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의 가시울타리서 분단의 철조망으로 길따라 삶따라

 내몰린 왕과 왕족들의 한 서린 섬 교동도
 볼 것 하나도 없다던 곳에 뜻밖의 볼거리, 철새떼
 가깝고도 먼 섬, 연륙교 완공땐 멀고도 가까운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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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순이 왕(중종)께 보고하기를 … (교동도) 가는 길에 남녀노소가 뛰어나와 (유배 가는 연산군을) 다투어 상쾌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 위리안치소에 이른즉 위리가 좁고 높아서 해를 볼 수가 없고 다만 작은 집만 있었다. …”(<교동향토지>)
 패악을 일삼던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폐위돼 교동도로 위리안치된 정황을 설명한 대목이다. ‘위리안치’란 유배형 중에서도 가장 무거운 형벌이다. 5~9m 높이의 가시나무(탱자나무) 울타리 안에 가두고 행동을 제약했다. 주로 왕권다툼과 관련돼 내몰린 왕족들에게 내려졌다. 교동도는 연산군 말고도 고려의 21대 왕인 휘종, 조선 세종의 셋째아들 안평대군, 광해군의 형인 임해군, 인조의 동생 능창대군, 광해군의 폐비 류씨, 흥선대원군의 큰아들 영선군 등이 유배됐던 ‘왕과 왕족의 유배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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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안선의 5분의 4 둘러싼 철조망, 역사적 숙명인가
 
 인천시 강화군 교동도. 지금 모습도 ‘위리안치’를 닮았다. 해안선의 5분의 4를 철조망이 둘러쌌다. 뚫린 곳은 남동쪽의 포구 두세 곳. 이마저 군인들 통제를 받는다. 섬인데도 주민 3000여명 가운데 전업 어민은 단 2명(1명은 어촌계장, 1명은 병원선 운항 겸업)뿐이다. 그럴 만도 하다. 섬 북쪽도 북한 땅, 서쪽도 북한 땅인 최전방 지역이다.
 분단의 ‘가시울타리’에 갇히고 ‘지붕 없는 박물관’ 강화도에 눌려 진면목이 가려 있던 가깝고도 먼 섬. 이런 교동도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강화도~교동도 연륙교가 내후년 완공 예정으로 공사중이다. 이달 초 송영길 인천시장은 제2의 개성공단 격인 ‘교동도 남북평화산업단지’ 추진계획을 발표해 관심을 끌었다. 외지인 유입과 개발 바람에 교동도의 본모습이 사라질까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지만, 오랜 세월 눌려 살았던 주민들에겐 ‘희망가’로 다가온다.
 
 #삼선리·난정리 들판
 ‘볼 것 하나 없다’는 교동도의 볼거리를 찾아 들어간 지난 11일. 생각지 않은 ‘볼거리’를 만났다. 들판과 하늘을 휩쓸고 다니는 철새떼다. 수천마리씩 떼지어 몰려다니며 먹고 지껄이는 쇠기러기떼 모습이 장관이다. 가시울타리도 철조망도, 바다도, 엄중한 분단 현실도 날갯짓 몇 번으로 가볍게 뛰어넘는 새떼들. 철새떼만으로도 늦가을 교동도는 멋진 여행지였다. 그러나 삼선2리 주민 김종필(59)씨 말은 좀 달랐다. “인제 뭐 끽해야 기러기하고 오리잖우. 가끔씩 고니도 오긴 오지만, 옛날엔 종류가 정말 엄청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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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의 아픔도 분단의 고통도 날갯짓 한번에 훌쩍
 
