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붕 위에 인생을 얹다_ 한봉운 어르신 (장성 가인마을) 그(그녀)를 만나자!

만난 분 : 한봉운 어르신 (80. 전남 장성 북하 가인마을)

만난 사람 : 윤주옥 실행위원장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국립공원 50년 준비위원회)

 

2016년 봄날, 백양사 앞 가인마을에 살고계신 한봉운 어르신을 만났다. 하루는 비가 세차게 몰아치던 날이었고, 다른 하루는 봄 햇살이 눈부신 날이었다. 두 날 모두 봄날의 연두 빛이 찬란하게 빛났다. 바람에 쓸리는 연두빛 물결에 과거와 현재가 살아나고, 알 수 없는 미래도 순간순간 보일 것 같았다. 과거를 회상하는 시간, 살아온 날들이 한 장 한 장 움직이는 장면이 되어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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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마을은 마을 앞에 보이는 봉우리 이름(가인봉)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아름다울 가()에 어질 인()을 쓰던 마을은 한국전쟁 후 행정구역 개편 때 더할 가()로 잘못 기재되어 加仁이 되었다. 가인마을이 생긴 지는 500~600년 전이라고 하나 마을이 언제, 어떤 연유로 이곳에 세워졌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마을 근처에 백양사, 청류암 등이 있으니 사하촌으로 시작되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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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은 1937년 장성군 북하면 가인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르신이 가인마을에 살게 된 건, 5대 할아버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 전남 곡성 옥과에 살던 어르신의 조상은 백양사가 있으니 살만한 곳이겠다 싶어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어르신은 어린 시절부터 농사일을 해왔지만 그것만으로는 먹고살기 힘들어 기와 얹는 일을 시작했다. 만암 대종사께서 백양사 법당 기와 보수를 할 때 장가 간 사람은 안 올려 보냈는데 어르신은 그 당시 아직 미혼이어서 기와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어르신은 기와기술자였던 추광스님 밑에서 7~8년 동안 일하며 기와 기술을 배웠고, 스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책임자로 일을 맡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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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장산국립공원 백양사 입구

 

그 후 어르신은 가인마을에서 3km 떨어진 용두마을에 사는 여인과 1956년 혼인했다. 어르신 나이 20살이었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두 분은 함께 살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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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봉운 어르신의 칠순 때 찍은 사진

 

총각이어서 시작할 수 있었던 기와 일을 어르신은 결혼을 하고도 계속하여 그 후 70세까지 했다. 50년 넘게 기와 일을 했으니 백양사 기와 일은 거의 어르신이 한 셈이다. 기와 일이 한참일 때는 1년에 100일 정도를 했다고 한다. 기와 일은 다른 일보다 4배 넘게 돈을 받을 수 있어 집안 경제에 큰 도움이 됐다고. 어르신은 기와 일 외에도 곶감 장사, 보리 타맥, 차 사업, 가게 등 안 해본 게 없다고 한다.

 

어르신은 태어난 후 6.25로 마을이 소개되었을 때 빼고는 자의로 마을을 떠난 건 딱 한 번이라고 한다. ‘1971년이었지. 서울에 바람 쐬러 올라갔었어. 집은 놔두고. 1년 뒤 다시 마을로 내려왔어.’라고 회상하셨다.

 

한국전쟁 중 가인마을 주민들은 소개되었고, 마을은 소각되었다. 가인마을만이 아니라 장성 북하면에 있는 25개 자연마을이 모두 소개되었다. 살던 마을을 잃은 주민들은 소개되지 않은 마을에 모여 3년간을 살아야했다. 3년 후 마을로 돌아왔으나 집도, 농지도 폐허가 되어 있었다. 마을로 돌아온 주민들은 천막을 치고 살았다. 제대로 된 집을 지은 건 1987년이다. 그 전까지는 초가집, 움막집에서 살았다.

전쟁 전 20호쯤 되던 마을은 집을 지을 수도 없고,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기도 힘드니 12호만 남게 되었다. 아이들은 비가 오면 산을 넘어 학교에 다녔다. 마을길의 폭이 1m가 안 되어 차도 들어올 수 없었다. 길을 넓히고 다리를 놓은 건 새마을운동 때였다. 주민들이 나서서 일을 했다.

