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쪽동백나무 꽃에 홀렸다. 너는? - 2016년 5월 주왕산국립공원 걷기예찬 후기 걷기예찬

나는 쪽동백나무 꽃에 홀렸다. 너는? - 20165월 주왕산국립공원 걷기예찬 후기

 

버스--버스-전철--길에서 낮밥-버스-택시, 시골동네 구례에서 시골동네 청송에 위치한 주왕산국립공원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구례버스터미널에서 주산지 주차장까지 이동에 소요된 시간만 총 7시간이다. 동대구에서 출발한 청송행 버스 안에서, 청송 부남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주산지까지 가면서 내가 생각한 단어는 유배, 귀양 그런 거였다. 만약 내가 유배형을 받았다면 그 자체로도 절망스러웠겠지만 유배 장소가 청송이라 더 절망했을 것 같다.

그런데 주왕산국립공원에서 12일을 보내고 난 나는 간사하게도 생각이 바뀌었다. 유배형을 받았을지라도, 그곳이 주왕산 가까이라면, 그래서 주왕산을 드나들며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면 나는 유배 왔다는 사실도 잊고 행복감에 젖었을 것 같다. 주왕산국립공원은 그런 곳이었다.

 

홀리다

주왕산국립공원을 떠나 구례로 돌아오면서 쪽동백나무가 궁금했다. 꽃말이 뭘까, 홀림이 아닐까? 그런데 그 홀림은 그냥 홀림은 아닐 것 같았다. 옛 기억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홀림, 전생인지 4차원인지 알 수는 없지만 현생은 아닌 어느 날, 우리 밖의 또 다른 우리가 반짝이던 순간, 주왕산국립공원 곳곳에 펴있는 쪽동백나무는 내 눈 앞에서 그런 아련함으로 흔들거렸다. 하늘에서, 땅에서, 물에서, 맘속에서, 흔들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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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왕산국립공원의 5월은 쪽동백나무만이 아니라 고광나무, 가막살나무, 불두화, 찔레나무, 층층나무, 국수나무, 산조팝나무 등이 피워낸 흰빛으로 강렬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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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조팝나무(), 불두화

 

우리가 쪽동백나무 꽃에 홀려있을 때, 쇠살모사가 산개구리의 다리를 물었다. 덩치 큰 산개구리가 버티기를 한다. 쇠살모사는 악착 같이 물고 있다. 빠져나가려는 산개구리와 놓치지 않으려는 쇠살모사의 혈투, 쇠살모사가 산개구리의 다리를 놨다. 쇠살모사는 포기한 걸까? 비틀비틀, 쇠살모사로부터 해방된 산개구리가 비틀거리며 정신을 차리려 노력한다. 산개구리는 정신을 가다듬고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는 뭔가에 홀린 듯 쇠살모사의 굴을 향해 걸어갔다. 아찔한 순간, 정적이 흐르고, 쇠살모사는 입맛을 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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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개구리, 홀려있을 때만이라도 그의 피가 물결처럼 흐르고, 그의 맘이 신비로움에 가득 차 있었기를, 찰나의 순간이었겠지만 매혹되어 달떠있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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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쓰럽다

주산지는 조선 숙종(1720) 8월에 착공하여 그 이듬해인 경종원년 10월에 준공하였다. 주산지 입구 바위에는 주산지 축조에 공이 큰 이진표 공의 공덕비가 있다. 295년 전 농업용 저수지로 만들어진 주산지는 현재 농업용 저수지이면서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105호이다. 준공 이후 아무리 오랜 가뭄에도 물이 말라 바닥을 드러낸 적이 없다니 이곳에 저수지를 만든 선조들의 풍수지리 안목이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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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산지 입구 이진표 공의 공덕비

 

청송, 주왕산하면 주산지를 떠올릴 만큼 주산지는 멋진 풍광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에게 인기 높은 곳이다. 이 인기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로 절정에 달했는데 내가 주산지에 간 것도 그 즈음이다.

여름 더위가 시작될 무렵으로 기억된다. 앉으면 졸리고, 만사가 귀찮게 느껴지던 때였다. 서울 동서울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자고 또 자고, 허리와 무릎이 굳어지는 고통을 여러 차례 느낀 후에야 주왕산국립공원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다시 주산지행 버스를 탔다. ‘이 길의 끝에 있다는 주산지는 어떤 곳일까?’

그때 만난 주산지는 피곤과 무력을 단박에 날려 보낼 만한 곳이었다. 먼지 날리는 길을 걸어 만난 산속의 저수지, 초록 물결 위에 당당히 서있던 왕버들나무, 왕버들나무는 저수지의 수호신이었다. 왕버들나무의 기운은 바라보는 이까지 당차게 만들었다.

 

주산지가 예전 같지 않다는, 왕버들나무가 죽어간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사람들의 끊임없는 발길이 왕버들나무의 기운을 쇠하게 하는 걸 거야.’ 그렇게 생각했다.

