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맞이 파티 찾아 뺑뺑이, 제대로 낚인 ‘첫경험’ 황라연의 남미 배낭여행
2010.09.29 14:09 너브내 Edit
<13> 크리스마스, 그리고 새해
갈까 말까 망설이다 잘 생긴 그의 꼬드김에…
‘헤롱헤롱’ 불량 3인조 급기야 “아이 러브 유”
다시 라파스에 돌아오고야 말았다. 코차밤바를 거쳐 라파스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베네수엘라 친구 산티아고에게 한국 음식 자랑을 잔뜩 하고선 도착하자마자 먹으러 가자고 꼬드겼다. 그는 내가 하는 말에 입맛을 쩝쩝 다시며 배가 고파 죽겠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산티아고는 마초같은 외모와는 달리 끊임없이 재잘재잘 잘도 떠들었다. 게다가 하는 말이 매우 웃겨서 하는 말마다 빵빵 터졌는데, 주된 레퍼토리는 나를 중국인이라고 놀리는 것이었다. 내가 “이건 한국 거야”라든가 “한국에서는~”이라고 하면, “아~중국” 이렇게 놀리는 식이다.
게다가 라파스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어떤 부자가 한국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아들에게 “한국이라는 나라는 북한, 중한(?????????), 남한이 있어”라고 알려주는 걸 들은 뒤로는 한국은 중국의 중간 부분, 일본은 중국의 동쪽 부분이라고 놀렸다. 그나저나 중한이라니. 그긴 어디인가?
엥? 한국은 북한 중한 남한으로 이루어져?
라파스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침대가 푹 꺼진 그 숙소에 가서 방을 잡고는 짐을 풀고 바로 한국 식당으로 달려갔다. 그날도 역시 한국식당엔 한국 여행자들이 많았고, 우리는 비빔밥과 김치찌개를 시켰다. 산티아고는 비빔밥의 누룽지에 호들갑을 떨면서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처음이라며 헉헉대고 먹었다. 다른 한국 여행객들이 삼겹살을 구워 먹는 것을 보고 저건 또 뭐냐며 내일은 저걸 먹자고 했다. 이 사람 진짜로 한국 음식에 꽂혔나보다.
우리가 라파스에 도착한 날은 12월 23일이었는데, 24일부터는 성탄 연휴라 24일엔 점심까지만 하고 성탄절 당일에는 가게문을 닫는다고 했다. 산티아고는 매우 아쉬워하면서 24일 낮에 꼭 오자고 했다.
다음날 우리는 11시 조금 넘어서부터 삼겹살을 먹기 시작했다. 이게 얼마 만에 먹어보는 삼겹살인지. 시장에서 우리 돈 300원짜리 스프를 먹다가 위에 기름칠 좀 하려니 침이 꼴까닥 넘어갔다. 전날 비빔밥에 떡실신한 산티아고는 삼겹살을 먹고 새로운 세계를 맛본 것 같다. 눈이 돌아갈 정도로 호들갑을 떨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맛있다고 외쳐댄 그는 갑자기 한국을 사랑한다고 하더니 나갈 때는 이런 멋진 음식을 알게 해줘서 고맙다며 내 몫까지 돈을 지불했다.
대충 선호도를 살펴보면 유럽 친구들은 한국음식이 너무 강렬해서 별로라고 하는 친구들도 있는데, 남미 친구들은 한국음식에 빠져드는 경우가 많았다. 유럽 중에서는 이탈리아 친구들이 특히 한국 음식을 좋아하는 것 같다.

이날은 봉인 해제, 마시고 마시고 또 마시고
라파스의 한국식당에서는 가끔 혼자 온 여행자들이 밥을 먹고 있어서 이야기하다가 친해지곤 하는데, 그날도 역시 혼자 온 사람들 2명과 라파스에 살고 있는 한국인 오빠, 산티아고, 나까지 5명이서 크리스마스이브인데 뭘 할까 고민하고 있었다. 시내를 방황하던 우리는 그냥 숙소에 가서 간단하게 맥주를 마시기로 하고, 숙소테라스에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숙소에 묵고 있는 한 명이 우리에게 오더니 숙소 사람들과 함께 파티를 열려고 하는데 참가하겠냐고 물어왔다. 심심하던 참에 잘됐다 싶어 참가비 20볼리비아노를 내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먹을거리와 술을 사와 본격적으로 판을 벌였다. 굵은 빗방울이 후두둑 쏟아지는데도 숙소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미친 듯이 잘만 놀았다. 비 맞아가면서 피리 불고 춤추고, 이건 뭐 광인들의 집합소였다.
그러나 원래 놀 때는 광인처럼 놀아야 재밌는 법. 원래 술을 많이 안 마시는 나도 그날은 봉인 해제 하고 ‘꽐라’가 될 때까지 퍼마셨다. 아니, 술을 마셔도 맥주가 아니라 보드카나 럼을 마시니 취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음식이 있는 부엌은 그야말로 배고프고 술에 취한 광인들의 집합소였다. 부엌 쪽에 가니 원샷의 메아리가 울려 퍼졌고, 눈이 풀려 고주망태가 된 사람들은 날 발견하고는 “꼬레아 꼬레아”를 외치며 술을 한가득 부어 주었다. 그 한잔으로 완전히 녹다운이 된 것 같다. 어릴 적에 마약을 하도 많이 해서 코뼈가 녹아버린 산티아고는 어느 날 정신을 차린 뒤 절대로 술·담배·마약을 안 한다고 했다.
