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혹독한 시대상황 사진으로 증언 박물관 기행

목포근대역사관
‘역사교육 장’ 옛 동척 건물에 150여 점 전시
애처롭고 통탄스럽고 치떨리는 ‘그때’ 생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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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포근대역사관(옛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위치ㅣ 전남 목포시 중앙동 2가 6번지.
 주요전시물ㅣ 일제 침략 만행 사진, 조선왕조 마지막 모습 사진, 일제강점기 목포 거리·사진·풍경 사진들.
 개관시간ㅣ 09시~18시.
 휴관일ㅣ 1월1일, 매주 월요일(월요일이 공휴일이면 다음날 휴관).
 관람료ㅣ 무료.
 전화번호ㅣ (061)270-8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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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엔 실물만 전시되는 게 아니다. 모조품도 있고 인형도 있고 그림·도표도 있고 사진도 있다. 옛 모습을 담은 사진 몇 장이 관람객들에게 커다란 감동을 안겨주기도 한다. 한일강제합병 100년, 안중근 선생 서거 100년이 되는 올해, 일제강점기의 혹독한 시대상황을 사진으로 만나보는 것도 좋겠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활보 흔적이 구석구석 남아 있는 전남 목포, 중앙로의 한 대리석 건물로 간다.
 
피 빨아먹던 동척, 9 곳 중 부산·목포 2 곳 남아 ‘역사교육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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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척(東拓).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에 대해 잠깐 공부해 보자. 일본이 우리나라의 토지와 농산물 등 경제수탈을 위해 세운 국책회사이자 착취기관이다. 척식(拓殖)이란 ‘식민지 개척’을 말한다. 일본의 동양척식주식회사,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모두 남의 나라 토지와 자본을 수탈하고 경영하고 장악하기 위해 만든 식민회사다. 일본은 1908년 서울(경성)에 동척 본점을 세우고, 부산·목포·이리·대전·대구·원산·평양·사리원 등 전국 주요 농업지역과 교통 요충지에 지점을 설치했다.
 
1917년엔 본점을 도쿄로 옮기고 중국과 내몽고, 동남아 각국에도 지점을 두어 착취 범위를 넓혔다. 토지와 농산물 수탈, 소작료 착취의 전초기지였다. 1926년 나석주(1892~1926) 의사가 조선식산은행과 동척 본점을 폭파시키기 위해 폭탄을 투척한 데는 이런 배경이 깔려 있다. 폭탄 불발로 나 의사는 왜경과 교전을 벌이다 “2천만 민중아, 쉬지말고 분투하라”고 외치며 자결한다. 당시 동척 본점 자리인, 을지로 2가 현 외환은행 본점 화단에 ‘나석주 의사 의거 기념터’ 표석과 동상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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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아홉 곳의 동척 본·지점 중 부산과 목포 지점 건물이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일재 잔재이니 헐어내야 한다는 주장과, 수탈의 상징물을 그대로 보전해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서오다 최근 시·도기념물(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두 곳 모두 근대역사관으로 쓰이고 있다.
 
옛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 지점 건물은, 영산포에 있던 동척 지점이 목포로 옮겨오면서 1920년께 건축한 르네상스식 2층 건물이다. 건물 외벽과 내벽 곳곳에 일본을 상징하는 해·벚꽃 따위 무늬들이 새겨진 단단한 대리석 건물이다. 광복 뒤 3~4년간 해군부대가 주둔했고 그 뒤 1989년까지는 해군 헌병대가 사용했다. 10년간 빈 건물로 방치되다 1999년 철거작업이 시작되자 시민들이 보존운동을 펼친 끝에 같은해 문화재로 지정됐다.
 
1흑3백 노리고 집단 이주…조선인들은 유달산 기슭으로 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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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모습이 거의 고스란히 남은 이 일제강점기 건물 안에, 희귀한 옛 사진들이 즐비하게 걸려 있어 눈을 부릅뜨게 만든다. 목포 거리의 옛 풍경은 애처롭고, 조선왕조의 마지막 모습은 통탄스러우며, 일본인들이 저지른 인간말종의 참혹한 행태들은 차마 눈 뜨고 바라보기 어렵다. 1층에 목포 옛 모습 사진 73점, 2층에 조선왕조 최후 모습과 일제 침략사 관련 사진 83점이 있다. 1층 별실엔 일제 만행 사진 9점이 따로 전시돼 있다.
 
