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 꼬리’ 아래 승천 못한 용이 튼 ‘둥지’ 길따라 삶따라

포항 구룡포 걷기 여행
칼바람에 싸먹는 과메기 쌈, 과연 ‘황금어장’이로세
포경기지 명성 간데 없고 녹슨 작살포만 ‘덩그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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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영일만을 감싼 호랑이 꼬리 아래쪽에 구룡포가 있다. 한겨울 과메기로 이름난 고장이다. 언덕마다 골목마다 과메기 덕장이 즐비하다. 호미곶에서 해맞이하고, 호랑이 꼬리 해안선 따라 돌며 바닷바람 즐긴 관광객들이 오며가며 찬 소주에 과메기 쌈을 싼다. 지금 구룡포엔 대게·오징어도 지천이다. 먹을거리 못지않게 볼거리도 지천인데, 열에 아홉은 모르고 지나친다. 열 마리 용이 승천하다 아홉마리만 올라갔다 해서 구룡포다. 남은 한 마리 용처럼, 구룡포 거리는 포구를 감싸고 길게 굽이친다. 구룡포읍사무소에서 시작해 용두산 기슭을 돌아 조선소·구룡포시장과 일본인 가옥 거리 거쳐 사라끝 방파제까지 걷는다.
 
대게·오징어가 지천에…봄엔 ‘벚꽃터널’ 눈부셔
 
Untitled-2 copy.jpg읍사무소 앞마당에, 작살로 고래를 쏘아 잡던 ‘고래총’(작살포) 두 개가 전시돼 있다. 구룡포는 일제강점기부터 1986년 고래잡이가 금지되기까지 중요 포경기지 중 한곳이었다. 포경기지의 명성도 고래 개체수 감소와 함께 사라지고 녹슨 작살포 두 개로 남았다. 작살포 옆엔, 조선시대 장기목장으로 드는 관문이던, 구룡포 돌문의 일부를 옮겨놓은 바위도 있다.
 
용두산 쪽으로 길 건너 ‘바르게 살자’ 빗돌을 지나 병포삼거리로 걷는다. 구룡포 읍내 들머리가 되는 작곡재(작고재)로 오르다 병포삼거리 만나 벚나무길로 내려간다. 봄이면 눈부신 꽃터널을 이룬다는 길이다. 25년전 한 주민이 600그루의 왕벚나무를 심어 꽃길을 가꿨다고 한다. 이를 알리는 표석이 용주사 입구 어린이집 맞은편 소공원에 있다. 병포리(병리)는 본디 자래(자라)골이다. 마을에 자라를 닮은 바위가 있어 자라골인데, 한자로 표기하면서 잘못 해석해 자루 병(柄)자를 쓰는 병포리(柄浦里)가 됐다.
 
병포리 과메기 덕장 앞에서, 전날 시집에서 읽은, 구룡포의 한 주민이 쓴 시에 등장하는 ‘덕수씨’를 만났다.
 
‘과메기 덕장 경비 덕수씨는/짤막한 다리에 긴 허리/떡 벌어진 어깨를 가진/나만 보면 겅중겅중 뛰는 눈 검은 사내…언 땅에 뼈다귀 쏟아주면/달빛 가득한 눈으로/뼈다귀 보고 나 보고 뼈다귀 보고 나 보고…덕수씨 먹어 어여 먹어/그제야 뼈다귀 한 번 핥고 나 한 번 핥고/돼지 등뼈와 덕수씨와 내가/삼각형으로 이어지는 밤/덕장 위로 달이 뾰족하다’(권선희 시 ‘덕수씨’)
 
권선희(45)씨는 구룡포에 10년째 살며 구룡포 구석구석의 역사와 문화, 사람살이를 취재하고 기록하고 시로 다듬어 온 일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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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씨와 작별하고 용두산 자락 수산물 가공공장 즐비한 언덕길을 오른다. 길을 따라 시원한 바다 전망을 배경으로 오징어 덕장이 펼쳐진다. 매서운 바람 속에 오징어를 내거는 손길이 분주하다. 손길은 바빠도 덕장 분위기는 그리 밝지 않다. 한국해양특수구조단 앞에서 만난 한 덕장 주인은 “예년에 비해 오징어 물량이 뜸하다”며 한숨을 쉬었다. 피데기(반건조 오징어) 한 축 도매값 2만5천원.
 
