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흥~ ‘툭’ 튀어나올 듯한 호랑이 만나러 가봅세 길따라 삶따라
2010.02.19 11:13 너브내 Edit
호랑이 관련 전설·민담 유독 많아
두려운 맹수를 ‘수호신’으로 묘사

“호랑이가 얼굴을 찌푸리고 구역질을 하며, 코를 감싸 쥐고 머리를 한쪽으로 돌리면서 말하길 ‘(배웠다는 놈이) 더럽구나. … 내 앞에 가까이 오지 마라. … 너희가 밤낮으로 싸다니며 팔 걷어붙이고 눈 부릅뜨고, 노략질하며 부끄러운 줄 모르고, 심한 놈은 금전을 형님으로 모신다. … 그 잔인하고 박한 행실이 너희보다 심한 것이 무엇이 있더냐.”(박지원 <호질>)
인용한 글은 백수의 제왕 호랑이가, 점잖은 척 더러운 짓을 일삼는 도덕군자(유학자)를 향해 던지는 준엄한 꾸짖음(호질·虎叱)이다.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가정맹어호). ‘호시탐탐’ 남의 재물을 노리고, 권력에 빌붙어 ‘호가호위’하는,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이들이 넘치면 백성들은 밤낮으로 이런 속담을 되뇌게 된다. 가혹한 정치가 춤추는 나라엔 백수들도 넘쳐난다. 백수의 왕은 호랑이다. 올해는 호랑이해 중에서도 60년 만에 돌아온다는 백호랑이해다. 눈에 화등잔만한 불을 켜고 백수의 왕이 나라를 지켜볼 게 틀림없다.
284개 마을 이름에 호랑이가
우리나라는 호랑이의 나라다. 방방곡곡 호랑이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우리 민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물이다. 호랑이 얘기 안 듣고 자란 사람 없고, 호랑이 꿈 한번 안 꾼 사람 드물다. 선사시대인들의 생활 흔적인 울주 반구대 암각화에 호랑이가 등장한 이래, 숱한 신화·전설·속담·격언과 지명, 상징물, 사람 이름에 이르기까지, 나고 살고 죽는 인생사 이곳저곳에 호랑이 얘기 한자락 걸치지 않은 데가 없을 정도다.
우리에게 호랑이는 양면성을 가진 존재다. 산의 주인인 산신령이요, 악을 응징하는 구원의 신이며, 친근한 이웃이고, 한없이 어리석은 바보이기도 하다. 한편으론 치명적인 야수이자, 부모를 해친 원수이면서, 포획하면 돈방석에 앉을 수 있는 사냥감이기도 했다. ‘호랑이 잡고 볼기 맞는다’는 속담은 신앙 대상으로서의 호랑이와 사냥감으로서의 호랑이, 두 속성을 함께 드러낸다.
호랑이가 등장하는 우리나라 전설·민담은 600여종을 웃돈다. 육당 최남선은 우리나라를 ‘호랑이 이야기의 나라’(호담국·虎談國)에 비유했다. 호랑이에게 주목한 최남선은 일제의 야욕이 극으로 치닫던 1908년 창간한 잡지 <소년>에 호랑이를 등장시켰다. 일본의 지리학자 고토가 한반도를 토끼에 비유한 데 반해, 대륙을 향해 앞발을 들고 일어서 포효하는 호랑이 모습으로 한반도를 그렸다.
땅 모습뿐 아니라 우리나라 구석구석엔 호랑이 상징물이 깔려 있다. 마을 이름, 지형지물 등에서 호랑이와 관련된 지명이 349곳(전체 지명의 0.4%)에 이른다.(국토지리정보원 자료) 지명 중엔 마을 이름이 가장 많아 284개를 차지한다. 호랑이 꼬리의 뜻을 담은 포항 호미곶, 호랑이가 엎드린 형상을 한 안성 금광면 복거리(복호리), 호랑이가 나타나 효자를 도왔다는 전설이 전하는 거제도 호곡마을, 영천의 효지미마을 등이 대표적이다. 영월 주천면 신일리의 의호총처럼, 효자를 도와주고 죽은 호랑이를 장사 지낸 호랑이 무덤도 여러 곳에 있다. 나쁜 호랑이든 착한 호랑이든 호랑이들은 한반도 전역에서 우리 민족과 진하게 어우러져 대대로 살아온 셈이다.