 드넓은 간척지 논바닥에 내려앉아 나락 주워 먹으며 요란스레 떠들고 있는 쇠기러기를 가리키며 이한정(70)씨도 말했다. “이상기온이래서 그런지 올핸 오리(가창오리)두 벨루 읍서. 베 빌 무렵에 아주 새카맣게들 몰려왔는데.” 몇년 전까지도 오리류·기러기류, 고니·두루미 등 철새들이 다양했는데, 갈수록 종류가 눈에 띄게 준다고 한다.
 “한 40년 전까지두 능에(느시·천연기념물)라구, 아주 큰 새가 왔었는데, 통 볼 수가 없어.”
 “다 잡아치웠으니 읍지.”
 “피난 와가지구 그땐 뭐 먹을 게 있었나. 누런 색깔에 큰 오리 종륜데, 잡으면 고기가 개 한마리 이상이 나왔어.”
 “요새 철새 한 마리 잡음 을만 줄 알아? 아, 저 건네서 죽은 기러기 주워 갔다가, 몇 십인가 몇 백인가 벌금 엄청 물었대여.”
 “농작물 피해 오리두 만만찮어. 산돼지 저리 가라야.”
 주민들이 풀어놓은 철새 이야기에 사람살이 애환이 다 담겼다.
 
 #삼선2리 경로당
 어르신 다섯이 둘러앉았다. ‘곱새치기’ 놀이가 한창이다. 곱새치기란, 화투가 널리 퍼지기 이전까지, 두꺼운 종이를 길게 잘라 숫자를 나타낸 형상을 그린 24장의 패를 사용해 즐기던 전통 투전놀이다. 자신의 패를 내며 그 숫자를 표현하는 구성진 노랫가락을 곁들이는 게 특징이다. 일제강점기까지 주로 상갓집에서 밤을 새우며 판을 벌이던 놀이로 전국에서 유행했으나, 지금은 화투에 밀려 사라진 지 오래다.
 교동면 문화보존회 한기출(62)씨는 “아마 곱새치기 놀이를 지금도 이어가는 지역은 찾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붓으로 그린 옛날식 패(긴목·진목)를 기대했으나, 아쉽게도 일반 화투를 대신 사용한다. “그림 그려 진목 만들 줄 알았던 유일한 어른”이 몇년 전 돌아가셨단다. 한낮인데 소주병이 놓였다. “이게 다 장삿집 상주 웃길라구들 하던 투전놀이여. 술 한잔씩들 하면 제대로 소리가 나오지.”(한신우씨·77)
 1~4까지는 석장씩, 5~10은 두장씩 모두 24장으로, 4명이 하고 1명은 쉰다. 3장씩을 나눠가진 뒤 돌아가면서 패를 한장씩 내려놓으며 노래를 부른다. 다 내려놓으면 다시 패를 섞어 3장씩 갖는다. 남이 갖지 않은 수를 많이 살려낸 이가 이기는데, 이를 장원이라 한다. 어르신들이 차례로 패를 내며 구성진 노래를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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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낮에 소주병 놓고 곱세치기 놀음 한창
 
 “불리임 잡고(‘불림’은 자신의 차례가 왔다는 뜻), 어디 보자아. 팔도로 돌아라 여든닷냥 금이 났구나(8을 낸다는 뜻).”
 “장에 가거드은 우리 집에도 들러서 가라(10을 낸다는 뜻).”
 “짐장(김장) 도와주러” 또 “콩 털러” 가야 하므로, “잠깐 돈질하고 가겠다”던 어르신들은 걷잡을 수 없이 ‘곱새치기 삼매’로 빠져든다. “꼬꼬댁일세.” 꼬꼬댁은 “놀이에서 진 사람 한 명만 장원에게 쇠질(돈질)하는 것”이고, ‘두어댁’은 둘이, ‘서너댁’은 셋이 전부 장원에게 돈을 내는 경우다.
 놀이방식이 복잡해 몇번을 다시 묻자, 이한표(78)씨가 “못 알아듣는 게 당연하지” 한다. 한 숫자를 가리키는 표현이 다양하고, 사람에 따라선 즉석에서 꾸며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린 뭐가 나오는지 척 들으면 알지.”
 시간은 없고 놀거리는 많은 시대에, 고색창연한 ‘곱새치기 놀이’가 행해지고 있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구성지게 노래 부를 사람도, 재미있게 보고 들어줄 사람도 거의 없어 이제 ‘사라지는 일’만 남은 놀이다.
 