나흘이면 배 한척 분해도 ‘뚝딱’
 
바람에 쓸리며 햇살 털어내기 바쁜 시누대숲 지나 언덕길을 내려간다. 짙푸른 바다를 안고 돌아가는 구룡포항이 일목요연하다. 내려서면 ‘뱃공장’, 조선소 자리다. 지난해 마지막 목선을 만든 뒤 지금은 배를 수리하는 장소로 쓰인다고 한다. 영덕에서 깨진 뱃머리를 수선하러 왔다는 배 주인이 무쇠난롯불을 쬐며 말했다.
 
“여 기술자들이 실력이 아주 좋심더. 딴덴 인력도 모지래고.” 배를 수리하는 실무는 외국인 노동자들 차지다.
 
새로운 배가 태어나던 조선소 옆에, 낡은 배가 생애를 마치는 폐선장이 있다. 거대한 배에서 뜯고 잘라낸 녹슨 살점들을 포클레인으로 끌어모아 옮겨 쌓는 작업이 한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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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배는 선령 20여년 된 79t짜리 철선이죠. 한 척 해체하는 데 나흘이면 끝납니다.”(고은종·42·고물처리업체) 배 크기와 모양만 보고도 “언제쯤 어디서 만들어진 배인지 알 수 있다”고 한다. 폐선장 옆 산밑엔 배의 안전을 기원하며 용왕신에 제를 올리는 자그마한 사당이 있다. 앞에 나뒹구는 막걸리통 몇개가 폐선장 분위기를 닮았다.
 
다시 언덕길로 올라 구룡포여중·고 입구 지나 구룡포 지역 마라톤 동호인 숙소인 ‘마징가 마라톤 쉼터’ 앞에서 오징어 트롤선 부두로 내려선다. 제빙·냉동공장과 생선 담는 나무상자 재생공장 지나 잡어 어판장 쪽으로 걷는다. 부두의 공중전화부스마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미소가 번진다. 고국의 집으로 통하는 유일 공간이다. 비바람 거센 날 특히 장사진을 이룬다고 한다.
 
‘땡’ 소리와 함께 뒤늦게 들어온 대게 경매가 시작됐다. 잡아온 대게를 바닥에 깐 뒤 종을 쳐서 경매가 준비됐음을 알린다. 마이크를 든 경매사와 남모르게 옷으로 가린 채 입찰가를 표시하는 구매자들의 바쁜 손길·눈길도 잠시, 몇초에 한 무더기씩 낙찰이 이뤄진다. 어판장 주변에서 박달대게 중급 1마리 4만~5만원, 속이 덜 찬 물게 작은것 1마리 4천~5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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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팥죽 찍어먹는 ‘호호’ 찐빵엔 유년 추억 ‘물씬’  

 
오전 햇살 가득한 2층 노을다방 쪽으로 큰길 건너, 58년째 복어탕을 끓인다는 함흥식당 지나 구룡포시장 골목으로 들어간다. 골목마다 과메기·오징어 세상이다. 가자미든 게든 뭐든 다 튀겨준다는 원조튀김·오뎅집 거쳐 40년째 한 자리서 소면·중면·우동 국수를 뽑아내고 있는 제일국수공장으로 간다.
 
