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걱산 거닐다 바람나겠네 길따라 삶따라
2010.05.20 11:50 너브내 Edit
세 물길 갈리는 태백
삼수령 넘어 마을의 봄
고산도시 태백. 한여름에도 모기가 없다는 동네다. 함백산·태백산·청옥산·백병산 등 고봉들이 늘 서늘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상저온 현상까지 겹쳐 올해 태백의 봄은 유난히 더디다. 5월 중순이 넘은 지금 개나리·진달래가 남아 있고 매화·벚꽃·배꽃이 한창이다. 개화가 20일 이상 늦었다. 예년 같으면 꽃봉오리가 터지기 시작했을 철쭉은 5월 말 축제를 앞두고 감감소식이다.
개화가 늦거나 말거나 한낮 들판 풍경은 곧바로 초여름을 향해 치닫고 있다. 태백 시내에서 35번 국도를 타고, 연초록으로 새단장한 낙엽송·자작나무 숲과 산벚꽃 무리 눈부신 피재(삼수령)를 넘어 볼거리·얘깃거리 많은 세 골짜기마을을 찾아간다.
부드러운 능선 초록밭과 굽잇길 귀네미골
태백 시내에서 35번 국도를 타고 피재(920m)를 넘는다. 삼척 하장면과 정선 도계읍 방향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피재는 백두대간에서 낙동정맥이 갈리는 지점이다. 백두대간이 서쪽 금대봉으로 방향을 튼 뒤 함백산·태백산을 거쳐 남서쪽으로 줄달음치고, 낙동정맥은 백병산·면산으로 내달린다.
피재란, 병자호란 등 전란 때 주민들이 이 고개를 넘어 태백산 일대 산중으로 숨어들었던 데서 비롯한 이름이다. 태백시는 최근 피재의 어감이 좋지 않다며, 한강·낙동강·오십천 세 물길이 갈리는 곳이란 뜻의 삼수령으로 바꿨다. 삼수령에서 광동호에 이르는 지역의 행정지명도 사조동에서 삼수동으로 바뀌었다. 본디 삼척시 하장면의 일부였으나, 1994년 태백시에 편입됐다.
검룡소는 남한강 발원지. 검룡소에서 솟은 물은 창죽골을 타고 동쪽으로 흘러(석회암 지대여서 물길은 수시로 스며 복류한다) 골지천을 이루어 태백시 북쪽 끝 광동댐으로 들어간다.
상사미마을 지나고 하사미마을 가리골 들머리 거쳐, 64년 지은 성공회 선교원인 예수원 들어가는 외나무골 들머리 지나면, 방송에 나온 화면을 따서 간판으로 세운 귀네미골 입구 표지판이 보인다. 낙엽송 숲 우거진 산길 따라 4㎞를 올라, 호밀밭 깔린 완만한 언덕들 사이에 들어앉은 그림 같은 귀네미마을을 만난다. 귀네미란 쇠귀를 닮은 산 너머 마을이란 뜻으로 <정감록>에도 등장하는 지명이다.

80년대 말 삼척 하장에 광동댐이 생기며 숙암·광동·조탄리 등 수몰지역 주민 30여가구가 이주해와 둥지를 틀었다. 가난한 이주민들은 이곳에 30여만평의 배추밭을 일궈 부농마을로 거듭났다. 20여가구가 남아 향토음식 체험장을 마련하고 민박시설을 들여 도시민들을 맞는다. 백두대간 종주꾼들이 들러 한숨 돌리는 곳이기도 하다.
도시민들을 끌어들이는 원동력은 산 능선을 따라 펼쳐진 밭과 길 풍경이다. 시멘트길이 능선 곳곳으로 이어져 있어 굽이굽이 차를 몰며 마을과 밭이 어우러진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밭에는 지금 호밀이 자라지만, 6월 중순 이후엔 모두 배추밭으로 바뀐다. 호밀은 배추농사를 위한 퇴비용이다.
가장 경관이 좋은 때는 배추가 자라나 온 산자락을 푸르게 덮는 7~8월. 그러나 언제 찾아가든 귀네미는 섭섭지 않은 그림을 보여준다. 능선 꼭대기 부근이나 큰재 쪽 흙길에 서면 삼척 오십천 일대 마을과 멀리 동해바다 일부가 눈에 들어온다. 9월 초에 배추 수확이 이뤄진다. 이 마을 배추밭 능선엔 내년 말까지 11기의 풍력발전기가 들어서게 돼 귀네미골 풍광은 완전히 달라질 전망이다.
