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백정’이래도 그걸로 묵고 살아야 했어요” 길에서 만난 사람
2009.03.13 00:54 너브내 Edit
국내 포경사 ‘산증인’ 이승길씨
40년 고래 인생 장생포 최고 ‘포장’…21m 참고래도
사람이건 고래건 수컷이 ‘어수룩’ 죽은 암컷옆 배회

“옛날엔 밍크같은 건 아예 안 잡았어요. 장수경이는 많이 잡았지.”
장생포항 ‘최고 포장’으로 불렸던 이승길(80·울산 남구 장생포동)씨. 포장이란 포경선에서 대포로 작살을 쏘아 고래를 잡는 ‘포수’의 존칭이다. 밍크는 중형인 밍크고래, 장수경은 대형고래인 참고래를 말한다.
장생포에선 참고래가 ‘장수경’
이씨는 장생포 포경업의 원로이자, 국내 현대 포경사의 산증인이다. 일제 때부터 포경선을 탄, 몇 안되는 생존 인물이다. 그는 16살때 ‘화장’(취사 담당)으로 포경선을 탄 이래, 1986년 포경이 금지될 때까지 40여년을 고래와 함께 살았다.
일제 때 일본 포경선들은 당시 7~9척이 장생포로 들어와 포항 구룡포, 강원 북부 장전항으로 이동하며 참고래를 잡았다. 척당 연 100마리 안팎을 잡아 제나라로 가져갔다. 이씨는 “한번은 배 일고여덜 척이 4개월간 120두를 잡았다 해서 장생포국민학교에서 기념행사를 연 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한 배에 보통 17~18명이 탔지만 한국인에겐 포수를 맡기지도 않았고, 기술도 가르치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한국인에겐 갑판장 이상은 시키지 않았다.
광복 뒤 일본 포경선들이 떠나면서, 장생포에선 한동안 고래를 못 잡았다. 일본에서 포경업에 종사하던 한국인들이 돌아오며 퇴직금 몫으로 50톤급 목선 2척을 받아왔다. 이 두 척의 목선이 사실상 장생포 포경업의 출발이었다.
“3년간 일 안했더니 동해바다에 고래가 지천입디다.” 울기등대에서 내려다보면 돌아다니는 고래들이 보일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가늠자도 없는 구경 70㎜ 포를 장착한 목선을 타고 주로 참고래를 잡았다. “귀신고래·혹등고래도 간혹 잡았지만, 대부분은 장수경일 잡았지. 이게 큰 놈이 많거덩.” 수염이 긴 고래라는 뜻의 ‘장수경’이지만, 장생포에선 실제로 수염이 긴 ‘북방긴수염고래’가 아닌 참고래를 장수경이라 불렀다(북한에선 참고래를 수염고래라 부른다). 참고래는 턱밑에서부터 배꼽까지 길게, 50~100개에 이르는 세로 주름들이 나 있어 수염처럼 보이기도 한다.
“돌고래 같은 쬐만한 것들은 건들지도 않았어”
29살 때 ‘포장’에 오른 이씨는 위치 선정에서 발사, 포획까지 동물적인 감각을 발휘하며 ‘명포수’로 떠올라 선주들의 ‘스카우트’ 대상이 됐다. 포수 자리는 포경업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는 자리지만, 실적이 시원치 않으면 언제든 쫓겨나야 하는 위치였다.
“다른 배들이 장수경이 큰놈 잡아온 거 보모 작살이 다섯 여섯개나 박힌 게 많았어요. 난 그렇게 안 해요. 주로 한 방에 눕히는 걸 마이 했지. 한 방에 죽은 고래는 피가 많이 나질 않아 선도가 좋다는 평가를 받았어요.”
30년간의 ‘포장’ 생활 동안 두 차례나 ‘그 해 최다 포획 포수’가 됐다. 한번은 참고래 18마리, 밍크고래 30여마리를 잡았다.
“바다에 나가가 이래 지켜보모 사람 키 두세 배가 넘는 ‘분기’(고래가 숨쉬며 내뿜는 물과 공기) 현상이 있는기라. 그라모 엔진 소리를 줄이고 다가가 요래 있으모 떠올라요. 숨쉴라꼬.” 이동 예상 지점으로 가서 몇분 기다린 뒤 떠오르면 포를 조준해 작살을 쐈다고 한다. 고래는 숨을 쉬기 위해 규칙적으로 물위로 떠올라야 한다. 참고래는 보통 6~8분(최대 15~20분)간 잠수하고 숨을 쉰다고 한다.