국립공원이라 집을 지을 수 없다고 알고 있었으나 1987년 여러 경로를 통해 집을 짓는 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해부터 마을사람들은 융자를 받아 집을 지었다. 어르신이 살고 있는 집도 그때 지은 집이다. 집을 짓기 시작하며 가수 수가 다시 늘어났다. 12호이던 마을은 조금씩 늘어나 지금 마을에는 20호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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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지은 어르신 집

 

어르신은 1986년부터 26년 동안 마을 이장을 하셨다. 어르신은 이장으로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마을에 집을 짓도록 한 것이라고 하셨다. ‘다른 마을에서 손가락 받지 않기 위해, 산중에 사는 놈들이란 소리 안 듣게 하려고.’라고 말씀하시는 어르신 눈가가 촉촉해진다. 가을마을은 어르신이 만든 마을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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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짓도록 한 후 상을 받았다

 

가인마을은 한봉, 고로쇠 수액, 곶감 등이 주산물이며 내장산국립공원, 백양사가 있어 민박 손님도 많았다. 비자나무 열매도 적지 않은 수입원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 가인마을은 먹고 살기가 힘겹다. 한봉은 4~5년 전 떼죽음을 당했고, 고로쇠 수액은 다른 곳에서도 많이 한다. 서해안고속도로가 개통되며 바다와 서해안 가까이에 있는 관광지로 사람들이 몰리니 민박 손님도 뚝 떨어졌다. 헛배 아픈데, 촌충에 효과가 좋은 비자열매는 국립공원의 숲이 무성해지면서 다른 나무에 묻혀 열매가 안 열린다. 감은 딸 사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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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은 1982년부터 한봉을 했다. 왼쪽이 한봉운 어르신

 

어르신은 예전에는 하루 3끼 밥을 먹으면 8일간 일해야 쌀 대두 한말(20키로), 밥을 안 먹고 일하면 5일간 일해야 쌀 대두 한말을 받았지. 지금은 하루 일당이 쌀 한 가마니(80키로)이고. 술과 밥을 다 대접해도 일당이 10만원, 기술자는 15만원, 전문가는 20만원을 줘야해. 그러니 사람을 사서 농사짓기는 너무 어려운 세상이야라고 하셨다.

도시사람들은 시골길을 다니다가 12월이 되어도 감나무에 감이 달린 채 있는 걸 보면 아까워한다. 왜 안 땄을까 궁금해 한다. 딸 사람이 없어서 못 땄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다. 딸 사람을 고용하고자 해도 딴 감을 팔아서 그 돈을 회수할 수 없으니 아깝고 속상하지만 그냥 놔둘 수밖에 없다. 나무에서 밭에서 열심히 키운 농작물이 썩어가는 걸 그냥 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

어르신은 젊은 사람들이 고향을 지키고 살 수 있을지 막막하다고, 다른 곳은 귀농하는 사람들도 많다지만 가인마을은 먹고 살 게 없으니 들어오는 사람들도 없다고 안타까워하셨다.

 

내장산은 19711117일 우리나라 제8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그런데 한봉운 어르신을 만나며 알게 된 사실 하나는 마을주민들이 국립공원이란 걸 체감한 건 1987년이라는 점이다. 1987년은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설립된 해이다. 공단직원들이 국립공원을 관리하며 예전과는 뭔가 달랐다는 거다.

어르신은 마음대로 집을 짓지 못했던 것 말고는 국립공원이어서 어려웠던 일은 크게 없었다고 하셨다. 이런 생각 때문에 2010년 국립공원 구역조정 당시 가인마을이 국립공원에서 해제되는 걸 원치 않으셨다. 그러나 다른 주민들이 원하고, 환경부가 만든 기준에도 합당하니 가인마을은 국립공원에서 해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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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장산국립공원 안 가인마을 위치

 

국립공원 경계 안에 있지만 더 이상 국립공원의 일부가 아니게 된 가인마을. 그곳이 국립공원 안에 있든 밖에 있든 경계에 있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국립공원이 있어 마음 든든하고, 삶에도 도움이 되고, 그곳에 사는 것이 자랑스러웠으면 하는 맘이다. 한봉운 어르신처럼 고향인 국립공원을 떠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맘이다. 어르신이 오랜 시간 건강하게 마을을 지키며, 마을 이야기, 살아온 이야기를 주변에 들려주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_ 윤주옥 위원장. 사진_ 허명구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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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안녕하세요. '국립공원을 지키는 시민의 모임' 사무처장 윤주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