귀네미골을 나와 5분 가량 하장 쪽으로 달리면 유서 깊은 마을 조탄리(도롱골·도릉골)에 이른다. 조탄(助呑)은 고려와 조선에 걸쳐 행해진 정전법의 흔적이 엿보이는 이름이다. 토지를 9등분해 8곳은 주민이 나눠 경작하고 1곳은 공동경작해 세금을 내는 공전으로 삼는 방식이다.
마을 앞 골지천 건너편 지명이 공전뜰로, 이곳이 공전 터였다. 조탄이란 지명은 조선 현종 때 삼척부사를 지낸 미수 허목이 지은 <척주지>에도 나타난다.

조선시대 정전법 흔적 남은 조탄마을
이 마을에 아주 멋진 전나무가 있다. 국내의 노거수 중 아름답고 오래되기로 손에 꼽히는 전나무다. 높이 40m, 가슴 높이 둘레 약 5m에 이르는 470여년 된 거목이다. 가까이 다가가면 우람하고 곧고 푸른 기운에 압도된다. 조탄마을의 당산목이다. 옆엔 주민들이 매년 삼월 삼짇날 나무에 제를 올리는 당집이 있다.
“저 전낭기(전나무)는 중 서낭인 게라. 당제를 지낼 제 고기는 하나도 안 쓰고 지내요. 중 서낭이니 그렇지.”(주민 안연수씨·82)
‘중 서낭’은 오래전 이 마을에 있었다는 도릉사란 절과 관련이 있다. 이 절터가 전나무 주변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절은 사라지고 삼층석탑이 이 마을에 있었다는 기록이 이 마을 신씨 집안에 전하는 ‘도릉장’이란 칠언절구 시 형식의 글에 나와 있다. 삼층석탑도 사라지고, 마을 들머리에 절탑(또는 도릉사탑)으로 불리는 돌무더기가 남아 있다.
이 돌무더기는 “아주 아주 오래 전부터 그 모습 그대로인 절탑”이라는데, 묵은 이끼가 검게 덮은 커다란 돌무더기 위에 작은 돌 하나가 세워져 있는 모습으로 방치돼 있다. 주변에 건축자재 등 잡동사니들이 쌓여 있고, 돌무더기는 무너져가고 있는 중이다. 큰절골·작은절골·부도바우 등 절과 관련된 지명이 마을에 남아 있다.
이 마을 골짜기 안엔 일제강점기에 대규모 금광이 여러 곳 있었다. “이 골짝에만 엄청 큰 금방아(돌을 빻아 금을 채취하던 물레방아)가 스물네 척이나 있었어. 왜정 때 일본놈들이 다 해먹었지. 금광 주인이 일본놈들이었어. 우린 노가다만 했구.”(안연수씨)
금방아는 골지천과 이웃마을 숙암리에도 지구렁이(지구랭이) 골짜기에도 즐비했다. 광석을 캐 물레방아로 빻은 뒤 물속에 수은을 넣어 금가루를 빨아들이게 하는 방식으로 금을 채취했다고 한다. 금방아 중 일부는 60년대까지 남아 있었다.
하장으로 가는 다리 건너기 전 왼쪽 산길(시멘트길)로 오르면 고개 넘어 지구렁이 마을에 이른다. 광동호가 생기기 전엔 강물을 숙암리 쪽 돌다리로 건너다녔으나, 물이 들어차 마을이 갇히자 새로 뚫은 길이다.
지구렁이 마을로 넘어가는 산속 풍경이 특이하다. 곳곳에 움푹 파인 커다란 웅덩이들이 나타난다. 동굴이 많은 석회암지역이어서 생긴 돌리네 지형이다. 작게는 수십m에서 최대 100여m나 되는 웅덩이들이 아홉개나 돼 이 지역을 아홉구미로 부른다. 웅덩이엔 전나무숲도 있고, 밭도 있고, 무덤도 있다.
지구렁이는 40년 전까지도 동해·삼척 주민들이 댓재를 넘어와 지구렁이재를 거쳐 정선을 가고 오던 길목이었다. 지구렁이에서 태어나 살아온 장순근(59)씨가 말했다.
“옛날에는 이 길이 아주 큰 통로래요. 삼척장으는 소금 사러 많이 갔더랬어요. 새벽에 떠나므는 밤 열두시가 돼서야 집에 돌아왔댔어요.” 동해·삼척 사람들은 산에서 삼을 재배해 소에 싣고 넘어다녔다고 한다. 60년대까지 오가는 이들로 주막집이 메워지며 20집이 넘게 살았다는 이 마을엔 지금 5가구만 남아 배추·곰취를 재배하며 산다.
