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숲이 병풍처럼, 거목들이 성처럼 길따라 삶따라
2010.08.26 10:48 너브내 Edit
함양군청에서 상림 숲길·이은대·중앙시장 거쳐 함양문화원까지 7.5km

경남 함양은 거목들이 이룬 오래된 숲의 고장이다. 천년이나 묵은 아름다운 숲 상림 말고도, 거리 곳곳에 수백년 살아온 느티나무들이 큰 그늘을 만들어 주민들을 품는다. 그리고 더 큰 그늘을 드리운 거목들이 있다. 신라 때 함양태수를 지낸 고운 최치원, 조선 초 함양군수를 지낸 점필재 김종직이다. 군민들은 예나 지금이나 이 큰 나무들이 거느린 빛과 그늘 안에서 일하고 또 쉰다. 자부심도 아픔도 이 그늘 아래 있다. 함양군청 앞에서 걷기 시작해 상림과 함양의 젖줄 위천, 읍내 골목과 함양시장길을 밟아 다시 군청으로 돌아온다.
느티나무 그늘 짙은 군청 주차장에 차를 대고 옆의 함양초등학교로 간다. 군청 앞 마당은 담장을 없앤 초등학교 앞 정원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학교 옆에 ‘거대한 뿌리’를 가진 느티나무가 기다린다. ‘함양 학사루 느티나무’(천연기념물)로 불리는 우람하고 건강하고 멋진 나무다. 높이가 21m인데, 줄기 둘레는 무려 9m에 이른다. 안내판엔 1천년 수령의 ‘천년목’이라 적었으나, 김종직(1431~1492)이 함양군수를 지낼 때 어린 아들을 잃고 서울로 떠나며 학사루 옆에 심은 나무라고 한다. 밑둥에, 열대지방 거목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판근막(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뿌리 부분이 넙적한 판 모양으로 자라 튀어나온 부분)들이 형성돼 있다.
군청 문화관광 해설사 전영순씨는 “이처럼 오래 되고도 건강한 아름다움을 내뿜는 나무는 보기 드물 것”이라며 “중간 줄기 위쪽엔 참나무 한 그루가 돋아 자라고 있다”고 말했다. 무수히 뻗은 가지들에선 매미들이 일제히 울어대 온갖 소음을 삼키는데, 그늘에 든 어린이들은 용케도 재잘재잘 할말 다한다.

길 건너에 학사루가 있다. 함양초교 자리는 본디 함양읍성의 객사가 있던 곳이다. 객사로 드는 2층 문루가 학사루다. 교실·도서관으로 이용되며 학교 안에 있던 것을 1979년 지금 자리로 옮겼다. 현판도 기둥에 내건 주련도 모두 최치원과 관련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애초 통일신라 때부터 있던 누로, 최치원이 태수로 있을 때 이 누에 자주 올라 시를 지었다고 전해온다. 최치원은 ‘최 학사’로도 불렸다. 임진왜란 때 불타 숙종 때(1692년) 중건했다.
영남학파 종조로 일컬어지는 김종직은 사후 유자광의 모함으로 부관참시당한 인물이다(무오사화). 학사루에 걸려 있던 유자광의 시 편액을 김종직이 철거해 불태웠는데, 이것이 유자광의 원한을 사 무오사화의 한 원인이 됐다고도 전한다. 학사루 뒤뜰엔 배롱나무가 화사한 꽃을 밝혔다.
학사루 주변은 우체국·등기소·경찰서·읍사무소가 몰려 있는 행정 중심 거리다. 자원봉사센터 지나 남양떡방아간·남양청과, 그리고 어탕국수로 이름난 조샌집이 있는 네거리 지나 김치찌개가 맛있다는 연밭식육식당 앞에서 길 건너 골목으로 든다. 식당도 이발소도 다방도 간판에 ‘연’ ‘연밭’이 들어 있다. 지명이 연밭머리다. 상림의 들머리가 되는 지역으로 오래 전에 연밭이 있었다. 연다방 앞길에는 차 배달 나가는 소형차들이 분주하다. “건설현장에서도 논밭에서도, 일단 차 한잔 하고 일을 시작”하는 게 일상화됐기 때문이다.
