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지메가 뭔 소리를 하고 있는 거예요? [산청 유평 고영일 님 이야기] 그(그녀)를 만나자!

이 아지메가 뭔 소리를 하고 있는 거예요?

 

_ 윤주옥 실행위원장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그림_ 정결 님

사진_ 허명구 님

 

그날은 아침부터 눈이 날렸다. 집을 나서 읍내로 가는 30분 남짓의 시간에 희미하게 윤곽이 보이던 노고단은 눈발 사이로 자취를 감췄다. 수묵화가 되어가는 지리산국립공원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생일 축--.’ 순간, 울컥병이 도져 눈앞이 침침해지고 얼굴이 붉어졌다.

19671229, 지리산은 구례군민들의 헌신적인 노력에 의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우리나라 첫 국립공원이었다. 나는 그 지리산을 통해 국립공원이 어떤 곳이어야 하는지 배웠고, 급기야는 그 산자락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나와 지리산은 국립공원이 맺어준 인연이다.

앞이 안 보이게 내리던 눈은 구례와 남원의 경계인 밤재를 넘자 싸라기눈으로 바뀌었고, 함양을 지날 때는 간혹 한두 송이가 날리더니, 함양을 지나 산청에 접어들자 자취를 감추고 파란 하늘에 흰 구름만 떠다녔다. 지리산 남쪽과 동북쪽의 날씨가 이렇게 다르다니, 지리산이 큰 산은 큰 산구나, 소리가 절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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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날, 인간세상으로 보자면 지리산국립공원의 생일날, 나는 그를 만나기 위해 산청 대원사 윗동네인 유평마을에 갔다. 유평마을은 유평, 삼거리, 외곡, 새재 등을 통칭하는 말이다. 그는 유평에서 새재로 올라가다가 외곡으로 빠지는 길 언덕에 산다.

 

그의 이름은 고영일이나 호적에는 고충웅으로 되어 있다. 일제 때 이름이 다다우였는데 해방 후에 면서기가 한자로 고쳐 올리면서 그리 되었다고 한다. ‘다다우(たたう)’넘칠 정도로 가득 차다, 부풀어 오르다, 만조가 되다.’라는 뜻이 있으니 충웅(忠雄)’이라 한 것 같다고 그는 말한다. 당사자들에게는 물어보지도 않고 탁상행정을 한 결과, 고영일인 그는 고충웅으로 살아야 했다. 예나 지금이나 행정은 일방적이고 일의 편리만 생각하는가 보다.

그는 1944년 진주 문산에서 태어났다. 유평마을로 들어온 건 12살 때라고 했다. 진주버스터미널에서 삼장쪽으로 가는 버스를 타려했으나 버스를 놓쳐 원지에서 명상까지 걸어왔단다. 30km가 다 되는 길이었다.

 

나중에 어머니에게 들으니 진주에서 명상 아래 양조장까지 오는 버스를 타려고 했는데 그 버스를 놓쳐버린 거예요. 삼정쪽으로 오는 버스가 하루 1대밖에 안 다녔거든요. 놓쳐버렸으니 할 수 없지,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함양, 산청쪽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원지까지 와서, 원지에서부터 걷기 시작한 거죠. 걷는데 배는 고파오고 날은 어두워지고, 정말 지금도 그 때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자갈이 깔려있는 비포장 도로였어요. 어머니에게 언제 도착하냐고 물으면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하시는데.. 결국 그날 여기까지 들어오진 못하고 명상에서, 명상이 어머니 고향이거든요, 거기서 잤어요.’

 

문산에 살던 그의 가족에겐 집도 없고 논밭도 없었다. 일본으로 돈 벌러 갔던 아버지는 해방 후 고향으로 오다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혼자서는 도저히 어린 자식들을 먹여 살릴 수 없었던 어머니는 재혼을 했다. 새 가정을 꾸렸지만 먹고 살기 힘들긴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셋방살이라고도 할 수도 없는 화장실이나 마구간 옆에서 살았다. 그러다가 어머니 친정에서 차라리 지리산으로 들어와 살라 해서 유평마을로 오게 되었다고 했다.

유평마을로 들어와 삼거리 개울 건너에 움막을 짓고 살았다. 억새로 얼기설기 엮은 집이었다. 비가 오면 억새에서 배어나온 붉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집이었다. 그 움막이 초가집이었냐고 묻자, ‘아고 초가집 정도면 양반이었게. 그런 집이 아니고 지금 티브에 나오는 아프리카 움막 같은 집이라. 서부경남지역에서 천한 것 중 천한 사람을 지리산 숯쟁이라 했어요. 1년 열두 달 동안 이발을 하나, 세수를 하나, 그런 사람이 사는 집이었어. 사람 사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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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본 삼거리 (2016731일)-정인철 촬영(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사무국장)

 

이야기하는 그와 묻는 나 사이의 간극은 말로 해봐야 몰라요, 참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어떻게 말로 합니까, 등으로 표현됐다. 움막에서 숯 굽고 살던 시절, 유평마을에는 길도 없었다. 대원사다리까지만 길이 있었고 그 위는 산길이었다. 그때는 한국전쟁 때 외지로 나갔던 사람들이 들어오지 않아서 유평에 고작 서너 가구가 살았고, 삼거리에는 그의 가족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그의 가족이 유평마을로 들어온 후 2년쯤 지나서 공병대가 길을 닦기 시작했다. 공병대는 유평초등학교에 텐트를 치고 일했다. 도로가 나니 산판일이 시작되고 사람들이 몰려들어왔다. ‘전주라는 사람이 골짜기 골짜기를 지정해서 일꾼들을 부렸다. 그 당시 지리산에는 탈영범, 범법자 등이 많았는데 그들은 장작 만들고, 숯 굽고, 산판에서 원목을 베어서 먹고 살았다.

