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멀리 아련히 만년설의 준봉들, 길이 오란다 정종호의 자전거 세계일주

[정종호의 자전거 세계일주] ⑧ 란저우~짱예/08년 6월2~12일

 

첫 야영, 물·새 소리 들으며 별빛에 묻혀 잠들다

정상 가까이 오르자 눈보라에 천둥·번개까지 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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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뚜(樂都)에서 씨닝(西宇) 가는 길에 한 중국인 자전거 여행자가 말을 걸어 왔다.

 

"어디로 가십니까? 나는 씨닝으로 가는데요."

 

괜히 옆에 와서 한 마디씩 던지는 사람이 많다. 이번엔 그냥 무시하고 갈까 하였으나, 그의 행색을 보고 자전거를 세우게 됐다. 젊은 친구가 뒷바퀴 위에는 이불을 올려놓고, 핸들바 양쪽에는 배낭과 텐트를 넣은 비닐 쇼핑백을 건 채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영락없는 자전거 무전여행자였다.

 

길동무가 되어 좋긴 했지만 취향이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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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정저우(정주)대학교에서 회계학을 전공하는 왕증파이라는 학생이었다. 여름방학 동안 40일 정도의 일정으로 티베트의 라사로 가는 중이라고 했다. 씨닝까지는 같은 길이라서 자연스럽게 동행을 하게 됐다. 그는 야채 파는 행상을 보자 토마토를 사서 나에게 먹으라고 줬다. 길 가에는 유채꽃밭이 유난히 많아서 유채꽃이 배경으로 서로 사진도 찍어주며 좋은 길동무가 되었다.

 

"길동무가 됐으니 삔관(여관)도 같은 곳으로 잡죠."

 

그는 '좋다'는 대답 대신 히죽 웃었다.

 

그런데 그의 취향이 문제였다. 씨닝에 도착해 한 삔관에 들러 방을 살펴본 뒤 이곳에서 머물자고 하자, 그는 싫다고 했다. "여긴 너무 비쌉니다. 다른 데 가죠." 그가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128위안의 숙박비가 그에겐 너무 비싸다고 여겨졌던 것이다.

 

다른 곳을 알아보았더니 150위안으로 더 비쌌다. 그러나 그는 여러 사람에게 물어 마침내 60위안짜리 저렴한 숙소를 찾아냈고 거기서 묵기로 하였다. 그 방은 침대 두 개와 소파 하나, 텔레비전 한 대가 있는 방인데 샤워를 할 수 있는 화장실이 없었다. 공동화장실에도 세면대만 있고 샤워실이 없었다. 그가 밀린 빨래를 하고 들어오길래 내가 공동화장실에서 수건에 물을 묻혀서 몸을 닦는 '수건 샤워' 법을 알려줬다. 

 

나는 그를 보면서 대학 시절이 생각났다. 지리산 산행 뒤 돌아오는 길에 돈이 떨어진 적이 있었다. 구례역에서 표를 사고 있던 어떤 아저씨에게 사정을 설명하며, 서울 가는 기찻삯을 도와달라고 하니 두 말 않고 차비를 내주었다. 그 분에 대한 고마운 마음은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다음날 왕증파이와 헤어질 때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그가 여행할 라사까지는 적어도 한 달이 걸리는 험난한 길이다. 나는 그가 갖고 있는 낡은 비닐 쇼핑백의 끈이 끊어질까 마음에 걸려 가방 하나를 자연스럽게 사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하였다. 숙소 근처 왕빠(인터넷방)를 찾는다고 함께 돌아다녔는데 그 흔한 가방가게가 보이지 않았다. 여분으로 갖고 있던 자전거 후미등과 약간의 간식거리를 그에게 주었다. 그는 남은 토마토를 나에게 주었다. 우리는 각자 가야 할 길로 향했다.

 

처음으로 만나는 설산, 험난한 일정을 예고해 주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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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닝에서 보꾸(寶庫)로 가는 길은 100㎞에 이르는 완만한 오르막길이다. 멀리, 하늘 아래 한가운데로 아련히 떠오르는 흰 산이 보였다. 처음으로 만나는 설산이었다. 흰 산은 앞으로 닥칠 며칠간의 험난한 일정을 예고해 주는 것 같았다. 

 

한 오토바이 수리점 앞에서 자전거를 멈추고 쉴 곳을 찾았다. 컴컴한 수리점 안에서 한 아저씨(앉은뱅이 장애인)가 나오더니 나에게 사각의자를 건넸다.

 

"의자에 않아서 쉬세요."

 

나는 사각의자에 자전거를 기대어 놓고, 옆집 대문 계단에 앉아 간식으로 비스킷을 꺼냈다. 그때 그 집 안에서 한 아주머니가 내다보더니, 물과 빵을 가져다주며 먹으라고 했다. 정말 고마웠다.

 

"고맙습니다. 빵이 맛있네요."