무속인들은 산신령과 동급으로 여기기도
호환으로 한 마을이 풍비박산 난 곳이 있는가 하면, 아버지가 호랑이에게 잡아먹히자 호랑이를 추격해 때려잡은 뒤 뱃속에서 살과 뼈를 수습해 장사 지낸 효자도 있다. 용맹함의 상징으로 그리고 악귀를 쫓는 힘을 가진 신성한 동물로 여겨, 그림 그리고 수놓고, 심지어 글로 써서 붙이기도 했다. 하늘에 기우제를 지낼 때도 강력한 힘을 가진 호랑이를 잡아 그 머리를 제단에 바쳤다고 한다. 무관의 관복 흉배에 그려넣어 용맹성을 강조했고, 대문에 호랑이 그림을 내걸어 잡귀를 쫓는 부적으로도 썼다. 무속인들은 산신령과 동급(또는 대리인)으로 여겨 호랑이를 모시기도 한다. 무섭기만 한 호랑이지만, 민담이나 민화 등에선 대부분 착하거나 어리석고 익살스런 모습으로 그려진다. 두려운 존재인 맹수를 일상생활 속에 녹여넣어 마을과 가족을 지켜주는 든든한 수호신으로 여기고 친숙한 동물로 묘사한다.
화등잔만한 불을 켜고, 밤길 가는 나그네의 심장을 오그라들게 하던 호랑이도, 효자를 등에 태우고 강물을 헤엄치던 호랑이도 이제는 우리나라에서 자취를 감췄다. 남한 땅에 야생 호랑이는 없다는 게 정설이다. 예나 지금이나 호랑이나 그 발자국을 봤다는 허다한 목격담은 진행형이다. 끊이지 않는 목격담에도 불구하고, 1920년대 이후 남한에선 호랑이가 발견됐다는 구체적 기록(포획 기록, 사진 촬영 등)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호랑이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우리는 여전히 호랑이와 함께 살고 있다. 88년 서울올림픽 마스코트로 아기 호랑이 호돌이를 내걸었다. 60년 만에 백호랑이해를 맞아 호랑이 마케팅 바람이 뜨거운 것도, 우리 곁에 호랑이가 살아숨쉬고 있다는 걸 드러낸다. 고고함, 용맹스러움의 상징동물 호랑이의 해. 우리 모두 새해를 맞아 두루 깨끗하고 용감하고 믿음직스러운, 멋지게 도약하는 한국 호랑이들이 되길 기원해 보자.
호랑이 나라이니, 방방곡곡에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를 간직한 마을들이 널려 있다. 호랑이를 만나러 떠나는 여행을 준비해볼 만하다. 살아 있는 호랑이도 만나보고 호랑이 흔적, 호랑이와 관련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보고 들을 수 있는 곳들을 소개한다. 호랑이 마을 여행 다녀오신 뒤엔, 한번쯤 호랑이 꿈 꾸고 대박도 맞으시길. ^^
글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사진 한겨레자료사진·조선민화박물관
에비, 호랑이가 물어갈라
백호랑이 해 추천 여행지 3제
경인년 호랑이해. 호랑이를 만나려면 호랑이 마을로 들어가야 한다. 호랑이와 호랑이 이야기를 좀더 가까이서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곳, 호랑이 마을 여행을 떠나보자. 차를 타고 이동하며 호랑이와 직접 대면할 수 있는 ‘호랑이 사파리’가 있고, 호랑이 사연을 간직한 마을엔 볼거리, 이야깃거리가 수두룩하다.
⊙ 코앞에서 만나는 황호·백호ㅣ 에버랜드 호랑이 사파리

경인년 새해는 호랑이해 중에서도 백호랑이해. 국내엔 모두 14마리(에버랜드 13마리, 서울대공원 1마리)의 백호가 있다. 백호는 예로부터 우리나라뿐 아니라 각국에서 영물로 신성시돼 온 동물.
에버랜드가 호랑이해를 맞아 ‘백호 해맞이 백호 사파리’를 시작했다. 45인승 버스를 타고 호랑이가 사는 곳으로 들어가, 900m 거리를 이동하며 호랑이의 활동 모습과 습성 등 생태를 관찰할 수 있다. 10마리의 백호와 황색 줄무늬의 벵골 호랑이 10마리, 한국호랑이 2마리 등 모두 22마리의 호랑이가 관람객을 기다린다. 먼저 황호랑이 구역을 둘러보고 백호랑이 구역으로 이동하며 가까운 거리에서 호랑이들의 다양한 모습을 보게 된다. 운 좋으면 입을 한껏 벌리고 우렁차게 포효하는 모습도 지켜볼 수 있다.