해병대 기동순찰대 앞을 지나 보림사 쪽으로 걷는다. 길바닥에 널어놓은 빨간 고추가 눈부신데, 열린 대문간에 앉으신 두 할머니가 보인다. 옆엔 달덩이같은 박들이 쌓여 있다. 밭에서 박을 따 실어다 놓고 막걸리를 한잔 하시는 중이다.
“박 깎아 말리갖고 너물(나물) 하모 차암 좋아예. 아들도 주고 사둔도 줄라꼬.”(유상달씨·71) “한잔 주까. 서울서 왔다꼬. 하매야, 우리 큰아도 서울 살아요. 그 아가 차암 효자라. 아침·저녁 전활 해요. 우찌 지내노, 밥 잡샀노 하고….”(김봉순씨·85) 갑자기 눈물 글썽해지시며 건네는 막걸리잔을 받아 들이켜니 시원하고 푸근하고 짭짤한 고향 맛이다.

함양 군민 대대로 거닐어온 아늑한 숲길
보림사는 1912년에 창건했다는 절. 이 절 미륵전에, 용산사 터 민가에 쓰러져 있던 것을 옮겨온, 고려 초기의 석조여래입상이 있다. 주지 수인 스님은 천진난만한 아이 표정이다. 거의 친구처럼 지내는 까닭에 동네 어린이들이 줄줄 따라다닌다고 한다. “아이들이 불쌍해요. 놀지도 못하고 공부만 하니 공부기계지. 애들은 그저 맘껏 놀게 해야 돼요. 그래야 사람으로 크지.” 이 절 한쪽엔 45년 전에 지었다는 미얀마 양식의 불교회관도 있다. “당시엔 읍내에서 가장 큰 건물이어서, 결혼식장으로 자주 이용됐다”고 한다.
식당 황궁·옥연가, 함양유림회관 지나 상림으로 걷는다. 숲이 아름답다고 할 때 이 숲을 빼놓고 말하기 어렵다. 들어서는 순간 어둑하고 아늑한 숲길이 한없이 이어진다. 상림은 통일신라시대 문장가 최치원이 함양태수로 있을 때 위천 물길을 돌리고 조성했다는 숲이다. 함양 사람치고 이 숲에 사연 한자락 간직하지 않은 이 드물다고 한다. 주민들이 대대로 거닐고 노닐어 온 부모 품같은 숲이다. 주로 활엽수인 100여종의 나무 2만여 그루가 6만평 넓이의 숲을 이루고 있다. 길이 1.6㎞.
숲 안엔 볼거리도 즐비하다. 함양읍성의 남문이던 망악루(지리산을 바라보는 누라는 뜻)를 옮겨세우며 이름을 고쳐지은 함화루, 이은리 물가에서 옮겨온 고려시대 석불, 박지원의 소설 ‘열녀함양박씨전’의 실제 모델이었다는 밀양 박씨의 정려비, 30여기의 선정비 무리와 척화비, 1923년에 세운 최치원 신도비와 정자 사운정(1906년 건립)·초선정이 있다. 선정비 중엔 악질 탐관오리의 대명사가 된 고부군수 조병갑의 것도 있어 눈길을 끈다. 고부군수 부임 8년 전에 함양군수를 지냈다는데 그때는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느티나무·개서어나무가 몸을 섞은 연리목도 보인다. 상림 끝자락엔 물레방아를 복원해 놓았다.
상림 위쪽 죽장마을은 성종 때 문장가 뇌계 유호인이 살던 곳이다. 그가 노모 봉양을 위해 낙향(선산)하려 하자 성종이 “이시렴, 부디 갈따, 아니 가든 못할쏘냐, 무단히 슬터냐, 남의 말을 들었느냐, 그려도 하 애닯고야 가는 뜻을 일러라” 하는 ‘이별가’를 부르며 잡으려 했던 충신이다. 뇌계는 상림 주변 위천 물길의 옛 이름이다. 상림 옆으론 읍내의 ‘연밭머리’ 지명에 걸맞는 2만여평 넓이의 연밭을 조성했다.