정신 멀쩡한 산티아고가 날 데리고(아니 거의 질질 끌려가듯 했다) “그만 마시고 자라”며 이불을 덮어주고 나갔건만, 한두 시간 뒤 아래에서 밥 말리의 “Iron Lion zion“(이 노래에서 자꾸 ‘라연 라연’ 거려서 처음 내 이름을 들으면 사람들은 이 노래를 불렀다)이 들리자 이불을 박차고 뛰어 내려가 노래에 맞춰 춤을 추며 빙빙 돌았다. 그 모습을 보고 벙 찐 산티아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음날 나는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냐며 산티아고한테 혼났다. T_T

DJ 한다는 레게머리 그 친구의 거부할 수 없는 유혹
그렇게 날 챙겨주던 산티아고도 크리스마스 다음날 페루로 떠나버리고 나도 하루 이틀 뒤에 다시 남쪽으로 떠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항상 생각대로 되지 않고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게 여행. 함께 한국식당에 밥 먹으러 가기도 했던 브라질 친구가 떠나는 나를 붙잡았다.
디제이를 한다는 긴 레게머리의 그 친구는 내가 북을 사러 가는데 같이 가주었고, 밥을 먹으면서 계속 나에게 31일 밤부터 2010년1월1일까지 계속되는 트랜스 파티에 다 같이 가자고 꼬드겼다. 그 축제에서 자기가 디제이를 하고, 텐트가 있으면 숙식은 공짜인데 입장료까지 50볼리비아노라며 완전 싸고 엄청 규모가 큰 파티라고 했다.
클럽이나 파티처럼 사람이 많은 곳을 꺼려하는 편이라 한국에서도 클럽 한 번 간 적 없었는데 갑자기 노상 트랜스 파티라니. 게다가 트랜스 음악이란 게 도대체 뭔지 몰랐다. 요즘 대세인 기계음 가득한 음악인가보다 하고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마구 갈등을 때리기 시작했다.
원래는 다시 사마이파타로 가서 자연을 즐기며 착한 마음 하얀 마음을 가지려고 했는데 갑자기 연말연시 파티가 땡긴다. 흔한 기회인 것 같지도 않고 여기 젊은이들은 어떻게 노나 알고 싶어지기도 했다. 게다가 숙소에서 나에게 계속 신경 써 주고 말 걸어주는 잘 생긴 이탈리아 친구가 자기도 간다며 같이 가자고 하니, 이건 가야하지 않겠는가!
그 파티는 라파스에서 두어 시간 떨어진 코로이코라는 정글 마을에서 열리는데, 같은 시기에 코로이코에서는 다른 파티도 있다고 한다. 트랜스 음악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서 이탈리아 친구의 정보대로 트랜스 파티가 아닌 드럼&베이스 파티를 가기로 했다.
여자 둘에 남자 여섯, 택시 한 대에 꾸깃꾸깃
숙소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 그 트랜스 파티에 가는 듯 했다. 그 중 이탈리아 친구를 포함한 열댓 명은 아예 라파스에서 코로이코까지 걸어간다고 3일 전에 출발했다. 나는 29일에 라파스에 살고 있는 한국인 오빠 집들이가 있어서 30일에 다른 일행들과 버스를 타고 편하게 가기로 했다. 게다가 파티에서 돈을 쓰려면 길거리에서 이름 써주고 돈 받는 일도 며칠 더 해야 했다.
29일 낮에는 이름 써주고 돈 받는 일로 50볼리비아노를 벌었다.(당시 환율로 약 7천 원인데 이정도면 하루 숙박비와 식비를 충당하고도 남는다) 또 다른 한국인 친구와 집들이를 가서 한국 음식을 해먹고 술을 마시다보니 밤이 늦어 그 집에서 하루 신세를 지게 됐다. 아침에 일어나서 라면을 먹은 뒤(라면 이야기를 하니 정말 먹고 싶다. 지금은 독일에서 체코로 넘어가는 기차 안인데 배고프고 특히 라면이 고프다. 프라하에 가면 제일 먼저 라면을 찾아 헤매야겠다) 숙소로 돌아가 씻고 코로이코로 떠날 준비를 했다.
코로이코까지 함께 갈 일행은 처음 라파스에 도착했을 때도 그 숙소에 묵고 있던 프랑스 친구들이었다. 우리는 여자 둘에 남자 6명으로 모두 8명이었는데, 콜렉티보 정류장까지 택시를 타고 가기로 했다. 당연히 두 대로 나눠서 갈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 인원이 한 대에 다 타는 게 아니겠나! 대형차도 아니고 우리나라 구형 프라이드 정도의 크기였는데 말이다. 난 조수석에 앉았는데 물론 혼자 앉은 게 아니라 둘이 앉았다. 다행히 함께 앉은 프랑스 친구 엉덩이가 작은 것에 무한히 감사했다.
그렇게 구겨진 상태로 택시를 타고 콜렉티보 정류장에 내려서 차를 알아보았다. 그런데 콜렉티보마다 사람이 꽉꽉 찬데다가 코로이코로 가는 콜렉티보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길바닥에 주저앉아 어떻게 해야 할지 딱히 방도가 없어 잡담하기 시작했다.

버스 찾아 여기저기 돌다 일행들 잃어
단체로 앉아 있으니 우리 주위에 여행객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도 역시 같은 파티에 가나보다. 정처 없이 헤매는 양 떼가 된 우리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하염없이 차를 기다렸지만 차는 올 생각을 안 했다. 결국 나는 리리 라는 프랑스 여자아이와 함께 버스를 찾아 여기저기 돌아다니게 됐는데, 그 사이에 일행을 잃었다.
