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백 년의 역사 증언하는 69기 줄줄이 박물관 기행

강화역사관 앞 빗돌
영세 불망비·선정비·금표·하마비 등 모양·글씨도 제각각
‘가축 방목 곤장 100대, 쓰레기 버리면 80대’ 글귀도

 
 
※ 강화 역사박물관 정보

주소|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 해안동로 1366번지 18(옛 갑곶리 1040).
주요전시물| 강화유수·부사 선정비·불망비와 금표 등 비석무리, 강화동종, 강화역사 자료.
관람시간| 9시~18시.
휴관일| 연중무휴.
관람료| 어른 1300원, 어린이 700원. 강화역사관과 덕진진·고려궁터 등 5곳을 모두 둘러볼 수 있는 일괄입장권은 2700원.
전화번호| (032)930-7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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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만큼 보일까, 보는 만큼 알까
 
하지만 ‘강화역사관’의 의미는 규모보다 훨씬 크다. 명칭에서 드러나듯이, ‘한반도 축소판’ 섬 강화도 역사탐방길의 관문이자 예습 공간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는 곳이다. 그렇다. 여행도 역사탐방도 예습이 중요하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진리에 가깝다. 강화도가 어떤 섬인지 알려주는 곳이 강화역사관이다. 그러나 정작 이번에 둘러볼 것은 강화역사관 자체가 아니다. 강화역사관 건물 밖이다. 강화역사관 앞마당에 도열한 비석 무리. 선정을 베푼 관리나 마을에 훌륭한 업적을 남긴 이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선정비·불망비 등의 빗돌들이다.
 
강화도는 한강·임진강·예성강으로 드는 해운교통의 요충지로, 역사의 고비마다 크고 작은 사건의 무대로 등장했던 섬이다. 고려 때 몽고의 침략으로 수도를 천도하며 ‘제2의 수도’로 떠오른 이래, 동서양 제국주의자들이 한반도를 넘볼 때마다 강화도는 늘 최전방 전선이 되어 수난을 겪어왔다. 그만큼 선인들의 애환이 서린 흔적들이 허다하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고인돌 등 선사시대 유적부터 일제강점기 침탈 흔적까지 섬 전체에 유적이 깔렸다. 선정비·불망비 등 비석들도 그런 유적들이다. 지방관리들이 펼친 업적과 각별한 애민정신을 기리기 위해, 임기가 끝난 뒤 세우는 빗돌이다. 지역을 다스렸던 수장들의 행적의 결과물이니, 그 지역 역사의 무게를 말해주는 증거물이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엔 지역마다 이런 빗돌이 없는 곳이 없다. 각 지역 옛 관아 주변이나 박물관 들머리 등에 모아놓은 몇 기에서 몇십 기에 이르는 선정비·불망비들을 만날 수 있다. 모든 역사유적은 처음 세운 제자리에 보전해야 마땅한데, 사람이 늘고 길이 뚫리고 건물이 들어서고 개발되고 재개발되고 파헤치고 메워버리면서, 제자리를 잃고 떠도는 유물들이 무수하다. 특히 빗돌들은 쓰러지거나 깨지기 쉽고 또 옮기기도 쉬워, 흔적없이 사라지는가 하면 찬밥 신세가 되어 이리저리 옮겨다니다 엉뚱한 곳에 ‘집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위나 추앙 정도보다 그때 그때 형편 따라
 
강화역사관 앞에는 무려 69기(안내판엔 67기로 적혀 있다)에 이르는 영세불망비·선정비·금표·하마비와 임진왜란때 명나라 원군 장수를 기린 빗돌 등 다양한 빗돌들이 도열해 있다. 강화도 각지에 세워져 있던 것들을 용정리에 모아 세웠다가, 이곳으로 제2강화대교가 건설되면서 1965년 착공 때 부근으로 옮긴 뒤 2000년 다시 강화역사관 앞으로 옮겨 세운 것이다. 주로 1600년대 초부터 1900년대초에 이르는 동안 강화에 부임했던 강화유수·부사·판관·군수 등을 기려 세운 것들이다. 가장 많은 것이 역대 강화유수들의 불망비다. 
 
img_02.jpg강화는 조선 인조 때 도성 방어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강화에 유수부를 설치했다. 유수부란 일종의 수도방위의 거점으로 강화와 개성, 경기도 광주, 수원, 춘천 등에 설치했다. 유수는 지방관이 아닌 중앙에서 파견된 정2품의 고위관리였다. 1895년 강화유수가 폐지될 때까지 숱한 유수들이 강화를 거쳤다. 외침의 최전선이던 강화도에 부임한 유수는 그 책임이 막중했고, 그만큼 할 일도 많았을 것이다. 민심을 살펴야 하고 전쟁 위기 땐 주민들을 동원해 성곽 개보수 등 공사에 나서야 했다.
 
