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은 ‘태백산맥’ 읽고, 입은 졸깃한 꼬막 ‘오물’ 길따라 삶따라
2010.03.11 17:34 너브내 Edit
전남 보성군 벌교 도심걷기
‘시체 질펀했던’ 소화다리, 현부잣집 무대가 여기
꺼칠한 격동기 흔적 뒤로 ‘졸깃졸깃’ 꼬막 맛볼까

벌교. 예로부터 화순·고흥·순천 교통 요지로, 육해산물 집산지였다. 육로·해로가 통하는 이곳을 일제가 수탈 기지로 삼은 것은 당연한 일. 사람 모이고 물자 몰리면서 돈 흔하고 주먹 거셌던 곳이 벌교다. 일제강점기에서 한국전쟁에 이르는 격랑의 시기에 첨예한 이념대립과 갈등이 펼쳐지던 곳이다.
숨어 있던 근현대사의 이면을 파헤친 조정래씨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주무대다. 홍교와 꼬막의 고장 벌교는 <태백산맥> 이후 국내 문학기행 1번지로 떠올랐다. 태백산맥의 무게에 눌리고 그늘에 가려 벌교의 문화유적들이 오히려 제빛을 잃어버린 느낌마저 든다. 골목골목에 격동기를 거친 옛 흔적들이 소설 속 인물들과 뒤섞여 꺼칠하게 남아 있는 전남 보성군 벌교읍으로 간다. 읍사무소에서 시작해 벌교천을 넘나들며 일식 가옥들과 한옥 고택들을 만나고, 홍교를 거쳐 다시 읍사무소로 돌아온다.
근대음악 선구자 채동선의 생가도 볼만

먼저 읍사무소 1층 채동선 기념관으로 들어간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로 시작하는 정지용의 시 <향수>에 곡을 붙인 이가 채동선(1901~1953)이다. 벌교 출신의, 근대음악의 선구자로 불린다. <고향>(정지용 시, 또는 박화목 시 <망향>, 또는 이은상 시 <그리워>) 등 우리 귀에 친숙한 곡들과, <조국> <한강> <삼일절 노래> 등 민족혼을 일깨우는 곡들이 그의 작품이다. 기념관에서 그의 사진들과 악보, 유품들을 만날 수 있다. 읍사무소 뒤엔 최근 지은 채동선 음악당이 있다.
도로 정비 공사가 진행중인 산 옆길을 따라 읍내 중심가 쪽으로 걷는다. 산 밑으로는 최근까지 낡은 집들이 빼곡하게 이어져 있있다. 지난해 철거한 뒤 현재 ‘정비사업’ 중이다. 정비를 위한 철거작업은 거리 곳곳에서 이뤄지고 있다. 보존함직한 일부 옛날식 집들과 골목들도 ‘정비’되고 있다. 골목 구석에 간혹 남아 있는 일본식 가옥들이 눈에 띈다. 삼거리에서 오래된 붉은 벽돌집(옛 금융조합 건물·등록문화재)을 만난다. 금융조합에서 농협 사무실 거쳐 지금은 농민상담소로 쓰이는 일제강점기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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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호박을 쪼께 재배헐랍디여. 판로 문제가 어쩔랑가.” “시험재배 해봉께로, 옛날보다는 좋아졌습디다요잉. 지금서는 계약재배 많이 해갖고 별문제 없어라.” 상담이 한창인 사무소 안 한쪽 벽으로 강점기 금고로 쓰였던 별실의 육중한 철문이 어색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번화가(본정통)의 들머리가 되는 지점이다. 일제강점기엔 주변에 우체국(현 케이티 건물)·경찰서(현 여관·빵집) 등이 몰려 있었다. 포목점과 여관, 요정도 즐비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벌교의 위상을 드러내는 흔적들이다. 벌교읍내에서 가장 오래됐다는 허름한 세계사진관과 1959년 지어진 벌교제일교회 건물을 보고, 52년째 대를 이어 문짝 등을 만든다는 삼화목공소 지나, 채동선의 부친이 100년 전 개교한 벌교초등학교로 간다. 삼화목공소 옆 건물도 크레파스미용실 2층도 일본식 가옥 흔적이 뚜렷하다.
‘나무 한나한나를 삶아서 지은’ 보성여관