13년 만에 만난 주산지와 왕버들나무는 짐작보다 더 쇠해 있었다. 주산지까지 가는 길도 깔끔히 다듬고, 주산지와 왕버들나무를 보호하려는 여러 시설물을 설치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전의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팔뚝보다 더 큰 잉어가 살고 있고, 천연기념물 수달, 원앙, 담비 등이 있다하여도, 줄기 중간에 잔뿌리를 만들어내며 사투를 벌이고 있는 왕버들나무가 처연하게 느껴졌다. 안쓰러웠다. 당당하게 살아왔던 옛 모습대로 그의 마지막이 우아했으면, 마을 아래에 대체할 만한 저수지를 만들어서라도 주산지의 수위를 낮췄으면, 300살이 되는 그가 주산지를 편안한 고향으로 기억했으면 좋겠는데, 누가 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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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립다

내원마을이 보고 싶었다. 임진왜란 당시 산 아래 마을 주민들이 피난 와 만들어졌다고 하는 마을. 일제강점기에는 목탄생산자들의 주거지로 70여 가구 500여명이 살았다는 마을. ‘전기 없는 달빛마을로 알려지면서 사람들이 모여들고, 사람들을 상대로 한 식당, 민박업소가 많아지며 계곡 오염 등이 문제되어 철거된 마을.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마을, 흔적조차 거의 다 사라지고 없겠지만 어떤 기운이 흐르는 곳인지 느끼고 싶었다.

마을로 가는 길의 초입에 대전사가 있다. 대전사 뒤엔 기암이, 대전사 왼쪽엔 장군봉이 있다. 마을로 가는 초입 산길은 넓고 경사는 거의 없었다. 휠체어와 유모차가 다닐 수 있을 만큼 평평했다. 계곡과 꽃들을 바라보며, 소곤소곤 일상을 이야기하며 걷기 좋은 길이다. 이야기 주제가 소소한 일상이라야 어울릴 것 같은 산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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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걷다보면, 용추폭포가 나타난다. 한적한 산길 끝에 갑자기 나타난 협곡에 다들 어리둥절해진다. 협곡을 지나면 약간 오르막 산길, 절구폭포는 용연폭포로 가는 갈림길에서 돌길을 따라 10분 정도 내려갔다 와야 한다. 절구폭포 앞에 앉았다가 다시 길을 나서 산길을 걸으면 용연폭포가 보인다. 용연폭포는 물과 바람, 세월이 만들어낸 굴이 있다. 바다가 아닌 산속에서 보는 침식혈(浸蝕穴)이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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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추협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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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구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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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연폭포

 

용추에서 절구, 용추에서 용연, 절구에서 용연, 폭포로 가는 길은 험하다고 할 수 없는, 살짝 긴장하며 걷기 좋은 길이다. 돌아보면, 연화봉, 병풍바위, 급수대도 볼 수 있으니 걷다가 쉬다, 돌아보다를 반복하면 좋을 길이다. 사방이 바위로 둘러싸인 곳에 서서 하늘과 바위의 공감능력에 긴 시간 눈길이 둬도 좋겠다.

 

용추, 절구, 용연폭포를 지나 좀 더 깊은 산길을 걷다보면 느티나무와 돌탑이 보이고, 지금은 사라진 내원마을 터가 나온다. 풀들만 무성하다. 마을 앞 개천의 평평바위에 앉아 마을 터를 바라보고 있으니 사람들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웃기도 싸우기도 울기도 하고, 반가움과 기쁨, 슬픔을 나누며 살아온 사람들의 흔적이 개천 아래 돌 틈에서 흘러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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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원마을은 20028월부터 마을 아래쪽 제1대피소와 팔각정 등을 폐쇄하고 2004년부터 마을과 공원 내 상가 등의 철거를 추진, 200811월 모든 건축물 철거했다. 철거해야할 이유가 분명했고, 덕분에 주방계곡은 깨끗해지고, 주왕산국립공원은 건강해졌다.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사람들의 소리가 그립고, 주민 없는 국립공원이 아쉽다.

내원마을 당산나무에 술 한 잔 드리고, 이곳에 살던 이 모씨가 올리는 잔이라고, 그들 부부는 바빠서 못 왔지만 맘은 늘 이곳에 있다고, 이곳이 그리워 머지않은 날에 다시 산으로 들어간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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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원마을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내원산방부부 (위 이상해 님, 아래 김희숙 님)

 

국립공원 50(2017)을 맞아 매달 한 곳씩 국립공원을 걷기로 하였다. 국립공원은 어느 곳이나 아름다우니 가까이 가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이번 걸음엔, 국립공원을 가되 풍경에만 눈길을 주지 않고 국립공원 안에 있는 마을, 국립공원이었으나 지금은 국립공원이 아닌 마을, 국립공원 경계에 있어 국립공원과 함께 한 마을에서 자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만나보고자 한다. 주민들의 살아온 이야기가 국립공원 보호 정책에 어긋나도, 먹고 사는 이야기가 우리 사는 이야기와 다르지 않아도, 우리의 만남이 지금을 변화시키거나 미래를 도모하는 일이 아니어도, 국립공원 마을과 주민들의 맘속으로 들어가 보고자 한다.

 

따뜻한 동생과 친절한 친구, 좋은 언니가 함께 하니 7시간을 달려갔다가 다시 7시간을 달려 돌아와야 하는 피곤함조차 기쁜 맘으로 받아들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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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윤주옥 실행위원장(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사진_ 허명구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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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안녕하세요. '국립공원을 지키는 시민의 모임' 사무처장 윤주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