하지만 근처 마을까지 가는 버스가 있어 다른 일행들과는 코로이코에서 만나겠거니 하고 그 버스를 잡아타고 출발했다. 근처 마을에서 내려 합승택시를 잡아 코로이코까지 가니, 코로이코 마을의 중앙광장인 듯한 곳에는 벌써 사람들이 한가득이었다. 여기저기서 악기를 연주하며 술을 마시는 젊은이들이 있었다. 우리는 내린 곳에서 얌전히 다른 일행들을 기다리기로 했다.
운이 좋았는지, 다른 일행들은 우리가 도착한 지 얼마 안 돼서 줄줄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거의 스무 명에 이르는 일행이 다 도착하고, 리리는 자기네 일행을 따라갈 것인지 물어왔다. 하지만 일단 나는 원래 숙소에서 같이 놀기로 한 친구들이 있기에 일단은 그 친구들을 찾기로 했다. 리리는 내가 그 친구들을 찾을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결국 그 작은 마을을 방황하다가 구석진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 친구들을 발견하고 본격 합류했다. 3일 전에 출발한 그들도 그날 오후에 도착했다고 했다. 3일 동안 고산을 넘고 정글을 넘어 온 친구들은 근육통 때문에 계단도 제대로 못 내려갈 지경이었다. 그걸 보고 난 편하게 와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그래도 같이 왔으면 더 재밌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 마약, 춤…, 작은 광장은 마구 취했다
밥을 먹고 나와서 광장에 앉아 잡담을 하고 있는데 딱 봐도 마약을 한 것 같아 보이는 볼리비아 젊은이 3명이 우리에게 다가와 기타와 북으로 볼리비아의 전통음악을 연주했다. 그들이 부른 노래는 아르헨티나의 유명한 좌파가수 마누차우의 곡을 그저 개사 한 것이었다. “Bien benido a Bolibia~(볼리비아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Bien benido a Coroico~(코로이코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Bien benido a mi corazon~.(내 마음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우리는 폭소했고 그들은 신났는지 갑자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 중 가장 정상이 아닌 것 같은 한 명이 내게 다가와 춤을 추자고 했다. 후덜덜, 나는 본능적으로 싫다고 했는데 그는 나에게 나쁘다는 한마디를 던지고 쿨하게 다른 친구에게 춤을 권했다. 작은 광장은 혼돈 그 자체였고 많은 젊은이들이 술이나 마약에 취해 날뛰었다. 딱 봐도 연말연시라 많이 풀어진 분위기였다.
파티는 그 다음날 밤부터 시작됐다. 코로이코 마을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을에서도 약간 떨어진 곳에서 하는 파티였기 때문에 오전에 체크아웃을 하고 짐을 챙겨 나왔다.
3일 동안 트레킹한 친구들은 빨래를 해야겠다며 빨래터에 물어물어 갔는데, 아뿔싸! 빨래터엔 전날 밤에 본 제정신이 아닌 볼리비아 3인조가 캠핑을 하고 있었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누워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모양새가 또 질 나쁜 코카인 같은 걸 한 모양이라고 일행이 귀띔해줬다.
일행들은 빨래를 열심히 하고, 나는 심심해서 여기저기 둘러보고는 팔찌를 땋고 있는데, ‘불량 3인조’가 내게 와서는 계속 말을 걸며 뭐라고 뭐라고 했다. 상대하기 귀찮아서 계속 못 알아듣는 척하며 대꾸도 안 하고 있는데 급기야 아이러브유 라며 자기가 만든 팔찌를 하나 건네주었다. 팔찌는 고마웠지만 난 어디든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불꺼진 파티장, 자고 있는 출연진, 이게 이게 뭐니
친구들의 빨래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광장으로 돌아갔다. 정말 정말 작은 코로이코 광장엔 벌써부터 새해를 맞이하려는 젊은이들로 가득했다. 우리 일행은 그 광장 근처 식당에서 맥주를 마시며 밤을 기다리고 있었다.
슬슬 어두워지자 우리는 광장으로 나가서 분위기를 살펴보았다. 분위기는 매우 혼란스러웠고 작은 광장엔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차 화장실에 가려고 인파 속을 헤집고 광장 밖으로 나가기가 쉽지 않을 정도였다. 들뜨고 신난 사람들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부어라 마셔라 놀아 재꼈다.
군것질 거리를 사기 위해 잠깐 혼자 슈퍼를 다녀오는 길에, 테라스에서 피자를 먹고 있던 아저씨 세 명이랑 눈이 마주쳐 그냥 가볍게 새해인사를 건넸더니 피자 한 쪽을 주었다. 배도 고팠는데 정말 잘됐다 싶어 넙죽 받아서 친구들 있는 곳으로 가서는 같이 나눠 먹었다.
같이 다니던 일행들은 꽤나 자유로운 영혼들이었다. 너무 자유로운 탓인지 그중 몇 명은 광장에서 현지인들이 파는 코카인을 복용했다. 나와 이탈리아 친구, 그리고 다른 아르헨티나 친구 한 명은 그 모습도 싫었고, 드럼&베이스 파티를 가기로 했기 때문에 택시를 타고 파티가 열린다는 호텔로 갔다.
