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거슬러 눈부신 잊혀진 왕국의 ‘신비’ 박물관 기행

고령 대가야박물관
200여 기 고분은 감동적이기까지 한 공동묘지
일제 패망하며 훔쳐간 도굴 유물 트럭 ‘3대 분’
 
 
Untitled-1 copy 2.jpg

<고령 대가야박물관>

주소=경북 고령군 고령읍 지산리 460번지.
주요전시물=토기·철기·금관·장신구 등 지산동 고분 출토 대가야 유물, 고령 지역 선사~조선시대 유물.
관람시간=09시~17시.
휴관일=매주 월요일.
관람료=일반인 2천원, 학생·군인 1천5백원.
전화번호=(054)950-6065.
홈페이지= www.daegaya.net 
 
 
가야(加耶 ·伽耶)로 간다. 기원 전후부터 서기 562년까지 주로 낙동강 하류 일대에서 번성했던 소규모 국가들을 총칭해 부르는 이름이 가야다. 구체적인 기록이 전하지 않아 ‘신비의 왕국’으로 불리는 연맹체 국가다. 각 기록엔 가라(加羅) ·가락(駕洛) ·구야(狗邪) ·임나(任那) 등으로도 전해온다.
 
마한·진한·변한 삼한시대에 변한의 12국에서 발전한 6가야 또는 7가야를 말한다. 고령 지역의 대가야, 김해의 금관가야, 함안의 아라가야, 함창의 고령가야, 성주의 성산가야, 고성의 소가야, 창녕의 비화가야가 그 나라들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과 <삼국사기> <삼국유사> <일본서기> 등에 일부 기록이 전해온다.
 
두 가지 건국신화…후기 가야시대의 중심국이 대가야
 
Untitled-2 copy.jpg

두 가지의 가야 건국신화가 전한다. 하나는 ‘가야산에 살던 산신 정견모주와 하늘에서 내려온 천신 이비가 사이에 두 아이를 낳았는데, 큰아들은 대가야의 시조 이진아시왕이 됐고, 둘째아들은 금관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또하나는 ‘하늘에서 6개의 커다란 알이 내려왔는데, 가장 먼저 깨어난 동자가 금관가야의 수로왕이 되었고 나머지 5개의 알에서 나온 동자들은 5가야의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앞엣것은 신라 말 최치원의 <석이정전>에 나온 이야기를 인용해 실은 조선 초의 <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대가야 중심의 건국신화이고, 뒤엣것은 고려 중기에 나온 <가락국기> 내용을 고려 후기에 일연이 인용해 실은 <삼국유사>의 금관가야 중심의 건국신화다.
 
김해 지역에서 번성했던 금관가야는 서기 400년 무렵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공격을 받은 뒤 쇠퇴하기 시작해 서기 532년 신라(법흥왕 19년)에 항복한다. 5~6세기, 후반기 가야의 중심국으로 위세를 떨치던 대가야는 백제·왜 연합군과 신라를 공격하다 패한 뒤, 결국 562년(진흥왕) 신라 이사부가 이끄는 군대의 공격을 받아 항복했다. 대가야 16대 도설지왕 때였다. 후기 가야시대 중심국가였던 대가야의 눈부신 유물들을 만나러 고령 대가야박물관으로 들어간다.
 
Untitled-4 copy.jpg

먼저 대가야 고분 이야기부터 해보자. 고령 지산동 주산 능선을 따라 200여 기의 고분이 흩어져 있다. 웅장하고 아름답고 감동적이기까지 한 옛 공동묘지다. 대가야의 왕과 귀족들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추정된다’고 하는 까닭은 고분이 거의 도굴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특히 일제강점기 수많은 고분들이 파헤쳐졌고, 패망한 뒤 이곳에 살던 일본인들이 떠날 때 가야 유물들을 대량으로 제나라로 가져갔다고 한다. 대가야박물관 한 관계자는 “일본 패망 뒤 일인들이 일본으로 철수하기 직전, 고령초등학교 운동장의 지엠시 트럭 3대에 엄청난 유물이 실려 있던 걸 목격한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해마다 주제 바꿔 1년 간 새로운 유물들 전시
 
