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섬들, 어느 하나 '상처'로부터 자유로우랴 강제윤 시인의 섬 기행

[강제윤 시인의 섬기행] ③ 괴뢰섬

 

귀아리? 괴리?…안내지도엔 있는데 ‘모르쇠’

인근 서검도 코앞 북녘 연백, 방송소리 또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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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버스터미널. 팔순의 노부부가 여행을 왔다. 어디를 가시는가. 전등사나 보문사에 불공이라도 드리러 가시는가. 노인들은 허리가 휘었다. 꼬부랑 노부부가 함께 나들이 온 모습이 애틋하고 눈물겹다.

 

할머니는 잠시 화장실을 다니러 갔다. 할아버지는 불현듯 버스 청소를 마치고 나오는 여자를 부른다. 여자는 50대 중반이나 됐을까. 할아버지는 '나, 당신을 기억 한다'고 반갑게 인사한다. 일전에 강화 왔을 때 여자가 버스 청소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여자도 자신을 기억해주는 할아버지가 고맙고 반갑다. 

 

"내가 아이스크림이나 대접 해야겠수."

 

할아버지는 지갑에서 돈을 꺼낸다. 여자가 슈퍼에 간 사이 할머니가 돌아온다. 여자는 할아버지에게 거스름돈을 돌려주고 할머니에게 아이스크림을 건넨다. 할머니는 의아한 듯이 여자를 본다. 여자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한다. 할머니는 아이스크림을 뿌리치며 할아버지에게 버럭 화를 낸다.

 

"아니 이 영감이 나를 옆에 두고도 딴 짓을 해!"

 

할아버지는 멋쩍게 웃고, 여자는 킥킥 웃으며 서둘러 자리를 뜬다. 할아버지는 '더위 사냥'을 반으로 쪼개 할머니에게 내민다. 할머니는 단단히 토라졌다. 한동안 밀고 당기는 노부부. 할머니는 끝내 아이스크림 반쪽을 받아든다. 노부부는 평생을 그리하며 살았을 것이다.

 

교동팔경 꼽히던 새우잡이 배 불빛…무장간첩 사건 뒤 무인도로

 

서검도와 미법도 사이에 괴뢰섬이 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은 볼음도에서였다. 민통선 안에 있는 미법도나 서검도, 볼음도는 지척간의 섬들이다. 서검도 앞 바다로 침투한 남파간첩이 그 섬에 숨었다가 도주한 뒤부터 섬의 이름이 괴뢰섬으로 바뀌었다 했다. '괴뢰'란 호칭은 북한정권을 소련의 꼭두각시로 보던 시대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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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포리 여객선 터미널에 앞에 서 있는 안내지도 하나에는 괴뢰섬이란 지명이 있다. 그런데 또 다른 지도에는 괴리섬으로 표기되어 있다. 하지만 정작 여객선의 선원들이나 서검도, 미법도 주민들, 면사무소 공무원들 누구에게 물어봐도 괴뢰섬에 대해 모르겠다고 고개를 젓는다. 지도에까지 표시되어 있다는 것은 한때 그 이름으로 불렸다는 분명한 증거인데 다들 모르겠다니 어찌된 연유일까.

 

괴뢰섬, 또는 괴리섬은 미법도에서 서검도로 가는 항로 중간에 있는 무인도다. 지금은 한전 송전탑이 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삼산면지'에 따르면 괴뢰섬은 본래 귀아리섬이었다. 한자로 옮기면서 귀하도(歸下島)가 됐고 그것이 괴뢰섬으로 바뀌었다가 남북관계가 유화국면으로 접어들면서 다시 괴리섬으로 부르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julgu.jpg강화군의 크고 작은 섬들은 어느 곳 하나 남북대결의 상처로부터 자유로운 곳이 없다. 북에서 넘어오던 잠수함이 몇 번이나 발각 된 곳도 서검도 앞 바다다. 미법도 북쪽의 기장섬도 본래는 7가구가 사는 유인도였다. 자생하는 기장이 많아 기장섬(黍島)이었다. 근해에 어족이 풍부해 한때는 풍요를 구가하던 섬. 기장섬 앞바다 새우잡이 배의 불빛들, 서도어등(黍島漁燈)은 교동팔경의 하나로 꼽힐 정도로 장관이었다. 이 섬도 무장 간첩 사건 뒤 소개되어 무인도가 됐다. 

