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업조합 전무하지 황해도지사 안 한다” 강제윤 시인의 섬 기행

서해의 황금시대, 파시 ⑧
평양 사람들은 통이 크고 서울 사람들은 쫌팽이
기계배·나일론 그물 등 기술의 축복이 재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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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 어장에서 여름이 시작되면 조기잡이는 파송 치고 선주와 선원들은 심을 댔다. 한철 어로가 끝나는 것이 ‘파송’이고 임금을 정산하는 것이 ‘심 대기’다. 조기잡이 배 선원들의 임금은 월급제가 아니라 ’짓 나누기‘였다. 이익을 분배하는 것이 짓 나누기다. 연평도의 풍선(風船) 안강망 배는 3:7제, 기계배는 4:6제였다. 안강망 배는 선주가 매출 이익의 7짓(7할)을 가져가고 나머지 3짓(3할)을 선원들이 나눠가졌다. 그물이나 조업에 필요한 어구는 선주가 부담했지만 식구미는 선주와 선원들 공동 부담이었다. 어구를 제외하고 선상 생활에 소요되는 식량을 비롯한 여러 물품을 ‘식구미’ 혹은 ‘식고미’라 했다. 어장이 끝나 파송을 치고 입항을 하면 배임자(선주)는 정산을 보고 총 어획고에서 ‘식구미’를 제한 다음 선원 몫으로 3짓을 떼어 주었다. 그 3짓에서 선원들은 각자의 몫을 분배 받았다.
 
선원들 중 사공은 뱃동사들보다 두 배 정도 몫이 많았다. 노련하고 일을 잘하는 이물 사공은 ‘보너스’를 받기도 했다. 선원들이 배에 타기 전 선주는 선원들에게 ‘용’을 주었다. 선용, 선도지라고도 하는 일종의 선불금이다. ‘용’은 보통 쌀 세가마니 정도. 선원들 몫의 3짓을 나눌 때 선원들은 각자가 쓴 용은 제하고 분배 받았다. 선원들 중에는 술을 안마시고 착실하게 돈을 버는 사람도 있었다.  1959년 봄 파송 때 연평도의 어떤 어부는 5만원까지 벌기도 했다. 쌀 한가마가 3800원 할 때였으니 아주 큰 돈을 손에 쥔 것이다. 하지만 술을 좋아하는 대부분의 선원들은 그저 한해 벌어 한해 먹고 사는 것으로 만족 했다.
 
파송치고 심대기가 끝나면 연평도 조기잡이 어장도 문을 닫고 파시도 끝이 났다. 망종이후 부터는 한 달 반 정도 칼치잡이가 이어졌다. 칼치잡이마저 끝나면 배에서 내리는 선원들도 있었고 더러는 남쪽 바다로 내려가 겨울까지 조업을 계속하기도 했다.
 
대낮부터 색주가에서 술 푸던 객주들 싸이렌 소리에 우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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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선에 조기를 팔지 않은 어선들은 조기를 가득 싣고 연평도 포구로 입항했다. 조기 배가 들어오기 시작하면 어업조합에서 싸이렌을 울렸다. 만선을 한 배들은 흰 광목으로 선체를 두르고 북을 치며 의기양양하게 돌아왔다. 어선들은 모두 쇠와 징, 북등을 갖추고 다녔다. 안개 속에서 신호용으로 쓰기도 하고 뱃고사를 지내거나 귀항할 때 풍물을 울리는데도 사용했다. 대낮부터 색주가에서 술을 푸던 객주나 여관에서 노심초사하던 선주들도 싸이렌 소리를 듣고 서둘러 포구로 달려 나왔다. 배에서 조기를 내리는 일은 부두노조원들의 몫이었다. 어업조합에서 경매가 이루어지면 서울 마포의 경강상인들이나 평양, 개성, 인천의 객주들은 중매인을 시켜서 조기를 낙찰 받았다. 경매가 끝나면 선주는 선원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색주가로 가서 질펀하게 마시고 놀도록 했다.
 
