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업 장군, 조기의 신으로 등극하다 강제윤 시인의 섬 기행

서해의 황금시대, 파시 ⑨ 
조선 세종 때부터 조기는 연평도 특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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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만 연안은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 세 강물이 황해로 합류되는 지역이다. 강들에서 흘러온 토사가 형성한 얕은 모래갯벌과 풍부한 부유 물질은 조기떼에게 최적의 산란장을 제공했다. 연평 열도는 해주만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연평도, 소연평도, 미력리도, 갈리도, 장재도, 초마도 등이 연평 열도를 이룬다. 남에서 올라온 조기떼는 모두 연평 열도를 거처야 해주만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연평 바다 조기는 이동 중 살이 올라 칠산 바다의 조기보다 크고 기름졌다. 연평도 부근에 황금의 조기 어장이 형성된 것은 이런 지리적 요인 때문이다.
 
연평도에서 조기잡이는 안목어장에서 처음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목어장의 당섬과 모니도 사이 바다 속에는 자연 둑인 ‘줄등’이 있다. 썰물이면 두 섬은 줄등으로 연결된다. 물살이 센 줄등에 주목망(柱木網)을 설치했다. 나무말뚝을 박아 그물을 걸고 조수에 밀려오는 조기떼를 잡는 것이 주목망이다. 예부터 안목어장에서 잡힌 조기는 크고 맛있기로 유명했다. 길이가 보통 40~50 센티미터가 넘었다. 안목어장의 조기는 궁에 진상품으로 올라갔다. 안목뿐만 아니라 구지도 부근에도 썰물이면 줄등이 나타났다. 구지도 줄등에도 말뚝을 박아 그물을 쳤다. 그물에는 조기뿐만 아니라 홍어, 도미, 농어, 복어 등이 대량으로 걸려들었다.
 
‘장군신’, 섬사람들의 수탈·억압과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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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도의 조기잡이는 임경업 장군과 인연이 깊다. 1634년 5월, 의주부윤 임경업 장군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구출하기 위해 황해를 건너던 중 잠시 연평도에 정박한다. 간조 때 임 장군이 가시나무를 찍어 안목바다에 꽂게 하였는데 물이 빠지자 가시나무의 가시마다 수많은 조기가 걸렸다고 전한다. 이것을 계기로 임경업 장군은 연평도 조기잡이의 시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후 임경업 장군은 연평도를 비롯한 서해 바다의 어업의 신으로 등극했고 연평도에는 임경업 장군의 신당까지 생겼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연평도의 조기잡이는 임경업 장군의 연평도 방문 이전부터 있어왔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연평도 특산물로 조기가 기록되어 있고 중종실록에도 이미 연평도의 어전을 둘러싼 다툼이 등장한다.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더라도 전설은 전설 나름의 생명력이 있다. 그래서 전설의 사실 여부를 따지는 일은 부질없다. 신앙 또한 그렇다. 임경업 장군이 어떻게 임 장군 신이 됐는지를 따지는 것 역시 부질없다. 신앙은 논증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믿으면 있고 믿지 않으면 없다. 임경업 장군이 조기잡이의 시조가 되고 어업의 수호신이 된 것은 아마도 섬사람들의 염원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신을 모시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추자도의 최영 장군이나, 완도의 송징 장군, 임경업 장군에 이르기까지 바다에서 신으로 모셔지는 이들 중 유독 장군이 많은 것은 섬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수탈과 억압을 받았는지를 보여주는 징표다. 그들에게는 왜구의 침입이나, 부패한 관리들의 수탈을 막아줄 힘센 장군신이 필요했을 것이다. 섬사람들은 임경업 장군신이나 최영장군 신에게 안전과 풍어만을 빌지는 않았을 것이다. 단지 그런 이유라면 오히려 바다의 주재자인 용왕에게 비는 편이 더 영험했으리라. 하지만 용왕은 세속의 일에는 관여 할 수 없는 존재! 세속에서도 강력한 힘을 발휘하한 장군들이 바다의 신으로 모셔진 까닭은 그 때문일 것이다.
 
풍어제, 임장군당에 깃발을 먼저 꽂으면 ‘장원’한다고 믿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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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의 섬이나 어촌 마을에서는 대체적으로 용왕 신을 섬겼지만 조기잡이 어선들만큼은 임장군신을 가장 크게 모셨다. 연평 면사무소 뒷동산, 임경업 장군 사당. 임 장군 신을 모시던 당집은 새로 단장 된 뒤 더 이상 당이 아니다. 어부들과 서해 바다 섬사람들의 신 임 장군을 모신 신전은 사라지고 없다. 당은 조선의 충신 임경업 장군을 모신 사당이 됐다. 칼을 들고 갑옷을 입은 임장군도는 간 곳이 없고 사당 안에는 관복을 입은 장군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그래도 사당은 여전히 수많은 만신들의 성지다. 사당 입구 당산나무 가지에는 오색 천들이 바람에 나부낀다.
 
