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보다 산 더 잘 알고 꽃보다 꽃 더 잘 안다 길에서 만난 사람

칠순의 오지산행가 김부래씨
40년간 강원도 뒤져 이름 붙인 산·골짜기 20여 곳
걸어다니는 백과사전 “1주일에 2일 쉬고 5일 논다”

 
“일주일 중에 딱 이틀만 쉬고, 닷새는 반드시 놀지요.”
69살의 ‘청년 산악인’인 김부래씨. 그는 태백시 대덕산·금대봉 생태·경관보전지역 환경감시단의 생태 모니터 요원이자, 숲 해설가다. 다달이 생태를 조사해 보고서를 작성하고, 주말 이틀은 탐방객을 안내해 ‘야생화의 보물창고’인 대덕산·금대봉 일대에서 숲 해설을 한다.
 

산악인 동·식물학자들이 단골로 찾아
 
img_01.jpg금대봉 자락 남한강 발원지 검룡소 안내소에서 그를 만났다. 비쩍 마른 체격에 꽁지머리를 하고 콧수염을 길렀다. 말랐지만 매우 건강하고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거느렸다. 그는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어하는 ‘산 할아버지’다. 그가 새벽마다 홀로 산에 올라 걷고 또 걸으며 생태를 관찰하는 것, 주말 탐방객을 맞아 나무와 꽃을 이야기해 주는 것, 저녁마다 사람들을 만나 술을 마시며 세상 이야기를 나누는 것, 이 모두가 그에겐 쉬고 또 노는 것에 속하는 일이다.
 
김부래란 이름은, 웬만한 산악인이나 식물학자들에겐 널리 알려진 이름이다. 김부래란 이름 앞엔 오지 산행 전문가,  야생화 전문가, 옛길 전문가란 타이틀이 따라다닌다.
 
40여년간 강원도의 높고 낮은 산과 골짜기, 오지마을들을 샅샅이 뒤지고 돌아다닌 인물이다. 특히 월간지 <사람과 산> 태백주재 기자로 20년간 일하며 강원도 땅이라면 모르는 구석이 없을 정도로 오지를 파헤치고 다녔다. 길도 없고 이름도 없는 산골짜기를 뒤지며, 토박이 주민들을 만나 지명을 듣고 옛 지도와 서적을 참고해 이름을 붙인(되찾은) 산과 골짜기 지명만 스무 곳이 넘는다.
 
이런 그의 산 탐방 이력이 알려지면서, 산악인이나 식물학자, 동물학자들이 길 안내를 요청하기 시작했고, 길 안내를 할수록 그의 환경 생태에 대한 지식도 덩달아 늘어났다.
 “학자들은 저마다 전문 분야가 있어요. 쑥이면 쑥, 미나리면 미나리, 각 분야에 대한 고도의 지식을 가진 분들이지요. 나는 구석구석 길 안내를 하고 그 분들로부터 지식을 흡수하게 됐어요.”

그가 태백시 주변 산을 둘러보며 말했다. “저 산봉우리, 골짜기 하나하나 발 안 딛은 곳이 없어요.” 하도 산을 오르다 보니, 산을 타는 방식도 다양하게 바꿨다고 한다. 산과 산을 잇는 새 길을 찾아 수시로 뒤지고, 태백시와 이웃 시·군 경계를 따라 걷는 산행만 세 번이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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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기록종 보고하면 언론 나온 뒤 반드시 도둑맞아”

 
주변에 보이는 나무나, 꽃들은 척 보면 거의 다 안다. 나무 이름 꽃 이름이 나오면, 그 생태와 특징들에 대한 설명이 줄줄이 흘러나온다.
  “야생화 공부요? 나는 도감을 들고 다녀본 적이 없어요. 잊어버리더라도 자꾸 반복해 관찰하고 들여다보는 게 중요하죠. 처음엔 나도 열 개 들으면 얼마 안가 여덟 개는 까먹었어요. 그러나 그렇게 지나가도 되풀이해 공부하고 기억하다 보니 알게 됩디다.”
 
야생화 하나를 제대로 알려면 각 분야를 두루 알아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 꽃에 깃들어 사는 나비, 곤충들을 알아야 하고 그 곤충을 먹고 사는 새들도 알아야 하며, 그 새들이 깃들어 사는 숲을 알아야 만물이 공생하는 자연의 이치를 알게 되고, 그렇게 해야  꽃의 생태와 가치를 훨씬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중부지역에서 눈에 띄는 식물은 거의 다 알지만, 간혹 모르는 식물이 나타나곤 한다. 그러면 도감을 찾아보고 인터넷을 뒤져 알아보는데, 이 과정에서 미기록종을 찾아내기도 한다고 말했다.
 