건물로 들어서면 왼쪽에 관리사무실 문이 보이고 한계단 올라서서 오른쪽으로 이어진 통로를 따라 벽면에 걸린 사진들을 둘러보게 된다. 사진들에 대한 제목과 간단한 설명이 붙어 있으나 대개 상세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사무실 문을 두드려 해설을 신청하면 사진들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1층엔 ‘사진으로 본 목포의 옛 모습’ 사진들이 전시돼 있다. 1897년 목포 개항에서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의 목포항 전경과 유달산 주변의 주택가 모습, 일인들이 활보하는 거리 모습 사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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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동양척식회사를 세운 뒤 우리 백성들의 토지를 수탈해, 일본에서 이주시킨 일본 인들에게 나눠주고 농사짓게 했다. 목포에 척식회사 지점을 둔 것은, 쌀·면화, 소금·김 등 농산물·해산물이 풍부한 지역인데다 물자운송에 요긴한 요충 항구였기 때문이다. 전시관 해설사 김문심(52)씨가 말했다. “목포엔 1흑3백이 안있습니까. 1흑은 김이죠 잉. 3백은 쌀과 면화, 소금이고요. 그래서 무역업도 발달했죠 잉. 요걸 노리고 일본의 가난한 농부들을 1천여명 목포로 이주시킨 것입니다.” 이주해 온 일인들에겐 농토와 함께 의식주는 물론, 당시 유흥거리였던 ‘나카마치 시장’에서 향응을 제공했다고 한다. 김씨는 “그러나 척식회사가 토지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고, 곡식을 거둬가기만 하자 이주해온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팽배했었다”고 설명했다.
 
유달산도 삼학도도 송도도 숲 우거진 아름다운 모습이다. 유달산 주변 사진을 보면, 당시 대로를 따라 큼직큼직하게 지어진 일본인 주택가 모습이 뚜렷한데, 도심에서 밀려난 조선인들의 집들은 유달산 기슭 산동네에 다닥다닥 붙어 있다. 산비탈 초가집들 주변에도, 온금동 째보선창 주변에도 목화밭이 펼쳐진 모습으로 보아 면화 재배가 대규모로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은 목포에 면화주식회사를 세우고 재배한 면화를 가공해 쌀 등 다른 농수산물과 함께 제나라로 가져갔다. “쌀의 경우 목포에서 생산된 전체의 70%를 일본으로 실어갔다”고 한다.
 
지금은 사라진 십팔은행·조선식상은행·조선은행 등 금융기관 지점들과 백화점·극장 건물 사진에서 금융·무역업으로 번성했던 목포의 일면을 만날 수 있다. “조선은행 건물은 지하실이 엄청 넓어 육이오때 유명인사들의 피난처로 사용됐습니다. 온갖 귀중품들과 돈을 싸들고 모여들었다고 해요.” 이 조선은행 목포지점 건물은 10년전 헐렸는데, 벽돌 등 건물 자재들을 서울의 한 인사가 1억원을 들여 사서 운반해갔다고 한다.
 
조선과 대한제국 종말이 슬라이드처럼 차례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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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산 사진에선 일등바위 밑에 일인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위해 새긴 부동명왕상과 홍법대사상이 뚜렷하다. 일본인들은 유달산 주면에 88개의 불상을 설치하고 순례하며 절을 올렸다고 한다. 1920년대 목포상업회의소에서 발행한 ‘목포항 추세’ 도표를 통해 당시 무역수지·선박출입추세, 미곡과 면화 이출추세도 볼 수 있다. 당시 목포역 열차시간표와 일본어로 된 노래 ‘목포항 선전가’도 붙어 있다.
 
1층에서 눈길을 끄는 곳이 계단 옆의 대형 금고다. 육중한 철문이 달린 방인데, 광복 뒤엔 해군 헌병대의 유치장으로도 사용됐다고 한다. 이곳엔 ‘조선육지면발상지’ 빗돌과 목화 채취 모습, 조면공장 작업 모습 등 사진들을 전시했다. 빗돌은 목포 고하도에서 1904년 육지면을 처음 재배하기 시작한 것을 기념해 세운 것이다. 조면공장 노동자들은 모두 조선인들이었는데, 13살 난 어린이들도 공장에서 일을 했다고 한다.
 
김 해설사가 말했다. “이 사진들을 둘러보던 할머니 한 분이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우시는 거에요. 왜 그러시냐고 물으니, ‘내가 소학교 3학년 때부터 저 공장에서 일했다’고 하시더군요. 공장 모습, 분위기, 일하는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거에요.” 할머니께선 “저 기계 속으로, 같이 일하던 동료 손이 딸려들어갔는데도 기계를 멈추지 않고 그냥 돌렸다”면서 울먹였다고 김 해설사는 전했다.
 
게다짝 끄는 소리가 들려올 듯한 우중충한 나무계단을 올라 2층 전시실로 간다. 슬픈 조선과 대한제국의 종말이 기다린다. 대가 끊긴 대한제국 황실 가계도를 지나면 흥선대원군이 기다리고, 덕수궁에 유폐된 고종 황제가 기다리고, 일본 군복을 입은 순종 황제가 기다린다. 승하(일제의 독살 추정)하기 전날 인정전으로 나서는 고종 황제, 고종 인산일에 상복을 입고 허탈감에 빠진 순종 황제, 땅에 업드려 통곡하는 흰옷 입은 백성들이 다가온다. 일본 태자를 맞이하기 위해 대한문을 나서는 순종 황제도, 방문한 일본 태자 행렬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전차 선로를 반대편으로 옮긴 가운데 또렷이 서 있는 숭례문도, 백두산에 올라 천지 앞에서 일본 시조신에게 기도하는 일본인들도, 일본 태자와 이토 히로부미 사이에 앉은 마지막 왕족 영친왕도, 어린 왕세자(이구) 손을 잡고 걷는 이방자 여사도 차례로 지나간다.
 