투명 강화유리로 무장한 9대의 버스 중 3대는 백호를 테마로 흰색으로 디자인한 ‘백호 스페셜 버스’. 직원들도 흰 모자·장갑을 착용하고 백호랑이 사파리를 돕는다. 버스엔 안내자가 탑승해 백호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파리를 이끄는 선두 지프차에선 사육사가, 호랑이가 좋아하는 닭고기 등을 던져줘 호랑이들의 식사 장면도 관찰할 수 있다.
백호라 해서 완전한 흰색은 아니고, 흰색 바탕에 초콜릿색 줄무늬를 지녔다. 체격은 황색 호랑이보다 크다. 평균 15㎏ 정도 몸무게가 더 나가고, 신장도 10㎝가량 크다. 코는 분홍색, 눈은 푸른색이어서 신비감을 더한다.
에버랜드 정상조 사육사는 “백호는 보기와 달리 황호에 비해 온순하고 덜 공격적인 호랑이”라며 “웬만하면 선제공격을 하지 않는 방어 위주의 활동을 하는 평화적인 행동 양태를 보인다”고 설명했다. 2005년 에버랜드에서 태어난 백호에게 ‘평화’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도 이런 특성을 반영했다. 사파리 버스 운행 오전 10시30분~오후 6시. 1회 운행에 20여분 소요. 에버랜드 자유이용권(어른 3만5000원·어린이 2만6000원)으로 둘러볼 수 있다. (031)320-5000.
⊙ 골목마다 호랑이 ‘득실’ㅣ 안성 복거마을

안성군 금광면 신양복리 복거마을은 120가구 300여명의 주민이 사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이다. 지난해까지는 더더욱 조용하고 한적한 마을이었다. 지난해 1월 ‘아름다운 미술마을 만들기 사업’이 벌어지며 마을엔 외지인들의 발길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담벽과 지붕, 골목들이 온통 호랑이 그림, 호랑이 조형물로 장식되면서 ‘호랑이 마을’로 유명세를 타게 됐기 때문이다.
“옛날에 호랑이가 많이 살아서 호랑이 마을이냐고요? 그렇진 않아요. 옛 어르신 말씀을 들어봐도 다른 곳에 비해 특별히 호랑이가 자주 출몰했던 건 아니에요.”(장갑수 복거마을 이장)
마을이 호랑이 그림으로 장식된 건 마을 이름에서 비롯했다. 복거마을은 본디 복호마을(복호동)이다. 뒷산(산복골) 모습이 호랑이가 엎드려, 앞에 있는 작은 산(개숲재)를 향해 앞발을 내뻗고 있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경로회관에선 어르신들의 고스톱 판이 한창이다. 이구동성 마을 자랑도 한참 이어진다. “뭐 그림 그리구 호랑이 마을 되니까, 구경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몰려옵디다. 동네가 발전하는 거지. 보기도 좋고.” 옆에 앉아 도라지를 다듬던 호랑이띠 어르신 정순애(84)씨가 말했다. “난 호래이 못 봤구, 얘기만 들었어. 저 경찰서 뒤 먹뱅이에 산제사 지내는 데가 있는데, 정월 초사흗날 제사를 지내구, 죄 인저 내려오구 나면, 엄청 큰 호랭이가 불을 껌벅껌벅하면서 내려왔대요. 산제사 음식 잡숫느라구.” 진천장에서 소를 사 몰고 넘어오던 옥정리 고개에서도 자주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한다.
호랑이는 이제 마을로 내려와 슬레이트 지붕이나 경로회관 옥상에서 골목을 내려다보거나, 흙벽담에 들어앉아 토끼가 곰방대에 붙여주는 담배를 피우고 있거나, 쇠붙이 호랑이가 되어 길가에 앉아 사람살이를 지켜본다. 방문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호랑이는 조성래(74)씨의 허름한 한옥 벽에 민화를 본떠 그린 ‘담배 피우는 호랑이’다.
마을 안 400년 된 거대한 느티나무 아래 서면 바람 스치는 가지마다,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들이 새록새록 움터 나오는 듯하다. 복거마을 장갑수 이장 011-749-3879. 안성 두리마을 운영위원회 (031)671-3022.
⊙ 착한 호랑이는 무덤을 남긴다ㅣ 영월 신일리 의호총

호랑이가 얼마나 우리 민족과 친숙한 존재인가는 곳곳에 남아 있는 호랑이 무덤을 봐도 알 수 있다. 어느 한 부위 버릴 것 없이 약으로 쓰인다는 동물이 호랑이다. 그 주검을 묻고 봉분을 만들고 비석까지 세워준 것은 호랑이 숭배사상과 교훈적 민담이 결합한 결과다.