물살이 거세고 깊다는 ‘까막소’ 물 건너편 언덕의 군민의 종 종각을 바라보며 고운교 앞으로 나와 위천 물길을 따라 걷는다. 물가에도 주택가에도 구석구석 거대한 느티나무가 서 있다. 그 그늘엔 어김없이 정자가 있고 어르신들이 둘러앉아 손바람·부채바람을 일으키신다. 돌북교(함양3교) 지나 거센 물살이 바위를 휘감아 흐르는 소고대를 바라보며 두루침교(함양1교) 쪽으로 간다.
한 떼의 학생들이 지도를 펴들고 상림 쪽으로 걸어간다. 수원 영통의 지기학교(대안학교)에서 국토 탐방을 왔다는 초등 5년~중 3년생 6명이다. 조장 김현주 양(중3)은 “5박6일 일정으로 남원·구례·하동·산청을 둘러보고 함양으로 왔다”며 “선생님이 계시지만, 현장에선 우리가 지도 들고 스스로 찾아다닌다”고 말했다.
왼쪽 운림리와 용평리 사이 거리는 옛 시장(시비전거리)이 있던 곳이다. 새 시장(중앙시장)이 생기며 상권이 쇠퇴했다. 두루침교를 건너 백연리(栢淵里)로 간다. 물길 가운데 소고대 바위엔 오래전 소나무·잣나무가 있었고 그 주위에 깊은 소가 있었는데 대홍수로 쓸려 내려갔다고 한다. 백연리에는 최치원과 김종직을 함께 모신 백연서원이 있었으나 서원철폐령 때 사라졌다. 백연리는 소고대를 중심으로 상백(돌북)마을과 하백(두루침)마을로 나뉜다.
두루침교 건너 잠시 걸으면 함양국유림관리소에 이른다. 일제강점기 임업시험장이 있던 곳이다. 1940년에 일본식·서양식을 섞어 지은 임업시험장 건물(등록문화재)은 현재 산림정보관으로 쓰인다. 국유림관리소에선 숲을 관찰하며, 나무로 곤충·꽃 등을 만드는 목공예체험을 무료로 할 수 있다. 해설사 4명 대기. 토요일 휴관.
백연리 산자락엔 대나무숲이 유난히 많다. 하백마을회관 앞에서 만난 정완봉(72)씨가 말했다. “저짝 대나무밭은 다 비 삣다. 백로 때문이라. 그기 좋고도 나쁜 짐승인기라. 밤새 깨르륵 캐싸 잠도 몬자고 빨래도 몬내건다. 들올때 똥 찍 깔기고, 나갈때 깔기고 대나무가 다 죽어나간다카이.” 대나무숲을 베어 버리자, 백로는 아랫마을 인당의 대나무밭으로 옮겨갔다.
‘이은대’ 울창한 숲길을 올라 한국전쟁 희생자 충혼탑을 바라본다. 이은대란 함양군수 김종직이, 진주로 부임하던 관찰사 유자광이 함양에 들렀을 때 일부러 모른척 외면하고 들어가 있었다는 언덕이다. 유자광은 당시 모함과 모사로 출세가도를 달리던 정치꾼이었다. 이 언덕엔 김종직이 이임한 뒤 군민들이 그를 흠모해 세운, 살아 있는 사람을 모시는 ‘생사당’(이은당)이 들어섰다. 김종직은 군수 재직때 세금·부역을 크게 줄이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이 사당은 유자광의 모함으로 철거됐다고 전한다. 사당이 있던 자리엔 일제강점기에 신사가 들어서기도 했다.