 

미법도, 이근안 고문으로 간첩 누명 쓴 어민들 ‘악몽’의 섬

 

미법도와 서검도로 가는 길은 멀다. 강화 본섬에서 바로 이어진 직항로는 없다. 외포리에서 석모도로 건너온 뒤 다시 하리 포구까지 이동해야 한다. 하리 포구에서 아침, 저녁 한 번씩 정기 여객선이 뜰 뿐, 군의 허가 없이는 그 흔한 대절선도 다니지 못한다. 하리포구에는 여객선 매표소만 달랑 하나, 주변에는 인가 한 채 없이 황량하다.


석모도 하리 선착장에서 출항한 여객선은 10분 만에 미법도에 도착한다. 석모도와 지척이지만 교통이 불편한 미법도는 낙도다. 옛날 미법도는 서검도와 함께 외국으로부터 온 배들을  검문하던 곳이다. 섬에는 후손 없는 묘지가 많다. 외래 선박들이 항해 중 사망한 이들을 섬에 매장하고 떠난 까닭이다. 인근의 섬들처럼 섬은 본래 어업이 주업이었으나 군사분계선이 그어지면서 어로에 제약이 많아져 어업은 쇠퇴하고 농업이 주업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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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10월29일, 갯벌에서 조개잡이 하던 어민 100여 명이 북한 경비선에 의해 집단 납북 됐다가 11월20일 판문점을 통해 귀환한 사건이 있었다. 모두가 미법도 주민들. 어민들은 경찰 조사 뒤 풀려났다. 그로부터 10여년 후인 1976년부터 미법도에서 연달아 다섯 차례의 고정간첩 사건이 터졌다. 납북 됐다 돌아온 어민들이 줄줄이 간첩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으로 갔다. 섬은 공안의 칼바람에 초토화 됐다. 그중 한 어민은 '인천 제철 폭파 공작'의 혐의가 씌워졌다. 그 어부는 마을의 민방위 소대장이었다. 고문 기술자 이근안이 그를 간첩으로 만들었다.

 

1982년, 남산의 대공 분실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고 온몸에서 피가 날 정도로 맞았다.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부인까지 잡아다 고문했다. 납북 당시 평양에서 친척에게 포섭돼 강화도 인근 경찰서의 위치와 교통편 등 국가기밀을 탐지하는 간첩활동을 한 것으로 조작됐다. 어부는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15년을 복역했다. 2007년 국정원 과거사위원회는 '납북어부 간첩' 정영씨 사건이 고문에 의해 조작 됐다는 결론을 내렸다. 세월이 흘렀지만 남파간첩 사건이나 납북어부 간첩 사건 등은 섬 주민 대다수에게 여전히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악몽일 것이다. 괴뢰섬에 대한 기억도 그러한 것일까.

 

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에 ‘관리 착복으로 백성 원망’ 기록 

 

"사복시(司僕寺)의 허다한 수세(收稅)를 교활한 아전의 농간에만 일임하여 과중한 조세(租稅)의 징수로 백성이 원망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탁주한(卓柱漢)이라는 자가 더욱 용사(用事)하였습니다. 강화(江華) 미법도(彌法島)의 둘레 8리 남짓을 폐현(廢縣)으로 도록(圖錄) 가운데에 기록하여 사사롭게 자신이 도둑질해 먹었고, 매음도(煤音島) 60리를 25리로 기록하고는 그 나머지 35리의 조세를 훔쳐 먹고 빼앗아 가졌습니다. 그리고 교동(喬桐)과 송가도(松家島)의 관계없는 민전(民田)을 사복시(司僕寺)에 붙여 두 섬에서 훔쳐 먹은 자취를 숨기려 하니, 교동 백성들이 원망이 골수에 사무쳐 그 고기를 먹고자 합니다."(숙종 40권, 30년(1704 11월 2일(무술) 3번째 기사)

