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소한 삶이 주는 따뜻함 [산청 유평 외곡마을 조복임 할머니] 그(그녀)를 만나자!

나는 어떤 집에 살고 싶을까. 나는 내가 태어난 시골집에 미련이 많다. 시골집은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는 세 칸짜리 안채가, 오른쪽에는 행랑채, 왼쪽에는 창고와 뒷간, 안채와 행랑채 사이에는 외양간, 마당에는 우물이 있는 집이었다.

 

나는 두 살 때 부모님을 따라 시골집을 나왔기 때문에 시골집에 대한 나의 기억은 언니, 오빠들의 기억에 의존한다. 언니 말에 의하면 시골집은 꽃밭이었다고 한다. 할머니가 꽃을 좋아하셔서 외양간에는 덩굴장미가, 마당에는 백일홍, 맨드라미, 과꽃, 채송화 등 갖가지 꽃들이 가득했다고 한다. 할머니는 텃밭보다는 꽃밭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소 없는 외양간에서도 덩굴장미와 소죽냄새가 나는 시골집, 지금 그 시골집엔 당숙이 살고 계신다. 꽃밭이 없어지고, 우물이 메워지긴 했지만 당숙 덕에 시골집은 여전히 사람이 사는 집으로 실존하고 있다. 나는 내가 태어난 시골집 같은 곳에서 살고 싶다. 어머니는 너처럼 게으른 아이가 그런 집에서 살 수 있겠냐고 하지만, 살고 싶다는 소망과 살 수 있다는 현실의 간극을 구태여 생각하지 않는 나는 그런 집에 살고 싶다. 소망 탓일까, 나는 그런 집에 사는 사람을 만나면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사람 같은 친숙한 느낌을 받는다.

 

조덕임 할머니(84). 할머니는 그런 집에 살고 계신다. 작은 내를 건너 할머니 집으로 가는 길엔 코스모스, 맨드라미, 금송화가 피어 있고, 집 앞 밭엔 고추, 배추, 쪽파가 자라고 있다. 할머니가 가꾼 밭은 꽃밭보다 예쁘고 정갈하여 하염없이 바라보게 하고, 미소 띠게 한다.

 

 

 

 

할머니는 대원사 근처 유평에 살다가 스물여덟 살 때 이곳으로 들어오셨다. 한국전쟁 후 소개되었던 이 마을은 할머니와 함께 들어온 사람들로 인해 다시 사람 사는 곳이 되었다. 할머니 집은 50년 전 할아버지께서 손수 지었다는데, 집 주변은 온통 밭이고, 산이다. 대문이 없는 집, 두 칸 방에 부엌 한 칸, 마당 건너편 누에 키우던 방 한 칸이 전부인 집은 소박함 그 자체이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20년 전 헤어졌는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해에 전기가 들어왔다고 한다.

 

집이 참 예쁘다는 말에 할머니는 내 어머니와 똑같은 표정을 지으며 겨울엔 물도 얼고, 나무 때서 살아야 하는데, 예뻐? 돈 있는 사람은 다 나가고 힘든 사람만 남았는데, 나는 여기 들어와선 한 번도 안 나갔지. 지금은 농사도 못해. 다리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슬하에 일곱 남매를 두신 할머니는 도시는 갑갑해서 살 수 없다고, 명절엔 아들들이 사는 부산으로 가신다고 한다. 부산에 가려면 우선 버스 타는 곳까지 나가야 하는데, 집에서 버스 타는 곳까지 걸어서 3시간쯤 걸린다고, 예전엔 1시간 반이면 갔는데 지금은 다리가 아파서 빨리 못 걷는다고 하신다. 새벽녘의 길 나섬, 3시간의 종종 걸음, 정성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32년생 내 어머니보다 3살 위인 조덕임 할머니, 할머니의 염색하지 않은 머리는 내 어머니 머리빛깔과 비슷했다. 할머니와 이야기하는 내내, 일 없으니 머리만 희어지나 싶어 자꾸만 머리로 손이 갔다. 할머니에 대한 익숙함은 할머니 안에서 내 어머니를 봤기 때문일까, 할머니만 두고 나오는 길이 아쉽고 죄송스러웠다.

 

 

 

간소한 집, 할머니 집은 내가 살고 싶은 집과 꼭 닮아 있다. 가을날, 마당에선 잰피가 말려지고, 집 뒤 텃밭엔 가시오가피, 천궁, 당귀, 참취가 꽃 피우며, 울 안 감나무에선 감이 떨어지고, 뽕나무가 여기저기 자유롭게 자라는 집, 나는 그런 집에 살고 싶다.