 #대룡리 골목시장
 육이오 전까지 교동도 주민에겐 거리로 보나 정서적으로 보나 경기도보다 황해도가 가까웠다. 생활권도 황해도 연안이었다. 교동도에 피란 와 눌러앉은 실향민들 고향도 대부분 연안·연백 일대다. 실향민들은 “전쟁 끝나면 고향 가겠다는 생각”으로 대룡리에 정착했다. 거적 깔고 움막 짓고, 떡이고 술이고 장사 되는 것이면 뭐든 해다 팔며 버티는 와중에 형성된 골목시장이다.
 “고생한 건 말도 못하지. 저 화개산 울창하지? 나무? 그때 어디 나무가 있어? 풀 한포기두 없이 홀랑 벳겨진 산이여. 아, 잔디 한 오래기까지 캐 모아서 불 때고 살았으니깐.”
 고구리에서 나오던 ‘토탄’은 요긴한 땔감이었다. 대룡리 골목에서 50년째 연안정육점을 열고 있는 최덕곤(73)씨가 말했다. “땅밑을 늑자(넉자)쯤 파면 꺼멓고 누런, 탄화된 고목이 나와. 그걸 낫으루다가 주욱 갈라 두부처럼 떠 말려선 난로에 때면 아주 화력이 좋았지.”
 토탄층에선 심심찮게 선인들 생활용품이 발견되기도 했다. 최씨는 “뭐가 낫에 툭 걸려 뒤져보면 화살촉이나 철제 수저 같은 게 나오는 거야. 다 던져버렸지.” 토탄층은 지금 저수지 물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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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 밑 파 땔감 구하던 토탄층은 저수지 물에 잠겨
 
 대룡리는 옛모습을 간직한 낡은 골목이지만, 교동도에선 가장 번화한 거리다. 고향 그리며 어렵게 살던 1세대 실향민들은 거의 세상을 떴고, 어린 시절 부모 손 잡고 넘어온 2세대들도 칠순을 넘어섰다.
 “요 근너여. 30분 노 저으면 되는 거리니깐. 저번에 애들이 쌍안경을 사가지구 왔드라구. 내 고향이 연백군 호동면 남당리 장수동인데, 지석리 가서 보니깐 아이구, 옛날 마을이 훤히 보이드라구. 다 바뀌었어두 척 보니깐 알겠드라구.”(교동이발관 지광식씨·72)
 50~60년대 지은 낡은 건물들이 이어지는 비좁은 골목 좌우로 골동품 같은 가게들이 즐비하다. “뭘 볼 게 있다고 여까지 오누. ‘1박2일’? 하이구, 거기 나오구서 한동안 볶아치드니 인제 뚝 끊겼어.”(최덕곤씨) 그래도 주말이면 몇명씩 들어와 골목을 기웃거리며 사진을 찍는다.
 다리 놓이고 개발 바람 불어도, 철새떼는 하늘을 덮고 어르신들은 곱새치기를 즐길까. 대룡시장 오래된 골목도 살아남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골목에서 만난 한 할머니가 말했다. “섬사람만 고생하란 법 있나. 개발이 돼이지, 개발.” 중앙철물 한옥숙(69)씨는 달리 말했다. “다리 놓이면 좋아질 건 또 뭔구? 자식들이구 관광객이구 당일루 왔다간 다 빠져나갈 텐데.” 그렇다. 자식들도 묵어 가고, 관광객도 묵어 가는 섬이 좋은 섬이다.
 강화 교동도/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 방치된 선인들의 발자취
  