 

사간원에서 사복시(司僕寺) 서리(胥吏) 탁주한(卓柱漢)의 부정을 밝히며 처벌을 요구했다. 국가에서 필요한 말을 관리하는 관청인 사복시 관리 탁주환이 강화(江華) 미법도(彌法島) 둘레 8리의 목장을 폐현(廢縣)으로 문서에 올려놓고 세금을 모두 착복했다는 것이다. 탁주환은 석모도 목장의 세금도 착복했다. 하지만 탁주환은 처벌 받지 않았다. 조정에 그를 비호하는 세력이었었던 때문이다. 

 

old.jpg과거에 미법도 백성의 세금을 착복한 관리가 처벌 받지 않았던 것처럼 죄 없는 미법도 어부들을 간첩으로 조작한 자들 대부분은 지금껏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고 있다. '조정'에 그들을 비호하는 세력이 여전히 건재하기 때문인가.

 

썰물 때를 기다리던 미법도 사람들 몇이 해안을 돌며 소라를 줍고 있다. 한 때 100여명이 넘게 살던 섬에 이제는 겨우 10여 가구의 노인들만 남았다.  

 

"소라가 안 붙더니 오늘은 좀 붙었네."

 

노인들은 농사짓는 틈틈이 소라도 잡고 굴도 깨 가계에 보탠다. 여기서 주운 소라는 석모도나 강화로 내다 판다. 가격은 1킬로에 4천5백 원선. 들물 때가 되자 영감은 소라를 들고 마을로 돌아가며 소라 줍는 할멈을 부른다.

'안 들어가."

"나 굴 찍을 거예요."

 

굴을 깨는 것을 여기서는 '찍는다'고 한다. 영감은 경운기를 몰고 마을로 돌아가고 할멈은 굴을 찍어 저녁 찬 거리를 장만한다.  

 

서검도, 조선 때 중국배 검문소…군사적 긴장이 섬 생태계에는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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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법, 서검도 등 민통선 안의 섬들은 아직도 외부와의 왕래에 제약이 많다. 섬에 민간인이 자유롭게 드나들기 시작한 것은 불과 5~6 년 전 부터다. 그 전에는 섬 안에 친인척이 있는 경우에 한해 출입이 가능했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북한의 황해도 연백과 인접한 강화 인근의 섬들은 지금도 군부대가 주둔해 있는 군사 요충지다. 한국전쟁으로 강화가 군사 분계선상에 위치하기 전에도 군사적 긴장은 오랜 세월 강화 지역의 숙명이었다. 고려와 조선의 왕도인 송도와 한양으로 진입하는 통로에 위치한 까닭이다.

 

교동도는 수군 절도사겸 삼도수군 통어사가 주둔하는 충청, 경기, 황해 삼도의 해군 사령부였고 인근의 미법도와 서검도, 동검도 등은 경기 수영의 전초기지였다. 지금 동검도는 간척으로 강화 본섬에 편입됐지만 그 또한 과거에는 강화, 김포 해협을 통해 한양으로 올라가는 배들을 검문 수색하던 검문소였다. 서검도는 주로 중국 쪽에서 오는 배들이나 교동도, 석모도, 연백, 개풍군 사이를 통해 한양으로 진입하는 배들의 검문소였다. 