국수다발을 한웅큼씩 집어 정리해 묶어내는 주인 이순화(72)씨의 손길이 날래다. 40년 전엔 이 골목에 국수공장이 아홉군데나 있었다고 한다. 제일 늦게 시작한 제일국수만 남았다. 30년째 간판도 없이 물국수만 만들어내는 할매국수집도, 40년 넘게 푸짐한 해물국수(일명 모리국수)를 팔아온 까꾸네 모리국수집도, 50년째 국수와 찐빵·단팥죽을 파는 철규분식도 다 제일국수공장 국수를 사다 쓴다. 중면 3~4인분 한 묶음에 2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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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국수집 지나 구룡포초등학교 앞 철규분식으로 간다. 맛있는 찐빵집으로 소문이 자자한데, 특히 갓쪄내온 빵을 뜨거운 단팥죽에 찍어먹는 맛이 아주 좋다. 안주인 박상연(67)씨가 친정 어머니에게서 솜씨를 물려받았다. 남편 천수생(69)씨가 말했다. “난 껍디기시더. 저 할매가 다 하지. 저 할매가 열두살 때부터 했니더.”
 
초등학교 앞인데, 철규분식집에 어린 학생들은 보이지 않는다. “요즘 학생들은 안옵니더. 옛날 학생들이나 찾아오지.” 30~40대들이 옛 맛을 못잊어 이 빵집에서 동창회나 계모임을 자주 연다고 한다. 찐빵 3개 1천원, 국수·단팥죽 2천원.
 
초등학교 옆 길모퉁이의 ‘은실한복’ 유리창이 따뜻해 보인다. 들여다보니 안에 한복은 한 벌도 안 보이고, 어르신 대여섯 분이 햇빛 드는 유리창쪽을 향해 하염없이 앉아 계시다. “한복집 문 닫은 지 한 20년 됐니더. 할배들 놀고 쉬는 쉼터시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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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때 신문 바른 벽지가 아직도 생생

 
중앙로 옛 일본인 가옥 거리를 향해 걷는다. 길 왼쪽으로 작은 암벽이 있는 신협 맞은편, 농협 골목 모퉁이에 작은 팻말이 하나 보인다. 구룡포 돌문이 있던 곳임을 알리는 표지판이다. 돌문은 조선시대 구룡포 뒷산인 매바위산(응암산)에서 동해면 흥환동 주변에 걸쳐 있던 대규모 말사육장(장기목장)으로 드는 관문이었다. 목장은 높이 3m, 길이 12㎞에 이르는 돌담을 쌓고 1천여마리의 말을 기르던 대형 국영목장이었다고 한다. 말을 노리고 달려드는 호랑이를 잡는 포수가 여럿 배치될 정도였다. 목장은 1905년 일제에 의해 폐쇄됐고, 울타리가 일부 남아 있다. 1988년까지 높이 7.5m의 자연석 돌기둥이 남아 있었으나, 낙석 등 안전사고 대비와 교통소통을 위해 헐어냈다. 돌문 윗부분을 잘라내 읍사무소 정원에 옮겨 놓았다.
 
옛 시외버스터미널이 있던 장안동 네거리 지나 잠시 걸으면 경찰주재소 건물을 시작으로 일본식 집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평지와 산비탈에 걸쳐 이뤄진 주택가 골목들에 약 50채 가량의 일본식 집들이 흩어져 있다. 온전한 모습을 갖춘 집은 15채 안팎이다. 대부분 녹슬고 허물어져 가는 빈집이다. 목욕탕·의원·요리집·여관 등 일부 건물엔 건물의 옛 사진을 곁들인 안내판을 붙여 놓았다. 일부 집들엔 다다미방이 그대로 남아 있고, 찢어진 벽지엔 당시 일본 신문 기사·광고 내용까지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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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거리는 일제강점기 일본의 오카야마·가가와현 지역 어민들을 집단이주시키면서 형성됐다고 한다. 당시 황금어장으로 불리던 구룡포를 어업전진기지로 건설하기 위한 이주였다.
 
