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도 돈다발 물고 다니던 연평도 파시 강제윤 시인의 섬 기행

파시(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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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때 연평도에는 상주하는 경찰이 없었지만 파시 때면 해주에서 임시로 경찰들이 파견 나왔다. 일본인 소장이 순사 3~4명을 데리고 들어왔다. 순사들만으로 인원이 부족해 파시 기간 동안 임시직원을 썼다. 그들을 ‘대리 순사’라 했다. 순찰은 대체로 완장과 목검을 찬 대리 순사들 몫이었다. 하루도 사고가 없는 날이 없었다. 섬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큰 사고가 나면 해주로 무전을 쳤다. 경찰선이 바로 달려와 범인들을 싣고 갔다. 파시가 끝나면 순사들은 철수하고 다시 연평도는 구장(區長)을 비롯한 섬의 원로들과 주민들이 동규(洞規)에 따라 자치적으로 질서를 유지해 나갔다. 그것을 ‘동네방’이라 했다. 법규를 위반한 사람이 있으면 구장 집 마당에서 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멍석말이를 하거나 곤장을 쳐서 다스렸다. 섬에 금주령이 내려졌는데 발각이 되면 주민들 앞에서 밀주 단지를 깨버리기도 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파출소와 헌병대, 보안대가 주재했다.
 
파시 땐 경찰들도 모자라 ‘대리 순사’까지 동원
 
Untitled-1 copy 4.jpg일제 때는 조기의 생태를 연구하기 위한 일본인 어류학자의 방문도 있었다. 1930년 5월 조선총독부 부산 시험장 기사로 근무하던 우치다 케이타로(內田惠太郞)는 인천에서 시험선을 얻어 타고 조기의 생태와 산란을 조사하기 위해 연평도를 찾았다. 파시 때면 캬바레도 생기고 가설 신파극장이나 곡마단도 들어 왔다. 연예인들이 위문 공연을 오기도 했다. 공연은 대부분의 배들이 들어오는 조금 물때에 주로 열렸다. 1960년대에는 파출소 앞 공터에 가설극장이 생기고 백남봉, 양훈, 양석천 같은 코미디언이나 장소팔, 고춘자 같은 만담가들이 공연을 했다. 배뱅이굿으로 유명한 이용관도 와서 공연을 했다.
 
공연이 끝난 다음날 가설극장 터에 나가면 돈다발을 줍는 일도 흔했다. 선주나 선원들이 술 취해 구경을 나왔다가 떨어뜨리고 간 것이었다. 파시 때는 개도 돈다발을 물고 다녔다는 말이 헛소리가 아니었다. 파시에 사람과 돈이 몰리니 간혹 폭력배들이 꼬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연평도에서 쫓겨났다. 일제시대 어느 해던가 해주 시멘트 회사의 오야붕이라는 폭력배가 부하들을 이끌고 연평도를 ‘접수’하러 왔다. 해주 깡패가 왔다기에 선원들과 마을 사람들이 구경을 갔다. 오야붕이란 자는 머리에 기름을 잔뜩 바르고 긴 앞 머리카락을 왼쪽으로 돌려서 붙였는데 무엇으로 붙였는지 바람이 불어도 머리카락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야붕은 지팡이 손잡이에 쇳덩이를 덧댄 ‘등산마찌’를 무기 삼아 들고 왔다. 하지만 연평도에 모인 선원들이 모두가 힘깨나 쓴다는 거친 뱃사람들이었다. 선원들이 깡패들을 에워싸고 “야야, 너 해주에서나 깡패 노릇 하지 연평 와서 깡패 노릇 하려고 하냐”고 엄포를 놓은 뒤 멱살을 틀어쥐니 바로 항복하고 이내 줄행랑을 쳤다.
 
바닷물을 마시는 건지 술을 마시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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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 때면 밀물이 갱변 술집 문턱까지 차오르기도 했다. 어떤 선원들은 만취해서 자갈밭에 자다가 물위에 뜨기도 했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저 사람 죽겠네” 소리치며 달려가 구하기도 했다. 아침이면 또 갈 가마 아궁이에서 잠든 선원이 발견하기도 했다. 밤에 술 취한 선원이 자기 배를 찾아가지 못하고 온기가 남아 있는 갈 가마 아궁이에서 자버렸던 것이다. 작은 섬에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몰리는 파시 때는 모든 것이 부족했지만 그중에서도 화장실 부족이 가장 큰 문제였다. 공중화장실이 있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을 다 수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새벽이면 진풍경이 벌어졌다. 어둑한 해변에 작은 불빛들이 길게 늘어서서 깜빡거렸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해변에 앉아 함께 대변을 보며 담배를 피우는 불빛이었다.
 