참고래는 한번 출항에 한 마리밖에 잡을 수 없었다. 대형 고래 두 마리를 잡아 배에 묶으면 속도가 느려져 돌아오는 동안 부패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밍크고래는 잡은 뒤 배에 끌어올려 해체작업을 했지만, 길이가 보통 20m에 이르는 참고래는 꼬리쪽을 배에 묶고 포구로 끌어와 해체작업을 한다. 고래잡이가 한창일 땐 선주 한 사람이 배를 서너척씩 갖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선주들은 해체장(사업장)도 별도로 갖고 있었다. 공동해체장이 마련되기까지 장생포에만 해체장이 4곳이나 됐다. 40톤 가량 되는 참고래에선 고기만 20여톤이 나오고, 껍질과 뼈로 기름을 짜면 40~50드럼이 나왔다고 한다.
“60자(18m)가 넘는 고래를 잡으면 2마리 값의 수당을 받았어요. 그래서 다들 큰 걸 많이 잡으려 애썼지. 돌고래? 그런 쬐만한 것들은 고래로 치지도 않았어. 건들지도 않았다니까.”
약삭빠른 귀신고래 귀신처럼 사라져 잡기 어려워
이씨는 “사람이나 고래나 수컷이 어수룩하다”고 말했다. 참고래 암수 두 마리가 함께 있을 때 수컷을 먼저 잡으면 암컷은 90%가 그대로 달아난다고 한다. 그런데 암컷을 먼저 잡으면 수컷은 도망치지 않고 주변을 배회한다.
“수컷은 항상 암컷 뒤를 따라다녀요. 두 마리가 앞뒤로 갈 때 쫓아가면서 뒷놈부터 잡게 되는데, 잡고 보면 100% 수놈이라. 근데 장수경(참고래)이도 구신고래(귀신고래)도 암컷이 먼저 죽으면 수컷은 도망 안가요.”
70년대 들어서 99톤급 철선이 투입되면서 고래잡이는 절정에 달했다. 참고래 개체수는 더더욱 줄었고, 마침내 참고래 포획이 금지됐다. 금지되고도 일부에선 고래잡이를 계속했다. 적발돼도 그 나라 해당지역 지자체에서 처벌하도록 돼 있어 벌금만 내고 나왔다고 한다. 정부에선 국내 포경선을 21척으로 제한했다. 1년에 잡히는 참고래가 손에 꼽을 정도로 줄어들자 포경선들은 그동안 큰 관심이 없던 밍크고래로 눈을 돌렸다.
이씨가 마지막으로 잡은 참고래는 “길이가 70자(약 21m)가 넘는 대물”이었다. 일본인들이 특히 좋아해, 가장 비싸게 팔리는 꼬리 부분 살코기(오노미)만 10㎏짜리 상자로 두 개가 나왔다. 이 두 상자를 일본에 밍크고래 중간 크기 1마리 값을 받고 팔았다고 한다. 이씨는 밍크고래만 잡을 땐 1년에 100여마리씩 잡았다. “가장 큰 놈은 29자(약 9m)짜리였다.”
이씨가 기억을 더듬어 어떤 고래들이 언제 많이 나타나는지 알려줬다.
“밍크고래는 4월 중순부터 5월말까지 동해바다로 많이 지나가요. 장수경(참고래)이는 6, 7월부터 9, 10월까지, 귀신고래는 음력 동지달 보름 전후 열흘간씩 한 20일 정도가 자주 발견되는 때지. 귀신고래는 육지 가까운 연안을 타고 내려가니 육지서도 볼 수가 있어요. 그러곤 4월~5월에 가끔씩 북쪽으로 올라가는 놈들도 보이지. 올라갈 땐 아주 빨리 올라가는데, 모습을 잘 드러내지도 않고 올라가버리는 기라. 이놈을 서해 어청도에서도 봤지. 원체 약아서 등의 숨구멍만 살짝 내놓고 숨쉬곤 순식간에 사라지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가 잡기도 참 어렵지. 한번 헛방 쏘모 그냥 놓치는 기라.”