눈 뜨고 못 볼 잔혹한 사진들, 따로 원하는 사람들에게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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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락 폭탄을 던진 뒤 체포돼 피투성이가 되어 왜경에 끌려가는 윤봉길 의사,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는 한복 차림의 여성들, 만세를 외치는 군중 앞의 말을 탄 왜경이 나타난 다음 일제의 잔혹한 고문, 처형, 생체실험, 강제로 끌려간 군대위안부들 모습이 이어진다. 관동대지진 때 일본인들에 의해 학살된, 재일 조선인들의 산더미처럼 쌓인 주검들과 밧줄에 묶인 채 총살되는 항일의병·독립군들의 모습 앞에서 관람객들은 충격과 고통과 안타까움의 신음을 내며 물러날 뿐이다. 사진들은 동남아 각국으로 확대된 일제 침략 야욕이 담긴 장면들을 지나 일본왕의 항복, 미군 앞에서의 항복문서 조인, 광복의 기쁨 가득 담은 태극기 행렬로 2층의 흑백사진 행렬은 마무리된다.
 
이 전시관의 1층 별실에는 다시 보기 싫을 만큼 참혹한 사진 아홉 점이 따로 전시돼 있다. 김 해설사는 “일본군이 각국에서 저지른 만행 사진인데, 너무 잔인해 따로 모았다”면서 “특별히 관람을 원하는 분들께만 보여준다”고 말했다. 사진들은 어린 위안부 살륙 장면, 위안부 겁탈 장면, 포로 처형 장면, 칼로 목을 치는 순간 등을 담은 사진 들이다. 잘린 머리를 들고 웃는 일본 군인, 목을 치는 장면을 둘러서서 구경하는 일본 군인들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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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근대역사관엔 일본인 관광객들도 많이 찾아온다. 한달이면 50~60명이 들른다고 한다. 과거 이곳에 살던 일본인들이나 그 후손, 옛 거리 모습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옛 일본인들의 생활 흔적이 남은 거리를 둘러보며 감동에 젖는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한국 강제합병이나 일본인들이 저지른 만행 등에 대해선 외면하고, 말도 안하고 대답도 안합니다. 모를 수도 있지만, 대개 관심이 없어하거나 없는 척하지요.” 김 해설사는 “근대역사관에 오는 일본인들은 대부분 사진을 보러 오는 것이 아니라, 옛 일본인 거리와 동양척식회사 건물을 보러 오는 이들”이라며 “2층의 만행 사진을 보곤 충격에 빠진 표정을 짓지만 이내 외면하고 돌아서는 이들이 많다”고 말했다.
 
만행 사진 처음엔 항의하다 침략의 현장 수긍하기도
 
3.jpg그러나 모든 일본인들이 다 그런 건 아니다. 김 해설사는 “옛 목포 일본인 거리 사진들을 보고 감동스러워하는 한 50대 일본인 남자를 1층 별실로 안내해 일본군의 만행 사진을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그는 그 사진들 일부만 본 채 돌아나와 왜 이 사진을 보여주느냐며 항의를 했어요. 그래서 사무실로 안내해 차를 대접하며 차근차근 이야기를 했지요. ‘과거 일본군인들이 저지른 일이다. 이곳은 일본에 침략받은 한국의 근대 사진들을 전시한 역사전시관이다. 그래서 그 사진들도 보여줬다’고 했더니, 어느 정도 수긍하더라고요.”
 
그 일본인은 얼마 뒤 편지를 보내왔다. 당시 너무 놀랐던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빨리 한국어를 배워 교류하며 더 알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김씨는 “오는 3월 그 일본인이 친구들과 다시 이곳을 방문할 계획이라는 연락을 받았다”며 “다시 만나면 반가이 맞아주고 친절하게 목포 거리를 안내해줄 생각”이라고 말했다.
 
목포근대역사관은 전시된 사진외에도 다수의 일제강점기 전후 사진들을 소장하고 있다. 목포시는 목포근대역사관과 가까운 곳에 있는 옛 일본영사관을 수리해 올해 안에 제1근대역사관으로 꾸미고, 척식회사 건물은 제2근대역사관으로 꾸며 개관할 계획이다.
 
사진에 대한 설명이 구체적이지 않고 지나치게 간단하거나 모호하게 붙인 것은 아쉬운 점이다. 어느 시기, 어떤 모습을 촬영한 것인지 명시하지 않은 사진들이 많다. 미확인 상태라더라도 가능한 한 상세한 설명을 달아주고, 영·일·중국어 번역문 정도는 기본으로 곁들여야 하지 않을까.
 
근대역사관에 전시된 목포의 옛 사진들은 사단법인 백년회 김환(75) 이사장을 통해, 조선왕조 및 일제침략 관련 사진들은 정성길(79·사진연구가) 동산의료원 선교박물관 명예관장을 통해 입수한 것들이다.
 
목포/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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