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향이 코를 간지럽히고 해를 담은 바다는 눈부시다 강제윤 시인의 섬 기행

<파시13> 신선의 섬, 민어의 고장 덕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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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적도 서포1리 마을 민박집. 주인 노인이 만든 솔방울 베개를 베고 잔 때문이었을까. 밤새 솔바람 소리를 들었다. 바람이 불고, 눈보라치고, 햇볕 따뜻한 봄이 오고, 비가 내리고, 밤과 낮이 수시로 교차했다. 소나무에 새순이 돋고, 송화 가루가 날리는가 싶더니 해변은 사람들 소리로 떠들썩했다. 물놀이 하는 사람들, 솔숲 그늘에 누워 낮잠을 자는 사람들, 고기 굽는 냄새, 조개 잡는 아이들, 찬바람이 불고 다시 해변은 텅 비어버렸다. 그렇게 세월이 갔다. 꿈이었다. 꿈을 꾼 것은 나그네였을까. 베갯속 솔방울들이었을까.
 
덤으로 밟는 흙길, 마음과 발이 날 것같구나
 
나그네는 섬에 오면 어디보다 먼저 산으로 간다. 모든 섬은 산이다. 어제 산길을 따라 서포리까지 왔다. 사람들은 섬에 도착한 순간 대체로 해변으로 달려가지만 해변에서는 섬을 볼 수 없다. 산에 올라가야 비로소 섬의 본 모습이 보인다. 요즈음은 아무리 작은 섬도 거의 모든 도로가 포장되어 있다. 섬의 산에 오르면 덤으로 얻을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흙길 걷기의 즐거움이다. 나그네는 누구보다 먼저 섬의 속살에 안겨볼 수 있다. 흙과 나무와 바람의 향기, 숲에서 한번 걸러진 바다 내음도 한결 청량하다. 대체로 섬의 산은 높지 않은 탓에 가볍게 오를 수 있다. 산길을 걸으며 푹신한 흙을 밟는다. 몸이 새털처럼 가벼워진다. 공중의 구름을 걷는 느낌이 이러할까. 사람이 관절이 상하고 자주 무릎이 아픈 것은 걷지 않아서가 아니다. 흙길을 걷지 않기 때문이다. 더 이상 사람이 걸을 수 있는 흙길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덕적도에서도 선사시대부터 사람살이가 시작됐다. 삼국 시대 초기에는 백제의 영토였으나 덕적도 또한 한강유역의 다른 지역들처럼 신라와 고구려에게 번갈아 점령당한 경계의 땅이다.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는 왜구들 때문에 섬은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공도(空島)가 되었다. 다시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이후부터다. 사람의 거주가 허락되면서 덕적도에는 첨사를 진장으로 하는 진이 생겼다. 조선시대 내내 남양부와 인천 도호부에 속했던 덕적도는 일제 때에 부천군에 소속되었다가 1973년 경기도 옹진군의 일부가 되었고, 1995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옹진군이 인천시로 편입되면서 100여년 만에 다시 인천의 강역이 됐다.
 
삼국시대 때 당나라 침략군의 전진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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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적도는 고대 황해 횡단 항로의 중요한 길목이었다. 그래서 덕적도는 당나라의 백제 침략 때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의 백제 침략 전진기지가 됐다. 660년, 수륙 93만 명의 대군을 끌고 침략전쟁에 나선 소정방의 당나라군은 4개월간 덕적군도(群島)를 13만 군대의 주둔지 겸 군수품 보급기지로 활용했다. 덕적도 바로 옆 소야도에도 당나라군의 진지로 추정되는 유적들이 남아 있다. 당나라군은 덕적도에 주둔 했다가 기벌포로 상륙해 신라와 협공으로 백제를 멸망시켰다. 그런 덕적도가 수려한 경관으로도 이름 높았다.
 
“덕적도는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할 때 군사를 주둔시켰던 곳이다. 뒤에 있는 3개의 돌 봉우리는 하늘에 꽂힌 듯하다. 여러 산기슭이 빙 둘러 쌌고 안쪽은 두 갈래진 항구로 되어 있는데 물이 얕아도 배를 댈만하다. 나는 듯 한 샘물이 높은 데서 쏟아져 내리고 평평한 냇물이 둘렸으며 층 바위와 반석이 굽이굽이 맑고 기이하다. 매년 봄과 여름이면 진달래와 철쭉꽃이 산에 가득 피어 골과 구렁 사이가 붉은 비단 같다. 바닷가는 모두 흰 모래밭이고 가끔 해당화가 모래를 뚫고 올라와 빨갛게 핀다. 비록 바다 가운데 있는 섬이라도 참으로 선경이다. 주민들은 모두 고기를 잡고 해초를 뜯어 부유한 자가 많다. 여러 섬에 장기 있는 샘이 많은데 덕적도와 군산도에는 없다.”  (이중환 ‘택리지’)
 