 외딴 마을, 조용한 여행지를 선호하시는 분들, 적적하고 을씨년스런 분위기도 마다않는 분이라면 교동도 여행 강추다. 섬이란 대개 외진 곳이지만, 수도권 섬 무리에 속하면서도 교동도처럼 여행자들 발길이 덜 닿은 섬도 드물 것이다.
 요즘엔 옛것, 낡은 것에 관심을 갖는 젊은층도 부쩍 늘었다. 방송(‘1박2일’)에 잠깐 소개돼 관심을 모은 교동도의 낡고 누추한 시장골목(대룡시장)으로 20대 남녀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자전거를 가지고 들어와 마을과 유적들을 구석구석 페달을 밟아 둘러보는 이들도 많다. 대룡시장 말고도, 을씨년스럽게 허물어져 방치돼 있는 옛사람들 흔적이 수두룩한 곳이 교동도다. 우거졌던 잡풀 시들고 현란한 단풍빛도 바랜 늦가을이니, 고려·조선 왕족들의 위리안치 유배지이자, 군사지역으로 철조망에 갇힌 교동도 풍경이 제대로 쓸쓸하게 다가올 터이다.
 한강·임진강 물과 예성강 물이 합쳐지는 물길 어귀, 교동도는 삼국시대 이래 서해안 해상교통의 요지였다. 조선 중기(인조)엔 경기·황해·충청 삼도 수군을 관할하는 삼도수군통어영이 설치됐던 중요 섬이다. 마을에 바닷가에 산자락에 남아 있는 교동도 선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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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동읍성
 교동면 읍내리. 조선 인조 때, 고읍리에 있던 읍성과 관아가 옮겨와 형성된 마을이다. 비석거리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들면 성곽 흔적과 함께 곳곳에 흩어진 석조물들이 다가온다. 비석거리는 옛 교동부사·군수들의 행적을 기려 세운 선정비·불망비들을 모아 세웠던 곳이다. 길 넓히기 공사와 농지 개간으로 옮겨 다니다, 지금은 교동향교 들어가는 길목에 39기의 비석들이 모여 있다.
 무너져가는 성곽 흔적 중 가장 뚜렷이 남아 있는 것이 남문 석축이다. 교동읍성에 있던 동·남·북문 중 남문인 유양루 자리다. 문루는 사라지고 홍예와 주변 성벽만 남아 있다. 1921년까지 누각이 남아 있었으나, 폭풍으로 허물어져 철거했다고 한다.
 문으로 들어가 길 오른쪽으로 잠시 걸으면 민가주택 뒤 밭둑에 선 두개의 돌기둥과 돌계단을 볼 수 있다. 교동부 관아로 드는 내삼문이 있던 자리다. 내삼문 초석은 본디 넷이었으나, 두개를 일제강점기에 교동공립보통학교(교동초교)에서 가져가 교문으로 썼다. 교동초교 안에서 교명이 새겨진 초석을 볼 수 있다. 돌기둥 위 산자락에 무너진 시멘트건물 터가 있는데, 이곳이 관청이 있던 교동부 터(교동부지)다. 일제강점기엔 금융조합이 들어서 있었다고 한다.
 민가 자리는 옛 객사 터로 추정된다. 집주인 한기일(70)씨가 말했다.
 “허물어져가는 한옥이었는데 하도 낡아서 집수리를 하려다, 목수가 헐고 새로 짓는 게 낫다고 해 허물어버렸지. 그때 나온 주춧돌들이 저거여.”
 주춧돌 등 여러 석재들을 세워 밭의 경계석으로 쓰고 있다. 집 앞 길옆엔 짜 맞춘 우물 정(정)자 석재가 그대로 남은 커다란 우물이 방치돼 있다.
 읍성 성곽은 무너져내리긴 했지만, 원형이 살아 있는 모습이다. 북문 터 성곽 안쪽 커다란 오동나무 밑에서 연산군의 폐비 신씨 초상을 봉안했다는 부근당이 있다. 이 주변은 철종이 어린 시절 살던 잠저지(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곳)이기도 하다.
  
 ⊙ 삼도수군통어영 남산포
 읍내리 바닷가 포구가 남산포다. 어항의 모습은 찾을 수 없고 배 한척만이 밧줄에 묶인 채 풍랑에 출렁인다. 지금은 썰렁해졌지만, 일제강점기까지 죽산포와 함께 중국·일본 배들이 드나들던 포구다.
 교동문화보존회 한기출씨는 “남산포는 조선시대 중국 등 외국 배들이 한반도로 들 때 기항하던 중심포구였다”며 “60년대까지 운행했던 철선 갑제환호가 인천에서 교동 남산포를 거쳐 연백까지 오갔다”고 말했다.
 남산포는 삼도수군통어영이 있던 자리이자, 중국 사신을 맞는 장소(대빈창)이기도 했다. 남산(진망산) 위에 사신당이 남아 있다.
 남산포로 드는 길 삼거리 왼쪽 시멘트창고 건물 옆 쓰레기더미 사이에서 높이 1m쯤 되는 돌기둥 하나를 볼 수 있다. 전성기 남산포구에 정박한 배들이 밧줄을 묶던 계류석이다. 여러개가 줄지어 있었다지만 하나만 남아 방치돼 있다.
  