충혼탑을 내려와 다시 강변을 걷는다. 오른쪽 마을 뒤 대나무숲에 하얗다. 백로 서식지다. 대숲 아래엔 낡아가는 한옥이 들어앉아 있다. 김종직의 제자로 무오사화때 함께 화를 당한 김일손의 동생 김구손의 후손 김철환(64)씨가 사는 고택이다. 작그마한 안채는 300년 됐다지만 다 개조됐고, 1918년(대정7년) 지은 사랑채와 문간채, 곳간이 남아 있다. 사랑채엔 ‘아산서실’이란 현판이 붙었다. 아산은 김씨의 작고한 형님의 호다. 김씨는 베트남전 참전때 총상을 입어 한 팔을 잃고 시력까지 잃은 분이다. “다리 다친 너울새를 곤쳐주고 모이 주니 한달째 안 날아가네요. 그래노이 백로도 마당에 날아와 온데를 댕기고 모이 묵고 이래 같이 삽니데이.” 김씨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덧붙였다. “돌 되는 손녀가 있는데, 저 놈들(백로)이 똑 아 소리매이로 우는 통에 매일 밤 속아요.”

김종직 사당·일제신사 거쳐 충혼탑 자리잡아
낡은 인당쌀상회 방앗간 건물을 보고 다시 다리(제2교·인당교)를 건넌다. 인당은 30여년 전까지 가난한 서민들이 모여 살던, 함양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던 마을이었다. 비좁은 골목마다 술집·밥집이 줄을 잇고 폭력배도 득실댔다지만, 이제는 대로가 뚫리고 큼직한 식당들도 들어서며 한적한 강변마을로 바뀌었다.
즉석에서 재료를 만들어 비벼먹는 보리밥이 맛있다는 허름한 이교식당 지나, 직접 갈아내는 콩국이 너무 진해 문제라는 제일식당을 들여다보고 중앙시장으로 향한다. 거리엔 대나무 깃대를 높이 세운 점집들이 많이 눈에 띈다. 시장 골목에 옛 정취를 간직한 제일여인숙이 있다. 낡고 비좁은 방이 ‘제8호실’까지 있는 단층 여인숙으로, 장날(2·7일) 지방 상인들이 묵어가는 곳이다. 1박 1만5천원.
시장 안의 맛있는 식당을 물으니 “순대집이 안 있소” 하고 나서는 분을 만났다. 이틀에 한번쯤 시장 골목을 돌며 사람살이를 둘러봐야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주민 허형수(56)씨다. 함양 지리산문학회 회원이라는 그가 데리고 간 곳은 50년째 대를 이어 순대를 직접 만들어 팔아온 병곡식당이다. “함양 흑돼지 대창·소창을 매일 1백마리 분을 손질해 당면 없이 선지와 야채로만 속을 채워” 순대를 만들어 파는 집이다. 허씨가 말했다. “시장을 이래 둘러보며 막걸리 한잔 하다 보모, 아, 내도 열심히 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기라.”
시장을 나서 길 건너, 할머니 인심이 좋아 2차 집으로 인기 있다는 술집 역마차를 지나 동문사거리로 간다. 함양읍성의 동문이 있던 곳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읍성의 동·서·남문이 헐리고 옮겨지고 성곽도 사라졌다. 동문사거리 일대는 읍내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다. 유명 빵집·도너츠집도 이곳에 몰려 있다. 왼쪽 멀리 필봉산(문필봉) 바라보며 함양중학교로 걷는다.

‘밝고 새롭고 바르게’ 빗돌 지나 학교 본관에 이르면 뜬금없이, 여기저기 깨지고 금가고 떨어져나간 커다란 석불이 모습을 드러낸다. 보물로 지정된 ‘함양석조여래좌상’으로, 함양의 보물 문화재 4점 중 유일하게 읍내에 있는 것이다. 중학교 자리는 고려시대 절로 추정되는 용산사 터다. 보림사에 있는 석불입상도 이 절터에서 나온 것이다.
다시 오던 길 내려와 함양성당 옆길로 든다. 성당 일부 담벽이 옛 성돌을 닮았다. 그러나 함양문화원 김성진 원장은 “성당 쪽에서 오래 전에 쌓은 석축으로 함양읍성과는 관계가 없다”고 말했다. 이 골목에 있는 함양문화원에 들르면 함양 역사와 문화, 인물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새들마을빌라·해누리빌라 사이 길로 걸으면 출발했던 함양초교 체육관 옆 ‘학사루 느티나무’에 이른다. 매미 소리 여전하고 오가는 아이들 재잘거림도 그대로인데, 묵직한 느티나무 자태는 한결 믿음직스러워 보인다. 볼수록 아름다운 거목의 곁에 앉아 오래 쉬고 싶었다. 7.5㎞를 걸었다.
