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개골 빗점소녀 (하동 의신마을 최다엽 님) 그(그녀)를 만나자!

빗점 소녀

 

_ 윤주옥 실행위원장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사진_ 허명구 님

 

20155월 초, 벽소령 옛길을 조사할 일이 있었다. 벽소령 옛길은 차가 없던 옛날, 바다 가까운 화개장터의 각종 해산물과 지리산 너머 내륙에 위치한 인월, 함양 등의 농산물이 오가던 길이었다. 소금쟁이능선길이라고도 불리는 이 길은 바다와 내륙을 잇는 최단거리 시장 길로 알려져 있다.

옛길을 조사하자면 문헌, 고지도 분석도 중요하지만 옛길 주변 마을에 살고 계시는 어르신들의 기억을 되살려 기록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의신은 벽소령 옛길에 있던 마을 중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는 마을 중 하나다. 그래서 의신마을을 찾아가 김정태 이장에게 벽소령 옛길조사에 대한 이러저러한 상황을 설명하자, 본인은 잘 모르고 아버님, 어머님 중에는 알고 계시는 분이 있을 거라며 마을 회관으로 가자고 했다.

 

아버님들은 누워서 티브를 보고 계셨고, 어머님들은 누워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고 계셨다. 벽소령 옛길을 물어보는 나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인 건 어머님들이셨다. 뱁실령, 소금장수, 철골, 덕평, 주막, 원대성, 줄밥 등 정신없이 쏟아지는 말 홍수 속에서 조용하던 한 어머님이 고향이 의신이세요?’라는 물음에 빗점에서 태어나 거기서도 살고 여기서도 살고 그랬어.’라 하셨다.

 

어머님 입에서 나온 빗점이란 단어는 나를 긴장되게 했다. 거기는 남부군사령관 이현상이 최후를 맞이한 바로 그곳이었기 때문이다. 빗점에서 태어났다는 건, 그리고 그곳에서 살았다는 건 전쟁 전후의 혼란과 공포, 두려움을 특별히 더 치열하게 경험했다는 걸 의미했다.

 

그날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와서도 나는 빗점이 고향이라는 최다엽 어머님(1934년생)이 내내 맘속을 떠나지 않았다. 다시 봬야한다, 빗점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감춰진 신비로움이 있을 거다, 어머님을 떠올릴 때면 주름진 얼굴과 촉촉한 눈망울이 너머로 단발머리를 하고 빗점을 뛰어다니는 소녀가 겹쳐졌다. 빗점 소녀 최다엽, 그 시절 빗점 소녀는 단발머리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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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다엽 어머님

 

빗점 소녀를 만나러 의신마을회관에 다시 찾아간 날은 비소식이 있던 지난 612일이었다. 식당에서 낮밥 준비를 하던 어머님들에게 최다엽 어머님을 만나러 왔다고 했다. ‘최다엽, 최다엽이 누구여? 봉근 어매?, 이 사람인디.’

할 말 없는디. 나는 말을 못해. 생각도 안 나.’라고 하시는 어머님에게 나는 생각나는 대로 말씀하시면 돼요. 빗점이란 마을이 궁금해서요. 거기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는지도 궁금하고요.’ 어머님은 내가 던지는 질문에 단답형으로 대답하다가 기억이 안 나네 하는 말을 반복하시며 띄엄띄엄 그 시절 얘기를 해주셨다.

 

그녀는 빗점에서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때 빗점에는 제법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10집 넘게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나무를 착착 포개어 재서 지은 윤판집에 살았다. 깊은 산속이었지만 빗점은 곳곳이 평평하여 논밭도 많았다. 소도 키웠으나 소가 들어가 일할 만큼 땅이 넓지 않아 논밭 일은 괭이, 호미로 해야 했다. 다랑다랑한 논에서 수확한 벼는 훌태로 훑어서 돌도구통에 찌어 먹었다.

삼을 키워 쪄서 째서 삼아 삼베옷을 해 입었다. 비누는 없었고 짚을 태워 그 물로 빨래를 했다. 화장 같은 건 할 새도 없었다. 베로 짠 버선을 신고, 신발은 짚을 삼아서 신고 다녔다. 겨울에는 덧버선을 만들어 신었다. 덧버선에 들어가는 솜은 여수에서 사와야 했다. 빗점은 삼 농사는 됐지만 목화 농사는 안 됐기 때문이다.

설날에는 돌도구통에 쌀을 찌어 손으로 비벼 만든 떡으로 떡국을 끓여 먹었다. 닭고기를 넣은 떡국이었다. 추석엔 송편은 못하고, 밀을 맷돌에 갈아 부쳐 먹었다. 생일엔? 생일이라고 별 거 없어, 밥 한 그릇에 미역국을 끓여먹은 게 다라고 했다. 공기놀이, 자치기, 땅따먹기 등을 했지만 일이 많아 놀이할 시간도 거의 없었다. 흙과 돌을 가지고 노는 것, 놀이와 일이 같았던 때였다.

물건을 사려면 화개장, 구례장까지 가야 했다. 새벽 일찍 나가도 밤늦게 돌아왔다. 장에 가선 소금이나 먹고 싶은 것을 샀다. 빗점에서는 장에 내다 팔 만큼의 농산물이 나오지 않아 숯을 팔아 돈을 만들었다. 숯덩이, 나무둥치를 이고 져서 하동장, 구례장에 가 팔았다. 산죽도 돈이 되었다.