Untitled-5 copy 3.jpg

지금까지 공식적으로 발굴작업이 이뤄진 고분은 10개뿐이다. 주인공 무덤은 파헤쳐진 반면, 주변에 함께 묻힌(순장) 이들의 석실들은 다행히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유일하게 도굴범들의 손을 피해 살아남은 고분이 73호 고분이다. 발굴된 대개의 고분이 돌판으로 뚜껑을 만들어 덮은 돌덧널무덤인데, 73호 고분은 나무덧널 무덤이었다. 가야 고분은 초기엔 나무를 사용한 목곽분이었다가 후기엔 석실분으로 발전해갔다. 대가야박물관 이용호 해설사는 “능선 아래쪽에 있는 73호 고분은 대가야의 가장 이른 시기의 고분”이라며 “도굴범들이 파들어가다 돌판이 나오지 않고 무너져내리자, 이미 도굴된 줄 알고 포기한 듯하다”고 말했다. 지산동 고분군은 처음 능선 아래쪽에서 고분이 만들어지기 시작해 점차 능선을 따라 위쪽으로 새로 만들어진 고분이 들어서 있다.     
 
대가야박물관은 1층 기획전시실과 2층 상설전실로 이뤄졌다. 기획전시실에선 해마다 주제를 바꿔 1년간 새로운 유물들을 전시한다. 2007년엔 지산동 44호 고분에서 출토된 인골 등을 전시했고, 2008년엔 7가야의 토기 비교전을 열었다. 2009년엔, 나무덧널 형식의 무덤이었던 까닭에, 유일하게 도굴범들의 손을 피해 온전히 살아남은 73호 고분 출토물을 선보였다. 2010년엔 일본이 반출해간 가야의 유물들을 주제로 한 전시회가 마련된다(3월말 현재 전시 준비중). 2층 전시실에선 선사 유물들과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만날 수 있다.
 
선사시대 대표적인 암각화 고장
 
Untitled-3 copy 2.jpg2층 전시관 입구엔 가야인 옷차림을 재현한 마네킹들을 세웠다. 각종 기록과 유물, 벽화 등을 참조해 재현한 비단옷과 삼베옷을 입혔다. 선사시대 유적부터 만난다. 석기류와 암각화들이 다가온다. 고령은 암각화 전시장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곳곳에서 무수한 선사시대 암각·성혈들이 발견되고 있는 고장이다. 대표적인 암각화인 양전리 암각화 바위를 전시관에 재현해 놓았다. 도깨비형 가면 모습과 동심원 등이 새겨진 암각화다. 암각화가 있는 돌은 고분의 석실 뚜껑으로도 사용됐다. 고분 석실 뚜껑으로 쓰였던 사람 모양이 새겨진 돌판 실물도 볼 수 있다.
 
대가야의 역사와 돌화살촉·돌칼, 그릇받침·그릇 등 숱한 토기류를 만난다. 토기들은 부드러운 곡선미와 안정감이 특징이다. 굽다리접시·항아리 등 유약을 바르지 않은, 한번만 구운 토기들인데, 새겨진 무늬와 장식들이 정교하고 아름답다. 받침대 부분에 네모난 창들이 뚫린 굽다리접시(高杯) 등은 요즘 한정식 밥상에 올려놓아도 아름답게 보일 만한, 아니 호화로운 상차림 모습을 갖출 정도의 멋진 그릇들이다. 닭뼈와 복숭아씨 등이 그대로 남아 있는, 음식과 과일이 담겼던 그릇들도 보인다. 글씨가 또렷이 새겨진 토기들도 있어 흥미롭다(복제품). 토기 허리와 뚜껑에 ‘대왕‘(大王)이란 글씨가 새겨진 긴목단지, 주둥이에 ‘하부사리리’라는 글씨가 새겨진 항아리다. 해설사는 “하부사리리란 합천의 하부 지역의 ‘사리리’라는 이가 만든 토기를 나타낸 듯하다”며 “대왕은 당시 가야 왕의 위상을 나타낸다”고 설명했다.
 
