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서린 부소산성 숲길엔 ‘역사’가 주렁주렁 걷고 싶은 숲길

벼랑 끝 몰린 사비성 백제인 심정 느낄 듯
한번 마시면 3년 젊어진다는 고란약수 ‘시원’
  
백제 고도 공주에 공산성(웅진성)이 있다면, 부여엔 부소산성(사비성·소부리성)이 있다. 부여 사비성은 백제의 마지막 도성이다. 백제 성왕이 538년 웅진에서 이곳으로 천도하면서 쌓은 토성과, 통일신라 때 이 성을 에워싸고 연결해 다시 쌓은 토성이 부소산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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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춧돌·기단석, 백제 때 만들어진 석재 재활용

 
금강의 한 구간인 백마강이 감싸고 돌아나가는 106m 높이의 이 산에, 거닐고 쉴 만한 울창하고도 아름다운 숲길이 기다린다. 숲길 주변엔 낙화암·고란사를 비롯해 백제시대 궁터(추정)에서부터 조선시대 관아에 이르기까지 선인들의 발자취가 즐비하다. 세계대백제전 여행길에 나섰다면 부소산성 탐방은 필수 코스에 가깝다. 부여읍내여서 이동 부담도 없다.

부소산 숲길로 오르기 전에 산성 정문 오른쪽 부여여고 안의 오래된 우물 팔각정(어정)에 들른다. 백제시대 우물로 임금도 신하도 이 물을 마셨다고 알려지는데, 육중한 대리석 뚜껑으로 덮여 있다. 정문 왼쪽 너른 들판은 발굴된 백제 유적지다. 부소산성 남쪽 기슭, 백제 왕궁 터로 추정되는 ‘관북리 유적’이다. 왕궁 건물로 보이는 대형 건물터와 목곽 창고, 연못 터와 배수로, 도로 흔적 등을 발굴해 일부를 복원해 놓았다. 이곳에서 나온 목간(기록용으로 썼던 나무쪽)·금제귀걸이장식·토기·기와류 등이 부여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유적지 뒤쪽엔 동헌·객사·내아 등 조선시대 관아건물(1869년 신축)이 있으나, 개방을 하지 않아 아쉬움이 남는다. 부여군청 관광해설사 최미선씨는 “객사 등 관아건물의 주춧돌·기단석은 대부분 백제 때 만들어진 석재를 활용하고 있다”며 “탑신·옥개석 등 탑돌도 볼 수 있다”고 했다. 관북리 유적 건너편, 부소산성 옛 정문 쪽에선 지금도 발굴작업이 한창이다. 백제시대 절 천왕사 터(추정)다. 사리를 넣던 사리공이 뚫린 심초석과 금속제 귀면상 등이 여기서 발굴됐다고 한다. 천왕사 터 위 산자락엔 또다른 백제 때 절 서복사 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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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삼충사 터에 신궁 공사로 상처 투성이

 
벽돌을 깐 널찍한 숲길을 걸어 삼충사로 간다. 백제의 세 충신으로 꼽는 성충·흥수·계백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삼충사 터에 일제강점기의 씁쓸한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삼충사 못미처 삼거리 안내간판 왼쪽을 살펴보면 이끼 낀 아치형 시멘트 구조물을 찾을 수 있다.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를 위해 드나들던 통로로, 일본인들은 차량으로 큰길을 이용하고, 부여 주민들은 이 통로를 통해 신사참배를 했다고 전해온다.

일제 말기 조선총독부는 삼충사 터에 일본 왕이 직접 참배하는, 무려 6만5000여평에 이르는 ‘부여신궁’을 지을 계획이었다고 한다. 부여에 도쿄신궁과 맞먹는 1급 신궁을 지어 ‘황민화 작업’에 박차를 가하려는 의도에서였다. 공사를 위해 부여읍내의 유적들이 파헤쳐지고, 일본인과 친일파들의 땅투기가 극성을 부려 땅값이 천정부지로 뛰었다. 그러나 일본 패망으로 공사는 중단됐고, 광복 뒤 주민들이 신궁 공사장을 파괴했다고 한다. 그 터에 1957년 삼충사를 지었다.
 
삼충사 뒤쪽은 옛 백제토성의 남문 자리다. 단풍나무 울창한 숲길을 걸어 제2남문터(부여여고 뒷산) 지나 영일루로 오른다. 본디 계룡산 쪽에서 뜨는 해를 맞이했다는 영일대 터인데, 부여 홍산현에 있던 관아 문루를 1964년 이곳에 옮겨놓고 영일루라는 현판을 걸었다. 안쪽에 걸린 ‘인빈출일’ 현판은 ‘삼가 공경하는 마음으로 해를 맞는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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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다퉈 ‘백제 쌀’ 찾느라 가짜까지

 
옛 토성 흔적들을 넘나드는 숲길은 소나무와 참나무류가 뒤섞인 청설모·다람쥐 놀이터다. 신발 밑창에 깔았다는 신갈나무도, 시루떡 할 때 깔았다는 떡갈나무도 이제 요란한 매미 소리 대신 은은한 풀벌레 소리를 거느렸다. 영일루부터는 흙길이 이어진다.
 