1만2000 인구가 지금은 1200명으로 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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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덕적도는 덕물도, 득물도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면적 20.87㎢, 해안선 길이 37.6㎞, 여의도의 4.5배쯤 되는 큰 섬이다. 덕적면은 덕적도, 소야도, 굴업도를 비롯한 유인도 8개, 무인도 34개 등 모두 42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2009년 1월5일 기준, 덕적면 전체 인구는 930가구 1800명. 덕적면 소재지가 있는 덕적도에는 679가구 1294명의 사람이 산다. 어가(35%)보다 농가(38%)가 약간 많다. 농어가 다수는 민박 등의 관광업을 겸하고 있다. 기독교의 세가 지배적인 덕적면 관내의 종교 시설은 교회가 5개, 성당이 2개지만 절은 없다. 의료시설도 열악하다. 보건지소와 보건 진료소가 1개씩 있으나 병, 의원은 없다. 덕적면 전체에 자동차는 552대, 선박은 67척이다.
 
옛 자료에 따르면 1954년 덕적도의 인구는 2244호 1만2788명이었다. 한국 전쟁 직후라 원주민보다 피난민이 약간 더 많았다. 원주민이 6039명, 피난민이 6749명. 무속을 제외하면 당시에도 종교는 기독교가 대세였다. 기독교인은 500여명이나 됐지만 절은 선갑도에 하나뿐이었고 그 절에도 신도가 없이 파계승만 1인이 거주했다. 당시 덕적군도 전체에 라디오는 25대였고, 신문은 110부를 구독했다. 인천신문 50부. 연합신문 30부, 조선일보 30부, 신문은 대부분 유지들과 관공서에서 구독했다. 그때는 덕적도에도 미군부대가 주둔했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담배 등의 물품을 판매하는 좌판이 2~3개 있었다. 의료인은 의사 3, 한의사 2, 수의사 1명과 의생 3명이었다.
 
한 겨울에도 시퍼런 배추가 자란다
 
전쟁 직후에도 덕적도는 산림이 울창했다. 그래서 피난민들은 도벌로 생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피난민의 집들은 해변에 다닥다닥 붙어있어서 ‘게딱지 집’이라 했다. 피난민들의 정착 초창기에는 본동(선주민) 주민들과 피난민들이 서로의 동네를 왕래하기 어려울 정도로 험악했다. “죽지 않을 만큼 때려 주고 맞기도 했다” 선주민과 피난민 간에 싸움이 일어나면 선주민들은 “피난민하고 사람하고 싸운다”고 말할 정도로 피난민들에게 적대적이었다. 피해의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차츰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자 섬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한 겨울에도 덕적도의 텃밭에는 배추가 시퍼렇게 자란다. 마늘도 그 푸른 줄기에 윤기가 흐른다. 고목의 동백나무도 꽃을 피운다. 이들 모두 남해의 섬과 바닷가 마을에서나 겨울을 난다고 알려져 있는 식물들이다. 같은 위도상의 육지 땅이라면 자연적인 생육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수원과 위도가 비슷한 덕적도의 겨울에 이들 식물이 자라는 것은 쿠로시오 난류의 영향 때문이다. 물은 열을 저장하고 이동시키는 능력이 탁월하다. 수천, 수만 리 먼 섬들에서 서로 비슷한 풍토를 발견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인천 연안부두에서 쾌속선으로 한 시간의 뱃길. 지금은 한철 꽃게잡이를 제외하고는 여름철 피서지로 더 각광 받는 섬이지만 과거 덕적도는 연평도와 함께 서해안의 대표적인 어업전진기지였다. 여름 어장철이면 덕적도에도 파시가 섰었다. 덕적도의 관문 도우 선착장 입구에는 민어를 들고 있는 어부상이 서있다. 덕적도가 민어의 고장이었음을 나타내는 증표다. 민어의 산란장이었던 덕적바다. 조기가 연평바다를 떠났듯이 지금은 민어 역시 덕적 바다를 떠난 지 오래다. 
 
글·사진 강제윤(시인·<섬을 걷다> 저자), 기획 인천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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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반갑습니다. 한겨레신문 이병학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