배에 묶어둔 밍크고래 밤 사이 백상아리의 먹잇감
장생포 포경선들은 처음엔 그저 바다에 나가 고래를 찾아 돌아다니며 잡았지만, 일본에서 음파 탐지기를 주문 제작해 오면서 좀 더 쉽게 고래를 잡게 됐다. 음파탐지기의 효능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바다에서 음파 탐지기를 작동시키면 고래들이 갑자기 죽어라 하고 도망을 치는 거야. 장수경이도 도망가고, 밍크고래도 도망가요. 돌고래만 빼놓고. 음파탐지기가 오히려 큰 고래를 쫓아버리는 거라. 이게 고래 이동경로를 추적해 따라가 잡는 방식인데 처음엔 실망했지요. 일본 해군용이지. 제작한 일본인한테 문의하니 거기서도 의아해했어요. 그런데 이게 결국 득이 된 거라.”
전력을 다해 도망치는 고래를 꾸준히 쫓아가면서 음파를 쏘아대면 결국 제풀에 지친 고래를 쉽게 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씨는 음파탐지기의 음파가 고래를 교란시키거나 싫어하는 파장인 듯하다고 추측했다.
이씨는 서해안으로 고래잡이를 갔다가 백상아리 등 상어류도 잡아봤다. 당시 서해안의 흑산도·어청도에도 소규모 포경 기지가 있었다. “해거름에 백상아리를 잡아 끌어올려 닻을 내리고 해체를 시작했는데, 갑자기 배 주변 바다가 요동치는 기라. 흘러내린 핏물 냄새를 맡고 백상아리 대여섯 마리가 몰려와 난리를 치는 기라.”
한번은 서해안에서 밍크고래를 잡아 배에 묶어뒀는데, 다음날 보니 뼈와 꼬리부분만 남아 있던 적도 있었다고 했다. 밤새 백상아리들이 뜯어먹은 것이었다.
포경 금지 이후 그는 주변에 고래잡이 이야기 들려주는 걸 낙으로 삼고 산다.
“누구는 우리를 고래백정이락할지 몰라도, 우린 그걸로 묵고 살아야 했어요. 할 줄 아는기 그거라. 어찌됐든 다 지난 일이요.”
그가 타던 포경선 제5진양호는 1986년 이후 폐선으로 남았다가, 고래박물관이 세워지면서 뱃머리를 복원해 박물관 안에 전시하고 있다.
“인자 울산서 고래 관광 시작한다지요? 좋은 일이요. 돌고래떼 몰려다니는 거 보모 참 멋있을 기요.”
울산/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40년 고래 인생 장생포 최고 ‘포장’…21m 참고래도
사람이건 고래건 수컷이 ‘어수룩’ 죽은 암컷옆 배회

“옛날엔 밍크같은 건 아예 안 잡았어요. 장수경이는 많이 잡았지.”
장생포항 ‘최고 포장’으로 불렸던 이승길(80·울산 남구 장생포동)씨. 포장이란 포경선에서 대포로 작살을 쏘아 고래를 잡는 ‘포수’의 존칭이다. 밍크는 중형인 밍크고래, 장수경은 대형고래인 참고래를 말한다.
장생포에선 참고래가 ‘장수경’
이씨는 장생포 포경업의 원로이자, 국내 현대 포경사의 산증인이다. 일제 때부터 포경선을 탄, 몇 안되는 생존 인물이다. 그는 16살때 ‘화장’(취사 담당)으로 포경선을 탄 이래, 1986년 포경이 금지될 때까지 40여년을 고래와 함께 살았다.
일제 때 일본 포경선들은 당시 7~9척이 장생포로 들어와 포항 구룡포, 강원 북부 장전항으로 이동하며 참고래를 잡았다. 척당 연 100마리 안팎을 잡아 제나라로 가져갔다. 이씨는 “한번은 배 일고여덜 척이 4개월간 120두를 잡았다 해서 장생포국민학교에서 기념행사를 연 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한 배에 보통 17~18명이 탔지만 한국인에겐 포수를 맡기지도 않았고, 기술도 가르치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한국인에겐 갑판장 이상은 시키지 않았다.
광복 뒤 일본 포경선들이 떠나면서, 장생포에선 한동안 고래를 못 잡았다. 일본에서 포경업에 종사하던 한국인들이 돌아오며 퇴직금 몫으로 50톤급 목선 2척을 받아왔다. 이 두 척의 목선이 사실상 장생포 포경업의 출발이었다.