그때가 11시 20분 정도였는데, 20분 정도 걸려 도착한 호텔은 도저히 파티가 열린다고 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너무 조용했을 뿐 아니라 불도 꺼져있었다. 우리 택시가 도착하자 그곳에 먼저 갔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태워달라고 사정을 했다. 그 중 먼저 그 파티에 가겠다고 나선 일행 5명이 있었는데, 그들은 일단 택시를 타고 빨리 광장으로 돌아가자고 소리쳤다.
결국 또 한 택시에 8명이 겹겹이 타고는 광장으로 향했다. 외국인 친구들은 한 택시에 몇 명까지 들어가나 실험하는 걸 좋아하나보다. 사람 위에 또 사람이 타고 머리만 창밖으로 내민 채 보헤미안 랩소디를 다 같이 부르며 12시 정각까지 광장에 꼭 도착해야 한다고 운전사를 재촉했다. 먼저 가 있던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드럼&베이스 파티라고 갔는데 출연진 중 몇 그룹은 도착도 안 하고 나머지 출연진은 자고 있더라는 것이었다.
결국 택시 안에서 2010 새해 알리는 폭죽소리만
어쩔 수 없이 다 같이 테크노 파티에 가기로 했다. 우리는 “Si se puede!! Si se puede!!(You can do it)“을 운전사에게 외치며 달밤에 비포장도로를 신나게 달렸다. 그러나 결국 택시 안에서 새해를 알리는 폭죽소리를 듣게 되고 말았다. 나의 2010년은 8명이 포개져 타고 달리던 볼리비아의 택시 안에서 시작되었다.
가까스로 광장에 도착해서 다른 일행들을 찾았건만 있을 리가 없었다. 그 멤버 그대로 다시 똑같은 택시에 타고 트랜스 파티가 열리는 곳까지 물어물어 도착했다. 파티가 열린 곳은 한적한 산골이었는데, 입구에서 파티 무대까지는 꽤 거리가 있었다. 드럼&베이스 파티에서 사기 아닌 사기를 당한 5명 중 한 명이 일단 체크를 해봐야겠다며 다녀와서는 몹시 실망한 말투로 여기도 아니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어쩌겠나, 갈 곳 없는 우리는 다른 일행도 여기 있으니 그냥 들어가기로 했다. 하지만 결코 50볼리비아노의 가치는 아니라고 박박 우겨서 10볼리비아노를 깎았다. 팔찌를 차고 들어가 보니 브라질 친구가 말한 아주 큰 파티는 무슨!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 중 70%가 아는 얼굴이었다. 우리 숙소에서 묵고 있던 친구들과, 라파스에서 코로이코로 가는 차를 기다릴 때 알게 된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무대라고 하는 것이, 작은 강의실 하나 만한 크기의 공간에서 몇몇 사람들이 춤을 추고 한쪽 구석에서 디제이가 음악을 트는 정도의 규모였다. 브라질 친구 아론은 마치 볼리비아 최대 규모의 파티인 것처럼 떠벌렸건만. 안 그래도 불만이 가득 쌓인 우리는 그 광경을 보고 음악에 취해 난해한 춤을 춰대는 이들 사이에서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속고 또 속고, 짧지만 너무나 길었던 3일
그런 속도 모른 채, 먼저 가 있던 친구들 중 몇 명은 얼굴에 낙서를 하고는 아주 신이 나서 내 얼굴에도 낙서를 해줬다.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돈 내고 왔으니 실컷 놀다 가야지, 하고 나도 친구들과 어울려 난해한 춤을 추고 놀았다. 그러던 중 한 일본인이 멀뚱멀뚱 가만히 서 있길래 말을 걸어보니, 아내와 함께 배낭여행중인데 그도 역시 이 파티가 굉장히 큰 파티인 줄 알았다며 실망감을 드러냈다. 게다가 브라질 친구가 말한 식사제공에 대해 물어보니 그런 것 따위는 있지도 않다고 했다. 그곳에서 캠핑을 할 생각도 아니었지만 왠지 왕창 속은 기분이 들었다.
파티에서 그렇게 설렁설렁 놀다가 어슴푸레 동이 트기 시작할 무렵, 나와 다른 두 명의 친구들은 파티에 질려 그냥 코로이코 마을로 돌아가기로 했다. 운 좋게 마을로 돌아가는 사람의 차를 얻어 탔는데,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아 꾸벅꾸벅 졸면서도 문을 꽉 잡고 있어야 했다. 그래도 공짜로 얻어 탄 게 어딘가.
새해 아침을 맞이한 코로이코 광장 주변은 그야말로 무법천지였다. 길은 쓰레기로 코팅된 데다가 사람들은 잔뜩 취해 여기저기 쓰러져있거나 싸우고 있고, 소변으로 생긴 작은 웅덩이가 곳곳에 널려 있었다. 라파스로 가는 차가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기에, 열려 있는 가게에 들어가 카페라떼를 시켜놓은 채, 우리 일행은 정신을 못 차리고 병든 닭 마냥 꾸벅꾸벅 졸았다.