마을에 사람이 죽으면 동네사람들이 상여를 미고 산으로 갔다. 상여틀은 마을에 있었고, 문종이를 사다가 물을 들여 꽃을 만들었다. 묘는 마을 근처 공동 산에 썼다.

농사일이 많지 않을 때면 이웃 마을에 가기도 했다. 빗점골에는 그녀가 사는 빗점 말고도 오리촌, 설산, 덕평 등의 마을이 있었다. 오리촌은 농사는 안 짓고 벽소령 너머로 넘어 다니는 사람들에게 술을 팔아먹고 살았다. 설산은 농사짓고 살았고, 덕평은 감자벌이를 해서 먹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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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고지도에 표기된 삼정, 빗점, 덕평

 

여순사건 후 산으로 들어온 빨치산들이 빗점으로 자주 내려왔다. 그들은 돌도구통에 방아를 찌어 놓으면 빼앗아갔다. 안 빼앗기려고 치마 밑에 넣어둔 것까지 어찌 알고 가져가버렸다. 시절이 하 수상하던 시절 정부는 빨치산들에게 은신처와 먹을거리를 제공한다면 마을을 불태우고 마을사람들은 마을에서 쫓아냈다. 그녀 나이 15살 때였다.

그녀는 빗점에서 쫓겨 내려와 신랑(1930년생)을 만나 혼인했다. 신랑이 군대 가 있는 동안 친정식구들이 있는 청암에서 살았다. 청암에서 큰 아들을 낳았다. 신랑이 군에서 나온 후 의신으로 돌아왔으나 땅도 없고 먹고 살 수가 없어 다시 빗점으로 올라갔다. 감자벌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큰아들(1959년생)은 신흥에 있는 왕성초등학교까지 20리 길을 걸어 학교에 다녔다.

먹고 살기 위해 다시 찾아갔던 빗점에서 아주 내려온 것은 1971, 큰아들이 6학년 때였다. 정부에서 산 속의 독가를 모두 정리한다며 이주케 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의신마을 지리산역사관 뒤쪽에 터를 잡아 집을 짓도록 했다. 빗점만 아니라 원대성 등 지리산 곳곳에서 살던 사람들은 모두 산에서 내려와야 했다.

 

빗점 소녀 최다엽은 빗점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빗점에서 아이들을 키웠다. 세월이 흘러 이제 83세의 노인이 된 빗점 소녀에게 빗점에 살면서 기억나는 일, 가장 행복했던 일이 뭐냐고 물어봤다.

고생한 것만 생각나지. 쌔가 빠지게 고생했지. 이고 다니고 지고 다니고 걸어 다니고. 그게 제일로 생각나지. 배는 고프지. 숯덩이 이다 놓고 오면 배고프지. 못 죽어서 사는 거지.’

기대했던 대답이 아니었다. 내가 준비한 답은 힘들고 어렵게 살았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래도 그 시절이 행복했던 것 같아, 가난했지만 서로 도와가며 따뜻하게 살았거든, 빗점의 보름달은 유난히 밝았지, 빗점의 계곡물은 수정빛 이었어 등이었는데...

 

의신에는 최다엽 어머님 말고도 빗점에서 살았던 분들이 몇 분 더 있다. 청암이 탯자리인 정춘자 어머님(1943년생)은 신랑이 군대 가고 먹고 살 길이 막막해서 감자벌이라도 해먹고 살자고 빗점으로 들어갔다.

전쟁 후엔 내가 가장 먼저 빗점으로 들어갔거든. 거기서 애기 3개 낳고. 감자만 내리 9일을 먹으니까 손발이 저려 물에 손을 넣지를 못해. 삼정에 와서 보리 베는 일 도와 주고 끝보리 한 되를 얻어다가 밥을 해먹었는데 꿀처럼 맛있어. 밥을 먹고 나니 손발이 안 저려. 말도 말아, 사는 게 사는 게 아니고 개돼지만치 못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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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춘자 어머님

 

지금은? 지금은 어떠냐는 질문에 의신마을회관에 계시던 어머님들 모두가 입을 모은다. ‘지금은 행복하지. 모든 게 다 좋아. 괴로운 게 없어. 애들도 다 밥 먹고 살고, 힘든 게 뭐가 있겠어.’

어머님들은 최다엽 어머님께 드린 빗점에 대한, 옛일에 대한 질문에 한 마디씩 첨가한다. ‘뭐가 그래. 그게 아니지. 어머 미쳤나보네. 개가 몇 살 때 였더라.’ 나의 최다엽 어머님 인터뷰는 의신마을 어머님들의 열렬한 관심과 참견 속에 마무리되었다.

어머님들은 주섬주섬 가방을 싸는 나에게 찬은 없지만 때가 되었으니 밥을 먹고 가라고 하신다. 쌀밥에 갖가지 나물, 멸치조림. 이 좋은 반찬을 두고 어머님들은 물에 밥을 말아 드신다. ‘밥이 안 넘어가서. 물에 말면 잘 넘어가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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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롭고 예쁜 빗점의 삶을 듣고 싶었던 내게 어머님들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드셨다. 그러시면서 우리는 그래도 편했지. 우리 어머님들은 더 고생하셨어.’라 하셨다. 의신마을회관을 나오며, 한 차례 비가 쏟아지길 기대하며 미래에 우리는 지금의 우리 삶을 어느 정도의 고됨으로 기억할까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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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안녕하세요. '국립공원을 지키는 시민의 모임' 사무처장 윤주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