함양/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경남 함양은 거목들이 이룬 오래된 숲의 고장이다. 천년이나 묵은 아름다운 숲 상림 말고도, 거리 곳곳에 수백년 살아온 느티나무들이 큰 그늘을 만들어 주민들을 품는다. 그리고 더 큰 그늘을 드리운 거목들이 있다. 신라 때 함양태수를 지낸 고운 최치원, 조선 초 함양군수를 지낸 점필재 김종직이다. 군민들은 예나 지금이나 이 큰 나무들이 거느린 빛과 그늘 안에서 일하고 또 쉰다. 자부심도 아픔도 이 그늘 아래 있다. 함양군청 앞에서 걷기 시작해 상림과 함양의 젖줄 위천, 읍내 골목과 함양시장길을 밟아 다시 군청으로 돌아온다.
느티나무 그늘 짙은 군청 주차장에 차를 대고 옆의 함양초등학교로 간다. 군청 앞 마당은 담장을 없앤 초등학교 앞 정원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학교 옆에 ‘거대한 뿌리’를 가진 느티나무가 기다린다. ‘함양 학사루 느티나무’(천연기념물)로 불리는 우람하고 건강하고 멋진 나무다. 높이가 21m인데, 줄기 둘레는 무려 9m에 이른다. 안내판엔 1천년 수령의 ‘천년목’이라 적었으나, 김종직(1431~1492)이 함양군수를 지낼 때 어린 아들을 잃고 서울로 떠나며 학사루 옆에 심은 나무라고 한다. 밑둥에, 열대지방 거목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판근막(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뿌리 부분이 넙적한 판 모양으로 자라 튀어나온 부분)들이 형성돼 있다.
군청 문화관광 해설사 전영순씨는 “이처럼 오래 되고도 건강한 아름다움을 내뿜는 나무는 보기 드물 것”이라며 “중간 줄기 위쪽엔 참나무 한 그루가 돋아 자라고 있다”고 말했다. 무수히 뻗은 가지들에선 매미들이 일제히 울어대 온갖 소음을 삼키는데, 그늘에 든 어린이들은 용케도 재잘재잘 할말 다한다.

길 건너에 학사루가 있다. 함양초교 자리는 본디 함양읍성의 객사가 있던 곳이다. 객사로 드는 2층 문루가 학사루다. 교실·도서관으로 이용되며 학교 안에 있던 것을 1979년 지금 자리로 옮겼다. 현판도 기둥에 내건 주련도 모두 최치원과 관련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애초 통일신라 때부터 있던 누로, 최치원이 태수로 있을 때 이 누에 자주 올라 시를 지었다고 전해온다. 최치원은 ‘최 학사’로도 불렸다. 임진왜란 때 불타 숙종 때(1692년) 중건했다.
영남학파 종조로 일컬어지는 김종직은 사후 유자광의 모함으로 부관참시당한 인물이다(무오사화). 학사루에 걸려 있던 유자광의 시 편액을 김종직이 철거해 불태웠는데, 이것이 유자광의 원한을 사 무오사화의 한 원인이 됐다고도 전한다. 학사루 뒤뜰엔 배롱나무가 화사한 꽃을 밝혔다.
학사루 주변은 우체국·등기소·경찰서·읍사무소가 몰려 있는 행정 중심 거리다. 자원봉사센터 지나 남양떡방아간·남양청과, 그리고 어탕국수로 이름난 조샌집이 있는 네거리 지나 김치찌개가 맛있다는 연밭식육식당 앞에서 길 건너 골목으로 든다. 식당도 이발소도 다방도 간판에 ‘연’ ‘연밭’이 들어 있다. 지명이 연밭머리다. 상림의 들머리가 되는 지역으로 오래 전에 연밭이 있었다. 연다방 앞길에는 차 배달 나가는 소형차들이 분주하다. “건설현장에서도 논밭에서도, 일단 차 한잔 하고 일을 시작”하는 게 일상화됐기 때문이다.
