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의 날쌘 돌이 이샘 (구례 황전마을 이길호 이장) 그(그녀)를 만나자!

지리산의 날쌘 돌이 이샘

 

_ 윤주옥 실행위원장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사진_ 허명구 님

 

 

528일 황전마을회관에서 이길호 님(1951년생, 66)을 만났다. 일찍 찾아온 더위에 몸은 처지고 그저 눕고만 싶은 날이었다. 그는 모내기를 했다고 했다. 아침부터 힘을 써서 일까, 충혈 된 그의 눈에 피곤함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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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구례군 마산면 황전마을에서 5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화엄사 살림을 책임지는 대처승이었다. 사람들은 그의 아버지를 도감스님이라 불렀다. 대처승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비구승이 화엄사에 들어오면서 서촌으로 내려왔다. 서촌은 화엄사 앞 상가 자리에 있던 작은 마을을 말한다. 서촌에 살던 그의 가족은 황전 본마을로 이사해야 했다. 서촌을 화엄사 집단시설지구로 조성하기 위해 모든 집들을 철거했기 때문이다.

그는 청천초등학교에 다녔다. 걸어서 30분쯤 걸리는 거리였다. 쌀과 보리가 반반 섞인 밥과 된장에 사카린을 넣어 으깬 것을 반찬으로 가지고 다녔다. 그는 구례중학교에 들어갔으나 형편이 안 되어 도중에 그만 뒀다. 학교를 다니지 못하게 된 그는 농사짓고, 나무하고, 산에서 먹을거리도 구하며 소년시절을 보냈다.

군대에서 제대한 그는 어머니가 아프셔서 바로 고향으로 내려왔다. 고향에 내려온 그는 봄이면 노고단을 중심으로 지리산 남쪽을 누비며 고로쇠, 거제수 물을 받았다. 물을 받으러 산에 다니다보니 여기저기로 연결된 산길을 알게 되었다. 그즈음 자연스럽게 지리산악회를 만났고, 지리산악회에서 활동하는 형님들, 지리산을 찾아오는 사회 인사들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 그의 둘째, 셋째 형은 포터를 하고 있었는데 산길을 많이 아는 그도 형들을 따라 포터를 시작하였다. 26살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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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터를 하던 시절, 장터목 대피소 앞에서

 

7, 80년대는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지리산으로 향하던 시기였다. 지리산을 오르려는 사람들은 텐트, 버너, , 김치 등을 지고 갈 포터를 고용했고, 그들에게 그는 젊고 힘 좋고 성실한 포터였다. 포터 일은 힘들었지만 노고단에 다녀오면 두 배의 일당을 받을 수 있으니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인기 있는 직업이었다. 그는 포터들 중에서도 일 잘하는 포터로 소문이 나 군청이나 국립공원관리공단, 경찰서 등에서 지리산에 갈 일이 생기면 그에게 연락했다.

포터를 하면서 그는 노고단에 있던 통신군부대의 부식 운반자도 했다. 봄에는 고로쇠, 거제수 물을 받고, 일주일에 한 번씩 부식 운반을 하고, 지리산에 오는 사람들을 위해 포터를 하면서 그는 경제적 여유가 생겼다.

한창때 그는 지리산을 날라 다녔다. 당시 그의 날쌘 모습은 산을 오르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유명했다. 어느 날 통신군부대 소대장이 군부대에서 키우던 진돗개를 팔아달라고 데리고 왔었다. 장날에 나가 팔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묶어놨는데 다음날 일어나보니 개가 사라지고 없었다. 군부대에 전화를 해보니 개가 거기에 와 있다는 것이었다. 어찌할까 고민하다 아직 해가 있으니 올라가서 데리고 와야겠다고 생각하고 산을 올랐다. 화엄사 일주문에서 시계를 보니 오후 5시였는데 쉬지 않고 올라가 노고단산장에 도착하니 615. 산장에 계시던 고() 함 선생님께 물 한잔 얻어 마시고 개를 데리고 산길을 내려와 저녁밥을 먹었다.

