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고단이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은? 지리산케이블카백지화

나는 섬진강가에 산다.

5분만 걸으면, 섬진강을 만날 수 있으니 대단한 행운이라 여기며 산다.

 

내가 사는 집은 지리산국립공원 노고단과 왕시루봉을 배경으로 들판에 우뚝 서 있다.

덕분에 나는 아침마다 노고단을 본다. 

나만이 아니라, 우리 집 개도, 닭도, 콩과 가지, 고추도 노고단을 보며 자라고 있다.

과학적으로 검증된 바 없지만 더 영험하고 맛날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저렇게,

지금 내 삶에 특별한 의미가 되어 있는 노고단은 우리 민족과 국립공원 역사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가진 곳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며 나라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오악-동쪽 토함산, 남쪽 지리산, 서쪽 계룡산, 북쪽 태백산, 중앙 부악(지금의 팔공산)-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남악이었던 지리산에서 제를 지내던 곳이 노고단이다.

 

지리산은 민족의 영산이라 한다.

지리산신은 여성이며, 그래서 지리산에 들면 편안하다고들 한다.

지리산의 봉우리 중 노고단은 나이 많은 지혜로운 여성을 상징하는 봉우리이니, 지리산의 지혜롭고 편안한 기운은 노고단에서 시작될 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흐릿하고 엉켜있는 세상사를 끌어안고 노고단에 오르면 답이 나올 때가 있다.

그렇게 생각될 때가 많다.

 

예로부터 하늘에 예를 다할 때 찾던 노고단은 일제, 한국전쟁 등을 거치며 여러 아픔을 겪었다.

노고단의 아픔은 노고단 훼손의 역사이기도 하다. 

 

노고단 훼손의 시작은 1920년대 노고단에 지어진 외국인 선교사들의 피서용 별장 52동에서 시작한다.

한여름에도 서늘하고 맑은 물이 샘솟으니, 오르는 힘겨움을 제외하면 노고단은 최고의 피서지이다.

선교사 별장을 짓고, 그들의 안전하고 편안한 피서를 위해 구례농민들은 선교사들을 가마에 태워 1500m 고지를 오르락내리락했다고 한다. 

생각하면, 가슴 싸한 일이지만 그랬다고 한다. 

 

노고단에 있던 선교사 별장은 한국전쟁 전후 반란군들의 근거지로 이용된다하여 토벌대에 의해 불태워졌다.

건물만이 아니라 노고단에 자라던 큰 나무들도 모두 불에 타 버렸다.

이때, 노고단에 자라던 구상나무와 수백 년간 노고단을 지키던 참나무들도 함께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한 차례 훼손의 광풍이 휩쓸고 간 노고단에 군사시설과 통신시설이 들어선 것은 1970년대이다.

길이 생기고, 차량이 다니고, 사람 발길이 잦아지며, 노고단은 풀도 나무도 자라지 못하는 곳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노고단 훼손에 결정타는 1988년에 건설된 성삼재도로이다.

성삼재까지 일반 차량이 올라올 수 있게 되면서 지리산을 찾는 사람이 급증하였고 노고단은 완전 초토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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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는 상황이 되자 환경부와 국립공원관리공단(이하 공단)은

노고단 정상부를 출입통제하기 위해 1991년부터 1993년까지 자연휴식년제 대상지로 지정하였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연중 기온이 낮고, 비와 바람이 많아 아고산대라 불리는 노고단일대는 자연의 힘으로 치유되기 힘든 최악의 상황이었다.

 

공단은 1994년부터 식생복원전문가의 자문과 계획에 의한 생태복원을 시작하였고, 2001년 복원되고 있는 노고단을 국민에게 공개하였다.

10년 만에 모습을 드러난 노고단은 초록으로 덮여가고 있었다.

아무 것도 살지 않던 노고단에 원추리와 둥근이질풀이 피어났고 새들이 울기 시작했다.

노고단이 맨 땅이던 때를 기억하던 사람들은 노고단의 초록물결에 가슴 뻐근했다. 

 

노고단은, 지금도 복원 중이다.

복원되고 있다 하지만, 노고단이 발길 닿기 전의 평화롭고 울창하던 숲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그리 되긴 힘들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렇다하여도 우리는 노고단에 희고, 노랗고, 붉은 꽃이 피고 진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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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재에서 노고단대피소와 노고단고개를 지나 노고단까지 걸으며 이렇게 많은 꽃을 만날 수 있음에,

다시 그 꽃들을 피워낸 자연이 경이롭다.