해병대 기동순찰대 앞을 지나 보림사 쪽으로 걷는다. 길바닥에 널어놓은 빨간 고추가 눈부신데, 열린 대문간에 앉으신 두 할머니가 보인다. 옆엔 달덩이같은 박들이 쌓여 있다. 밭에서 박을 따 실어다 놓고 막걸리를 한잔 하시는 중이다.
“박 깎아 말리갖고 너물(나물) 하모 차암 좋아예. 아들도 주고 사둔도 줄라꼬.”(유상달씨·71) “한잔 주까. 서울서 왔다꼬. 하매야, 우리 큰아도 서울 살아요. 그 아가 차암 효자라. 아침·저녁 전활 해요. 우찌 지내노, 밥 잡샀노 하고….”(김봉순씨·85) 갑자기 눈물 글썽해지시며 건네는 막걸리잔을 받아 들이켜니 시원하고 푸근하고 짭짤한 고향 맛이다.

함양 군민 대대로 거닐어온 아늑한 숲길
보림사는 1912년에 창건했다는 절. 이 절 미륵전에, 용산사 터 민가에 쓰러져 있던 것을 옮겨온, 고려 초기의 석조여래입상이 있다. 주지 수인 스님은 천진난만한 아이 표정이다. 거의 친구처럼 지내는 까닭에 동네 어린이들이 줄줄 따라다닌다고 한다. “아이들이 불쌍해요. 놀지도 못하고 공부만 하니 공부기계지. 애들은 그저 맘껏 놀게 해야 돼요. 그래야 사람으로 크지.” 이 절 한쪽엔 45년 전에 지었다는 미얀마 양식의 불교회관도 있다. “당시엔 읍내에서 가장 큰 건물이어서, 결혼식장으로 자주 이용됐다”고 한다.
식당 황궁·옥연가, 함양유림회관 지나 상림으로 걷는다. 숲이 아름답다고 할 때 이 숲을 빼놓고 말하기 어렵다. 들어서는 순간 어둑하고 아늑한 숲길이 한없이 이어진다. 상림은 통일신라시대 문장가 최치원이 함양태수로 있을 때 위천 물길을 돌리고 조성했다는 숲이다. 함양 사람치고 이 숲에 사연 한자락 간직하지 않은 이 드물다고 한다. 주민들이 대대로 거닐고 노닐어 온 부모 품같은 숲이다. 주로 활엽수인 100여종의 나무 2만여 그루가 6만평 넓이의 숲을 이루고 있다. 길이 1.6㎞.
숲 안엔 볼거리도 즐비하다. 함양읍성의 남문이던 망악루(지리산을 바라보는 누라는 뜻)를 옮겨세우며 이름을 고쳐지은 함화루, 이은리 물가에서 옮겨온 고려시대 석불, 박지원의 소설 ‘열녀함양박씨전’의 실제 모델이었다는 밀양 박씨의 정려비, 30여기의 선정비 무리와 척화비, 1923년에 세운 최치원 신도비와 정자 사운정(1906년 건립)·초선정이 있다. 선정비 중엔 악질 탐관오리의 대명사가 된 고부군수 조병갑의 것도 있어 눈길을 끈다. 고부군수 부임 8년 전에 함양군수를 지냈다는데 그때는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느티나무·개서어나무가 몸을 섞은 연리목도 보인다. 상림 끝자락엔 물레방아를 복원해 놓았다.
상림 위쪽 죽장마을은 성종 때 문장가 뇌계 유호인이 살던 곳이다. 그가 노모 봉양을 위해 낙향(선산)하려 하자 성종이 “이시렴, 부디 갈따, 아니 가든 못할쏘냐, 무단히 슬터냐, 남의 말을 들었느냐, 그려도 하 애닯고야 가는 뜻을 일러라” 하는 ‘이별가’를 부르며 잡으려 했던 충신이다. 뇌계는 상림 주변 위천 물길의 옛 이름이다. 상림 옆으론 읍내의 ‘연밭머리’ 지명에 걸맞는 2만여평 넓이의 연밭을 조성했다.
