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놀음에 날 새는 줄 모르던 작사판 연평도 강제윤 시인의 섬 기행

파시(10)
파시 철이면 술집 100개 작부만 50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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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 때 연평도에는 요정이나 요릿집 같은 색주가만 100여 군데 이상이 생겼다. 한 집에 작부가 5명씩은 됐으니 줄잡아 500명이었다. 봄, 조기 파시 철이 돌아오면 연평도에 고깃배보다 먼저 들어오는 것이 상점과 색주가들이었다. 점포를 세내고 가건물을 짓고 상품을 늘어놓고 손님 맞을 준비에 분주했다. 색주가에서는 술을 비축하고 안주를 장만하고 작부들을 구해오고 한철 장사 준비로 들썩였다. 장사꾼은 흑산도 위도 파시를 거처 오는 이들도 있었고 한몫 잡아볼 심산으로 인천 등지에서 처음 들어오는 이들도 있었다. 아예 배를 마련해 장사할 물건과 사람들을 싣고다니며 어선을 쫓는 장사꾼들도 있었다. 어부들도 흑산도 단골이 연평도 단골이 되기도 했다.
 
이때가 되면 마을의 가장 앞줄, ‘갱변’ 쪽 집들은 장사꾼들에게 한철 세를 놓고 자신들은 마을 안쪽 집에 방 한 칸을 얻어 이사를 갔다. 그때부터 가정집이 색주가로 바뀌었다. 아무리 작은 초가집도 방이 서너 칸은 됐다. 해변 가인 ‘갱변’에는 판자로 지은 가건물도 생기고 그곳에도 색주가가 들어섰다. ‘어부들을 쫓는 철새’ 혹은 ‘물새’라 불린 작부들은 연평도에 들어오면 사진과 증명서를 제출하고 면사무소에 등록을 해야 했다. 주점도 영업허가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무허가 주점이나 미등록 작부도 많았다. 400명의 작부가 등록을 하면 미등록 작부가 200여명은 됐다.
 
색주가는 주인의 고향에 따라 인천옥, 목포옥, 해주옥, 군산옥, 비금옥, 위도집, 흑산집 등의 간판을 달았다. 해변 식당, 신선 요리집 등 식당 간판을 단 집들도 이름만 식당이지 다들 색시장사를 했다. 심지어 강원도 속초나 묵호에서 어선을 따라 온 장사꾼이 문을 연 색주가도 있었다.
 
일제 때는 일본 게이샤에 카페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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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때는 일본 유곽도 있었고 일본 기생들도 많았다. 1930년대 연평 파시에는 상점 중에서 요릿집과 음식점이 가장 많았다. 어느 해에는 요릿집에 일본 기생만도 50명이 넘었다. 조선인 업소는 60여개, 작부가 150여명이었다. 당시 연평도의 작부 수는 해주 시내보다 3~4배가 많았다. 1936년, 연평 파시에 신고 된 요릿집은 300개, 음식점이 53호, 카페도 1호가 있었으며 이발관 9개, 목욕탕 3개, 여인숙 5개, 대서소가 2개였다. 등록된 작부들이 95명, 예기는 5명이었다. 그때도 등록되지 않은 작부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해방 후인 1947년 연평도에는 500호의 가옥과 3천여명의 주민이 있었다. 500여 호 중에서 파시 때 색주가로 바뀌는 집이 260여호나 됐고 등록된 작부만 400여명이었다.
 
파시 때면 술 담글 줄 아는 주민들은 막걸리와 청주를 만들어 내다팔거나 색주가에 댔다. 쌀밥은 못 먹어도 술은 쌀로 빚어다 팔았다. 파시 때 연평도에서 유명한 술은 ‘박문주’라는 청주였다. 연평도 사람들이 용수박아 뜬 쌀 술이었다. 술의 빛깔이 꽃처럼 빨갛고 입에 척척 들러붙었다. 색주가에서 박문주는 됫술로 팔았다. 주민들은 막걸리를 만들어 색주가에 대거나 직접 팔기도 했다. 쌀 한 말로 막걸리를 만들어 팔면 쌀 한 가마니 값을 벌었다.
 
조기잡이 배가 정박하면 나이가 어린 화장이나 늙은 영자는 배를 지키고 뱃동사 6~7명이 술집으로 몰려갔다. 뱃동사들 틈에 색시들 2~3명이 앉아 술을 쳤다. 남자들 숫자에 비해 여자가 적으니 맘에 드는 색시를 차지하기 위한 주먹다짐도 흔했다. 더러는 색시를 차지하기 위해 패싸움까지 벌어질 정도였다. 색시들 중에는 장구 잘치고 창을 잘하는 이들도 있었다. 고급술이라야 정종이나 박문주 정도였고 대부분은 막걸리나 소주였다. 안주는 생선탕이나 구이, 삶은 돼지고기 등이 상에 올랐다. 그때나 지금이나 색시들은 술과 안주를 먹으며 매상을 올렸다.
 