라파스로 가는 차에서도 내내 도미노처럼 쓰러져 잤는데, 이놈의 차가 자꾸 고장이 나서 중간에 한 시간씩 차를 세워놓고 수리를 하는 것이었다. 라파스에 돌아가는 게 왜 이렇게 힘든 건지. 몇 차례 실랑이를 무사히 잘 넘기고 라파스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씻고 맥주를 마신 뒤 곧바로 꿈나라로 직행했다. 3일 동안의, 짧지만 너무나도 길었던 연말연시였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새해를 택시 안에서 맞이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글 사진 황라연
갈까 말까 망설이다 잘 생긴 그의 꼬드김에…
‘헤롱헤롱’ 불량 3인조 급기야 “아이 러브 유”

다시 라파스에 돌아오고야 말았다. 코차밤바를 거쳐 라파스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베네수엘라 친구 산티아고에게 한국 음식 자랑을 잔뜩 하고선 도착하자마자 먹으러 가자고 꼬드겼다. 그는 내가 하는 말에 입맛을 쩝쩝 다시며 배가 고파 죽겠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산티아고는 마초같은 외모와는 달리 끊임없이 재잘재잘 잘도 떠들었다. 게다가 하는 말이 매우 웃겨서 하는 말마다 빵빵 터졌는데, 주된 레퍼토리는 나를 중국인이라고 놀리는 것이었다. 내가 “이건 한국 거야”라든가 “한국에서는~”이라고 하면, “아~중국” 이렇게 놀리는 식이다.
게다가 라파스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어떤 부자가 한국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아들에게 “한국이라는 나라는 북한, 중한(?????????), 남한이 있어”라고 알려주는 걸 들은 뒤로는 한국은 중국의 중간 부분, 일본은 중국의 동쪽 부분이라고 놀렸다. 그나저나 중한이라니. 그긴 어디인가?
엥? 한국은 북한 중한 남한으로 이루어져?
라파스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침대가 푹 꺼진 그 숙소에 가서 방을 잡고는 짐을 풀고 바로 한국 식당으로 달려갔다. 그날도 역시 한국식당엔 한국 여행자들이 많았고, 우리는 비빔밥과 김치찌개를 시켰다. 산티아고는 비빔밥의 누룽지에 호들갑을 떨면서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처음이라며 헉헉대고 먹었다. 다른 한국 여행객들이 삼겹살을 구워 먹는 것을 보고 저건 또 뭐냐며 내일은 저걸 먹자고 했다. 이 사람 진짜로 한국 음식에 꽂혔나보다.
우리가 라파스에 도착한 날은 12월 23일이었는데, 24일부터는 성탄 연휴라 24일엔 점심까지만 하고 성탄절 당일에는 가게문을 닫는다고 했다. 산티아고는 매우 아쉬워하면서 24일 낮에 꼭 오자고 했다.
다음날 우리는 11시 조금 넘어서부터 삼겹살을 먹기 시작했다. 이게 얼마 만에 먹어보는 삼겹살인지. 시장에서 우리 돈 300원짜리 스프를 먹다가 위에 기름칠 좀 하려니 침이 꼴까닥 넘어갔다. 전날 비빔밥에 떡실신한 산티아고는 삼겹살을 먹고 새로운 세계를 맛본 것 같다. 눈이 돌아갈 정도로 호들갑을 떨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맛있다고 외쳐댄 그는 갑자기 한국을 사랑한다고 하더니 나갈 때는 이런 멋진 음식을 알게 해줘서 고맙다며 내 몫까지 돈을 지불했다.
대충 선호도를 살펴보면 유럽 친구들은 한국음식이 너무 강렬해서 별로라고 하는 친구들도 있는데, 남미 친구들은 한국음식에 빠져드는 경우가 많았다. 유럽 중에서는 이탈리아 친구들이 특히 한국 음식을 좋아하는 것 같다.

이날은 봉인 해제, 마시고 마시고 또 마시고
라파스의 한국식당에서는 가끔 혼자 온 여행자들이 밥을 먹고 있어서 이야기하다가 친해지곤 하는데, 그날도 역시 혼자 온 사람들 2명과 라파스에 살고 있는 한국인 오빠, 산티아고, 나까지 5명이서 크리스마스이브인데 뭘 할까 고민하고 있었다. 시내를 방황하던 우리는 그냥 숙소에 가서 간단하게 맥주를 마시기로 하고, 숙소테라스에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숙소에 묵고 있는 한 명이 우리에게 오더니 숙소 사람들과 함께 파티를 열려고 하는데 참가하겠냐고 물어왔다. 심심하던 참에 잘됐다 싶어 참가비 20볼리비아노를 내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먹을거리와 술을 사와 본격적으로 판을 벌였다. 굵은 빗방울이 후두둑 쏟아지는데도 숙소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미친 듯이 잘만 놀았다. 비 맞아가면서 피리 불고 춤추고, 이건 뭐 광인들의 집합소였다.
그러나 원래 놀 때는 광인처럼 놀아야 재밌는 법. 원래 술을 많이 안 마시는 나도 그날은 봉인 해제 하고 ‘꽐라’가 될 때까지 퍼마셨다. 아니, 술을 마셔도 맥주가 아니라 보드카나 럼을 마시니 취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음식이 있는 부엌은 그야말로 배고프고 술에 취한 광인들의 집합소였다. 부엌 쪽에 가니 원샷의 메아리가 울려 퍼졌고, 눈이 풀려 고주망태가 된 사람들은 날 발견하고는 “꼬레아 꼬레아”를 외치며 술을 한가득 부어 주었다. 그 한잔으로 완전히 녹다운이 된 것 같다. 어릴 적에 마약을 하도 많이 해서 코뼈가 녹아버린 산티아고는 어느 날 정신을 차린 뒤 절대로 술·담배·마약을 안 한다고 했다.