 ⊙ 화개사와 교동향교
 화개산(260m)은 교동도의 최고봉. 산 남쪽 자락에 조선 인조 때 고읍리에서 옮겨온 교동향교가 있다. 규모는 크지 않으나, 동재·서재 등의 건물 형태와 배치가 독특하다. 왼쪽 담 옆에선 물맛 괜찮은 약수가 솟는다.
 화개사는 비구니 스님 한 분(윤진 스님)이 지키는 자그마한 암자다. 이 절도 고읍리 쪽 절골에 있다 옮겨왔다고 한다. 법당 건물은 영락없는 한옥의 모습이다. 여기 얽힌 사연이 우습고 씁쓸하다. “옛 법당이 불탄 뒤 불상을 모실 곳이 없어 임시로 요사채에 모셨는데, 결국 이 불상을 한 대학교에 팔아 마련한 돈으로 읍내리의 김씨 부잣집 사랑채를 사들여 옮겨 지었다”(한기출씨)고 한다.
 그러나 화개사는 속 깊은 도량이다. 주민들이 동제를 지내거나 행사가 있을 때, 스님과 불자들이 힘을 모아 음식 등을 장만해 가져간다고 한다. 절 주변에서 아름드리 소나무 한 그루와 닳아빠진 자그마한 부도 하나를 만날 수 있다.
 
 ⊙ 교동도 밑은 ‘물 탱크’?
 화개사 왼쪽 임도를 따라 절 뒷산 쪽으로 오르면 굽잇길 오른쪽에 움푹 꺼진 커다란 웅덩이를 만난다. “오래 전에 엄청난 물이 솟구쳐나오던 샘”이라거나 “물이 고였던 못”이었다는 얘기가 있다. 구전돼오는 두 샘, 문정과 무정을 가리킨다는  이야기도 있다. 임신부가 문정 샘물을 마시면 문인이 태어나고, 무정 샘물을 마시면 무인이 태어난다는 얘기다. 한기출씨가 말했다.
 “여기서 엄청난 물이 솟아나왔는데, 바다 건너 삼산면(석모도)의 임신한 아낙네들이 달밤에 허옇게 솟구치는 물줄기를 보고 놀라 낙태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한 스님이, 명주 1천필을 돌에 매달아 물 밑바닥을 막으면 된다고 해서 그대로 했더니 막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교동도 주변에는 실제로 이처럼 물이 솟는 용천 지대가 발달해 있다고 한다. “교동은 물 위에 뜬 섬”이라거나, “황해도 쪽에서 흘러온 수맥이 교동에서 터진다”거나, “어디든 파면 온천이 솟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흘러다닌다. 교동도 수자원 정보에 정통한 한기출씨는 교동도와 미법도 사이 바다 밑에도 엄청나게 물이 솟는 장소가 실제로 있다고 말했다.
 “바닷물이 만조와 간조 사이 시간대엔 잠잠해지는데, 그 장소만 물살이 심하게 요동친다. 실제로 그곳을 지나던 작은 배가 갑자기 뒤집힌 적도 있었다.” 한씨는 교동도에서 20대째 조상 대대로 터를 잡아 살아오고 있는 교동 토박이다. 그는 “물 부족에 대비해, 그 바다 밑에서 솟는 물을 끌어다 농업용수로 쓸 계획을 세운 적도 있었다”고 전했다.
 