 

Untitled-7 copy.jpg아주머니는 머리에 검은 스카프를 쓰고 있었는데, 이것으로 보아 이들은 소수민족인 회족(回族) 같았다. 내가 빵을 먹고 있을 때 집 안에서 한 어린아이가 나와 다가왔다. 나는 가지고 있던 초콜릿을 아이에게 먹으라고 주었다. 아주머니가 이를 보고 "너 그거 받으면 안돼"라고 말렸지만, 아이는 어머니 말보다 초콜릿의 유혹이 더 컸는지 얼른 받아 챙겼다.

 

그때 나를 지켜보고 있던 아저씨(다리를 저는 또 다른 장애인 아저씨)가 나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그를 따라 그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는 조그만 오토바이상점을 운영하는 이진뵤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집 안에 있는 닭장에서 달걀 2개를 꺼내 나에게 달걀스프를 만들어 주었다. 그는 이방인을 손님으로 깍듯이 맞아들이는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의 눈에선 먼 이국 땅을 향한 아득한 그리움 같은 것이 느껴졌는데, 그가 갖고 있는 목발이 그런 느낌을 더하게 했다.   

 

그는 눈에 총기가 있어 보이는 그의 아들에게 "중국 인민은 당신을 환영합니다"라는 문구를 쓰게 한 뒤 이를 나에게 건넸다. 나는 "중국인을 사랑합니다"라는 문구를 답례로 메모지에 써주었다. 그는 그 종이를 액자 귀퉁이에 끼워 넣었다. 떠나는 나를, 앉은뱅이 아저씨와 목발을 짚은 아저씨 그리고 그 가족들이 모두 나와 지켜봤다. 손을 흔드는 그들을 뒤로 하고 나는 페달을 밟았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했다.

 

계곡을 낀 콘도같은 번듯한 삔관, 그러나 끝내 열리지 않았다

 

그날은 보꾸에서 숙소를 정하려고 했는데, 작은 마을이어서 묵을 곳이 없었다. 시간은 벌써 오후 4시, 다음 마을까지 가는 것은 무리였다. 길 옆에서 주민들에게 물어 보니 여기서 7공리(㎞)를 가면 삔관이 있다고 하였다. 나는 다시 힘을 내어 오르막길을 달렸다. 계곡과 산을 끼고 경치가 좋은 위치에 자리 잡은, 빨간 지붕의 번듯한 삔관 건물이 나를 반겼다.
'멋진 이 곳에서 하룻밤 묵을 수 있겠구나' 하며 나는 기대에 부풀어 삔관 문으로 다가갔다. 바로 그 순간 열려 있던 철문이 스르르 닫히며 길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철문 옆의 조그만 경비실 창문이 열리더니 "빈 방이 없습니다. 돌아가세요" 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난감했다. 여기서는 더이상 앞으로 갈 수도 뒤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콘도미니엄같이 건물이 여러 채인 큰 삔관에 방이 없다니 의아했다. 한번 사정해 보기로 했다.

 

"아무 방이라도 좋습니다. 하루 묵어가게 해주세요."

 

경비는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고 결과는 똑 같은 대답이었다. 경비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긴 나무의자가 있고 옆에 난로가 보였다. "방이 없으면, 여기에서라도 자고 가면 안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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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난감해 하는 표정으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때 슬쩍 숙박명부를 보니 명부에는 숙박자가 몇 명 안 되었다. 잠시 뒤 한 사람이 건물에서 나오더니 "여기는 잘 곳이 없습니다" 라고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밖에서는 해발 2,700m 고지의 차가운 빗방울이 자전거 위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근처에서 텐트를 치게 해달라는 요청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내가 "배도 고프고 담배도 떨어지고 지쳐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다"고 버티자, 불쌍해보였던지 그는 빵과 물을 갖다줬고, 한 점원은 담배 2갑을 가져와 건네주었다. 그와 한 시간 정도 결론 없는 승강이를 하는 중에 차가운 빗방울이 굵어지고 있었다.

 

그가 마지막이라는 듯이 단호하게 의견을 말했다. "보꾸로 돌아가면 파출소가 있을 겁니다. 거기서 재워달라고 해보시오?"

 

파출소에서 먹고 잤다, 죄인이 아니라 숙박인으로

 

Untitled-9 copy.jpg결국 나는 파란 우비를 쓰고 얼음처럼 차가워진 바람 속으로 자전거 페달을 밟아 온 길로 돌아갔다. 파출소를 찾아 안으로 들어서며 한 경찰에게 말했다. "나는 한국에서 온 자전거 여행자입니다. 묵을 곳이 없으니 여기서 자고 가게 해주십시오." 그러자 그는 "여기서 10공리쯤 가면 숙소가 있다"면서 그곳에서 자고 가라고 했다. 또 온 길로 10㎞나 빗길을 달려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저 위의 삔관까지 갔다가 돌아왔습니다. 이제 지쳐서 더 이상 못 갑니다."

 

경찰은 내 패스포트를 조사하더니,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정 그렇다면 여기서 자고 가시오"라고 말했다. 나는 비로소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눈물나게 고마운 경찰이었다.