 

서검도는 미법도에서 15분을 더 간다. 여객선은 솔책도(松柵島) 선착장으로 입항한다. 서검도와 솔책도는 썰물 때만 건널 수 있는 별개의 섬이었으나 지금은 간척으로 하나의 섬이 되었다. 두 섬 사이 갯벌은 15만평의 논으로 바뀌었다. 주민들은 서검도를 안동네, 솔책도를 솔착이라 부른다. 여름이면 황해도 연백을 코앞에 둔 갯벌에서 상합을 잡아 팔기도 하지만 군사분계선상의 바다에서 고기잡이는 자유롭지 못하다. 과거 풍요롭던 어장은 간데없고 교동도나 석모도처럼 주민들은 쌀농사로 생계를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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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비해 통행이 쉬워졌다고는 하지만 서검도나 미법도는 여전히 외부와 단절이 깊다. 하지만 외부세계와 소통이 자유롭지 못하다 해서 섬이 더 궁핍한 것은 아니다. 스스로 하나의 세계를 이루며 사는 섬은 욕망의 제어를 통해 만족에 도달한다. 욕망의 대상이 없으면 욕망은 충분히 절제 될 수 있다. 군사분계선이 이 섬을 무분별한 개발의 욕망으로부터 지켜주었다. 군사적 긴장이 섬의 생태계에는 축복이 된 것이다. 

 

서검 저수지 북쪽 갯벌 제방에 앉아 지는 해를 본다. 이곳도 밤이면 출입금지 지역이다. 불과 6킬로 거리의 황해도 연백 땅이 안개에 쌓여 희미하다. 안개 속에서도 북쪽의 방송 소리는 가깝게 들린다. 인기척 때문이었을까. 갯벌을 배회하던 고라니 한 마리 놀라서 솔책도 방향으로 한껏 달음질친다. 녀석과 나그네와의 거리는 1킬로도 넘는데 녀석의 사람에 대한 공포가 극에 달한 모양이다. 

 

고라니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섬의 밭들은 모두 울타리가 쳐져있다. 그래도 안심하지 못한 주민들은 한 해 한 번 씩 고라니 사냥을 통해 개체수를 줄인다. 그래도 소용없다. 고라니는 금세 번식하여 섬을 뒤덮는다. 북한이나 강화 본섬 등지에서 헤엄쳐 오는 것을 막아낼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토록 먼 인기척에도 놀라 도망친 것은 그 거리가 사냥꾼의 사정거리 안이기 때문일 것이다. 삶의 방향으로 내달리는 것은 모든 생명의 본능이다.

 

개장 초 ‘물 반 고기 반’ 저수지…군사분계선까지 투기 탐욕 발길

 

서검 저수지에 민물 낚시꾼들이 제법 여러 개의 좌대를 차지하고 앉았다. 낚시터가 개장 된 것은 3년 남짓. 그 전에는 이 섬에 일반인들의 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다. 오랜 세월 낚시가 금지 됐던 저수지는 개장 초기에 물 반, 고기 반이었다. 교통이 불편한 탓에 저수지에는 지금도 물고기들이 제법 많다.

 

외지에서 들어와 정착한 낚시터 관리인은 북한에서 떠내려 온 '떼목'들을 모으고 있다. 언젠가 전시장을 만들 계획이다. 여름 장마철 북에서 흘러온 나무 절구통과 소 구유통, 벌통 등을 보여 준다. 나무로 만든 벌통에는 훔쳐가지 못하도록 쇠사슬까지 달아매져 있지만 물살의 도둑질만은 피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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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서검도의 땅값도 많이 올랐다. 김포 매립장이 포화상태에 이르면서 서검도에 특수 폐기물 매립장이 들어설 거라는 소문이 도는 탓이다. 잘 보존된 천연의 섬을 도시의 쓰레기장이 되도록 부추기는 것은 투기꾼들이다. 어제는 미법도까지도 땅을 보러온 사람들을 만났었다. 전문 투기꾼들, 그들이 온 나라를 투기장으로 만들더니 이제는 군사분계선까지 왔다. 그들의 탐욕이 군사분계선을 넘을 날도 멀지 않아 보인다.

 

시인 /http://blog.naver.com/bogil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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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반갑습니다. 한겨레신문 이병학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