거미줄 친 맥주병 섞어 바가지 씌우던 작사판
 
고단한 뱃일에 지친 뱃동사들은 색주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몇 잔 못 마시고 취해버렸다. 그대로 방에 누워 잠들기도 하고 깨어나 다시 마시기도 했다. 뱃동사들은 돌아가며 쓰러졌다 일어나고 그렇게 밤을 새워 술을 마셨다. 막걸리나 소주를 마시던 뱃동사들도 막판에는 입가심으로 맥주를 마시곤 했다. 맥주 안주로는 사과, 배 등의 과일이나 과자가 나왔다. 하지만 그쯤 되면 거의 모든 뱃동사들이 취해 그 자리에 잠이 들고 말았다. 아침에 배임자가 술값을 계산하려고 색주가에 들르면 맥주병이 방안에 가득 차 있었다. 뱃동사들이 잠든 사이에 빈 맥주병을 가져다 두고 바가지를 씌운 것이다. 그 중에는 거미줄이 쳐진 맥주병도 더러 있었다. 술집 주인은 밤새 거미줄이 쳐진 것이라고 우겼다. 그러면 선주도 별 수가 없었다. 속는 줄 알면서 속았다. 그것이 작사판이었다. 1947년에는 “소주 한 되에 1천원, 쌀 한 말에 680원, 고물가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는 신문보도(<동아일보> 1947년 5.23)까지 나올 정도로 연평파시의 바가지가 극성이었다. 
 
사리 때면 밀물이 술집 문턱까지 차오르기도 했다. 어떤 선원들은 만취해서 자갈밭에 자다가 물 위에 뜨기도 했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저 사람 죽겠네” 소리치며 달려가 구하기도 했다.
 
매번 선주가 술을 사는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은 선원들 자신이 돈을 내고 먹었다. 술 먹고 술값을 못 내면 주인에게 덜미가 잡혀 갇히기도 했다. 그때는 선주가 와서 빼내주었다. 색주가에서는 술과 여자, 노름 등 선원들이 나락에 떨어질 수 있는 모든 요소가 다 갖춰져 있었다. 힘든 뱃일로 어렵게 번 돈을 술집에서 쉽게 탕진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집에는 한 푼도 가져다주지 못한 방탕한 어부의 아내들은 혼자 힘으로 아이들 기르며 생고생을 했다.
 
“밤새도록 술들 처먹고 돈 떨어뜨리고, 개가 돈다발을 물고 다니고 그랬는데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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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주가라고 다 호황을 누리는 것은 아니었다. 술집도 인기 있는 집이 따로 있었다. 예쁜 색시나 재주 많은 기생, 후한 인심으로 단골손님을 많이 확보한 술집들이 돈을 벌었다. 흑산 파시나 위도 파시, 연평 파시까지 또 해마다 봄이면 술집과 선원들이 대부분 함께 다녔으니 단골이 가능했다.
 
봄철 파시 때 “술집 누나들이 오면” 동네 아이들의 마음도 덩달아 설렜다. 어린 마음에도 예쁜 누나들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술집에 드나들면서 누나들의 담배 심부름을 해주곤 했다. 이름도 모르는 누나들이 “그림같이 예뻤다. 장구도 잘치고 멋있었지만 성질은 드러웠다.” 어떤 누나들은 개차반처럼 구는 손님들이 있으면 병을 깨고 덤벼들기도 했다. “파송을 치고 누나들이 떠나면 어린 마음도 쓸쓸해 졌다.”
 
조금 때를 제외하면 바람이 불어 피항해 온 배들이 많을 때가 색주가들에게는 대목이었다. 그래서 연평 파시 때면 “기생들이 갈바람 불라고 굿을 한다”는 소문도 돌았다. “바람아 강풍아 섣달 열흘만 불어라” 기원하며 몰래 숨어 굿을 한다는 것이다. 보건소장은 1주일에 한번씩 색주가를 돌면서 작부들의 성병 검사를 했다. 6·25 이후에는 연평도에 미군부대도 주둔해 있었다. 미군들도 색주가에 내려가 술을 마시고 가곤 했다.
 
화사하게 치장한 겉모습과는 달리 색시들의 고통은 말할 수 없이 컸다. 밤낮 없이 술을 마시고 험한 사내들의 비위를 맞추고 몸까지 팔아야 했으니 파시가 끝날 때쯤이면 몸과 마음이 온통 만신창이가 됐다. 게다가 작부들 중에는 색주가의 포주에게 번 돈을 뜯기고 노예처럼 생활해야 하는 일도 흔했다. 색주가를 비롯한 장사치들은 봄철 조기잡이가 파송을 치면 미련없이 섬을 떠났다.  
 
글·사진 강제윤(시인·<섬을 걷다> 저자), 기획 인천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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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반갑습니다. 한겨레신문 이병학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