조기를 살 때 가장 약삭빠르게 구는 사람들은 서울의 객주들이었다. 평양 사람들은 대체로 값을 후하게 쳐주었다. “평양 사람들이 크게 놀았지 서울 사람들은 쫌팽이 같았어.” 서울의 객주들은 무조건 싸게만 사려고 들었지만 평양의 객주들은 밑지지 않을 성만 싶으면 조기를 구입했다. 평양 객주들은 대인의 풍모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싸게 사기위해 너무 약삭 빠르게 굴던 서울 객주 중에는 경매가 끝날 때까지 조기를 전혀 낙찰 받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상고선도 마찬가지였다. 평양 사람이 선주인 상고선이 와야 값을 후하게 받았다.
 
연평도에 싣고 들어온 조기는 무조건 어업조합을 거쳐야 했다. 조합에서는 노조의 운반비와 경매 수수료를 떼어갔다. 경매가 시작되면 객주의 주문을 받은 중매인들이 조기를 낙찰 받아주고 수수료를 챙겼다. 황해도에 본부를 둔 어업조합의 연평 출장소가 생긴 것은 1934년. 연평도 어민들이 기존의 조개류를 취급하던 포패(捕貝)조합을 기반으로 어업 조합을 설립했다. 연평도 우체국 옆에는 아직도 일제 때 지어진 어업 조합 건물이 남아 있다. 아직도 수협 직원 몇 명들이 근무하는 건물은 퇴락할 대로 퇴락했다. 지금이야 상상도 안가는 일이지만 일제하에서 연평도 어업조합은 절정의 호경기를 누렸다. 조합 직원들이 20명이 넘었고 봄 파시 때는 임시 직원만 30~40명씩 더 썼다. ‘연평도 어업조합 전무 하지 황해도지사 안 한다’ 할 정도로 조합 간부들은 부와 권세를 누렸다. 조기파시가 시작되면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어선들이 모두 어업조합에 신고를 하고 신고비를 납부했다. 조합에서는 조기어장에 조업할 수 있는 출어허가증을 교부했다.
 
잘 말려 방망이질해 생으로 찢어먹으면 맛 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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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때부터 서울 마포에서 얼음을 싣고 온 경강상인의 배가 생물 조기를 사가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굴비로 가공된 뒤 유통됐다. 조기를 매입한 객주들은 인부들을 사서 간통에 조기를 저린 뒤 해변에 널어 말렸다. 잘 마른 굴비들은 서울이나 개성, 평양, 인천 등지로 팔려 나갔다. 황해도의 재령, 신천 방면 사람들도 굴비를 많이 사갔다. 조기 절이는 탱크가 해안을 따라 쭉 늘어서 있었다. 조기를 저리는 간통은 시멘트를 이용해 네모난 수조처럼 만들었다. 크기가 보통 집 한 채 만 했다. 간통의 깊이는 2~4미터. 간통 속은 사다리를 타고 오르내렸다. 간을 하기 위한 소금도 노적더미로 쌓여있었다. 조기는 보통 2~3일 정도 간통에 절인 뒤 꺼냈다. 조기와 소금이 절여지면서 간통에 생기는 물을 조기젓국이라 했다. 절여진 조기는 그 물에 한번 헹구었다가 꺼내서 바로 말렸다.
 
바위나 자갈밭은 햇볕에 잘 달구어져 조기가 쉽게 말랐다. 조기 절이고 말리는 일은 주민들이 품삯을 받고 했다. “품팔이 할 일이 많으니까 다른 장사에 머리를 잘 안 썼다.” 지금은 매립 되어 도로가 된 자갈밭은 온통 널어 말리는 조기들 천지였다. 영광굴비와는 달리 연평도 굴비는 엮어서 말리지 않고 꾸덕꾸덕 말린 뒤에 한 뭇씩 엮었다. 덕장에 말리지 않고 자갈 바닥에 말리는 풍습 때문이었다. 큰 것은 10마리가 한 뭇이고 작은 것은 20마리였다. 잘 마른 굴비를 방망이로 때려서 생으로 찢어먹으면 맛이 기가 막혔다. 봄에 잡히는 알밴 조기를 오사리(곡우사리) 조기라 했는데 오사리조기로 만든 굴비는 최상품으로 비싼 값에 팔려 나갔다. 기계배들이 조기잡이 배의 주류가 되면서부터 연평도에서 굴비 말리는 풍습도 사라져 갔다. 상고선이나 어선들이 조기들을 얼음에 재서 직접 인천으로 운반해 갔고 연평도 굴비말리기도 막을 내렸다.
 