“3년간 일 안했더니 동해바다에 고래가 지천입디다.” 울기등대에서 내려다보면 돌아다니는 고래들이 보일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가늠자도 없는 구경 70㎜ 포를 장착한 목선을 타고 주로 참고래를 잡았다. “귀신고래·혹등고래도 간혹 잡았지만, 대부분은 장수경일 잡았지. 이게 큰 놈이 많거덩.” 수염이 긴 고래라는 뜻의 ‘장수경’이지만, 장생포에선 실제로 수염이 긴 ‘북방긴수염고래’가 아닌 참고래를 장수경이라 불렀다(북한에선 참고래를 수염고래라 부른다). 참고래는 턱밑에서부터 배꼽까지 길게, 50~100개에 이르는 세로 주름들이 나 있어 수염처럼 보이기도 한다.

“돌고래 같은 쬐만한 것들은 건들지도 않았어”
29살 때 ‘포장’에 오른 이씨는 위치 선정에서 발사, 포획까지 동물적인 감각을 발휘하며 ‘명포수’로 떠올라 선주들의 ‘스카우트’ 대상이 됐다. 포수 자리는 포경업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는 자리지만, 실적이 시원치 않으면 언제든 쫓겨나야 하는 위치였다.
“다른 배들이 장수경이 큰놈 잡아온 거 보모 작살이 다섯 여섯개나 박힌 게 많았어요. 난 그렇게 안 해요. 주로 한 방에 눕히는 걸 마이 했지. 한 방에 죽은 고래는 피가 많이 나질 않아 선도가 좋다는 평가를 받았어요.”
30년간의 ‘포장’ 생활 동안 두 차례나 ‘그 해 최다 포획 포수’가 됐다. 한번은 참고래 18마리, 밍크고래 30여마리를 잡았다.
“바다에 나가가 이래 지켜보모 사람 키 두세 배가 넘는 ‘분기’(고래가 숨쉬며 내뿜는 물과 공기) 현상이 있는기라. 그라모 엔진 소리를 줄이고 다가가 요래 있으모 떠올라요. 숨쉴라꼬.” 이동 예상 지점으로 가서 몇분 기다린 뒤 떠오르면 포를 조준해 작살을 쐈다고 한다. 고래는 숨을 쉬기 위해 규칙적으로 물위로 떠올라야 한다. 참고래는 보통 6~8분(최대 15~20분)간 잠수하고 숨을 쉰다고 한다.
참고래는 한번 출항에 한 마리밖에 잡을 수 없었다. 대형 고래 두 마리를 잡아 배에 묶으면 속도가 느려져 돌아오는 동안 부패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밍크고래는 잡은 뒤 배에 끌어올려 해체작업을 했지만, 길이가 보통 20m에 이르는 참고래는 꼬리쪽을 배에 묶고 포구로 끌어와 해체작업을 한다. 고래잡이가 한창일 땐 선주 한 사람이 배를 서너척씩 갖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선주들은 해체장(사업장)도 별도로 갖고 있었다. 공동해체장이 마련되기까지 장생포에만 해체장이 4곳이나 됐다. 40톤 가량 되는 참고래에선 고기만 20여톤이 나오고, 껍질과 뼈로 기름을 짜면 40~50드럼이 나왔다고 한다.
“60자(18m)가 넘는 고래를 잡으면 2마리 값의 수당을 받았어요. 그래서 다들 큰 걸 많이 잡으려 애썼지. 돌고래? 그런 쬐만한 것들은 고래로 치지도 않았어. 건들지도 않았다니까.”
약삭빠른 귀신고래 귀신처럼 사라져 잡기 어려워

“수컷은 항상 암컷 뒤를 따라다녀요. 두 마리가 앞뒤로 갈 때 쫓아가면서 뒷놈부터 잡게 되는데, 잡고 보면 100% 수놈이라. 근데 장수경(참고래)이도 구신고래(귀신고래)도 암컷이 먼저 죽으면 수컷은 도망 안가요.”
70년대 들어서 99톤급 철선이 투입되면서 고래잡이는 절정에 달했다. 참고래 개체수는 더더욱 줄었고, 마침내 참고래 포획이 금지됐다. 금지되고도 일부에선 고래잡이를 계속했다. 적발돼도 그 나라 해당지역 지자체에서 처벌하도록 돼 있어 벌금만 내고 나왔다고 한다. 정부에선 국내 포경선을 21척으로 제한했다. 1년에 잡히는 참고래가 손에 꼽을 정도로 줄어들자 포경선들은 그동안 큰 관심이 없던 밍크고래로 눈을 돌렸다.