학교에 얽힌 주민들의 기억. “어린 시절 홍수가 나면 운동장에 물이 가득 들어차 미꾸라지가 득실댔다.”(주민 이정희씨·58) “여순사건 때 학교 운동장에 주민을 남녀별로 모아놓고 손을 만져봐서 배운 사람 못 배운 사람을 가려냈다.”(박금옥씨·84)
벌교초교 정문 옆엔 2층짜리 일본식 가옥인 옛 보성여관(등록문화재)이 남아 있다. 1935년에 “나무 한나한나를 전부 삶아서 지었다”는 목조 여관이다. 소설에 경찰토벌대원들의 숙소인 남도여관으로 등장했다. 최근까지 점포로 사용돼 오다 문화재청이 사들인 뒤 현재 복원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그렁게 요것이 우리 외할아부지가 순천~벌교간 철도공사 노가다를 해서 번 돈으로 지은 것이요.” 창업자의 외손자 신영철(62)씨는 “지서장도 세무서장도 부임하면 다 보성여관에 여장을 풀었다”고 덧붙였다. 올해 말까지 해체보수공사를 마친 뒤 전시관·숙박시설을 갖춘 예술인들의 창작·문화공간으로 활용될 예정이다.

옛 술도가 자리(보성여관 앞 식당·책방 일대) 지나 ‘솥부리간’ 터로 간다. 식당과 노래방이 들어선 자리로, 40여년 전까지 이곳에 무쇠솥과 쟁기를 만드는 주물공장이 있었다고 한다. 주물공장에서 매일 수십명분의 밥을 해댔다는 박금옥씨가 말했다. “남편이 일본 징용 끌려갔다 돌아와갖고 요기서 주물 기술자로 일했어라. 쇳물이 튀어 손에 박혀불면 몇달을 낫덜 안해부러. 손이고 팔이고 시커매갖고 안 데인 사람이 없었어라.”
벌교 첫 공중목욕탕이었다는 벌교목욕탕(옛 백제목욕탕)과 이름난 요정이었던 대영관 자리를 지나 벌교역 쪽으로 간다. 어깨띠를 두른 일행이 악수공세를 펴며 골목을 누비는 모습에서 다가온 선거철이 실감난다. 벌교역 앞 관광안내소에서 벌교 주변 관광지 약도를 얻을 수 있다.
‘시끌벅적‘ 5일장, 도로변까지 장마당 벌어져
제2부용교로 가는 도로변엔 평일인데도 길 좌우로 장터가 형성돼 있다. 끝물이 되어가는 꼬막·새조개들과, 달래·냉이 등 봄내음 물씬한 나물 좌판들이 줄을 잇는다. 장날(4, 9일)이면 역 앞에서부터 제2부용교까지, 그리고 정미소가 있던 골목을 지나 제1부용교(소화다리) 주변까지 온통 시끌벅적한 장마당으로 변한다고 한다. 삶아 밑반찬으로 주로 먹는 새꼬막(똥꼬막) 1㎏ 5000원, 제사상에도 오르는 고급 참꼬막은 9000~1만원, 양념장을 뿌려 회로 먹는 큼직한 피꼬막은 1만5000원.
제2부용교 건너며 내려다보니 갈대밭 사이로 거품을 앞세운 밀물이 벌교천 상류로 치닫고 있다. 30~40년 전까지 이곳까지 꼬막을 실은 배들이 들어왔다고 한다. 다리 건너 오른쪽 철다리 걸린 하류 쪽으로 일제강점기에 주민을 동원해 쌓은 중도방죽(나카시마 방죽)이 이어진다. 주민들은 2부용교가 놓이기 전까지, 위험을 감수하며 철다리를 걸어 건너다녔다. 벌교제일고(옛 벌교상고) 지나 제석산 발치로 오르면 도열한 아름드리 벚나무들 사이로 태백산맥문학관과 박씨 제각이 모습을 드러낸다.
박씨 제각은 <태백산맥> 첫머리에 현부잣집으로 묘사되는, 한·일 주택양식이 혼재된 가옥이다. 소설에서처럼 탁 트인 전망을 자랑하는 명당인데, 감흥은 새로 지은 건물에서보다는, 기슭을 향해 치달아오른 흙돌담과 비탈에 들어앉은 연못에서 우러나온다. 연못 한가운데엔 흙을 북돋워 섬처럼 꾸몄는데, 옛날 여기에 토끼를 놓아길렀다고 한다. 안채와 담 사이의 큼직한 동백나무는 벌써 발치에 붉은 꽃송이들을 두껍게 깔고 탐방객들의 셔터 공세를 받고 있다.
태백산맥문학관엔 소설을 구상하고 쓰고 탄압받고 협박받고 출간되기까지 6년간의 집필과정, 취재노트, 육필원고, 언론 보도 내용, 조정래씨가 사용하던 물품 등이 전시돼 있다.

