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눈물을 보았다 (심원이 고향인 김태곤 어르신) 그(그녀)를 만나자!

그 남자의 눈물을 보았다

- 심원이 고향인 김태곤 어르신

 

 

_ 윤주옥 실행위원장 (국시모 국립공원 50년 준비위원회)

그림_ 정결 회원

사진_ 허명구 회원

 

우리 가족이 서울생활을 접고 지리산으로 내려오던 건 8년 전 11월 하순이었다. 짐을 가득 실은 트럭에 실려 정신줄 놓고 자던 나는 살갗으로 전해오는 새벽 기운에 눈을 떴다. 차창 너머로 논과 밭, 산의 형체가 드러났고, 겨울로 가는 황량한 산야 위로 눈발이 흩날렸다.

새로운 삶터. 이제 나는 지리산자락에 살게 된다. 지리산은 그의 땅에 들어서는 나를 눈발로 반겼다. 그 순간 수없이 다녔던 지리산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면서 서러움이 밀려왔다. 삶으로 마주한 지리산이 내게 받아낸 첫 번째 눈물이었다. 그 후로도 나는 지리산 앞에서 여러 차례 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는 지난 이야기를 하다가 눈물을 흘렸다. 77살의 노인이 눈물을 흘린 건, 집에서 쫓겨나 마을이 불타는 모습을 봤다고 했을 때, 혹은 부모님의 죽음을 이야기했을 때가 아니라 어느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였다. 지금부터 나는 그의 이야기를 하려 한다. 여순사건 때 심원에서 나와 달궁에 살다가 덕동에 살고 있는 김태곤 어르신(1940년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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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심원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가 동학혁명에 가담했다가 쫓겨 심원으로 피난 왔다가 그곳에 정착했다고 한다. 그의 형제는 33녀인데 심원에서 태어난 형제는 22녀이고, 나머지는 달궁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엌과 방 2개인 고지집에서 살았다. 나무틀 위에 새를 덮고, 새를 돌려 쌓은 후 드나드는 문만 빼꼼히 낸 집이었다. 지붕에 얹은 억새는 땅까지 내려오게 했는데, 그렇게 해야 겨울에 덜 춥고 짐승도 피할 수 있었다.

밤에는 호롱불을 켰다. 산수유와 비슷한 시기에 피는 아구사리 열매의 기름을 짜서 접시에 따르고, 그 기름접시에 실을 꽈서 놓은 후, 실에 불을 붙여 불을 밝혔다고 했다. 여자들은 그 아구사리 기름을 동백기름처럼 머리에 발랐다.

그의 집은 노고단에서 심원으로 날등을 타고 내려오면 만나는 첫 집이었다. 그는 마을회의를 하는 날의 풍경을 기억하고 있었다. 마을일을 보던 외숙이 높은 곳에 서서 소리치면 그 소리를 들은 마을아재가 다시 높은 곳에 서서 소리를 쳤다. 그렇게 입에서 입으로 마을회의를 알렸다. 몬당 너머 집이 있고 또 몬당 너머 집 있고 하니 그렇게 연락하는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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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곤 어르신의 고향, 심원마을. 국립공원관리공단은 심원마을 이주사업을 하고 있다. 사업이 끝나면 심원마을은 지도에서 사라진다.

 

그가 심원에 살 때 심원 본동네엔 집이 20채 정도 있었다. 하지만 심원에는 본동네 말고도 골골마다 집이 하나씩 있어 심원 주변의 집들을 다 합치면 거의 80집이 살았다고 한다. 골골에 살던 사람들은 왜정 때 일본군대 안 가려고 숨어든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대소골, 대파니골, 방아골. 무넹기, 도장골 등에 흩어져 살았다.

그가 어렸을 때는 지리산에 곰이 멧돼지보다도 더 많았다고 한다. 호랑이는 3마리쯤 있었는데 가장 유명한 호랑이 이름이 지리산 순래봉이었다고 한다. 그의 할머니는 순래봉이 걸어가면 만복대 왕억새 위로 등걸이가 보였을 정도로 덩치가 컸다고 했다. 그의 할머니는 호랑이와 인연이 많은 사람이었다. 호랑이가 할머니를 집까지 바래다 준 일도 있었다고 했다. 구례장에 갔다 밤늦게 돌아오는 날이었는데 호랑이가 할머니 뒤를 따라오면서 다른 동물이 얼씬거리지 못하게 했다는 거다. 호랑이가 따라오는데도 무섭지 않았다고, 다른 짐승은 가까이 오면 찬바람이 불면서 소름이 돋는데 그날은 등 뒤에서 훈김이 났다고 하셨다.

 

1948년 가을 어느 날, 그는 심원과 이별하게 되었다. 그의 나이 9살 때다. 그는 그날의 상황을 담담하게 전했다. ‘여수 14연대가 구례 밤티재에서 3연대와 만나기로 했는데, 만나서 얘기를 해보니 서로가 의견이 달랐어요. 한쪽은 좌, 한쪽은 우. 서로의 사상이 다르다보니 교전을 하게 되어 차 몇 대가 몬당에서 불타고. 밤낮 하루를 싸웠지요.’