 ⊙ 고읍리와 연산군 유배지
 고구리는 일제강점기 고읍리와 구산리를 합치며 지은 지명이다. 고구리 저수지 귀퉁이에 고읍리가 있다. 읍내리로 읍성을 옮기기 전까지 관아가 있던 고려시대 읍성 터다. 마을을 둘러싼 낮은 구릉 위에 남은 토성과 석축 흔적, 옥사 터(형옥지) 등을 볼 수 있다.
 화개산 자락 쪽을 살펴보면 옛 집터들이 무수히 남아 있어, 당시 마을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다고 한다. 토성 터 남쪽엔 13세기 고려 희종이 유배 와 머물던 경원전 터도 있다.
 화개산 자락 고구2리(영산골)는 옛 이름이 연산곡이다. 연산군이 유배된 장소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뒷산을 영산으로 불렀던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마을엔 700년이 넘었다는 거대한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주민들은 해마다 삼월삼짇날 이 나무에 치성을 드리며 마을의 안녕을 비는 대동굿을 하고 연산군 위령제도 함께 지낸다고 한다.
 화개산 등산로를 따라 10여분쯤 걸어 오르면, 널찍한 터를 닦고 최근 세운 ‘연산군유배지’ 빗돌을 만난다. ‘연산군 위리안치소 추정지’다. 유배 장소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어, 추정지로 거론되는 세곳 중 가장 유력하다고 평가되는 이곳에 빗돌을 세웠다. 정확한 유배 지점은 아니지만 화개산에 막혀 어둑한 북서향 지형, 좌우로 우거진 울창한 수림 등이 위리안치 터로 삼았음직해 보인다.
 죄인을 대상으로 인체실험에 가까운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는 연산군. 그는 유배된 해 겨울 병을 얻어 숨을 거둔다. 병이 심해진 사실을 알고 중종이 의원을 보내 구하려 했으나, 이루지 못했다고 전해온다. 화개산 자락, 연산군 유배 터에 흩날리는 늦가을 낙엽들이 권력의 무상함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화개산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옛 한증막 터, 화개약수, 조선 말 효자무덤 등도 만날 수 있다. 정상 전망이 좋다. 강화도와 석모도 황해도 등 주변 육지와 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최근 세운 정자 대운정이 정상에 있다. 교동도의 옛 이름이 대운도다. 
 
  ◇ 알아두면 좋아요
 
 ⊙ 강화도 창후포구~교동도 월선포구 배편은 물때에 따라 소요 시간이 네배까지 차이가 난다. 물이 찼을 땐 15분 가량 걸리지만, 물이 빠지면 배가 우회해 1시간이나 걸린다. 교동도에서 나올 때도 마찬가지. 특히 당일 여행일 경우, 월선선착장에 내려 미리 그날의 ‘배 도는 시간’을 알아두시길. 
 ⊙ 창후리 포구에서 배를 탈 때 인적사항을 적어 군인에게 제출해야 한다.
 ⊙ 교동도에서 철조망이나 부대 주변, 북녘 해안을 향한 촬영은 금지된다.   
 ⊙ 대룡리 시장골목은 주말에 더욱 썰렁해진다. 식당 등 많은 가게들이 문을 닫고 자식들 기다리는 서울·인천으로 나가기 때문.
  
  ◇ 여행쪽지
 
 ⊙ 가는 길/서울 외곽순환고속도로 김포나들목에서 나가 48번 국도 따라 강화도로 간다. 강화읍 거쳐 하점면 신봉삼거리에서 좌회전해 교동·창후 표지판 따라 가면 창후리 선착장이다. 교동도 월선포구행 배편은 물때에 따라 달라지므로 일정하지 않지만, 봄·여름엔 하루 20회 안팎, 가을·겨울엔 10회 안팎이 운행된다. 화개해운. 편도 1인 2300원, 승용차 편도 1만6000원, 오토바이 5000원, 자전거 3500원.
 ⊙ 교동도 둘러보기/교동도에 마을버스가 2대 있다. 2시간 간격으로 운행돼 이용엔 불편하다. 승용차나 자전거를 싣고 들어가 둘러보는 게 좋다. 섬의 주요 마을을 도보여행은 1박2일 코스다. 읍내리·교동읍성·남산포·향교·화개사·대룡리시장·고구리·연산군유배지·한증막 등을 걸어서 둘러보는 데도 6~7시간은 잡아야 한다. 화개산 산행은 왕복 1시간40분 안팎. 교동면사무소 옆, 고구2리 영산마을 등에 등산로 입구가 있다.
 ⊙ 먹을곳·묵을곳/고구리 송계정(불고기·생대구탕) (032)932-5559, 대룡리 풍년식당(찌개류·생선조림류·2인 이상 가능) (032)932-4629. 대룡리에 여관(교동파크) 하나와 민박·여인숙들이 있다.
 ⊙ 여행문의/강화군청 문화관광과 (032)930-3515, 교동면사무소 (032)930-4310.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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