 

 

 

 

 

 

조덕임 할머니가 있어 다시 오고 싶은 이곳은 산청군 삼장면 유평에 있는 외곡마을이다. 외곡마을은 시천에서 산청으로 가는 59번 국도에서 대원사 표지를 보고 들어서면 된다. 대원사계곡을 따라 쭉 올라가다보면 지리산국립공원 표지가 나오고, 소나무와 참나무, 박달나무, 서어나무 등이 빽빽이 서있는 곳을 지나면 왕등재 습지로 오르는 삼거리가 나온다, 삼거리에서 왕등재 습지 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다보면 나오는 마을이 외곡이다.

 

외곡마을은 외고개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이 마을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전하는 이야기로,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이 신라를 피해 들어온 곳이 이곳이었다고, 신라군에 발각된 구형왕은 외고개, 새재, 쑥밭재를 넘어 칠선계곡으로 갔다고 한다. 마을 주변엔 당시의 유물이라 생각되는 기와장이 곳곳에 있다고 한다.

 

마을 일을 맡고 있는 송현대 님은 조덕임 할머니와 비슷한 시기에 외곡마을로 들어왔다. 1958, 6살 때였다. 3년 넘게 비어 있던 마을은 집이고, 논이고, 밭이고 모두 억새, , 산딸기, 버드나무 천지였고, 농사를 짓기 위해 땅을 파면 유골이 나오던 시기였다. 그는 유평에 있는 가랑잎초등학교에 다녔는데 학교도 불에 타버려 공병대 막사에 톱밥을 깔아놓고 공부하였단다.

 

 

지금 외곡마을엔 다섯 가구가 살고 있지만 예전 이 마을엔 천석꾼이 살았다고 한다. 천석꾼이요? 나의 되물음에 그는 말이 그렇다고, 논도 밭도 없어 보이지만 산이 논이고, 산이 밭인 곳이 이곳이라고 했다. 천석꾼은 아니어도 조백석이라고 조 씨 성을 가진 쌀 백 섬을 하는 사람은 분명히 살았다고 했다.

그 시절 지리산 8부 능선까지 사람들이 살았단다. 나무를 도벌하려는 사람들이 중봉 아래에도 살았다고, 지금도 잎이나 열매를 따기 위해 마가목, 들메, 음나무 등을 통째로 베어내는 사람들이 있다고, 그러면 되겠냐고 한다.

 

외지사람들은 이런 곳을 보면 개발하려하지요. 깨끗하고 조용하니까요. 우리는 벌어먹고 살아야하니까 어려움이 많습니다. 농사도 어려워요. 환경면에서는 좋지만 나이 들면 연금도 없고, 아무리 일해도 밖에서 얻는 소득의 절반도 안 됩니다. 그러니 떠날 수밖에요.’ 먹고 살기 힘드니 사람들이 떠나고, 그 많던 논과 밭의 대부분은 다시 산이 되었다.

 

그는 지금 사과농사를 짓고 있다. 40년 전 경북 사람들이 들어와 시작한 사과 농사가 그나마 그와 그의 이웃들을 잡아두고 있는 것이다. 이곳 사과는 해가 짧아 색은 안 좋으나 일교차가 커 맛은 일품이라 한다. 그의 사과밭 아래엔 질경이, 여뀌, 사초, 쇠별꽃, 닭의장풀 등이 살고 있다.

 

 

 

외곡마을은 왕등재 습지 아래 있는 마을이다. 왕등재 습지는 2008년 람사르 총회 공식 탐방지였으며, 천년 이상 된 자연형 습지로 유명하다. 왕등재 습지에 대해 물어보니 그는 , 별거 아닙니다. 뭐 볼게 있다고, 우리는 안 갑니다.’고 잘라 말한다.

 

환경부와 국립공원관리공단은 고산습지가 야생동물에게 물과 쉼터를 제공하니 생태적으로 유의미하다 하여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지만 주민들에게는 심드렁한 대상일 뿐이다. 반달가슴곰, 노루, 멧돼지 등이 다니고, 잠자리 가운데 가장 작은 꼬마잠자리가 살고 있다는 해발 973미터에 있는 왕등재 습지, ‘거 때문에 못살겠네요, 우리만 죽어요. 출입 통제가 웬 말입니까? 좋은 곳이라면 다들 보게 해야지요.’ 지역주민들이 가까이 있는 보호지역에 대한 일반적 반응이 외곡마을에선 나오지 않았다. 다행일까, 무심 속의 뼈를 발견하지 못한 건 아닐까?

_ 윤주옥 사무처장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사진_ 허명구 님 (국시모 미디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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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안녕하세요. '국립공원을 지키는 시민의 모임' 사무처장 윤주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