보통의 건강한 사람이 걸어서 왕복 8시간쯤 걸리는 산길을 2시간 30분 만에 다녀온 것이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소설 임꺽정에 나오는 황천왕동이가 생각났다. 화엄사에서 노고단까지 수없이 오간 그에게 지리산은 집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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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게로 짐을 나르다 처음 구입한 키슬링형 배낭을 메고 (오른쪽이 이길호 이장)

 

그의 아내는 여수 사람이다. 아내 이야기를 하며 그는 인연은 따로 있다는 말을 했다. 중풍인 어머니를 모실 때는 중매도 안 들어왔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시자마자 2곳에서 중매가 들어왔다. 30살 때였다. 그는 마르고 호리호리한 순천 아가씨보다 넉넉한 여수 아가씨를 택했다. 외모보다는 시골살이를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에게 정이 가더라고 했다. 그때 그의 아내는 23살이었다. 23살의 도시 아가씨는 31살의 농촌 총각의 어디가 좋았을까?

아내와는 중매로 만난 다음해 결혼을 했고 슬하에 11녀를 뒀다. 그의 아들은 31살 되던 해에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5년 전의 일이다. 아들 친구들 보면 술 생각이 난다고 한다. 담배를 못 끊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딸아이는 혼인을 했고 손자도 있다. 3살 된 손자 이야기를 할 때면 그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다.

 

그는 55세까지 포터를 했다. 지금도 좋아하는 사람이 오면 산에 올라간다고 한다. 포터가 아닌 그냥 동행인으로서 길을 안내하며, 옛정을 나눈다. 그와 함께 산에 오르기 위해 30년 동안 한 해도 안 거르지 않고 찾아오는 분도 있다고 한다.

포터 하던 시절 기억에 남는 사람들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판사, 검사, 이런 사람들은 산에 와서도 목에 힘을 줄려고 한다니까. 판검사야 그 자리에 있을 때나 판검사지. 산에 오면 다 똑같은데 말야. 그 사람들은 그걸 모르더라고. 청와대나 안기부, 그 사람들은 좀 숨기고 싶어 하지. 회사에서 온 사람들처럼. 산에 같이 갔다가 우연히 권총을 발견해서 뭔 회사인데 권총을 가지고 다니냐?‘고 하니까, ’안기부에서 왔습니다.‘ 이러더라고.’ 판사와 검사, 청와대와 안기부, 그 사람들 모두 산에 오르면 그를 이 대장이라 불렀다고 한다.

1987년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설립되며 공단의 사법경찰을 하라는 권유가 있었으나 월급도 적고, 무엇보다도 마을주민들을 감시해야하는 일인 것 같아 안 하겠다고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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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지금 황전마을 이장이다. 2004년부터 2006년까지 했던 이장은 일이 생겨 그만 뒀었고, 2013년에 다시 이장을 맡았다. 그만 뒀던 이장을 다시 하게 된 건 아들을 잃고 힘겨워하는 그를 마을주민들이 이장 맡아 바쁘게 살다보면 아들 생각을 덜 하지 않겠냐는 배려 때문이었다.

그는 지리산자락 황전마을에 태어나 그곳에서 어린시절, 청년시절, 장년시절을 보내고 있다. 산 아래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산과 함께 살 게 되었다. 화엄사에서 노고단까지 지게에 짐을 져서 나르는 일이 녹녹하진 않았지만 덕분에 먹고 살 수 있었고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도 있었다.

포터로, 안내자로 살아온 그는 지리산이라는 큰 산, 황전마을이라는 큰 산 아래 마을에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 2000년대에 접어들며 산에서의 그의 역할은 줄어들었으나 거짓말할 줄 모르고 맡겨진 일을 충실히 해내는 그는 산에서 그랬던 것처럼 마을에서도 믿음직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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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안녕하세요. '국립공원을 지키는 시민의 모임' 사무처장 윤주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