조탄 쪽에서 넘어오는 길이 급경사여서 한겨울 주민들 통행이 어렵자, 광동호 물길 옆으로 길을 다시 냈다. 주민들은 하장까지 이 길을 통해 오간다.
지구렁이 마을 앞에 우뚝 솟은 찌걱산(지각산)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이름도 희한하지요. 찌걱산이라. 찌걱산은 암산이고 물 건너에서 지따맣게 암산을 파고든 고갯등이 숫산이라.”(장순근씨)
솟은 모양이 뿔을 닮아 지각산이라지만, 주민들이 부르는 찌걱산이 더 의미심장하다. 까마득한 절벽을 이룬 산꼭대기에서 내려다 보면(또 지도를 보면) 무슨 얘긴지 알 수 있다. 골지천 물길이 댓재 쪽에서 흘러온 번천과 만나기 전, 찌걱산 쪽으로 180도 몸을 튼 뒤 다시 숙암리 쪽으로 180도 급회전해 돌아나가는데, 이 모양이 움푹 팬 찌걱산 안으로 길쭉한 반도(고갯등)가 깊숙이 파고든 모습을 만든다.
푹 꺼진 지구렁이 곁엔 '바람나는 산'찌걱산 움푹
조탄리 주민 신오춘(78) 할머니가 말했다. “새 길이 뚫리기 전에 숙암리로 가려면 찌걱산 쪽으로 걸어다녔어요. 근데 젊건 늙건 남자·여자가 여길 함께 걸어갔다 하면 반드시 그냥 가지 않은 기라. 꼭 바람이 나는 기라. 거기 제집바우(계집바위)에 돌 하나 얹어놓고 가도 마을에서 틀림없이 누군가 바람이 났어요.”
조탄리와 하장을 잇는 새 길이 뚫리면서 숫산인 길쭉한 고갯등 한가운데가 잘렸다. 그 뒤론 주변 마을에서 바람나는 일이 사라졌다고 한다.
찌걱산엔, 꼭 바람 날 걱정 때문이 아니더라도 오르지 않는 게 좋다. 전화 송수신용 철탑까지 시멘트 찻길이 나 있지만, 정상 부근은 까마득한 절벽이고 산길이 험하다. 오르는 길에 수직동굴도 흩어져 있어 위험하다. 정상 주변에 우거진 나무로 전망도 좋지 않다.
태백=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삼수령 넘어 마을의 봄

고산도시 태백. 한여름에도 모기가 없다는 동네다. 함백산·태백산·청옥산·백병산 등 고봉들이 늘 서늘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상저온 현상까지 겹쳐 올해 태백의 봄은 유난히 더디다. 5월 중순이 넘은 지금 개나리·진달래가 남아 있고 매화·벚꽃·배꽃이 한창이다. 개화가 20일 이상 늦었다. 예년 같으면 꽃봉오리가 터지기 시작했을 철쭉은 5월 말 축제를 앞두고 감감소식이다.
개화가 늦거나 말거나 한낮 들판 풍경은 곧바로 초여름을 향해 치닫고 있다. 태백 시내에서 35번 국도를 타고, 연초록으로 새단장한 낙엽송·자작나무 숲과 산벚꽃 무리 눈부신 피재(삼수령)를 넘어 볼거리·얘깃거리 많은 세 골짜기마을을 찾아간다.
부드러운 능선 초록밭과 굽잇길 귀네미골
태백 시내에서 35번 국도를 타고 피재(920m)를 넘는다. 삼척 하장면과 정선 도계읍 방향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피재는 백두대간에서 낙동정맥이 갈리는 지점이다. 백두대간이 서쪽 금대봉으로 방향을 튼 뒤 함백산·태백산을 거쳐 남서쪽으로 줄달음치고, 낙동정맥은 백병산·면산으로 내달린다.
피재란, 병자호란 등 전란 때 주민들이 이 고개를 넘어 태백산 일대 산중으로 숨어들었던 데서 비롯한 이름이다. 태백시는 최근 피재의 어감이 좋지 않다며, 한강·낙동강·오십천 세 물길이 갈리는 곳이란 뜻의 삼수령으로 바꿨다. 삼수령에서 광동호에 이르는 지역의 행정지명도 사조동에서 삼수동으로 바뀌었다. 본디 삼척시 하장면의 일부였으나, 1994년 태백시에 편입됐다.
검룡소는 남한강 발원지. 검룡소에서 솟은 물은 창죽골을 타고 동쪽으로 흘러(석회암 지대여서 물길은 수시로 스며 복류한다) 골지천을 이루어 태백시 북쪽 끝 광동댐으로 들어간다.