주민들의 증언 등을 통해 일본인 가옥 거리에 대한 자료조사를 해온 권선희씨는 “이곳에 살다 다시 찾아오는 일본인들은 옛 모습 그대로 남은 집들을 보고 감동에 젖곤 한다”며 “특히 이곳에서 태어난 일본인들은 구룡포를 고향으로 삼고 있었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일본식 집인 하시모토 가옥은 각종 자료와 물품들을 전시한 전시관으로 쓰고 있다. 그러나 거리나 집들에 대해 설명한 안내판도 없고, 관리인도 상주하지 않는다. 최근 시에서 입수한 당시의 거리를 상세하게 묘사한 지도와 사진을 복사해 전시관 마당에 세웠지만, 이에 대한 설명도 없어 아쉬움을 남긴다.
 
새하얀 등대 앞 바다에서 뱃길 안내하는 붉은 등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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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옆 계단을 오르면 구룡포항이 한눈에 보이는 구룡포공원이다. 한국전쟁 희생자를 기린 충혼탑과 충혼비가 있고, 한쪽엔 1942년 세워진 ‘도가와 야사부로 송덕비’가 있다. 도가와 야사부로는 구룡포항 건설에 크게 기여했다고 한다. 시멘트로 발라진 비문 복원 여부를 놓고 지역민 사이에 찬반 양론이 있다. 공원으로 오르는 계단 좌우엔 돌기둥들이 즐비하다. 송덕비 건립을 후원한 일본인 이름을 새긴 빗돌들인데, 광복 뒤 이름을 시멘트로 바르고 뒤쪽에 호국영령들의 이름을 새겨 다시 세웠다.
 
Untitled-8 copy.jpg일본식 가옥 골목을 나서 큰길 건너 방파제로 간다. 모래밭 끝부분이어서 사라끝으로 불리는 지역이다. 방파제 입구에 또하나의 일제 유물이 있다. 이 역시 도가와 야사부로가 관여한 방파제 확축공사(1935) 준공비다. 빼앗겼던 땅과 바다이니 구석구석, 돌이켜 되새기고 반성해야 마땅한 당시 흔적들이 없을 수 없다. 지우고 없애버리고 싶어도, 그것들까지 근대유산이다. 여기까지 5㎞를 걸었다.
 
그리고. 여기서 지방도를 따라 10여분 더 걸으면 구룡포중·종합고등학교 앞 길가에 선 아담한 등대를 만날 수 있다. 사라말등대다. 언덕의 새하얀 사라말등대 앞바다엔 암초지대임을 알리는 붉은 등표가 파도를 맞으며 서서 구룡포항으로 드는 뱃길을 안내해 주고 있다. 등대 주변은 굽잇길에다가 찻길이 좁고 갓길도 없으니 차 조심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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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포 여행 쪽지
수도권에서 영동고속도로 여주분기점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가 김천분기점에서 경부고속도로로 바꿔 탄다. 대구 도동분기점에서 대구~포항 고속도로 타고 포항나들목으로 간다. 포스코·포항공항 쪽으로 직진해 31번 국도를 타고 가다 구룡포 팻말 보고 나가 929번 지방도 따라 구룡포 읍내로 간다. 읍 들머리에 읍사무소가 있다. 잡어 어판장 좌우에도 주차장이 있다.
과메기나 대게는 포구 주변 대부분의 식당에서 만날 수 있다. 장안동 뒷골목의 까꾸네 모리국수(054-276-2298). 물메기·대게·아귀·홍합·미더덕에 콩나물을 곁들인 푸짐한 국수를 낸다. 맑은 국물을 원하면 고춧가루를 빼준다. 1인분 5000원(2명 이상 주문). 구룡포초교 앞 철규분식(054-276-3215). 시금치를 곁들인 따뜻한 물국수(2000원), 작고 차진 팥소 찐빵, 단팥죽만 판다. 오전 9시 문 열어 찐빵은 11시쯤부터 판다. 복어요리 전문 함흥식당 (054)276-2347. 고래고기 전문 삼오식당 (054)276-2991.
구룡포읍사무소 (054)276-2565. 포항시청 (054)270-2114. 포항문화원 (054)242-4711. 포항역 (054)270-5837. 포항터미널 (054)270-5836.

 
포항/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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