 

잠시 뒤 근무 나갔던 5명의 경찰들이 파출소로 모여 들더니 저녁상이 차려졌다. 파출소 안에 주방이 있어서 요리는 그 곳 주방에서 만들어졌고 음식도 꽤 푸짐하였다. 그들은 가장 먼저 나에게 젓가락을 주며 먹으라고 말했다. 조금 전 삔관에서 내준 빵을 먹었지만, 나는 그들의 권유대로 꽤 많은 양의 음식을 포식했다. 상이 바뀌더니 과일과 청포묵이 나왔다. 경찰들은 나에게 자꾸 더 먹으라고 권했다.

 

"많이 드세요, 자전거 여행이 힘들 텐데."

 

이뿐만이 아니었다. 잠시 뒤엔 술상이 차려졌다. 내가 고마움의 표시로 "중국에는 호인이 많습니다" 라고 하자, 한 경찰이 "전세계 인민은 다 한 가족"이라는 멋진 응답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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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대화 중에 사천성의 지진 얘기도 빼놓지 않았다. 나도 그 얘기를 들으면 가슴이 아프다는 말을 해주었다.

 

다음날 아침 식사도 파출소에서 해결한 뒤 출발하려고 하니 그들은 남은 빵과 과일을 싸 건네주었다. 나는 이 자리를 빌려 그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지 않을 수 없다.

 

'나그네를 접대해 준 공안경찰 주위핑씨와 친절한 그의 동료 경찰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고도 3,800m, 한 구비 넘으면 하늘과 맞닿은 또 한구비…

 

나는 즉시 대판산으로 행했다. 대판산 고개는 높이 3,800m 이상(정상 밑 터널을 통과하였는데 고도가 3,803m였다)으로, 이틀 만에야 그 고개를 넘었다. 해발 2,530m의 보꾸에서 출발해 대판산을 올라, 고개 정상 가까이에서 한창 공사중인 터널을 통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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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벼랑처럼 가팔랐고 차가운 바람이 몰아쳐 조금도 쉴 틈을 주지 않았다. 한 구비 돌아가면 하늘과 맞닿은 또 한 구비가 나타났다. 가파를 판(坂)자를 쓰는 대판산 고갯길은 나를 천마(Flying Horse·내 자전거 이름)의 안장 위에서 내려오도록 만들었다.중간쯤 올랐을 때 위로는 더이상 계곡물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여기서 결정을 해야 했다. 더 갈 것인가? 멈출 것인가? 이미 결론은 나 있었다. 야영이다. 처음으로 치는 텐트였다.

 

계곡물에 발을 담그니 차갑기 그지없다. 코펠로 물을 떠서 몸에 끼얹으니 정신이 번쩍 든다. 지금까지 여행하는 동안 찬물로 샤워한 적이 많아서 그런지 얼음처럼 차가운 물도 견딜 만했다. 샤워를 하는데 염소 몇 마리가 '음메에에' 하며 옆으로 지나갔다. 

 

밤하늘 풍경은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무수한 별들이 땅 위에 사는 수많은 생명들의 빛처럼 찬란히 반짝였다. 너의 별과 나의 별, 그리고 세계 모든 사람들의 별. 나는 계곡물 소리와 부엉이 소리를 들으며 별빛에 묻혀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출발해, 서둘러 정상 가까이까지 올랐다. 대판산이라고 쓰인 커다란 돌판이 보였고, 거기에 입구가 봉쇄된 터널 공사 현장이 있었다. 터널은 다 뚫린 상태였고 내부 마무리 공사중이었다. 공사장 관리자인 듯한 직원에게 터널을 통과할 수 있느냐고 물었으나 '못 간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로서는 밑져야 본전이어서, 터널을 지나게 해달라고 약간의 떼를 써보았다. 그러자 그는 "이 안은 분진이 심해서 마스크가 없이는 지날 수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나는 마스크는 없었지만 대용품은 갖고 있었다.

 

"그래요? 나에겐 마스크가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스크 대신 스카프를 둘러 코와 입을 가리고 터널 속으로 들어섰다. 공사장 분진이 어둠 속에서 허옇게 떠올라 터널 안을 메우고 있었다. 자전거는 내리막길인 긴 터널을 쏜살같이 통과해 나갔다. 터널을 나와서 보니 옷은 온통 흰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이 터널을 자전거로 통과한 첫 인물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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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높으면 경치도 좋은 법인가? 터널을 빠져나오자 기련(치랜)산의 영봉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나도 모르게 무심코 한 마디 중얼거렸다. "이보다 힘들 수 없지만 이보다 좋을 수도 없구나." 만년설의 준봉들이 보이는 곳. 다음은 저 산을 넘는 것인가? 길이 오라는 대로 나는 갈 뿐이다.

 

대판산의 내리막길은 순식간이었다. 다탄이란 조그만 마을에 도착해 일찍 숙소에 들었다. 

 

짱예로 가는 길은 3개의 언덕이 있었다. 대판산과 냉용령 그리고 아전령으로 냉용령에서는 정상 가까이 오르자 천둥번개가 치고 눈보라가 몰아쳤었다.

 

글·사진 정종호 http://cafe.daum.net/bicycle.world.t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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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반갑습니다. 한겨레신문 이병학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