대표적인 호랑이 무덤이 한우마을 ‘다하누촌’으로 유명한, 영월군 주천면 신일리 금산 자락에 남아 있다. 커다란 봉분 앞에 1743년 세워진 비석에 내력이 적혀 있다. 전국에 걸쳐 나타나는 효자와 호랑이 이야기가 담겨 있다. 주천 금산 밑에 금 처사(본명 금사하)라는 효성이 지극한 선비가 호랑이의 도움으로 불어난 강물을 무사히 건너, 약을 구해다 어머니의 병을 낫게 했다고 한다. 그뒤 1720년 숙종 임금이 승하하자, 그는 베옷을 입고 망산에 올라 3년상을 지냈는데, 이때도 그 호랑이가 나타나 함께 밤을 지새웠다. 3년상을 마치고 사흘 뒤 호랑이가 금 처사 집 마당에 와서 죽었는데, 처사는 호랑이를 끌어안고 통곡하며 금산 자락에 묻어 주었다. 그리고 23년 뒤 강원도 관찰사를 보필하는 순영중군(정3품)이 주천에 왔다가, 이 이야기를 듣고는 비석을 세워 기록하게 했다. 나라에서 이 소식을 듣고 금 처사에게 사방 10리의 땅을 내리고, 매년 호랑이 무덤에 제사 지내게 했다는 이야기다.

높이 약 1m의 비석 앞면엔 의호총(義虎塚) 글씨가 또렷하고, 뒷면엔 비석을 세우게 된 내력이 적혀 있다. 호랑이 무덤 앞에 세운 옛 비석이 남아 있는 것은 드물다고 한다. 의호총 옆엔 최근 호랑이상과 금 처사상을 세우고, 초막도 지어놓았다.
호랑이 무덤만 보러 가기엔 다소 심심한 여행길. 주천면 주변엔 선암마을 한반도 지형, 5대 적멸보궁 중 한곳인 법흥사, 요선정과 요선암 등 짭짤한 볼거리들이 많다. 주천면 주민들은 최근 의호총과 고려시대 삼층석탑, 술샘(주천), 옛 선정비 무리, 망산의 철종임금 태실 터, 망산 정상의 누각 빙허루, 옛날 단종임금 묘소 참배길에 건너다닌 섶다리를 재현한 쌍섶다리, 19세기 한옥인 김종길 가옥 등 볼거리들을 잇는 트레킹 코스를 만들어 탐방객들을 맞고 있다. 다하누촌 고깃집에서 한우고기를 즐긴 뒤 탐방길에 나서볼 만하다.
한편 경기 고양시 동쪽 북한산 자락 제청말에도 효자(박태성)와 인왕산 호랑이 이야기가 전하는 무덤이 있다. 무덤 옆에 2m 크기의 호랑이상을 세웠다. 주천면 트레킹코스 탐방 안내 주천리 박상준씨(011-9409-2677).
안성·영월/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호랑이 부적 찍으세요
멀리 떠나지 않아도 즐길수 있는 호랑이해의 멋과 재미들
민화는 전문 화가들이 아닌, 민간에서 성행했던 서민의 그림을 말한다. 작자가 드러나지 않은 그림으로, 서툴고 완성도가 떨어지지만, 풍습과 서민의 정서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고 평가된다. 민화에 등장하는 주요 동물 중 하나가 호랑이다. 잡귀를 물리치는 호랑이와 복을 불러들이는 까치, 절개를 상징하는 소나무를 함께 그린 ‘까치와 호랑이’(작호도)가 대표적이다. 호랑이 민화를 만날 수 있는 곳과 행사를 소개한다.
⊙ ‘호랑이 부적 찍기’ 체험 l 서울 종로구 가회동 가회민화박물관. 호작도·화조도·문자도 등 민화 20~30점을 상설전시한다. 호랑이 발톱과 수염도 소장하고 있다. 호랑이해를 맞아 호랑이 부적 찍기 체험을 마련했다. 가정평안부적·호신부적·삼재부적 등을 찍어 가져갈 수 있다. 체험료 3000원. 입장료 어른 3000원, 어린이 2000원. (02)741-0466.
⊙ ‘전통예술과 호랑이’ 강연 l 서울 종로구 신문로 아산정책연구원 강당. 25일(목) 오전 10시30분. 경인년 신년 특강으로 윤열수 가회민화박물관장이 ‘한국 전통예술에 나타난 호랑이’를 주제로 강연한다. (02)735-5878.