상사미마을 지나고 하사미마을 가리골 들머리 거쳐, 64년 지은 성공회 선교원인 예수원 들어가는 외나무골 들머리 지나면, 방송에 나온 화면을 따서 간판으로 세운 귀네미골 입구 표지판이 보인다. 낙엽송 숲 우거진 산길 따라 4㎞를 올라, 호밀밭 깔린 완만한 언덕들 사이에 들어앉은 그림 같은 귀네미마을을 만난다. 귀네미란 쇠귀를 닮은 산 너머 마을이란 뜻으로 <정감록>에도 등장하는 지명이다.

80년대 말 삼척 하장에 광동댐이 생기며 숙암·광동·조탄리 등 수몰지역 주민 30여가구가 이주해와 둥지를 틀었다. 가난한 이주민들은 이곳에 30여만평의 배추밭을 일궈 부농마을로 거듭났다. 20여가구가 남아 향토음식 체험장을 마련하고 민박시설을 들여 도시민들을 맞는다. 백두대간 종주꾼들이 들러 한숨 돌리는 곳이기도 하다.
도시민들을 끌어들이는 원동력은 산 능선을 따라 펼쳐진 밭과 길 풍경이다. 시멘트길이 능선 곳곳으로 이어져 있어 굽이굽이 차를 몰며 마을과 밭이 어우러진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밭에는 지금 호밀이 자라지만, 6월 중순 이후엔 모두 배추밭으로 바뀐다. 호밀은 배추농사를 위한 퇴비용이다.
가장 경관이 좋은 때는 배추가 자라나 온 산자락을 푸르게 덮는 7~8월. 그러나 언제 찾아가든 귀네미는 섭섭지 않은 그림을 보여준다. 능선 꼭대기 부근이나 큰재 쪽 흙길에 서면 삼척 오십천 일대 마을과 멀리 동해바다 일부가 눈에 들어온다. 9월 초에 배추 수확이 이뤄진다. 이 마을 배추밭 능선엔 내년 말까지 11기의 풍력발전기가 들어서게 돼 귀네미골 풍광은 완전히 달라질 전망이다.
귀네미골을 나와 5분 가량 하장 쪽으로 달리면 유서 깊은 마을 조탄리(도롱골·도릉골)에 이른다. 조탄(助呑)은 고려와 조선에 걸쳐 행해진 정전법의 흔적이 엿보이는 이름이다. 토지를 9등분해 8곳은 주민이 나눠 경작하고 1곳은 공동경작해 세금을 내는 공전으로 삼는 방식이다.
마을 앞 골지천 건너편 지명이 공전뜰로, 이곳이 공전 터였다. 조탄이란 지명은 조선 현종 때 삼척부사를 지낸 미수 허목이 지은 <척주지>에도 나타난다.

조선시대 정전법 흔적 남은 조탄마을
이 마을에 아주 멋진 전나무가 있다. 국내의 노거수 중 아름답고 오래되기로 손에 꼽히는 전나무다. 높이 40m, 가슴 높이 둘레 약 5m에 이르는 470여년 된 거목이다. 가까이 다가가면 우람하고 곧고 푸른 기운에 압도된다. 조탄마을의 당산목이다. 옆엔 주민들이 매년 삼월 삼짇날 나무에 제를 올리는 당집이 있다.
“저 전낭기(전나무)는 중 서낭인 게라. 당제를 지낼 제 고기는 하나도 안 쓰고 지내요. 중 서낭이니 그렇지.”(주민 안연수씨·82)
‘중 서낭’은 오래전 이 마을에 있었다는 도릉사란 절과 관련이 있다. 이 절터가 전나무 주변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절은 사라지고 삼층석탑이 이 마을에 있었다는 기록이 이 마을 신씨 집안에 전하는 ‘도릉장’이란 칠언절구 시 형식의 글에 나와 있다. 삼층석탑도 사라지고, 마을 들머리에 절탑(또는 도릉사탑)으로 불리는 돌무더기가 남아 있다.
이 돌무더기는 “아주 아주 오래 전부터 그 모습 그대로인 절탑”이라는데, 묵은 이끼가 검게 덮은 커다란 돌무더기 위에 작은 돌 하나가 세워져 있는 모습으로 방치돼 있다. 주변에 건축자재 등 잡동사니들이 쌓여 있고, 돌무더기는 무너져가고 있는 중이다. 큰절골·작은절골·부도바우 등 절과 관련된 지명이 마을에 남아 있다.