이런 가운데 특히 백성들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지고, 가뭄 때 구휼하고, 각종 송사에서 광명정대한 판단을 내려온 관리라면 선정비·영세불망비를 세우는 대상이 됐다. 그러나 이런 전통은 조선 후기로 가면서 많이 흐려졌다. 선정을 베푼 것과 상관없이 수령이 자신의 권위를 내세워 세우거나, 지역 유지들이 수령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만들어 세우거나, 그저 관행적으로 세워진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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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양도 크기도 가지가지다. 대체로 크기가 크면 클수록, 돌거북이나 용무늬를 새긴 머릿돌 등 장식이 많을수록, 지위가 높았거나 추앙받던 분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런 기준은 따로 없다는 게 전문가의 말이다. 강화도 향토사학자 강창수(77)씨는 “불망비·선정비는 대개 선정을 베푼 수령의 재임기간이 끝날 무렵 주민들이 그를 칭송해 세우는 것”이라며 “여러 비석들을 살펴볼 때 지붕돌이나 거북 받침돌 설치 여부, 그리고 비의 크기 등은 그때그때 형편대로 하는 것이지, 대상자의 지위나 주민들의 추앙 정도에 따라 달라지거나 특별한 기준이 있는 건 아니었다”고 말했다.
 
계도하고 경고하는 내용 적은 금표 특이
 
하나하나 빗돌을 둘러보면 돌의 재질도, 글씨도, 거북돌 크기도, 거북 얼굴 표정도 제각각이어서 나름대로 재미가 있다. 빗돌마다 빗돌의 주인공 이름과 건립연도를 적은 안내문을 설치해 놓아 둘러보기에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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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열한 빗돌 무리 중에는 금표·하마비도 있다. 금표는 곳곳에 세워 주민을 계도하고 경고하는 내용을 적은 비석으로, 요즘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강화도엔 강화유수부(현 고려궁터) 앞 등 여러 곳에 세웠으나, 지금은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 금표 빗돌엔 1733년 강화유수부 쪽이 세운 양면비로, 여기에는 자연보호와 생활환경 개선을 위해 주민들을 계도하고 경고하는 흥미로운 내용이 적혀 있다. 한문 내용을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가축을 놓아 기르는 자는 곤장 100대, 재나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자는 곤장 80대’. 곤장 100대라면 매우 중한 범죄에 속한다. 개·돼지·소들의 배설물로 인한 주변환경 오염을 막고, 집에서 일상적으로 나오는 쓰레기를 스스로 처리하게 함으로써 거리를 청결하게 유지하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흔히 ‘守令以下皆下馬’(수령 이하는 모두 말에서 내려 걸어라)라고 적혀 있는 하마비는 전국에 많이 남아 있다. 하마비도 일종의 경고문을 적은 빗돌이다. 이곳의 하마비는 1783년(정조 7년) 세운 것으로, 갑곶리에 있던 것을 2000년 이곳으로 옮겼다. 삼충사적비는 병자호란 때 청군이 강화도로 쳐들어오자 월곶진(연미정 부근)에서 적과 맞서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강흥업·구원일·황선신 세 충신을 기려 1636년(인조14년) 세운 것이다. 당시 황선신은 강화부중군(정2품), 구원일은 강화좌부천총(정3품), 강흥업은 강화우부천총(정3품)을 맡던 무신이다.
 
 
신미양요 때 미군함인 콜로라도함에서 찍은 사진 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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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강화역사관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자. 전시관은 2개층 네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아래층 두 전시실엔 돌칼·돌도끼·토기 등 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에 이르는 선사인들의 생활 유물들과 고려~조선시대의 도자기류와 생활용품, 서적들이 전시돼 있다. 팔만대장경 제작 과정도 재현해 놓았다. 2층으로 오르는 계단 벽에 신미양요 때 미군함인 콜로라도함에서 찍은 사진이 걸려 있다. 광성보 전투에서 패해 빼앗긴 조선 사령관의 장수기(수자 기)를 배에 내걸고 그 앞에 의기양양하게 서 있는 미국 군인들 모습이다. 2층엔 몽고 침입에서부터 병자호란, 병인양요·신미양요 등 동양·서양 오랑캐들의 강화도 침략사를 전시했다. 철종(강화도령 이원범)을 모시러 궁에서 온 행차 모습을 그린 강화행렬도와 보물(제11-8호)인 강화동종도 이곳에서 만난다.

강화도의 빗돌들을 더 만나려면 교동도(40기), 화도면 상방리 화도초등학교 앞(9기), 화도면 사기리 선두포 제방(6기) 등으로 가면 된다. 강화도엔 올해(2010년) 말 새로운 박물관이 들어선다. 하점면 부근리 고인돌 유적 옆에 들어설 강화박물관이 현재 공사중에 있다. 강화동종 등 유물들은 새 박물관으로 옮겨져 전시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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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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