⊙ 부천 ‘복된 호랑이 기운’전 l 부천 전통민화전승연구회(회장 이문성)는 18~23일 전철 부천역사 지하 부천문예전시관에서 회원들이 그린 ‘까치와 호랑이’ 등 민화 35점을 선보이는 ‘복된 호랑이 기운’전을 연다. 무료. 010-3319-7197.
⊙ 조선 명품 민화 특별전 l 강원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 조선민화박물관(관장 오석환). 5월중 미공개 호랑이 민화 30여점 등 명품 민화들을 선보이는 ‘조선 명품민화 특별전’을 열 계획이다. 조선민화박물관은 호랑이 민화 200점을 비롯한 3800여점의 소장 민화 중 150여점(호랑이 민화 10여점 포함)을 상설전시하고 있다. 조선~일제강점기에 제작된 춘화 수십점과 고가구도 상설전시한다. 관람료 어른 3000원, 어린이 1500원. (033)375-6100.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두려운 맹수를 ‘수호신’으로 묘사

“호랑이가 얼굴을 찌푸리고 구역질을 하며, 코를 감싸 쥐고 머리를 한쪽으로 돌리면서 말하길 ‘(배웠다는 놈이) 더럽구나. … 내 앞에 가까이 오지 마라. … 너희가 밤낮으로 싸다니며 팔 걷어붙이고 눈 부릅뜨고, 노략질하며 부끄러운 줄 모르고, 심한 놈은 금전을 형님으로 모신다. … 그 잔인하고 박한 행실이 너희보다 심한 것이 무엇이 있더냐.”(박지원 <호질>)
인용한 글은 백수의 제왕 호랑이가, 점잖은 척 더러운 짓을 일삼는 도덕군자(유학자)를 향해 던지는 준엄한 꾸짖음(호질·虎叱)이다.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가정맹어호). ‘호시탐탐’ 남의 재물을 노리고, 권력에 빌붙어 ‘호가호위’하는,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이들이 넘치면 백성들은 밤낮으로 이런 속담을 되뇌게 된다. 가혹한 정치가 춤추는 나라엔 백수들도 넘쳐난다. 백수의 왕은 호랑이다. 올해는 호랑이해 중에서도 60년 만에 돌아온다는 백호랑이해다. 눈에 화등잔만한 불을 켜고 백수의 왕이 나라를 지켜볼 게 틀림없다.
284개 마을 이름에 호랑이가
우리나라는 호랑이의 나라다. 방방곡곡 호랑이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우리 민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물이다. 호랑이 얘기 안 듣고 자란 사람 없고, 호랑이 꿈 한번 안 꾼 사람 드물다. 선사시대인들의 생활 흔적인 울주 반구대 암각화에 호랑이가 등장한 이래, 숱한 신화·전설·속담·격언과 지명, 상징물, 사람 이름에 이르기까지, 나고 살고 죽는 인생사 이곳저곳에 호랑이 얘기 한자락 걸치지 않은 데가 없을 정도다.
우리에게 호랑이는 양면성을 가진 존재다. 산의 주인인 산신령이요, 악을 응징하는 구원의 신이며, 친근한 이웃이고, 한없이 어리석은 바보이기도 하다. 한편으론 치명적인 야수이자, 부모를 해친 원수이면서, 포획하면 돈방석에 앉을 수 있는 사냥감이기도 했다. ‘호랑이 잡고 볼기 맞는다’는 속담은 신앙 대상으로서의 호랑이와 사냥감으로서의 호랑이, 두 속성을 함께 드러낸다.
호랑이가 등장하는 우리나라 전설·민담은 600여종을 웃돈다. 육당 최남선은 우리나라를 ‘호랑이 이야기의 나라’(호담국·虎談國)에 비유했다. 호랑이에게 주목한 최남선은 일제의 야욕이 극으로 치닫던 1908년 창간한 잡지 <소년>에 호랑이를 등장시켰다. 일본의 지리학자 고토가 한반도를 토끼에 비유한 데 반해, 대륙을 향해 앞발을 들고 일어서 포효하는 호랑이 모습으로 한반도를 그렸다.