이 마을 골짜기 안엔 일제강점기에 대규모 금광이 여러 곳 있었다. “이 골짝에만 엄청 큰 금방아(돌을 빻아 금을 채취하던 물레방아)가 스물네 척이나 있었어. 왜정 때 일본놈들이 다 해먹었지. 금광 주인이 일본놈들이었어. 우린 노가다만 했구.”(안연수씨)
금방아는 골지천과 이웃마을 숙암리에도 지구렁이(지구랭이) 골짜기에도 즐비했다. 광석을 캐 물레방아로 빻은 뒤 물속에 수은을 넣어 금가루를 빨아들이게 하는 방식으로 금을 채취했다고 한다. 금방아 중 일부는 60년대까지 남아 있었다.
하장으로 가는 다리 건너기 전 왼쪽 산길(시멘트길)로 오르면 고개 넘어 지구렁이 마을에 이른다. 광동호가 생기기 전엔 강물을 숙암리 쪽 돌다리로 건너다녔으나, 물이 들어차 마을이 갇히자 새로 뚫은 길이다.
지구렁이 마을로 넘어가는 산속 풍경이 특이하다. 곳곳에 움푹 파인 커다란 웅덩이들이 나타난다. 동굴이 많은 석회암지역이어서 생긴 돌리네 지형이다. 작게는 수십m에서 최대 100여m나 되는 웅덩이들이 아홉개나 돼 이 지역을 아홉구미로 부른다. 웅덩이엔 전나무숲도 있고, 밭도 있고, 무덤도 있다.
지구렁이는 40년 전까지도 동해·삼척 주민들이 댓재를 넘어와 지구렁이재를 거쳐 정선을 가고 오던 길목이었다. 지구렁이에서 태어나 살아온 장순근(59)씨가 말했다.
“옛날에는 이 길이 아주 큰 통로래요. 삼척장으는 소금 사러 많이 갔더랬어요. 새벽에 떠나므는 밤 열두시가 돼서야 집에 돌아왔댔어요.” 동해·삼척 사람들은 산에서 삼을 재배해 소에 싣고 넘어다녔다고 한다. 60년대까지 오가는 이들로 주막집이 메워지며 20집이 넘게 살았다는 이 마을엔 지금 5가구만 남아 배추·곰취를 재배하며 산다.
조탄 쪽에서 넘어오는 길이 급경사여서 한겨울 주민들 통행이 어렵자, 광동호 물길 옆으로 길을 다시 냈다. 주민들은 하장까지 이 길을 통해 오간다.
지구렁이 마을 앞에 우뚝 솟은 찌걱산(지각산)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이름도 희한하지요. 찌걱산이라. 찌걱산은 암산이고 물 건너에서 지따맣게 암산을 파고든 고갯등이 숫산이라.”(장순근씨)
솟은 모양이 뿔을 닮아 지각산이라지만, 주민들이 부르는 찌걱산이 더 의미심장하다. 까마득한 절벽을 이룬 산꼭대기에서 내려다 보면(또 지도를 보면) 무슨 얘긴지 알 수 있다. 골지천 물길이 댓재 쪽에서 흘러온 번천과 만나기 전, 찌걱산 쪽으로 180도 몸을 튼 뒤 다시 숙암리 쪽으로 180도 급회전해 돌아나가는데, 이 모양이 움푹 팬 찌걱산 안으로 길쭉한 반도(고갯등)가 깊숙이 파고든 모습을 만든다.
푹 꺼진 지구렁이 곁엔 '바람나는 산'찌걱산 움푹
조탄리 주민 신오춘(78) 할머니가 말했다. “새 길이 뚫리기 전에 숙암리로 가려면 찌걱산 쪽으로 걸어다녔어요. 근데 젊건 늙건 남자·여자가 여길 함께 걸어갔다 하면 반드시 그냥 가지 않은 기라. 꼭 바람이 나는 기라. 거기 제집바우(계집바위)에 돌 하나 얹어놓고 가도 마을에서 틀림없이 누군가 바람이 났어요.”
조탄리와 하장을 잇는 새 길이 뚫리면서 숫산인 길쭉한 고갯등 한가운데가 잘렸다. 그 뒤론 주변 마을에서 바람나는 일이 사라졌다고 한다.
찌걱산엔, 꼭 바람 날 걱정 때문이 아니더라도 오르지 않는 게 좋다. 전화 송수신용 철탑까지 시멘트 찻길이 나 있지만, 정상 부근은 까마득한 절벽이고 산길이 험하다. 오르는 길에 수직동굴도 흩어져 있어 위험하다. 정상 주변에 우거진 나무로 전망도 좋지 않다.
태백=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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