산판 허가가 났을 때 들어왔던 그 많던 사람들은 산판일이 끝나자 다들 나가 버렸다. 갈 곳 없는 사람들만이 남았다. 남은 사람들은 산에 있는 도토리를 주워 말려서 가루를 내어 끓여 먹고 살았다. 수저도 없이 손으로 집어 먹었다.

 

유평마을에서 숯쟁이로 나무하며 살던 그는 28살에 지리산을 떠났다. 지리산을 떠나있던 동안 군대를 마치고 속초여자와 결혼하여 아이 둘을 낳았다. 속초에서 노점상, 고물장사을 하던 그는 41살이 되어 다시 지리산으로 들어왔다. 초등학교 1학년, 4학년이던 아이들 손을 잡고 유정천리를 부르며 들어왔다고 했다.

가련다 떠나련다, 어린 아들 손을 잡고..’ 내 앞에서 노래를 부르던 그가 옷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세상 살기가 너무 싫어서, 뭐 굶어죽어도 좋고 거렁이가 돼도 좋으니까 나는 골짝으로 가련다하고 들어 온 거죠. 나는 시내생활하고는 안 맞아요. 사람 상대하는 게 참 힘들어요. 그러니까 내 노력으로, 몸 써서 먹고, 있는 그대로 살아야겠다고 가족들과 의논해서 어머니 계시는 이곳으로 다시 들어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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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새재

 

그는 지금 오미자 농사를 짓는다. 사과농사가 망한 후 사과나무 뽑아낸 자리에 오미자를 심었다. 오미자는 아는 사람들에게 판다. 많은 돈은 아니지만 먹고 살 수 있고 땅만 바라보고사니 맘도 편하다고 한다.

지리산에는 가끔 올라가세요?’ 내 물음이 끝나자마자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 아지메가 뭔 소리를 하고 있는 거예요? 천왕봉은 부처님 손바닥이고 내 생활터전입니다. 여기 살면서 먹고 살아야하니, 산에서 약초, 당귀, 작약, 오미자, 이런 거 캐가며 먹고 살았어요. 후레쉬 잡고 새벽에 길을 나서서 새재 위 조개골에 올라가면 날이 희끄머니 허여지면, 후레쉬를 내만이 아는 장소, 바위 밑에 숨겨 논단 말입니다. 천왕봉, 중봉, 하봉, 써래봉, 온대를 다 다녔어요. 전라도쪽은 많이는 안 가봤고. 배낭 메고 지리산 올라가는 등산객들을 보면 참 호사스럽게 보이고 그래요. 그 사람들은 고생한다고 말하지만 나는 멧돼지처럼 산을 헤매고 다녔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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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거리에 있는 그의 오미자밭

 

지리산을 날아다니던 그도 지리산에 못 간지 오래됐다. 이제는 무릎도 아프고, 약초 캘 일도 없으니 높이 올라갈 일도 없다고. 그래도 지리산에 대해 늘 이렇게 말한단다. ‘지리산이 있으니까 먹고 살았다. 다행이다. 내가 자발적으로 온 건 아니지만 운명적으로 지리산에 왔고, 그래도 나는 참 잘 왔다. 지리산아 고맙다. 오늘까지 생활을 이어주고. 정말 고맙구나.’

그는 지난 삶을 생각하면 가시밭길이었지만 그래도 지리산을 만나 오늘까지 살아온 게 고맙고, 앞으로도 건강하게 살면 좋겠다고 한다. 나도 그렇다. 지리산을 만나 고맙고, 앞으로도 건강하게 살면 좋겠다.

 

고영일로 태어나 고충웅으로 살아온 그의 이야기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유평마을에 남아있는 1970년대 전후 가옥에 대한 설명이다. 지금 유평마을에는 난민주택, 독가촌 등 정치적으로 불안정했던 시기에 지어진 집들이 남아있는데 그는 그 집들의 역사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유평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집은 외곡에 있는 집인데, 그 집은 정부에서 목자재를 줘서 살 사람이 직접 집을 짓도록 한 집이라고 한다. 그 후에 난민주택이라 하여 신청을 해서 뽑힌 가구를 지원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이 때에는 업자가 들어와서 초가삼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난민주택 다음에 들어온 가옥은 독가촌이다.

독가촌은 김신조 사건 이후 유평마을 같은 오지에는 간첩들이 들어올 수 있으니 은신처를 없앤다며 화전민을 정리하고 산 곳곳에 흩어져 살던 사람들을 집단화한 사업이다. 지리산자락에 독가촌이 남아있는 마을은 여럿 되지만 유평마을처럼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곳은 드물고, 그 독가촌에서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은 거의 없다. 유평마을에는 새재, 중땀, 삼거리, 유평 등에 독가촌이 남아있고 그 일부에 사람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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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거리 독가촌 일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게 유평마을은 단지 대원사가 있는 곳, 치밭목대피소로 가는 등산로 변의 작은 마을일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유평마을은 우리나라 민초들이 겪어야 했던 아픈 역사가 깃들어 있고, 그 역사를 이야기해줄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이다. 그가 살고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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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안녕하세요. '국립공원을 지키는 시민의 모임' 사무처장 윤주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