정신 멀쩡한 산티아고가 날 데리고(아니 거의 질질 끌려가듯 했다) “그만 마시고 자라”며 이불을 덮어주고 나갔건만, 한두 시간 뒤 아래에서 밥 말리의 “Iron Lion zion“(이 노래에서 자꾸 ‘라연 라연’ 거려서 처음 내 이름을 들으면 사람들은 이 노래를 불렀다)이 들리자 이불을 박차고 뛰어 내려가 노래에 맞춰 춤을 추며 빙빙 돌았다. 그 모습을 보고 벙 찐 산티아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음날 나는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냐며 산티아고한테 혼났다. T_T

DJ 한다는 레게머리 그 친구의 거부할 수 없는 유혹
그렇게 날 챙겨주던 산티아고도 크리스마스 다음날 페루로 떠나버리고 나도 하루 이틀 뒤에 다시 남쪽으로 떠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항상 생각대로 되지 않고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게 여행. 함께 한국식당에 밥 먹으러 가기도 했던 브라질 친구가 떠나는 나를 붙잡았다.
디제이를 한다는 긴 레게머리의 그 친구는 내가 북을 사러 가는데 같이 가주었고, 밥을 먹으면서 계속 나에게 31일 밤부터 2010년1월1일까지 계속되는 트랜스 파티에 다 같이 가자고 꼬드겼다. 그 축제에서 자기가 디제이를 하고, 텐트가 있으면 숙식은 공짜인데 입장료까지 50볼리비아노라며 완전 싸고 엄청 규모가 큰 파티라고 했다.
클럽이나 파티처럼 사람이 많은 곳을 꺼려하는 편이라 한국에서도 클럽 한 번 간 적 없었는데 갑자기 노상 트랜스 파티라니. 게다가 트랜스 음악이란 게 도대체 뭔지 몰랐다. 요즘 대세인 기계음 가득한 음악인가보다 하고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마구 갈등을 때리기 시작했다.
원래는 다시 사마이파타로 가서 자연을 즐기며 착한 마음 하얀 마음을 가지려고 했는데 갑자기 연말연시 파티가 땡긴다. 흔한 기회인 것 같지도 않고 여기 젊은이들은 어떻게 노나 알고 싶어지기도 했다. 게다가 숙소에서 나에게 계속 신경 써 주고 말 걸어주는 잘 생긴 이탈리아 친구가 자기도 간다며 같이 가자고 하니, 이건 가야하지 않겠는가!
그 파티는 라파스에서 두어 시간 떨어진 코로이코라는 정글 마을에서 열리는데, 같은 시기에 코로이코에서는 다른 파티도 있다고 한다. 트랜스 음악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서 이탈리아 친구의 정보대로 트랜스 파티가 아닌 드럼&베이스 파티를 가기로 했다.
여자 둘에 남자 여섯, 택시 한 대에 꾸깃꾸깃
숙소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 그 트랜스 파티에 가는 듯 했다. 그 중 이탈리아 친구를 포함한 열댓 명은 아예 라파스에서 코로이코까지 걸어간다고 3일 전에 출발했다. 나는 29일에 라파스에 살고 있는 한국인 오빠 집들이가 있어서 30일에 다른 일행들과 버스를 타고 편하게 가기로 했다. 게다가 파티에서 돈을 쓰려면 길거리에서 이름 써주고 돈 받는 일도 며칠 더 해야 했다.
29일 낮에는 이름 써주고 돈 받는 일로 50볼리비아노를 벌었다.(당시 환율로 약 7천 원인데 이정도면 하루 숙박비와 식비를 충당하고도 남는다) 또 다른 한국인 친구와 집들이를 가서 한국 음식을 해먹고 술을 마시다보니 밤이 늦어 그 집에서 하루 신세를 지게 됐다. 아침에 일어나서 라면을 먹은 뒤(라면 이야기를 하니 정말 먹고 싶다. 지금은 독일에서 체코로 넘어가는 기차 안인데 배고프고 특히 라면이 고프다. 프라하에 가면 제일 먼저 라면을 찾아 헤매야겠다) 숙소로 돌아가 씻고 코로이코로 떠날 준비를 했다.
코로이코까지 함께 갈 일행은 처음 라파스에 도착했을 때도 그 숙소에 묵고 있던 프랑스 친구들이었다. 우리는 여자 둘에 남자 6명으로 모두 8명이었는데, 콜렉티보 정류장까지 택시를 타고 가기로 했다. 당연히 두 대로 나눠서 갈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 인원이 한 대에 다 타는 게 아니겠나! 대형차도 아니고 우리나라 구형 프라이드 정도의 크기였는데 말이다. 난 조수석에 앉았는데 물론 혼자 앉은 게 아니라 둘이 앉았다. 다행히 함께 앉은 프랑스 친구 엉덩이가 작은 것에 무한히 감사했다.
그렇게 구겨진 상태로 택시를 타고 콜렉티보 정류장에 내려서 차를 알아보았다. 그런데 콜렉티보마다 사람이 꽉꽉 찬데다가 코로이코로 가는 콜렉티보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길바닥에 주저앉아 어떻게 해야 할지 딱히 방도가 없어 잡담하기 시작했다.

버스 찾아 여기저기 돌다 일행들 잃어
단체로 앉아 있으니 우리 주위에 여행객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도 역시 같은 파티에 가나보다. 정처 없이 헤매는 양 떼가 된 우리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하염없이 차를 기다렸지만 차는 올 생각을 안 했다. 결국 나는 리리 라는 프랑스 여자아이와 함께 버스를 찾아 여기저기 돌아다니게 됐는데, 그 사이에 일행을 잃었다.