1939년 지은 석조예배당 회정리교회(현 대광어린이집)를 보고, 벌교천 ‘소화다리’(제1부용교)로 간다. 1931년(소화6년)에 본디 난간도 없이 놓은 다리였다. 피비린내 나는 이념갈등, 주민들의 고통이 깊이 새겨진 다리다.
소설에 나오는 “소화다리 아래 갯물에고 갯바닥에고 시체가 질펀허니 널렸는디, 아이고메 인자 징혀서 더 못 보겄구만이라” 대목이 아니더라도, 벌교의 나이드신 어르신 누구에게 물어봐도 비슷한 말이 쏟아져 나온다. “일렬로 세워놓고 총을 쏴 물로 떨어뜨렸다. 시체들과 핏물이 밀물·썰물을 따라 흘렀다. 읍사무소 주변과 소화다리 밑엔 늘 시체가 쌓여 있다시피 했다.”
‘막걸리 한말씩 부어주는’ 포교당 향나무
옛 활터인 낡은 관덕정(5년 전에 역 뒤쪽으로 이전) 건물을 멀리서 보고 봉림리 임봉열 가옥(옛 김병욱 가옥)으로 간다. 웅장한 담벽이 돋보인다. 낡았지만 정갈한 정취가 배어나오는 이 고택은 소설에서 ‘김범우의 집’으로 묘사된다. 안채 옆 뜰에 와르르 꽃망울을 터뜨린 홍매·백매 향기가 은은하다.
보물 304호 홍교를 바라보며 봉림교를 건넌다. 벌교성당 지나 골목으로 드니 홍교리 경로당 옆 골목에 낡은 한옥이 앉아 있다. “요것이 이승만 때 국회의원 지낸 김아무개 집인디, 요즘서 담 새로 쌓고 고치고 합디다요잉.”(주민 강대평씨·78)
골목을 돌아나와 홍교와, 물난리로 다리가 끊겼을 때 중수하며 세운 단교중수비 등 6개의 크고작은 빗돌 무리를 만난다. 일부는 마모돼 새긴 글씨들이 떨어져나간 모습이다. 홍교는 다리 밑으로 내려가 올려다보는 모습이 아름답다. 옛 돌은 별로 남아 있지 않으나, 세 개의 무지개형 다리 밑에 설치한 용머리가 남아 있다.
송광사 벌교포교당엔 아름드리 향나무가 있어 들를 만하다. “매년 봄 향나무에 막걸리 한말씩을 부어준다”는 주지 보리 스님은 “이 포교당이 일제강점기에 야학활동이 이뤄졌던 장소”라고 설명했다. 담 안에 흰 매화 화사하게 핀 채동선 생가를 보고 나니 하루해가 저물었다. 걷기를 마치고, 씹는 맛도 씹히는 맛도 졸깃졸깃하다는 벌교 꼬막을 맛보러 식당으로 향했다. 약 6㎞를 걸었다.
벌교/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시체 질펀했던’ 소화다리, 현부잣집 무대가 여기
꺼칠한 격동기 흔적 뒤로 ‘졸깃졸깃’ 꼬막 맛볼까

벌교. 예로부터 화순·고흥·순천 교통 요지로, 육해산물 집산지였다. 육로·해로가 통하는 이곳을 일제가 수탈 기지로 삼은 것은 당연한 일. 사람 모이고 물자 몰리면서 돈 흔하고 주먹 거셌던 곳이 벌교다. 일제강점기에서 한국전쟁에 이르는 격랑의 시기에 첨예한 이념대립과 갈등이 펼쳐지던 곳이다.
숨어 있던 근현대사의 이면을 파헤친 조정래씨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주무대다. 홍교와 꼬막의 고장 벌교는 <태백산맥> 이후 국내 문학기행 1번지로 떠올랐다. 태백산맥의 무게에 눌리고 그늘에 가려 벌교의 문화유적들이 오히려 제빛을 잃어버린 느낌마저 든다. 골목골목에 격동기를 거친 옛 흔적들이 소설 속 인물들과 뒤섞여 꺼칠하게 남아 있는 전남 보성군 벌교읍으로 간다. 읍사무소에서 시작해 벌교천을 넘나들며 일식 가옥들과 한옥 고택들을 만나고, 홍교를 거쳐 다시 읍사무소로 돌아온다.
근대음악 선구자 채동선의 생가도 볼만