기계배, 나이론 그물, 어군탐지기 등 기술의 축복이 재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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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가 잡히지 않는 조금 때는 안강망 배나 자망 배 할 것 없이 거의 모든 배들이 연평도로 들어왔다. 수천척의 배들로 연평 앞바다가 가득 찼다. 조금 때라고 선원들이 쉬는 것은 아니었다. 망가진 어구를 손보고 다음 출어를 준비하느라 쉴 틈이 없었다.
 
과거 그물은 칡넝쿨로 만든 갈망과 마를 이용해 만든 마망이 사용됐다. 면사가 보급되면서 이들 그물은 자취를 감추었고 면사는 나이론 그물에게 자리를 내줬다. 나이론이 나오기 전까지 연평어장의 그물은 면사였다. 일제 때는 면사를 타래로 사다가 마을 부녀자들에게 그물을 직접 뜨게 한 뒤 들기름을 먹여 사용했다. 그물의 벼릿줄이나 닻줄은 칡넝쿨로 만들어 썼다. 면사는 쉽게 부식되고 잘 끊어졌다. 면사는 햇빛이나 바닷물에 약했다. 그런 면사를 질기게 하고 썩지 않게 하기 위해 ‘갈’을 입혔다. 갈은 일종의 염색, 코팅이었다. 참나무 껍질을 푹 끓이면 물엿처럼 고아지는데 그것을 굳힌 것이 ‘갈’이다.
 
외지에서 온 선주들은 연평도의 갈 가마를 임대해 썼다. 초대형 솥에 장작불을 때서 갈을 넣고 물을 끓였다. 물이 펄펄 끓기 시작하면 그물을 집어넣은 뒤 다시 끓였다. 불을 때는 일은 보통 나이든 영자가 맡았다. 젊은 선원들이 회피하는 일이라 영자들이 했다. 갈이 다 입혀진 그물은 꺼내다 ‘갱변’ 자갈밭에 말렸다. 널 장소가 없어서 말리지 못한 그물은 배로 가져가 돛대에 걸어서 말렸다. 연평도의 옛 어선 사진 중 긴 돛대에 그물을 걸어 놓은 것이 갈 먹인 그물을 말리는 풍경이다. 하얀 면 그물에 처음 갈물을 들이면 빨갛게 변하고 그물도 빳빳해졌다. 조업에 돌아올 때마다 갈물을 다시 들이고 그렇게 몇 번의 갈물을 먹은 그물은 까맣게 변했다.
 
나이론 그물이 확산되면서 점차 갈물들이기 풍습도 사라졌다. 나이론 그물은 면사보다 3배 이상 조기가 많이 잡혔다. 면사는 그물이 뻣뻣해서 조기가 덜 붙고 잘 빠져 나갔지만 나이론 그물은 부드러워서 조기가 잘 붙고 한번 붙으면 못 빠져 나갔다. 어선들은 보통 서너 틀의 그물을 예비로 더 싣고 다녔다. 조업 중 그물이 끊어지거나 손상이 생기면 즉각 교체했다. 면사를 사용하던 시절 갈 가마의 장작이나 난방, 어선의 조리용으로 베어낸 땔감들 때문에 연평도의 산은 벌거숭이가 되어 갔다. 후일에는 땔감이 부족해서 풀까지 베어다 불을 땔 정도였다. 나이론 그물의 등장과 함께 갈물들이기는 사라졌다. 나이론 그물은 면사보다 3배 이상의 어회고를 올렸다. 기계배와 나이론 그물, 어군탐지기의 등장은 조기의 어획량을 획기적으로 늘렸지만 그것이 결국 조기어장의 고갈을 앞당기는 주범이 됐다. 기술의 축복이 기술의 재앙으로 돌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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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강제윤(시인·<섬을 걷다> 저자), 기획 인천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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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반갑습니다. 한겨레신문 이병학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