물살이 거세고 깊다는 ‘까막소’ 물 건너편 언덕의 군민의 종 종각을 바라보며 고운교 앞으로 나와 위천 물길을 따라 걷는다. 물가에도 주택가에도 구석구석 거대한 느티나무가 서 있다. 그 그늘엔 어김없이 정자가 있고 어르신들이 둘러앉아 손바람·부채바람을 일으키신다. 돌북교(함양3교) 지나 거센 물살이 바위를 휘감아 흐르는 소고대를 바라보며 두루침교(함양1교) 쪽으로 간다.
한 떼의 학생들이 지도를 펴들고 상림 쪽으로 걸어간다. 수원 영통의 지기학교(대안학교)에서 국토 탐방을 왔다는 초등 5년~중 3년생 6명이다. 조장 김현주 양(중3)은 “5박6일 일정으로 남원·구례·하동·산청을 둘러보고 함양으로 왔다”며 “선생님이 계시지만, 현장에선 우리가 지도 들고 스스로 찾아다닌다”고 말했다.
왼쪽 운림리와 용평리 사이 거리는 옛 시장(시비전거리)이 있던 곳이다. 새 시장(중앙시장)이 생기며 상권이 쇠퇴했다. 두루침교를 건너 백연리(栢淵里)로 간다. 물길 가운데 소고대 바위엔 오래전 소나무·잣나무가 있었고 그 주위에 깊은 소가 있었는데 대홍수로 쓸려 내려갔다고 한다. 백연리에는 최치원과 김종직을 함께 모신 백연서원이 있었으나 서원철폐령 때 사라졌다. 백연리는 소고대를 중심으로 상백(돌북)마을과 하백(두루침)마을로 나뉜다.
두루침교 건너 잠시 걸으면 함양국유림관리소에 이른다. 일제강점기 임업시험장이 있던 곳이다. 1940년에 일본식·서양식을 섞어 지은 임업시험장 건물(등록문화재)은 현재 산림정보관으로 쓰인다. 국유림관리소에선 숲을 관찰하며, 나무로 곤충·꽃 등을 만드는 목공예체험을 무료로 할 수 있다. 해설사 4명 대기. 토요일 휴관.
백연리 산자락엔 대나무숲이 유난히 많다. 하백마을회관 앞에서 만난 정완봉(72)씨가 말했다. “저짝 대나무밭은 다 비 삣다. 백로 때문이라. 그기 좋고도 나쁜 짐승인기라. 밤새 깨르륵 캐싸 잠도 몬자고 빨래도 몬내건다. 들올때 똥 찍 깔기고, 나갈때 깔기고 대나무가 다 죽어나간다카이.” 대나무숲을 베어 버리자, 백로는 아랫마을 인당의 대나무밭으로 옮겨갔다.
‘이은대’ 울창한 숲길을 올라 한국전쟁 희생자 충혼탑을 바라본다. 이은대란 함양군수 김종직이, 진주로 부임하던 관찰사 유자광이 함양에 들렀을 때 일부러 모른척 외면하고 들어가 있었다는 언덕이다. 유자광은 당시 모함과 모사로 출세가도를 달리던 정치꾼이었다. 이 언덕엔 김종직이 이임한 뒤 군민들이 그를 흠모해 세운, 살아 있는 사람을 모시는 ‘생사당’(이은당)이 들어섰다. 김종직은 군수 재직때 세금·부역을 크게 줄이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이 사당은 유자광의 모함으로 철거됐다고 전한다. 사당이 있던 자리엔 일제강점기에 신사가 들어서기도 했다.
충혼탑을 내려와 다시 강변을 걷는다. 오른쪽 마을 뒤 대나무숲에 하얗다. 백로 서식지다. 대숲 아래엔 낡아가는 한옥이 들어앉아 있다. 김종직의 제자로 무오사화때 함께 화를 당한 김일손의 동생 김구손의 후손 김철환(64)씨가 사는 고택이다. 작그마한 안채는 300년 됐다지만 다 개조됐고, 1918년(대정7년) 지은 사랑채와 문간채, 곳간이 남아 있다. 사랑채엔 ‘아산서실’이란 현판이 붙었다. 아산은 김씨의 작고한 형님의 호다. 김씨는 베트남전 참전때 총상을 입어 한 팔을 잃고 시력까지 잃은 분이다. “다리 다친 너울새를 곤쳐주고 모이 주니 한달째 안 날아가네요. 그래노이 백로도 마당에 날아와 온데를 댕기고 모이 묵고 이래 같이 삽니데이.” 김씨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덧붙였다. “돌 되는 손녀가 있는데, 저 놈들(백로)이 똑 아 소리매이로 우는 통에 매일 밤 속아요.”