먼저 읍사무소 1층 채동선 기념관으로 들어간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로 시작하는 정지용의 시 <향수>에 곡을 붙인 이가 채동선(1901~1953)이다. 벌교 출신의, 근대음악의 선구자로 불린다. <고향>(정지용 시, 또는 박화목 시 <망향>, 또는 이은상 시 <그리워>) 등 우리 귀에 친숙한 곡들과, <조국> <한강> <삼일절 노래> 등 민족혼을 일깨우는 곡들이 그의 작품이다. 기념관에서 그의 사진들과 악보, 유품들을 만날 수 있다. 읍사무소 뒤엔 최근 지은 채동선 음악당이 있다.
도로 정비 공사가 진행중인 산 옆길을 따라 읍내 중심가 쪽으로 걷는다. 산 밑으로는 최근까지 낡은 집들이 빼곡하게 이어져 있있다. 지난해 철거한 뒤 현재 ‘정비사업’ 중이다. 정비를 위한 철거작업은 거리 곳곳에서 이뤄지고 있다. 보존함직한 일부 옛날식 집들과 골목들도 ‘정비’되고 있다. 골목 구석에 간혹 남아 있는 일본식 가옥들이 눈에 띈다. 삼거리에서 오래된 붉은 벽돌집(옛 금융조합 건물·등록문화재)을 만난다. 금융조합에서 농협 사무실 거쳐 지금은 농민상담소로 쓰이는 일제강점기 건물이다.

“단호박을 쪼께 재배헐랍디여. 판로 문제가 어쩔랑가.” “시험재배 해봉께로, 옛날보다는 좋아졌습디다요잉. 지금서는 계약재배 많이 해갖고 별문제 없어라.” 상담이 한창인 사무소 안 한쪽 벽으로 강점기 금고로 쓰였던 별실의 육중한 철문이 어색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번화가(본정통)의 들머리가 되는 지점이다. 일제강점기엔 주변에 우체국(현 케이티 건물)·경찰서(현 여관·빵집) 등이 몰려 있었다. 포목점과 여관, 요정도 즐비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벌교의 위상을 드러내는 흔적들이다. 벌교읍내에서 가장 오래됐다는 허름한 세계사진관과 1959년 지어진 벌교제일교회 건물을 보고, 52년째 대를 이어 문짝 등을 만든다는 삼화목공소 지나, 채동선의 부친이 100년 전 개교한 벌교초등학교로 간다. 삼화목공소 옆 건물도 크레파스미용실 2층도 일본식 가옥 흔적이 뚜렷하다.
‘나무 한나한나를 삶아서 지은’ 보성여관

학교에 얽힌 주민들의 기억. “어린 시절 홍수가 나면 운동장에 물이 가득 들어차 미꾸라지가 득실댔다.”(주민 이정희씨·58) “여순사건 때 학교 운동장에 주민을 남녀별로 모아놓고 손을 만져봐서 배운 사람 못 배운 사람을 가려냈다.”(박금옥씨·84)
벌교초교 정문 옆엔 2층짜리 일본식 가옥인 옛 보성여관(등록문화재)이 남아 있다. 1935년에 “나무 한나한나를 전부 삶아서 지었다”는 목조 여관이다. 소설에 경찰토벌대원들의 숙소인 남도여관으로 등장했다. 최근까지 점포로 사용돼 오다 문화재청이 사들인 뒤 현재 복원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그렁게 요것이 우리 외할아부지가 순천~벌교간 철도공사 노가다를 해서 번 돈으로 지은 것이요.” 창업자의 외손자 신영철(62)씨는 “지서장도 세무서장도 부임하면 다 보성여관에 여장을 풀었다”고 덧붙였다. 올해 말까지 해체보수공사를 마친 뒤 전시관·숙박시설을 갖춘 예술인들의 창작·문화공간으로 활용될 예정이다.

옛 술도가 자리(보성여관 앞 식당·책방 일대) 지나 ‘솥부리간’ 터로 간다. 식당과 노래방이 들어선 자리로, 40여년 전까지 이곳에 무쇠솥과 쟁기를 만드는 주물공장이 있었다고 한다. 주물공장에서 매일 수십명분의 밥을 해댔다는 박금옥씨가 말했다. “남편이 일본 징용 끌려갔다 돌아와갖고 요기서 주물 기술자로 일했어라. 쇳물이 튀어 손에 박혀불면 몇달을 낫덜 안해부러. 손이고 팔이고 시커매갖고 안 데인 사람이 없었어라.”
벌교 첫 공중목욕탕이었다는 벌교목욕탕(옛 백제목욕탕)과 이름난 요정이었던 대영관 자리를 지나 벌교역 쪽으로 간다. 어깨띠를 두른 일행이 악수공세를 펴며 골목을 누비는 모습에서 다가온 선거철이 실감난다. 벌교역 앞 관광안내소에서 벌교 주변 관광지 약도를 얻을 수 있다.
‘시끌벅적‘ 5일장, 도로변까지 장마당 벌어져