땅 모습뿐 아니라 우리나라 구석구석엔 호랑이 상징물이 깔려 있다. 마을 이름, 지형지물 등에서 호랑이와 관련된 지명이 349곳(전체 지명의 0.4%)에 이른다.(국토지리정보원 자료) 지명 중엔 마을 이름이 가장 많아 284개를 차지한다. 호랑이 꼬리의 뜻을 담은 포항 호미곶, 호랑이가 엎드린 형상을 한 안성 금광면 복거리(복호리), 호랑이가 나타나 효자를 도왔다는 전설이 전하는 거제도 호곡마을, 영천의 효지미마을 등이 대표적이다. 영월 주천면 신일리의 의호총처럼, 효자를 도와주고 죽은 호랑이를 장사 지낸 호랑이 무덤도 여러 곳에 있다. 나쁜 호랑이든 착한 호랑이든 호랑이들은 한반도 전역에서 우리 민족과 진하게 어우러져 대대로 살아온 셈이다.
무속인들은 산신령과 동급으로 여기기도

화등잔만한 불을 켜고, 밤길 가는 나그네의 심장을 오그라들게 하던 호랑이도, 효자를 등에 태우고 강물을 헤엄치던 호랑이도 이제는 우리나라에서 자취를 감췄다. 남한 땅에 야생 호랑이는 없다는 게 정설이다. 예나 지금이나 호랑이나 그 발자국을 봤다는 허다한 목격담은 진행형이다. 끊이지 않는 목격담에도 불구하고, 1920년대 이후 남한에선 호랑이가 발견됐다는 구체적 기록(포획 기록, 사진 촬영 등)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호랑이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우리는 여전히 호랑이와 함께 살고 있다. 88년 서울올림픽 마스코트로 아기 호랑이 호돌이를 내걸었다. 60년 만에 백호랑이해를 맞아 호랑이 마케팅 바람이 뜨거운 것도, 우리 곁에 호랑이가 살아숨쉬고 있다는 걸 드러낸다. 고고함, 용맹스러움의 상징동물 호랑이의 해. 우리 모두 새해를 맞아 두루 깨끗하고 용감하고 믿음직스러운, 멋지게 도약하는 한국 호랑이들이 되길 기원해 보자.
호랑이 나라이니, 방방곡곡에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를 간직한 마을들이 널려 있다. 호랑이를 만나러 떠나는 여행을 준비해볼 만하다. 살아 있는 호랑이도 만나보고 호랑이 흔적, 호랑이와 관련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보고 들을 수 있는 곳들을 소개한다. 호랑이 마을 여행 다녀오신 뒤엔, 한번쯤 호랑이 꿈 꾸고 대박도 맞으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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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비, 호랑이가 물어갈라
백호랑이 해 추천 여행지 3제
경인년 호랑이해. 호랑이를 만나려면 호랑이 마을로 들어가야 한다. 호랑이와 호랑이 이야기를 좀더 가까이서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곳, 호랑이 마을 여행을 떠나보자. 차를 타고 이동하며 호랑이와 직접 대면할 수 있는 ‘호랑이 사파리’가 있고, 호랑이 사연을 간직한 마을엔 볼거리, 이야깃거리가 수두룩하다.
⊙ 코앞에서 만나는 황호·백호ㅣ 에버랜드 호랑이 사파리

경인년 새해는 호랑이해 중에서도 백호랑이해. 국내엔 모두 14마리(에버랜드 13마리, 서울대공원 1마리)의 백호가 있다. 백호는 예로부터 우리나라뿐 아니라 각국에서 영물로 신성시돼 온 동물.
에버랜드가 호랑이해를 맞아 ‘백호 해맞이 백호 사파리’를 시작했다. 45인승 버스를 타고 호랑이가 사는 곳으로 들어가, 900m 거리를 이동하며 호랑이의 활동 모습과 습성 등 생태를 관찰할 수 있다. 10마리의 백호와 황색 줄무늬의 벵골 호랑이 10마리, 한국호랑이 2마리 등 모두 22마리의 호랑이가 관람객을 기다린다. 먼저 황호랑이 구역을 둘러보고 백호랑이 구역으로 이동하며 가까운 거리에서 호랑이들의 다양한 모습을 보게 된다. 운 좋으면 입을 한껏 벌리고 우렁차게 포효하는 모습도 지켜볼 수 있다.
투명 강화유리로 무장한 9대의 버스 중 3대는 백호를 테마로 흰색으로 디자인한 ‘백호 스페셜 버스’. 직원들도 흰 모자·장갑을 착용하고 백호랑이 사파리를 돕는다. 버스엔 안내자가 탑승해 백호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파리를 이끄는 선두 지프차에선 사육사가, 호랑이가 좋아하는 닭고기 등을 던져줘 호랑이들의 식사 장면도 관찰할 수 있다.