김종직 사당·일제신사 거쳐 충혼탑 자리잡아
낡은 인당쌀상회 방앗간 건물을 보고 다시 다리(제2교·인당교)를 건넌다. 인당은 30여년 전까지 가난한 서민들이 모여 살던, 함양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던 마을이었다. 비좁은 골목마다 술집·밥집이 줄을 잇고 폭력배도 득실댔다지만, 이제는 대로가 뚫리고 큼직한 식당들도 들어서며 한적한 강변마을로 바뀌었다.
즉석에서 재료를 만들어 비벼먹는 보리밥이 맛있다는 허름한 이교식당 지나, 직접 갈아내는 콩국이 너무 진해 문제라는 제일식당을 들여다보고 중앙시장으로 향한다. 거리엔 대나무 깃대를 높이 세운 점집들이 많이 눈에 띈다. 시장 골목에 옛 정취를 간직한 제일여인숙이 있다. 낡고 비좁은 방이 ‘제8호실’까지 있는 단층 여인숙으로, 장날(2·7일) 지방 상인들이 묵어가는 곳이다. 1박 1만5천원.
시장 안의 맛있는 식당을 물으니 “순대집이 안 있소” 하고 나서는 분을 만났다. 이틀에 한번쯤 시장 골목을 돌며 사람살이를 둘러봐야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주민 허형수(56)씨다. 함양 지리산문학회 회원이라는 그가 데리고 간 곳은 50년째 대를 이어 순대를 직접 만들어 팔아온 병곡식당이다. “함양 흑돼지 대창·소창을 매일 1백마리 분을 손질해 당면 없이 선지와 야채로만 속을 채워” 순대를 만들어 파는 집이다. 허씨가 말했다. “시장을 이래 둘러보며 막걸리 한잔 하다 보모, 아, 내도 열심히 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기라.”
시장을 나서 길 건너, 할머니 인심이 좋아 2차 집으로 인기 있다는 술집 역마차를 지나 동문사거리로 간다. 함양읍성의 동문이 있던 곳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읍성의 동·서·남문이 헐리고 옮겨지고 성곽도 사라졌다. 동문사거리 일대는 읍내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다. 유명 빵집·도너츠집도 이곳에 몰려 있다. 왼쪽 멀리 필봉산(문필봉) 바라보며 함양중학교로 걷는다.

‘밝고 새롭고 바르게’ 빗돌 지나 학교 본관에 이르면 뜬금없이, 여기저기 깨지고 금가고 떨어져나간 커다란 석불이 모습을 드러낸다. 보물로 지정된 ‘함양석조여래좌상’으로, 함양의 보물 문화재 4점 중 유일하게 읍내에 있는 것이다. 중학교 자리는 고려시대 절로 추정되는 용산사 터다. 보림사에 있는 석불입상도 이 절터에서 나온 것이다.
다시 오던 길 내려와 함양성당 옆길로 든다. 성당 일부 담벽이 옛 성돌을 닮았다. 그러나 함양문화원 김성진 원장은 “성당 쪽에서 오래 전에 쌓은 석축으로 함양읍성과는 관계가 없다”고 말했다. 이 골목에 있는 함양문화원에 들르면 함양 역사와 문화, 인물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새들마을빌라·해누리빌라 사이 길로 걸으면 출발했던 함양초교 체육관 옆 ‘학사루 느티나무’에 이른다. 매미 소리 여전하고 오가는 아이들 재잘거림도 그대로인데, 묵직한 느티나무 자태는 한결 믿음직스러워 보인다. 볼수록 아름다운 거목의 곁에 앉아 오래 쉬고 싶었다. 7.5㎞를 걸었다.
함양/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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