이씨가 마지막으로 잡은 참고래는 “길이가 70자(약 21m)가 넘는 대물”이었다. 일본인들이 특히 좋아해, 가장 비싸게 팔리는 꼬리 부분 살코기(오노미)만 10㎏짜리 상자로 두 개가 나왔다. 이 두 상자를 일본에 밍크고래 중간 크기 1마리 값을 받고 팔았다고 한다. 이씨는 밍크고래만 잡을 땐 1년에 100여마리씩 잡았다. “가장 큰 놈은 29자(약 9m)짜리였다.”
이씨가 기억을 더듬어 어떤 고래들이 언제 많이 나타나는지 알려줬다.
“밍크고래는 4월 중순부터 5월말까지 동해바다로 많이 지나가요. 장수경(참고래)이는 6, 7월부터 9, 10월까지, 귀신고래는 음력 동지달 보름 전후 열흘간씩 한 20일 정도가 자주 발견되는 때지. 귀신고래는 육지 가까운 연안을 타고 내려가니 육지서도 볼 수가 있어요. 그러곤 4월~5월에 가끔씩 북쪽으로 올라가는 놈들도 보이지. 올라갈 땐 아주 빨리 올라가는데, 모습을 잘 드러내지도 않고 올라가버리는 기라. 이놈을 서해 어청도에서도 봤지. 원체 약아서 등의 숨구멍만 살짝 내놓고 숨쉬곤 순식간에 사라지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가 잡기도 참 어렵지. 한번 헛방 쏘모 그냥 놓치는 기라.”
배에 묶어둔 밍크고래 밤 사이 백상아리의 먹잇감
장생포 포경선들은 처음엔 그저 바다에 나가 고래를 찾아 돌아다니며 잡았지만, 일본에서 음파 탐지기를 주문 제작해 오면서 좀 더 쉽게 고래를 잡게 됐다. 음파탐지기의 효능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바다에서 음파 탐지기를 작동시키면 고래들이 갑자기 죽어라 하고 도망을 치는 거야. 장수경이도 도망가고, 밍크고래도 도망가요. 돌고래만 빼놓고. 음파탐지기가 오히려 큰 고래를 쫓아버리는 거라. 이게 고래 이동경로를 추적해 따라가 잡는 방식인데 처음엔 실망했지요. 일본 해군용이지. 제작한 일본인한테 문의하니 거기서도 의아해했어요. 그런데 이게 결국 득이 된 거라.”
전력을 다해 도망치는 고래를 꾸준히 쫓아가면서 음파를 쏘아대면 결국 제풀에 지친 고래를 쉽게 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씨는 음파탐지기의 음파가 고래를 교란시키거나 싫어하는 파장인 듯하다고 추측했다.
이씨는 서해안으로 고래잡이를 갔다가 백상아리 등 상어류도 잡아봤다. 당시 서해안의 흑산도·어청도에도 소규모 포경 기지가 있었다. “해거름에 백상아리를 잡아 끌어올려 닻을 내리고 해체를 시작했는데, 갑자기 배 주변 바다가 요동치는 기라. 흘러내린 핏물 냄새를 맡고 백상아리 대여섯 마리가 몰려와 난리를 치는 기라.”
한번은 서해안에서 밍크고래를 잡아 배에 묶어뒀는데, 다음날 보니 뼈와 꼬리부분만 남아 있던 적도 있었다고 했다. 밤새 백상아리들이 뜯어먹은 것이었다.
포경 금지 이후 그는 주변에 고래잡이 이야기 들려주는 걸 낙으로 삼고 산다.
“누구는 우리를 고래백정이락할지 몰라도, 우린 그걸로 묵고 살아야 했어요. 할 줄 아는기 그거라. 어찌됐든 다 지난 일이요.”
그가 타던 포경선 제5진양호는 1986년 이후 폐선으로 남았다가, 고래박물관이 세워지면서 뱃머리를 복원해 박물관 안에 전시하고 있다.
“인자 울산서 고래 관광 시작한다지요? 좋은 일이요. 돌고래떼 몰려다니는 거 보모 참 멋있을 기요.”
울산/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