하지만 근처 마을까지 가는 버스가 있어 다른 일행들과는 코로이코에서 만나겠거니 하고 그 버스를 잡아타고 출발했다. 근처 마을에서 내려 합승택시를 잡아 코로이코까지 가니, 코로이코 마을의 중앙광장인 듯한 곳에는 벌써 사람들이 한가득이었다. 여기저기서 악기를 연주하며 술을 마시는 젊은이들이 있었다. 우리는 내린 곳에서 얌전히 다른 일행들을 기다리기로 했다.
운이 좋았는지, 다른 일행들은 우리가 도착한 지 얼마 안 돼서 줄줄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거의 스무 명에 이르는 일행이 다 도착하고, 리리는 자기네 일행을 따라갈 것인지 물어왔다. 하지만 일단 나는 원래 숙소에서 같이 놀기로 한 친구들이 있기에 일단은 그 친구들을 찾기로 했다. 리리는 내가 그 친구들을 찾을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결국 그 작은 마을을 방황하다가 구석진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 친구들을 발견하고 본격 합류했다. 3일 전에 출발한 그들도 그날 오후에 도착했다고 했다. 3일 동안 고산을 넘고 정글을 넘어 온 친구들은 근육통 때문에 계단도 제대로 못 내려갈 지경이었다. 그걸 보고 난 편하게 와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그래도 같이 왔으면 더 재밌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 마약, 춤…, 작은 광장은 마구 취했다
밥을 먹고 나와서 광장에 앉아 잡담을 하고 있는데 딱 봐도 마약을 한 것 같아 보이는 볼리비아 젊은이 3명이 우리에게 다가와 기타와 북으로 볼리비아의 전통음악을 연주했다. 그들이 부른 노래는 아르헨티나의 유명한 좌파가수 마누차우의 곡을 그저 개사 한 것이었다. “Bien benido a Bolibia~(볼리비아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Bien benido a Coroico~(코로이코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Bien benido a mi corazon~.(내 마음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우리는 폭소했고 그들은 신났는지 갑자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 중 가장 정상이 아닌 것 같은 한 명이 내게 다가와 춤을 추자고 했다. 후덜덜, 나는 본능적으로 싫다고 했는데 그는 나에게 나쁘다는 한마디를 던지고 쿨하게 다른 친구에게 춤을 권했다. 작은 광장은 혼돈 그 자체였고 많은 젊은이들이 술이나 마약에 취해 날뛰었다. 딱 봐도 연말연시라 많이 풀어진 분위기였다.
파티는 그 다음날 밤부터 시작됐다. 코로이코 마을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을에서도 약간 떨어진 곳에서 하는 파티였기 때문에 오전에 체크아웃을 하고 짐을 챙겨 나왔다.
3일 동안 트레킹한 친구들은 빨래를 해야겠다며 빨래터에 물어물어 갔는데, 아뿔싸! 빨래터엔 전날 밤에 본 제정신이 아닌 볼리비아 3인조가 캠핑을 하고 있었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누워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모양새가 또 질 나쁜 코카인 같은 걸 한 모양이라고 일행이 귀띔해줬다.
일행들은 빨래를 열심히 하고, 나는 심심해서 여기저기 둘러보고는 팔찌를 땋고 있는데, ‘불량 3인조’가 내게 와서는 계속 말을 걸며 뭐라고 뭐라고 했다. 상대하기 귀찮아서 계속 못 알아듣는 척하며 대꾸도 안 하고 있는데 급기야 아이러브유 라며 자기가 만든 팔찌를 하나 건네주었다. 팔찌는 고마웠지만 난 어디든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불꺼진 파티장, 자고 있는 출연진, 이게 이게 뭐니
친구들의 빨래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광장으로 돌아갔다. 정말 정말 작은 코로이코 광장엔 벌써부터 새해를 맞이하려는 젊은이들로 가득했다. 우리 일행은 그 광장 근처 식당에서 맥주를 마시며 밤을 기다리고 있었다.
슬슬 어두워지자 우리는 광장으로 나가서 분위기를 살펴보았다. 분위기는 매우 혼란스러웠고 작은 광장엔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차 화장실에 가려고 인파 속을 헤집고 광장 밖으로 나가기가 쉽지 않을 정도였다. 들뜨고 신난 사람들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부어라 마셔라 놀아 재꼈다.
군것질 거리를 사기 위해 잠깐 혼자 슈퍼를 다녀오는 길에, 테라스에서 피자를 먹고 있던 아저씨 세 명이랑 눈이 마주쳐 그냥 가볍게 새해인사를 건넸더니 피자 한 쪽을 주었다. 배도 고팠는데 정말 잘됐다 싶어 넙죽 받아서 친구들 있는 곳으로 가서는 같이 나눠 먹었다.
같이 다니던 일행들은 꽤나 자유로운 영혼들이었다. 너무 자유로운 탓인지 그중 몇 명은 광장에서 현지인들이 파는 코카인을 복용했다. 나와 이탈리아 친구, 그리고 다른 아르헨티나 친구 한 명은 그 모습도 싫었고, 드럼&베이스 파티를 가기로 했기 때문에 택시를 타고 파티가 열린다는 호텔로 갔다.