파시 때는 연평도에 입항하는 모든 외지 배들도 임장군당에 제사를 올렸다. 본래는 당 섬에 임 장군 당이 있었다고 한다. 임 장군 당이 연평도 본섬에 새로 생긴 뒤부터는 당 섬의 작은 당은 잘 찾지 않게 되었다. 과거에는 당지기 만신도 있었다. 풍어제는 당지기 만신이 주관하거나 “인천에서 가장 말 잘하고 공수 잘 짓는 무당”을 모셔오기도 했다.
 
과거 연평도의 풍어제는 두 종류가 있었다. 연평도 주민 모두의 안녕을 비는 큰 고사(대동 굿)는 주민들이 추렴하여 모셨고 배 연신 굿은 선주 개인들이 모셨다. 배 연신 굿은 개인 굿이지만 큰 고사에 버금가는 규모로 행해졌다. 연평도 주민들은 매년 정월 초하루부터 보름 사이에 길일을 택해 임 장군 당에서 큰 고사를 지냈다. 마을 굿이지만 그래도 굿의 중심은 배를 부리는 선주들이었다. 고사가 시작되면 조업 나갈 배들마다 깃발을 들고 와서 당 앞에다 깃대를 꽂았다. 가장 먼저 깃대를 꽂는 선주가 조기를 가장 많은 조기를 잡는 ‘장원’을 한다는 믿음이 있어서 깃대를 먼저 꼽기 위한 경쟁도 치열했다. 큰 고사는 3일씩 이어졌다. 제물은 쌀과 소, 돼지고기, 떡시루 등이 올려졌다. 축원 굿을 할 때는 선주들이 돌아가며 댓가지를 잡았다. 만신의 기원으로 신이 내리면 댓가지가 흔들렸다. 아이들은 고사떡을 훔쳐 먹으면 명이 길어진다는 속설을 핑계 삼아 몰래 당에 들어가 떡을 훔치기도 했다.
 
출어 전에 선주들은 각자 자신의 배에서도 고사를 지냈다. 뱃고사는 배임자들이 개별적으로 모셨다. 선주들이 자기 배의 깃발을 들고 당으로 가서 돼지고기와 떡시루, 과일 등을 올렸다. 이것이 배 연신 굿(영신굿)이다. 배 연신 굿은 임 장군 뿐만 아니라 용신, 배 선왕인 물애기씨, 여러 지역의 대감 신들을 청하여 모시는 굿이었다. 굿은 선주 부인이 날짜를 받아 무당에게 요청 했다. 출어를 앞둔 선원들은 부인과 잠자리를 하지 않았다. 굿을 하기 이틀 전부터는 배의 선원들이 집에 들어가지 않고 배에서 잠을 자며 바닷물에 목욕재계를 했다.
 
배 연신 굿을 준비하며 선주는 배 안에다 만장기(삼색기)와 오색기 등 수많은 온갖 깃발을 달았다. 깃발 중 단연 으뜸은 임 장군 기였다. 광목에다 임 장군을 그려 넣은 깃발을 배의 제일 높은 깃대에 매달았고 그 밑에는 ‘장대바리’라는 긴 무명천을 늘어뜨렸다. 굿은 뱃사람들이 먼저 배안의 부정을 푼 뒤에야 무당이 배에 올라가 주관했다. 선원 중 원로인 영자는 바가지에 물을 담아 숯을 띄운 뒤 솔가지로 적셔 배의 이물부터 고물까지 배안 구석구석으로 돌아다니며 뿌렸다.
 
“인 부정에 누린 부정, 비린 부정, 피 부정에 상문 부정, 누추한 부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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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고사 때뿐만 아니라 배안에서 부정한 일을 행해졌거나 부정한 것을 목격했을 때는 그때마다 부정풀이를 했다. 부정풀이는 부정쓸기, 부정가시기, 부정씻기 등의 이름으로 불렸다. 바가지에 바닷물이나 소금, 숯, 고추가루 등을 담아 배안을 돌아다니며 뿌리며 부정한기운을 몰아내는 의식이었다. 소금이나 물 등의 정화력이 부정한 기운을 씻고 잡귀를 물리쳐 준다고 믿었다.
 