그날의 총소리는 심원에서도 들렸다. 그렇게 싸우던 3연대 군인들이 새벽이 되자 노고단에서 날등을 타고 심원으로 내려왔다. 심원에 도착한 군인들은 배고파 죽겠다고 난리를 피웠다. 그들은 무를 뽑아 먹고, 주민들이 내온 삶은 감자를 허겁지겁 먹었다.

그날 오후 3시쯤 군인들이 심원을 나서면서 심원사람들도 따라 나서라 했다. 마을사람들은 아무런 준비도 못하고 집을 나섰는데, 집을 나서자마자 군인들은 집에 불을 댔다. 심원은 그렇게 불에 탔다. 심원 본동네와 골짜기, 정령치쪽 거의 100여 호가 그렇게 집을 잃고 마을을 떠났다.

 

심원에서 나온 그의 가족은 달궁에 자리를 잡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작은 아버지 내외, 혼인 안한 작은아버지 등 어른 7명과 그와 동생들 3, 모두 11명이 작은 방 하나에 살아야 했다. 얼떨결에 고향을 떠나온 그의 가족은 한국전쟁과 빨치산 토벌 등이 오래 계속되면서 심원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달궁에 살게 되었다.

달궁에 살던 어느 날 저녁, 한 반란군의 아내가 한복을 입고 산에서 내려왔다. 하루를 달궁에서 잔 그 여인은 마을주민에게 밥을 얻어먹고는 날이 샐 무렵 다시 산으로 올라갔다. 여인은 다음 날 저녁에도 왔다. 다시 내려온 여인을 마을사람 한명이 묶으려고 하니, ‘날 묶지 마세요. 연약한 여자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나는 이대로 자수하려 하니 걱정 마세요. 아저씨에게 피해를 안 줄 것이니, 가만있다 가게 해 주십시오.’했다.

그러고 보니 여인은 무기는 없고 책만 한권 들고 있었다. 마을주민이 묶지 않고 이장에게 데려가니 여인은 돈을 주며 막걸리 2통을 받아달라고 했다. 이장이 막걸리 2통을 받아오니까 동네양반들, 술이 있으니 와서 술을 드십시오.’라고 고함을 질렀다. 당시는 돈을 주고도 사먹기 힘든 것이 쌀 막걸리였다. 그런 것을 공짜로 준다니까 동네사람들이 30명 정도 모이게 됐다. 동네사람들이 모이니까 여인은 마루 난간에 서서 나는 14연대 OOO의 마누라입니다. 제가 한복을 입고 어떻게 산을 따라 다니겠습니까? 그동안 마을에 와서 폐를 많이 끼쳤습니다. 동네 어르신들에게 보답의 의미로 노래 한 자리 불러드리겠습니다.’하고 노래를 부르는데 그 자리에 있던 마을사람들 중에 울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우리집이 이장집 바로 앞이라 나도 구경 갔는데 참 예뻤어요. 말도 잘하고요. 그 분이 부른 노래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이제 가면 죽는다는 아주 슬픈 노래였어요.’ 여인의 이야기를 하며 그의 눈에 눈물이 흐르자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그의 아내가 화장지를 갖다 줬다. 나는 목에 두르고 있던 스카프로 눈물, 콧물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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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곤 어르신이 노끈으로 삼은 신

 

내가 그의 눈물을 본 날은 햇살 맑은 여름날이었다. 그는 심한 고사리 밭일 끝에 몸살이 왔다며 이야기하는 내내 땀을 흘렀다. 이마에 맺힌 땀을 닦고 숨을 몰아쉬며 이야기하는 그가 눈물까지 보이자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주섬주섬 가방을 싸고 일어서며 다음에 다시 오겠다고 했다.

그를 다시 만나러 가던 날은 지리산에 비바람이 몰아치던 날이었다. 그의 아내는 집으로 들어서는 나에게 수건을 건넸다. 나의 두 번째 방문 때 그는 달궁도 소개되어 산내로 피난 나갔던 이야기, 달궁 이장 시절 이야기, 성삼재에서 식당 하던 이야기 등을 들려주었다.

고향인 심원에서 쫓겨나 달궁을 고향 삼아 살던 그가 지금 사는 곳은 덕동이다. 덕동은 그의 아내가 태어난 곳이다. 그는 현재 덕동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초봄엔 고로쇠를 하고, 가을엔 곶감을 하지만 돈이 되는 건 고사리라며 올해도 고사리를 200근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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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곤 어르신이 살고 있는 덕동마을 전경

 

요즘 나는 덕동마을에 자주 간다. 어느 날엔 마을에서 자기도 하고, 주민들과 함께 밥도 먹는다. 괜히 마을을 어슬렁거리며 집집을 기웃거리는 나를 알아보는 마을사람들도 생겼다. 구례에 사는 내가 지리산 너머 남원 덕동마을에 정이 가는 이유는 내 앞에서 눈물을 보였던 그가 있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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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안녕하세요. '국립공원을 지키는 시민의 모임' 사무처장 윤주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