시화되며 작전통제권 인수에 대비, 합참이 미군으로부터 지상군 작전통제권을 인수받는 방안 등이 구체적으로 논의됐다는 점이다.

반면 하부구조의 경우 지상군은 청와대 지침과 다소 거리가 있었으나 전략기동군사의 창설과 기동군단의 창설이 구체화 됐다. 하지만 차기 보병사단의 개편문제가 전혀 개선되지 않은 상태로 보고되는 등 여전히 육군본부의 개혁의지는 구태의연한 상태로 남아 있어 6공화국 내 육군의 전력구조 개편을 실현시키지 못할 가능성은 그만큼 더 커져갔다. 이는 이종구 육군총장에 이어 취임한 이진삼 총장 역시 전임자의 행태를 추종했기 때문이다.

각 군 군사령부 개편에 있어서도 이필섭 2군사령관만 개혁에 호응하고, 이문석 1군사령관과 신말업 3군사령관은 오히려 개혁에 배치되는 안을 올려 818 위원회의 젊은 장교들에게 거부감을 줬다. 해군의 경우 잠수함 전력증강에 맞춰 지휘 및 부대구조를 증편하는 기회로 삼고자 노력했고, 공군 역시 공군작전사령부 예하의 중간제대를 옥상옥으로 증편하는 것 등 자군의 이익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을 보여 논란의 소지를 남겼다.

특히 육군은 장교 계급구조를 818 하부구조 보고내용에 결부시켜 위관급 장교의 공석을 2000석 줄이는 대신 영관급 장교의 공석을 1000석 늘려 이들의 진급을 늘리려는 기회로 활용하려는 움직임을 나타내 818 위원회의 심한 반발을 샀다. 그러나 일부 진급을 앞둔 장교들이 부동뇌동해 보고서를 상정시킴으로써 결국 안보보좌관실과 육본이 정면으로 부딪치게 되고, 거대한 육군의 힘과 정치논리에 밀려 큰 결실을 보지 못한 채 미완의 개혁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좌절된 개혁


이 무렵 한국 군부에게 중요한 것은 적에 맞서는 게 아니라 내부의 경쟁자보다 더 우위를 점하는 것이다. 공동체 안전의 실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안보문제가 중요시되는 것이 아니라 군 내부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특정 군부가 일정한 위상을 점하기 위해 안보논리가 활용되는 것이다. 전쟁이 나면 아무런 전투력도 발휘할 수 없는 계룡대가 여전히 바위처럼 버티고 앉아서 개혁의 길목을 가로막는 기이한 현상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6공화국이 석양 속으로 사라질 무렵 육군참모총장 비서실장이던 유효일 장군은 청와대 안보정책비서관실의 김희상 대령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개혁이라는 게 박정희 대통령 때도 못했던 것이고, 코끝으로 군을 움직이던 전두환 대통령 때도 안 된 일이다. 그런데 물태우가 그것을 하겠어?”

애초 818계획에 추구하고자 했던 취지, 즉 현재의 안보위협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면서 미래의 잠재적 위협에 대비하는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국방정책은 단지 연구수준으로 끝났다. 한편으로는 북한을 자극하여 대통령선거에서 ‘북풍’을 통한 영구집권을 도모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고급장교의 진급 공석을 늘려 군부를 팽창시키고 각 군의 기득권을 개혁의 태풍으로부터 지켜내는데 더 많은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한국적 국방현실에서 ‘비난을 받으면서도 변혁을 추진할 수 있는’ 장교단이 존재한다면 그들이 안보의 마지막 보루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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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월간 군사전문지 <디펜스21+> 편집장, 한겨레 군사사이트 <디펜스21> 전문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