연평도에서도 폭풍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1934년 연평도에 큰 폭풍이 몰아쳤다. 6월1일 아침부터 비가 오고 풍랑이 일자 어선들이 내항으로 피항해 들어왔다. 내항에 들어온 어선은 600여척. 6월2일 오후 4시경, 강력한 폭풍이 몰아쳤다. 600여척의 어선들이 서로 부딪치면서 충돌해 323척이 파손되고 204명이 물에 빠져 죽었다. 후일 황해도 지사와 황해도 수산협회에서 조난자 위령비를 세웠다. 연평 우체국 앞에 세워졌던 위령비는 지금 조기 박물관 근처로 옮겨져 있다.
 
사라호 태풍 때도 수많은 조기 배들이 뒤집어졌다. 해변의 판자 집들이 쓸려가 버리고 피항을 온 배들도 서로 부딪치면서 파손되고 침몰해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눈물의 연평도’를 만든 태풍 사라는 1959년 9월15일, 사이판 섬 해역에서 발생해 한반도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동해로 빠져나가 소멸했다. 사망·실종 849명, 이재민이 무려 37만3459명이나 됐다. 선박은 1만1704척이나 파손 됐으며 재산 피해는 1900억원에 달했다. 연평도에 피항을 들어온 어선들도 서로 몰려 있다가 부딪치는 바람에 파손되고 침몰해 피해가 컸다.
 
어로저지선과 파시의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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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도 근해에서 조기가 가장 많이 잡히는 어장은 구월이 안골을 비롯한 해주 인근 바다였다. 해방 후에도 38선 이남인 대수압도 북쪽 해주만까지 남한의 조업구역이었다. 하지만 한국 전쟁 이후 휴전이 되면서부터 황금어장의 대부분이 북쪽의 영해가 됐다. 남쪽의 어선들은 연평도 북쪽 1.3km 거리인 NLL 이남에서만 조업이 가능했다. 그러나 조기를 쫓는 배들은 황금어장을 눈앞에 두고 조기떼를 포기할 수 없었다. 월선 조업을 단속하는 남북 양측의 감시가 있었지만 감시를 피해 미력리도 등 북쪽 섬들 앞까지 숱하게 넘어 다녔다. 월선하면 잡히는 조기의 양이 대 여섯 배가 넘으니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넘어 다녔다. 
 
그 과정에서 밤에 몰래 북쪽 바다로 넘어가 조업하던 남한 배들이 북한의 포격을 받고 침몰하는 사건들이 자주 발생했다. 1955년 5월에는 북한군이 월선 조업 중이던 남한 어선들에게 집중 포격을 하여 수십 명이 사망했다. 그 후에도 남한 쪽 배들의 월선 조업은 계속됐다.
 
1957년에는 연평도 선적의 배가 북쪽으로 넘어가 조업하다가 육섬 뒤쪽에서 북한군의 포를 맞고 침몰했다. 3명만 살아 나오고 5명이 사망했다. 하지만 월선 조업은 중단되지 않았고 남북 간에 잦은 마찰이 빚어졌다. 그러던 중 남한 정부는 1968년, 연평도 북쪽으로 어선들의 항해를 금지하는 어로저지선(어로한계선)을 만들었다. 그와 함께 연평도에 있던 서해 어로지도 본부도 덕적도 북리 항으로 옮겨 갔다.
 
그 무렵은 오랜 세월 남획의 결과 조기의 어획량이 급격히 줄어들던 시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1969년 무렵부터 황해에 한랭전선이 깔려 칠산, 연평 어장의 수온이 올라가지 않았다. 물 온도가 섭씨 11-12도 이상이 돼야 조기가 회유 하는데 수온이 차자 조기떼는 북상하지 않고 남해에 머물렀다. 유자망 어선들은 가거도나 홍도 근처에 그물을 내리고 마지막 남은 조기떼를 잡아 올렸다. 조기떼가 연평어장으로 올라갈 길이 아주 막혀버린 것이다. 1969년에는 어로저지선이 남쪽으로 더 내려오고 어선들의 출입항마저 자유롭지 못하게 됐다. 연평도 근해에서는 어선이나 운반선의 단독 운항이 금지되고 여객선 출항 때에만 따라서 움직일 수 있었다. 마침내 수백년 이어온 연평어장의 조기잡이가 끝나고 연평도 조기 파시도 종말을 고했다.
 
글·사진 강제윤(시인·<섬을 걷다> 저자), 기획 인천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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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반갑습니다. 한겨레신문 이병학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