그때가 11시 20분 정도였는데, 20분 정도 걸려 도착한 호텔은 도저히 파티가 열린다고 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너무 조용했을 뿐 아니라 불도 꺼져있었다. 우리 택시가 도착하자 그곳에 먼저 갔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태워달라고 사정을 했다. 그 중 먼저 그 파티에 가겠다고 나선 일행 5명이 있었는데, 그들은 일단 택시를 타고 빨리 광장으로 돌아가자고 소리쳤다.
결국 또 한 택시에 8명이 겹겹이 타고는 광장으로 향했다. 외국인 친구들은 한 택시에 몇 명까지 들어가나 실험하는 걸 좋아하나보다. 사람 위에 또 사람이 타고 머리만 창밖으로 내민 채 보헤미안 랩소디를 다 같이 부르며 12시 정각까지 광장에 꼭 도착해야 한다고 운전사를 재촉했다. 먼저 가 있던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드럼&베이스 파티라고 갔는데 출연진 중 몇 그룹은 도착도 안 하고 나머지 출연진은 자고 있더라는 것이었다.
결국 택시 안에서 2010 새해 알리는 폭죽소리만
어쩔 수 없이 다 같이 테크노 파티에 가기로 했다. 우리는 “Si se puede!! Si se puede!!(You can do it)“을 운전사에게 외치며 달밤에 비포장도로를 신나게 달렸다. 그러나 결국 택시 안에서 새해를 알리는 폭죽소리를 듣게 되고 말았다. 나의 2010년은 8명이 포개져 타고 달리던 볼리비아의 택시 안에서 시작되었다.
가까스로 광장에 도착해서 다른 일행들을 찾았건만 있을 리가 없었다. 그 멤버 그대로 다시 똑같은 택시에 타고 트랜스 파티가 열리는 곳까지 물어물어 도착했다. 파티가 열린 곳은 한적한 산골이었는데, 입구에서 파티 무대까지는 꽤 거리가 있었다. 드럼&베이스 파티에서 사기 아닌 사기를 당한 5명 중 한 명이 일단 체크를 해봐야겠다며 다녀와서는 몹시 실망한 말투로 여기도 아니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어쩌겠나, 갈 곳 없는 우리는 다른 일행도 여기 있으니 그냥 들어가기로 했다. 하지만 결코 50볼리비아노의 가치는 아니라고 박박 우겨서 10볼리비아노를 깎았다. 팔찌를 차고 들어가 보니 브라질 친구가 말한 아주 큰 파티는 무슨!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 중 70%가 아는 얼굴이었다. 우리 숙소에서 묵고 있던 친구들과, 라파스에서 코로이코로 가는 차를 기다릴 때 알게 된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무대라고 하는 것이, 작은 강의실 하나 만한 크기의 공간에서 몇몇 사람들이 춤을 추고 한쪽 구석에서 디제이가 음악을 트는 정도의 규모였다. 브라질 친구 아론은 마치 볼리비아 최대 규모의 파티인 것처럼 떠벌렸건만. 안 그래도 불만이 가득 쌓인 우리는 그 광경을 보고 음악에 취해 난해한 춤을 춰대는 이들 사이에서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속고 또 속고, 짧지만 너무나 길었던 3일
그런 속도 모른 채, 먼저 가 있던 친구들 중 몇 명은 얼굴에 낙서를 하고는 아주 신이 나서 내 얼굴에도 낙서를 해줬다.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돈 내고 왔으니 실컷 놀다 가야지, 하고 나도 친구들과 어울려 난해한 춤을 추고 놀았다. 그러던 중 한 일본인이 멀뚱멀뚱 가만히 서 있길래 말을 걸어보니, 아내와 함께 배낭여행중인데 그도 역시 이 파티가 굉장히 큰 파티인 줄 알았다며 실망감을 드러냈다. 게다가 브라질 친구가 말한 식사제공에 대해 물어보니 그런 것 따위는 있지도 않다고 했다. 그곳에서 캠핑을 할 생각도 아니었지만 왠지 왕창 속은 기분이 들었다.
파티에서 그렇게 설렁설렁 놀다가 어슴푸레 동이 트기 시작할 무렵, 나와 다른 두 명의 친구들은 파티에 질려 그냥 코로이코 마을로 돌아가기로 했다. 운 좋게 마을로 돌아가는 사람의 차를 얻어 탔는데,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아 꾸벅꾸벅 졸면서도 문을 꽉 잡고 있어야 했다. 그래도 공짜로 얻어 탄 게 어딘가.
새해 아침을 맞이한 코로이코 광장 주변은 그야말로 무법천지였다. 길은 쓰레기로 코팅된 데다가 사람들은 잔뜩 취해 여기저기 쓰러져있거나 싸우고 있고, 소변으로 생긴 작은 웅덩이가 곳곳에 널려 있었다. 라파스로 가는 차가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기에, 열려 있는 가게에 들어가 카페라떼를 시켜놓은 채, 우리 일행은 정신을 못 차리고 병든 닭 마냥 꾸벅꾸벅 졸았다.
라파스로 가는 차에서도 내내 도미노처럼 쓰러져 잤는데, 이놈의 차가 자꾸 고장이 나서 중간에 한 시간씩 차를 세워놓고 수리를 하는 것이었다. 라파스에 돌아가는 게 왜 이렇게 힘든 건지. 몇 차례 실랑이를 무사히 잘 넘기고 라파스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씻고 맥주를 마신 뒤 곧바로 꿈나라로 직행했다. 3일 동안의, 짧지만 너무나도 길었던 연말연시였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새해를 택시 안에서 맞이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글 사진 황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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