무당은 배안에서 여러 신들을 청하는 신청울림을 한 뒤 임장군당으로 당산맞이 굿을 하러 이동했다. 원래 연평도 당에서는 임장군의 화상을 걸어 놓고 당산맞이 굿을 했다. 하지만 화상이 없는 곳에서는 나무 말뚝에 도포를 입혀 임장군상으로 삼고 또 다른 나무말뚝에 빨간 치마와 노랑 저고리를 입힌 임 장군 부인상을 삼아 굿을 하기도 했다. 임 장군 당으로 가는 행렬은 장군 기를 든 사공(선장)이 가장 선두에 서고 무당과 선주, 제물을 진 사람, 선주부인, 뱃동사들의 순으로 이어졌다. 행렬은 장단에 맞추어 어깨를 들썩이며 줄지어 올라갔다. 행렬은 당산에 이르러 제물과 향을 바치고 당산맞이 굿을 시작했다. 굿은 부정풀이와 초감흥, 영정물림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선주 일행이 다시 바닷가로 나와 뱃 동사 가족 중에 바다에서 죽은 사람의 혼을 위로하는 굿을 올리고 허수아비처럼 생긴 ‘산영감’을 바다로 떠나보내면 배연신 굿의 모든 과정이 끝났다.
 
기독교 보급으로 무속신앙 쇠락
 
일제 말 임경업 장군 당과 신사에 얽힌 이야기는 당시 민중들에게 임장군당이 얼마나 소중한 성소였는지를 알려주는 설화다. 당시 연평도어업조합 이사였던 와다(和田)가 주관이 되어 임장군 사당 위에다 신사를 건립할 계획을 세웠다. 일제의 민족문화말살 정책 차원에서 행해진 일이었다. 그런데 신사 터를 닦은 날 밤에 와다가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임장군이 나타나 칼을 들고 와다에게 호통을 쳤다.
 
“날이 밝으면 당장 신사 건립을 중단하고 파헤친 터를 원상복구 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에게 큰 불행이 있을 것이다.”
 
잠이 깬 와다는 꿈이 현실처럼 생생해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날이 밝자 와다는 마을 유지들과 상의해서 신사 건립을 중단하고 터를 원상복구 했다. 그리고 마을 원로들과 함께 임장군 당에 제물을 올리고 제사를 드렸다. 설화는 임장군에 대한 신앙이 단지 조선 사람들뿐만 아니라 어업에 종사하는 일본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임장군 당은 기가 세서 당 앞을 지나던 소가 넘어지곤 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한다.
 
출어 때는 연평도에서도 여자와 관련된 금기가 많았다. 조업 나가는 날 아침, 여자가 앞질러 가면 재수 없다고 조업을 나가지 않는 선주들도 있었다. 출어 전날에는 꿈에 여자를 보는 것도 금기로 여겼다. 동물에 대한 금기도 있었다. 출어 날자가 잡히면 선주나 선원들은 개고기를 먹지 않았다. 개를 잡는 곳에도 가지 않았다. 조업 중 거북이가 잡히면 술을 먹여 바다로 보내주었다. 돼지꿈을 꾸면 만선을 이룬다고 믿었다.
 
연평도를 비롯한 서해안 일대의 섬들에는 기독교의 세가 강했다. 그래서 어업을 하는 사람들과 교인들 간에 마찰도 잦았다. 어떤 때는 기독교인들이 굿을 못하게 방해를 놓기도 했다. 기독교를 믿는 선주들 중에도 배를 부리는 사람들은 굿을 안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러는 다른 교인들의 눈을 피해 인천 문학동 등지로 나가 굿을 하고 오는 일도 있었다. 출어 때는 연평도에서도 여자와 관련된 금기가 많았다. 조업 나가는 날 아침, 여자가 앞질러 가면 재수 없다고 출어를 포기하는 선주들도 있었다. 출어 전날에는 꿈에 여자를 보는 것도 금기로 여겼다. 동물에 대한 금기도 많았다. 출어 날짜가 잡히면 선주나 선원들은 개고기를 먹지 않았다. 개를 잡는 곳에도 가지 않았다. 조업 중 거북이가 그물에 걸리면 술을 먹여 바다로 보내주었다. 돼지꿈을 꾸면 만선을 이룬다고 믿었다.
 
글·사진 강제윤(시인·<섬을 걷다> 저자), 기획 인천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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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반갑습니다. 한겨레신문 이병학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