 

여름 꽃이 만발한 8월, 노고단으로 가는 길은 하늘 위의 꽃밭을 걷는 꿈같은 길이었다.

그 길에서 만난 꽃들은 인간의 오만과 욕심을 용서한 자연의 선물이기에 더 없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풀과 나무는 꽃을 피워 자신을 마음껏 자랑한다.

사람들은 그 꽃들을 생긴 모양, 특징, 전설, 느낌 등 다양한 방식으로 기억한다.

'이름 아는 게 무슨 소용이야, 좋아하면 그만이지.'라 할 수도 있으나 풀과 나무와 가까워지는 방법의 하나는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다.

 

여름날 노고단에 핀 꽃에는 

생긴 모양을 보고 이름 지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범꼬리, 꿩의다리, 지리터리풀, 짚신나물, 물레나물, 큰까치수영, 꼬리풀, 곰취, 하늘말나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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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부터 범꼬리, 물레나물, 큰까치수영, 꼬리풀

 

여름날 노고단에 핀 꽃에는 가슴 아픈 전설을 간직하여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 저린 동자꽃, 꽃며느리밥풀, 개망초 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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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부터 동자꽃, 꽃며느리밥풀

 

여름날 노고단에서는 사람의 오감을 동원하여 이름 붙여진 노루오줌, 산오이풀, 흰씀바귀, 둥근이질풀 등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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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부터  둥근이질풀, 산오이풀

 

여름날 노고단에서는 생김새, 전설, 특징, 쓰임새 등을 정확히 알지 못하나 그 나름의 이유가 있어 노고단에 살고 있는

구름패랭이꽃, 별꽃, 젓가락나물, 자주조희풀(나무), 기린초, 갈퀴나물, 참싸리(나무), 미역줄나무, 물봉선, 달맞이꽃, 참당귀, 개시호, 참나물, 큰개현삼, 송이풀, 질경이, 모시대, 구절초, 참취, 민들레, 여로, 일월비비추 등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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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로부터 구름패랭이꽃, 물봉선, 참당귀, 모시대, 참취

 

그리고,

여름날 노고단으로 가는 길에서는 단아하고 청초하여 한 번 더 눈길이 가는 산수국(나무)과 노고단의 상징인 원추리를 마음껏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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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로부터 산수국, 원추리

 

사람도 그렇듯이 풀과 나무도 독야청청 혼자 있을 때보다는 다른 생명들과 더불어 있을 때 편안해 보인다.

그리고 풀과 나무, 곤충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길은 의식하지 않아도 사뭇 진지하고 더없이 따스하다.

사람은 자연 안에 있을 때 더 사람답다는 말에 동감하게 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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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고단에 서면 가까이 구례읍내와 섬진강, 반야봉이 보이고, 멀리 천왕봉과 무등산도 보인다.

반야봉으로 떠오르는 해에 감동하고, 

노고단에서 끊이지 않고 이어진 길의 끝에 있는 천왕봉까지 걸어갈 수 있다는 것도 신기하고,

바다로 향하는 지리산 물이 모이는 섬진강도 그리워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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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은 지리산이 지리산'국립공원'인 것에 의미를 두지 않고 관광지가 되길 원하며,

또 어떤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이 빨리 올라가 휘둘러보고 내려올 수 있으니 케이블카가 있어야 한단다.

 

그러나 노고단의 훼손 역사를 아는 우리는 케이블카가 건설될 경우 또다시 망가질 노고단에 죄스럽다.

송전탑만으로도 노고단의 원 모습을 바라볼 수 없어 안타까운 우리는 15m 5층짜리 건물을 들어서게 하는 케이블카에 찬성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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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을 구례 지리산, 산청 지리산, 남원 지리산이라 하지 않고 그냥 '지리산'이라 부르는 이유는

우리나라에 있는 그 어떤 산보다 크고 웅장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모두에게 지리산은 그리움과 애잔함, 고마움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지리산이 없음을 상상할 수 없고, 지리산에게 받은 기운으로 매일이 풍성해지기 때문이다.

 

역사로 기록되기 전부터 우리 안에 존재했던 지리산은

한 번도 지리산에 오르지 않은 사람에게도, 바다 건너 먼 이국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도 늘 아련한 산이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운 지리산이 지금 모습 그대로 우리 곁에 남아있길,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모두의 마음이 모아지길 간절히 바란다. 

 

글_ 윤주옥 사무처장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사진_ 허명구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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