백호라 해서 완전한 흰색은 아니고, 흰색 바탕에 초콜릿색 줄무늬를 지녔다. 체격은 황색 호랑이보다 크다. 평균 15㎏ 정도 몸무게가 더 나가고, 신장도 10㎝가량 크다. 코는 분홍색, 눈은 푸른색이어서 신비감을 더한다.
에버랜드 정상조 사육사는 “백호는 보기와 달리 황호에 비해 온순하고 덜 공격적인 호랑이”라며 “웬만하면 선제공격을 하지 않는 방어 위주의 활동을 하는 평화적인 행동 양태를 보인다”고 설명했다. 2005년 에버랜드에서 태어난 백호에게 ‘평화’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도 이런 특성을 반영했다. 사파리 버스 운행 오전 10시30분~오후 6시. 1회 운행에 20여분 소요. 에버랜드 자유이용권(어른 3만5000원·어린이 2만6000원)으로 둘러볼 수 있다. (031)320-5000.
⊙ 골목마다 호랑이 ‘득실’ㅣ 안성 복거마을

안성군 금광면 신양복리 복거마을은 120가구 300여명의 주민이 사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이다. 지난해까지는 더더욱 조용하고 한적한 마을이었다. 지난해 1월 ‘아름다운 미술마을 만들기 사업’이 벌어지며 마을엔 외지인들의 발길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담벽과 지붕, 골목들이 온통 호랑이 그림, 호랑이 조형물로 장식되면서 ‘호랑이 마을’로 유명세를 타게 됐기 때문이다.
“옛날에 호랑이가 많이 살아서 호랑이 마을이냐고요? 그렇진 않아요. 옛 어르신 말씀을 들어봐도 다른 곳에 비해 특별히 호랑이가 자주 출몰했던 건 아니에요.”(장갑수 복거마을 이장)
마을이 호랑이 그림으로 장식된 건 마을 이름에서 비롯했다. 복거마을은 본디 복호마을(복호동)이다. 뒷산(산복골) 모습이 호랑이가 엎드려, 앞에 있는 작은 산(개숲재)를 향해 앞발을 내뻗고 있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경로회관에선 어르신들의 고스톱 판이 한창이다. 이구동성 마을 자랑도 한참 이어진다. “뭐 그림 그리구 호랑이 마을 되니까, 구경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몰려옵디다. 동네가 발전하는 거지. 보기도 좋고.” 옆에 앉아 도라지를 다듬던 호랑이띠 어르신 정순애(84)씨가 말했다. “난 호래이 못 봤구, 얘기만 들었어. 저 경찰서 뒤 먹뱅이에 산제사 지내는 데가 있는데, 정월 초사흗날 제사를 지내구, 죄 인저 내려오구 나면, 엄청 큰 호랭이가 불을 껌벅껌벅하면서 내려왔대요. 산제사 음식 잡숫느라구.” 진천장에서 소를 사 몰고 넘어오던 옥정리 고개에서도 자주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한다.
호랑이는 이제 마을로 내려와 슬레이트 지붕이나 경로회관 옥상에서 골목을 내려다보거나, 흙벽담에 들어앉아 토끼가 곰방대에 붙여주는 담배를 피우고 있거나, 쇠붙이 호랑이가 되어 길가에 앉아 사람살이를 지켜본다. 방문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호랑이는 조성래(74)씨의 허름한 한옥 벽에 민화를 본떠 그린 ‘담배 피우는 호랑이’다.
마을 안 400년 된 거대한 느티나무 아래 서면 바람 스치는 가지마다,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들이 새록새록 움터 나오는 듯하다. 복거마을 장갑수 이장 011-749-3879. 안성 두리마을 운영위원회 (031)671-3022.
⊙ 착한 호랑이는 무덤을 남긴다ㅣ 영월 신일리 의호총

호랑이가 얼마나 우리 민족과 친숙한 존재인가는 곳곳에 남아 있는 호랑이 무덤을 봐도 알 수 있다. 어느 한 부위 버릴 것 없이 약으로 쓰인다는 동물이 호랑이다. 그 주검을 묻고 봉분을 만들고 비석까지 세워준 것은 호랑이 숭배사상과 교훈적 민담이 결합한 결과다.