수십 개 쇳조각 꿰어 만든 정교한 갑옷 눈길
 
Untitled-1 copy 3.jpg

1914년 촬영된 주산 능선의 고분군 사진도 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벌거숭이 산에 무너져가는 고분들 모습이 안쓰럽게 다가온다. 일본인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이 개를 데리고 능선에 서 있는 사진이다. 고분마다 봉분 일부가 파헤쳐진 듯한 모습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도굴된 상태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가야왕국은 풍부한 철 생산으로 왜 등과 무역을 하고 있었다. 화폐로 쓰였음직한, 일정한 크기로 만들어진 덩이쇠들과 쇠도끼·화살촉 등을 볼 수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이 정교하게 제작된 투구와 갑옷이다. 투구는 가늘고 긴 일정한 크기의 쇳조각 수십개를 부채 형식으로 겹치게 꿰어 만들었다. 옷감 무늬 흔적이 남아 있는 쇠붙이들도 인상적인 볼거리다.     
 
역시 전시물 중에서 가장 눈부시기는 금관과 금귀고리 등이다. 물론 진품은 아니고 정교하게 새로 만들어 전시한 것들이다. 세계적으로 순금으로 만든 옛 금관은 10개에 불과하다고 한다. 아프가니스탄 출토 1개, 스키타이 출토 1개, 그리고 신라 금관이 6개, 대가야 출토 금관이 2개다. 대가야 금관은 도굴된 뒤 전해진 것이어서 어느 고분에서 나온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금장식이 풀잎형, 꽃봉오리형 2가지인데 왕이 직접 썼던 것은 아니고 사후에 제작돼 무덤에 넣은 장식품이다. 꽃봉오리형 금관(국보 138호)은 삼성 리움미술관에서, 풀잎형 금관은 일본 오쿠라콜렉션에서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30호 고분에서 출토된 어린 왕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작은 금동관(일부)도 볼 수 있다. 45호 고분 등에서 출토된 금귀고리는 섬세하게 다듬고 이어붙이고 깎아낸 모습이 눈이 부실 정도다.
 
Untitled-1 copy 4.jpg

 
Untitled-6 copy.jpg

40여 명이 함께 묻힌 대형 순장묘엔 8살짜리 아이도

 
유물들은 신라시대 거쳐 고려시대 것으로 이어진다. 신라 때 절 물산사 터에서 나온 기왓장 무늬도, 반룡사에서 옮겨온, 탑신 없이 옥개석들만 남은 아담한 점판암 다층석탑도, 고려 초기의 개포리 석조관음보살좌상(복제품)도 아름답다. 조선시대 향교 고문서들과 인명부, 주례목판, 그리고 말안장 등을 둘러보면 전시관 밖으로 나오게 된다. 1층엔 탁본, 목판인쇄 체험, 불 지피기 체험 등을 할 수 있는 어린이체험학습실이 마련돼 있다. 야외전시장의 옛 불상들과 석탑, 돌거북 등도 볼거리다.
 
대가야박물관 옆엔 국내 최대 순장묘인 44호 고분(1977년 발굴) 내부 모습을 고스란히 재현해 놓은 왕릉전시관이 있어 함께 둘러볼 만하다. 40여명이 함께 묻힌 대형 고분이다. 이용호 해설사는 “유골 조사로 묻힌 이들의 나이를 알 수 있는데 8살짜리 아이를 안고 있는 어른도 있었다”며 “모두 유골 뒷머리가 깨져 있는 것으로 보아 묻히기 전에 타살된 듯하다”고 말했다.  이 고분에서 출토된, 백제에서 조의품으로 보내온 금동함과 등잔, 오키나와에서 생산된 야광조개 국자(부서진 조각)도 전시했다. 왕릉 축조 과정도 살펴볼 수 있다.
 
Untitled-3 copy 3.jpg

박물관 관람을 전후해 주산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고분 무리를 따라 산책을 즐겨보자. 아름다운 주변경치와 대가야 왕릉들의 위용을 함께 만나게 되는 산책로다. 왕릉전시관 앞 길 건너편엔 대가야역사테마관광지도 있다. ‘전투를 통해 본 대가야의 역사’란 주제로 대가야의 흥망성쇠를 4D영상으로 감상할 수 있는 영상관을 갖췄다.
 
고령군에선 4월8~11일 대가야박물관 일대에서 ‘용사의 부활’이란 주제로 ‘2010 대가야 체험축제’를 펼친다. 대가야와 고령의 특산물, 악성 우륵 등과 관련된 다채로운 체험행사들이 진행된다.    
 
고령/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Leave Comments


profile반갑습니다. 한겨레신문 이병학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