“미기록종을 보고하면 언론에 소개되는데, 그 뒤엔 반드시 그 식물을 도둑맞습니다. 욕심 많은 이들이 거론된 지역을 샅샅이 뒤져 파가는 거예요. 그래서 미기록종이 나와도 되도록이면 알리지 않으려 합니다.”
 
야생화 트레킹이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요즘, 그는 야생화 도적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며 걱정했다. 그는 도적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고 했다. 전문 남획꾼들이 물론 큰 문제이지만, 야생화를 처음 알게 된 평범한 산행객들의 소유욕과 초보 사진가들의 마구잡이 촬영의 폐해가 더 크다는 것이다.
 
“디카가 확산되면서 떼지어 야생화 사진을 찍으러 오는 이들이 부쩍 늘었어요. 이 사람들 중 하나가 ‘여기 이 꽃 멋있다’며 찍으면, 나머지 10여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주변 야생화를 다 밟아 쑥밭으로 만드는 거예요.”
 
야생화 탐방자들에게 그는 숲의 처지에서, 꽃과 나무의 처지에서 길을 보고 산을 봐야 한다고 주문했다.
 

성우에서 밴드하다 기자까지 “바람처럼 구름처럼”
 
img_03.jpg온갖 직업을 전전해 온 그의 젊은 시절 이야기가 흥미롭다. “칠십 평생을 바람처럼 살고, 또 구름처럼 살았어요. 나처럼 산 사람 정말 드물거요.”

그는 파란만장하기보다는 화려하고 자유분방한 젊은 시절을 보냈다. 평창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다닌 뒤 춘천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고등학교 때는 기타를 잘 쳤다. 처음 한국방송 강릉라디오방송의 성우로 활약했고, 우연히 방송국 밴드단에 대타 기타리스트로 ‘땜빵’으로 나선 것을 기회로, 성우 일을 접고 업소 밴드의 일원으로 활약하게 된다. 자연스레 악단이 필요한 업소를 돌며 일하게 되고 카바레와 요정의 악단 일원이 됐다.
 
태백에 정착하게 된 것도 “강원도의 제3호 카바레인 황지카바렌가?”에서 일하게 되면서다. 1968년 당시 황지는 광산 개발로 “개도 오백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악단 일을 하면서 산에도 다니고, 합기도도 배우고, 완구점도매상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는 공인 5단의 합기도 사범이기도 하다. 그는 악단 일에 대해 “도로또 이런 건 안 하고 재즈 공연을 주로 했다”고 말했다. 악단 일을 완전히 접은 것은 50살 나던 해, 산악 월간지 <사람과 산>이 창간되면서다. 창간호부터 태백주재 산악기자로 일하기 시작해 오지 산행을 전문으로 다루는 기자로 활약했다.
 
 
배낭 뒤 달린 나무명찰에 ‘부착(富着) 김부래’
 
그는 요즘도 거의 매일 아침부터 산행에 나선다. 산에 가면 세상만사 모두 다 잊어버리고 산 자체에 푹 빠질 수 있어 편해진다고 한다.
 “한 세 시간 자고 새벽마다 산엘 가지요. 돌아와선 다시 도시락 싸들고 또 산으로 갑니다. 신선이 된 기분이죠. 다녀와선 나머지 시간엔 책을 읽어요. 술을 마시거나.”
 
그는 환갑 넘은 아내(기노훈·61)의 남편이자, 1남2녀의 아버지이면서, 두 손자·손녀의 할아버지다. 가정을 꾸리면서 어떻게 혼자 산을 떠도는 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까. “아내나 아이들 고생도 많았죠. 그래도 늘 이렇게 살아오다 보니 다 익숙해 집디다.”
 
언제나 두 개의 스틱과 나침반, 2만5천분의 1 지도가 접혀 들어 있는, 김부래 할아버지의 배낭 뒤엔 나무 명찰이 하나 매달려 있다. ‘부착(富着) 김부래’. 부가 따로 있어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부를 입고 또 붙이고 다니는 김부래’란 뜻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태백/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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