대표적인 호랑이 무덤이 한우마을 ‘다하누촌’으로 유명한, 영월군 주천면 신일리 금산 자락에 남아 있다. 커다란 봉분 앞에 1743년 세워진 비석에 내력이 적혀 있다. 전국에 걸쳐 나타나는 효자와 호랑이 이야기가 담겨 있다. 주천 금산 밑에 금 처사(본명 금사하)라는 효성이 지극한 선비가 호랑이의 도움으로 불어난 강물을 무사히 건너, 약을 구해다 어머니의 병을 낫게 했다고 한다. 그뒤 1720년 숙종 임금이 승하하자, 그는 베옷을 입고 망산에 올라 3년상을 지냈는데, 이때도 그 호랑이가 나타나 함께 밤을 지새웠다. 3년상을 마치고 사흘 뒤 호랑이가 금 처사 집 마당에 와서 죽었는데, 처사는 호랑이를 끌어안고 통곡하며 금산 자락에 묻어 주었다. 그리고 23년 뒤 강원도 관찰사를 보필하는 순영중군(정3품)이 주천에 왔다가, 이 이야기를 듣고는 비석을 세워 기록하게 했다. 나라에서 이 소식을 듣고 금 처사에게 사방 10리의 땅을 내리고, 매년 호랑이 무덤에 제사 지내게 했다는 이야기다.

높이 약 1m의 비석 앞면엔 의호총(義虎塚) 글씨가 또렷하고, 뒷면엔 비석을 세우게 된 내력이 적혀 있다. 호랑이 무덤 앞에 세운 옛 비석이 남아 있는 것은 드물다고 한다. 의호총 옆엔 최근 호랑이상과 금 처사상을 세우고, 초막도 지어놓았다.
호랑이 무덤만 보러 가기엔 다소 심심한 여행길. 주천면 주변엔 선암마을 한반도 지형, 5대 적멸보궁 중 한곳인 법흥사, 요선정과 요선암 등 짭짤한 볼거리들이 많다. 주천면 주민들은 최근 의호총과 고려시대 삼층석탑, 술샘(주천), 옛 선정비 무리, 망산의 철종임금 태실 터, 망산 정상의 누각 빙허루, 옛날 단종임금 묘소 참배길에 건너다닌 섶다리를 재현한 쌍섶다리, 19세기 한옥인 김종길 가옥 등 볼거리들을 잇는 트레킹 코스를 만들어 탐방객들을 맞고 있다. 다하누촌 고깃집에서 한우고기를 즐긴 뒤 탐방길에 나서볼 만하다.
한편 경기 고양시 동쪽 북한산 자락 제청말에도 효자(박태성)와 인왕산 호랑이 이야기가 전하는 무덤이 있다. 무덤 옆에 2m 크기의 호랑이상을 세웠다. 주천면 트레킹코스 탐방 안내 주천리 박상준씨(011-9409-2677).
안성·영월/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호랑이 부적 찍으세요
멀리 떠나지 않아도 즐길수 있는 호랑이해의 멋과 재미들

⊙ ‘호랑이 부적 찍기’ 체험 l 서울 종로구 가회동 가회민화박물관. 호작도·화조도·문자도 등 민화 20~30점을 상설전시한다. 호랑이 발톱과 수염도 소장하고 있다. 호랑이해를 맞아 호랑이 부적 찍기 체험을 마련했다. 가정평안부적·호신부적·삼재부적 등을 찍어 가져갈 수 있다. 체험료 3000원. 입장료 어른 3000원, 어린이 2000원. (02)741-0466.
⊙ ‘전통예술과 호랑이’ 강연 l 서울 종로구 신문로 아산정책연구원 강당. 25일(목) 오전 10시30분. 경인년 신년 특강으로 윤열수 가회민화박물관장이 ‘한국 전통예술에 나타난 호랑이’를 주제로 강연한다. (02)735-5878.
⊙ 부천 ‘복된 호랑이 기운’전 l 부천 전통민화전승연구회(회장 이문성)는 18~23일 전철 부천역사 지하 부천문예전시관에서 회원들이 그린 ‘까치와 호랑이’ 등 민화 35점을 선보이는 ‘복된 호랑이 기운’전을 연다. 무료. 010-3319-7197.
⊙ 조선 명품 민화 특별전 l 강원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 조선민화박물관(관장 오석환). 5월중 미공개 호랑이 민화 30여점 등 명품 민화들을 선보이는 ‘조선 명품민화 특별전’을 열 계획이다. 조선민화박물관은 호랑이 민화 200점을 비롯한 3800여점의 소장 민화 중 150여점(호랑이 민화 10여점 포함)을 상설전시하고 있다. 조선~일제강점기에 제작된 춘화 수십점과 고가구도 상설전시한다. 관람료 어른 3000원, 어린이 1500원. (033)375-6100.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