널찍한 평지에 소나무가 숲을 이룬 ‘군창지’에 이른다.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사용된 창고 터가 확인된 곳이다. 여기에 전해오는 이야기 한 토막. 일제강점기 발굴 당시 이곳은 백제 때 창고 터로 알려졌는데, 여기서 탄화된 쌀이 대량으로 발견됐다. 당시 부여 고적보존회의 가장 큰 고민이 “창고 터에서 출토되는 쌀을 부여를 찾는 고급관리나 저명인사에게 기념으로 선물하는 일”이었다. 수학여행 온 학생들도 앞다퉈 ‘백제 쌀’을 찾으면서, 기념품 가게엔 가짜 백제 쌀이 등장해 팔려나갔다고 한다. 그러나 이 창고 터의 쌀은 뒤에 조선시대 것으로 확인됐다.

 
통일신라 때 토성 흔적을 보고 동문터 지나 이른바 태자골로 든다. 늦가을 단풍 터널이 눈부시다는 숲길이다. 붉은 물봉선 만발한 샘터(태자천)에서 ‘낙화암에서 몸을 던졌다는 전설의 백제 궁녀들을 모신’ 사당 궁녀사 들머리 거쳐 부소산성 광장까지 어둑한 숲길이 이어진다. 광장에서 왼쪽 언덕으로 오르면 전망 좋은 누각 반월루를 만난다. 부여읍내 일부와 구드래 들판, 반월형으로 읍내를 감싸고 도는 백마강, 강 건너의 부산(사비천도 무렵 폭우로 떠내려왔다는 작은 산)까지 한눈에 둘러볼 수 있는 곳이다. 반월루 뒤 산책로 안쪽 길가엔 복원해 놓은 백제 때 수혈주거지(현대식 건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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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타고 올려다보는 낙화암 백화정은 아!

 
광장에서 더 오르면 사자루(사비루)가 있는 부소산 북쪽 끝 정상이다. 지는 달을 감상했다는 송월대가 있던 곳으로, 애초 백제 때 망대가 있었던 자리로 추정된다. 누각은 1919년 임천 관아의 문루를 옮겨 세운 것이다. 옮겨 세울 당시 이곳에서 광배 뒷면에 정지원이란 이름이 새겨진 백제 때 ‘금동석가여래입상’(보물 196호, 현재 부여박물관 전시)이 발견됐다. 사자루 현판은 의친왕 이강의 글씨라고 한다. 나무에 가려 전망은 빼어나지 않으나, ‘강 살리기 공사’를 벌이며 벌건 흙탕물로 변한 백마강 물길이 내려다보인다.

img_05.jpg다시 내려와 낙화암을 향해 내리막길을 걷는다. 낙화암 전망대에선 ‘흙탕물 백마강’ 물길이 한결 또렷하게 눈에 들어온다. ‘삼천궁녀’ 전설이 부풀려졌다지만, 적들에게 쫓겨 절벽 끝에 몰린 백제인들의 비장한 심정이 헤아려진다. 낙화암엔 1929년 세운 정자 백화정이 앉아 있다.
 
물가 쪽으로 더 내려가면 고란사가 나온다. 백제 때 전설이 전해오는 절이지만, 당시 유물은 없다고 한다. 법당 뒤 절벽 밑에 백제 임금이 고란초를 띄워 마셨다는 고란약수가 있다. 샘 앞쪽에 실제 고란초를 전시해 뒀다. 고란초는 고사리목에 속하는 양치식물이다. 샘이 깊어 손잡이가 긴 스테인리스 국자로 물을 떠 마셔야 하는데, 한번 약수를 마시면 3년 젊어진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여기서 오던 길 돌아나와 서복사 터, 하동정씨 정려각 쪽으로 내려와도 되고, 고란사 밑 선착장에서 유람선을 타고 구드래선착장으로 나와도 된다. 황포돛배·일반유람선이 함께 운행한다. 배를 타고 올려다보는 낙화암 백화정 풍경이 근사하다.
 
부여/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부여 여행쪽지  
⊙ 가는 길| 수도권에서 경부고속도로 이용해 가다 천안~논산고속도로로 갈아타고 간다. 공주분기점에서 대전~당진고속도로로 바꿔타고 당진 쪽으로 잠시 가다 다시 서공주분기점에서 공주~서천고속도로 이용해 서천 쪽으로 간다. 부여나들목에서 나가 부여읍내로 간다.
⊙ 먹을 곳| 연밥과 마밥을 내는 백제의 집(041-834-1212), 제주은갈치·고등어조림을 내는 물항식당(041-836-1533).
⊙ 묵을 곳| 읍내 곳곳에 모텔이 많다. 백제관광호텔 (041)835-0870, 삼정유스호스텔 (041)835-3101.
⊙ 여행문의| 부여군청 관광과 (041)830-2251, 부여문화원 (041)835-3318, 세계대백제전 조직위 (041)857-6955.
 
이병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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