제2부용교 건너며 내려다보니 갈대밭 사이로 거품을 앞세운 밀물이 벌교천 상류로 치닫고 있다. 30~40년 전까지 이곳까지 꼬막을 실은 배들이 들어왔다고 한다. 다리 건너 오른쪽 철다리 걸린 하류 쪽으로 일제강점기에 주민을 동원해 쌓은 중도방죽(나카시마 방죽)이 이어진다. 주민들은 2부용교가 놓이기 전까지, 위험을 감수하며 철다리를 걸어 건너다녔다. 벌교제일고(옛 벌교상고) 지나 제석산 발치로 오르면 도열한 아름드리 벚나무들 사이로 태백산맥문학관과 박씨 제각이 모습을 드러낸다.
박씨 제각은 <태백산맥> 첫머리에 현부잣집으로 묘사되는, 한·일 주택양식이 혼재된 가옥이다. 소설에서처럼 탁 트인 전망을 자랑하는 명당인데, 감흥은 새로 지은 건물에서보다는, 기슭을 향해 치달아오른 흙돌담과 비탈에 들어앉은 연못에서 우러나온다. 연못 한가운데엔 흙을 북돋워 섬처럼 꾸몄는데, 옛날 여기에 토끼를 놓아길렀다고 한다. 안채와 담 사이의 큼직한 동백나무는 벌써 발치에 붉은 꽃송이들을 두껍게 깔고 탐방객들의 셔터 공세를 받고 있다.
태백산맥문학관엔 소설을 구상하고 쓰고 탄압받고 협박받고 출간되기까지 6년간의 집필과정, 취재노트, 육필원고, 언론 보도 내용, 조정래씨가 사용하던 물품 등이 전시돼 있다.

1939년 지은 석조예배당 회정리교회(현 대광어린이집)를 보고, 벌교천 ‘소화다리’(제1부용교)로 간다. 1931년(소화6년)에 본디 난간도 없이 놓은 다리였다. 피비린내 나는 이념갈등, 주민들의 고통이 깊이 새겨진 다리다.
소설에 나오는 “소화다리 아래 갯물에고 갯바닥에고 시체가 질펀허니 널렸는디, 아이고메 인자 징혀서 더 못 보겄구만이라” 대목이 아니더라도, 벌교의 나이드신 어르신 누구에게 물어봐도 비슷한 말이 쏟아져 나온다. “일렬로 세워놓고 총을 쏴 물로 떨어뜨렸다. 시체들과 핏물이 밀물·썰물을 따라 흘렀다. 읍사무소 주변과 소화다리 밑엔 늘 시체가 쌓여 있다시피 했다.”
‘막걸리 한말씩 부어주는’ 포교당 향나무

보물 304호 홍교를 바라보며 봉림교를 건넌다. 벌교성당 지나 골목으로 드니 홍교리 경로당 옆 골목에 낡은 한옥이 앉아 있다. “요것이 이승만 때 국회의원 지낸 김아무개 집인디, 요즘서 담 새로 쌓고 고치고 합디다요잉.”(주민 강대평씨·78)
골목을 돌아나와 홍교와, 물난리로 다리가 끊겼을 때 중수하며 세운 단교중수비 등 6개의 크고작은 빗돌 무리를 만난다. 일부는 마모돼 새긴 글씨들이 떨어져나간 모습이다. 홍교는 다리 밑으로 내려가 올려다보는 모습이 아름답다. 옛 돌은 별로 남아 있지 않으나, 세 개의 무지개형 다리 밑에 설치한 용머리가 남아 있다.
송광사 벌교포교당엔 아름드리 향나무가 있어 들를 만하다. “매년 봄 향나무에 막걸리 한말씩을 부어준다”는 주지 보리 스님은 “이 포교당이 일제강점기에 야학활동이 이뤄졌던 장소”라고 설명했다. 담 안에 흰 매화 화사하게 핀 채동선 생가를 보고 나니 하루해가 저물었다. 걷기를 마치고, 씹는 맛도 씹히는 맛도 졸깃졸깃하다는 벌교 꼬막을 맛보러 식당으로 향했다. 약 6㎞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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