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억 마리 조기떼는 ‘눈물의 비석’으로 남아 강제윤 시인의 섬 기행

서해의 황금시대, 파시 ① 연평도
등대도 빛 잃은 지 오래, ‘시간’만 들었다 났다…
지상엔 없는, 사라진 곳 찾아 타임머신을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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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여객선을 기다리고, 출어할 물때를 기다리고, 폭풍이 멈추길 기다린다. 섬에서의 삶은 시간을 견디는 일이다. 섬사람들은 기다림의 자손이다. 기다림을 견딜 수 없는 사람은 섬 왕국의 시민권자가 될 수 없다. 육지의 시간과 섬의 시간은 다르다. 지상 어디에도 절대적인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공간마다 각기 다른 시간이 흐른다. 그리스 아토스 반도의 그리스 정교회 수도원들은 속세와 다른 시간대를 살아간다. 그들의 시간은 밤 12가 아니라 일몰부터 시작된다. 그 시간은 ‘비잔틴 타임’이다. 사람은 시간을 계량해서 시계를 만들고, 시간을 시계 안에 가두어 두기도 하나 그것은 그저 사람들끼리의 약속일뿐 우주의 시간을 가늠할 수 있는 계측기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섬의 시간은 느리다. 더러 정조(停潮)시의 물결처럼 정지하기도 한다. 시간이 정지해 있는데 몸과 마음이 바쁘다 해서 섬을 벗어날 방도는 없다. 정지된 시간을 다시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섬의 주재자는 오로지 자연이다. 저 바다와 바람과 구름과 달과 태양. 사람은 다만 섬의 시간이 이끄는 대로 따를뿐 시간의 지배를 거역할 수 없다. 바람이 거세진다. 바람이 섬의 시간을 흐르게 할 것인지 멈추게 할 것인지 사람인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바람 앞에서 사람은 그저 처분을 기다리는 죄수에 불과하다. 사람이 과학기술의 위세를 빌려 지구 행성의 지배자라도 되는 양 오만을 떨지만 섬에 와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사람은 여전히 바람 앞의 등불이다. 수 만 톤의 배도 대양을 가르는 태풍 앞에서는 한 조각 가랑잎에 지나지 않는다.
 
소년시절 트로트에 꽂힌 꿈의 그곳으로 30년만의 ‘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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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꿈꾸던 연평도로 간다. 내가 연평도란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소년 시절 최숙자의 노래 ‘눈물의 연평도’를 통해서였다. 그날 이후 나는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고향도 아닌 연평도에 향수를 품고 살았다. 그러므로 나의 연평도행은 30년만의 ‘귀향’이기도 하다.
 
 “조기를 담북 잡아 기폭을 올리--고/
 온다던 그 배는 어이하여 아니오--나/
 수평선 바라보며 그 이름 부르면
 갈매기도 우는구나 눈물의 연평도.... ” 
 
애틋한 가사와 애절한 곡조, 당시 중학생이던 나는 팝송보다 트로트에 ‘꽂혀’ 있었고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황성옛터’나 ‘선창’, ‘이별의 인천항’과 ‘눈물의 연평도’를 듣고 또 들었다. ‘눈물의 연평도’를 만든 것은 1959년의 태풍 ‘사라’였다. 그때 연평도 어장으로 조기잡이를 갔던 많은 어부들도 끝내 바다에서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연평도 등대 공원 입구에는 ‘눈물의 연평도’ 노래비가 서 있다. 하지만 연평도 등대는 더 이상 등대가 아니다. 유물이 되어버린 등대. 등대는 빛을 잃은 지 오래다. 1960년 3월 첫 점등 이후 수많은 조기잡이 배들에게 생명의 등불이었던 등대는 1974년 안보 상황을 이유로 일시 소등됐다가 1987년, 영영 용도폐기되고 말았다. 연평 어장에서 사라져버린 조기떼가 돌아온다 해도 안보 상황이 바뀌지 않는 한 등대가 다시 불을 밝힐 가능성은 희박하다.
 
오랜 세월 연평도는 조기의 섬이었다. 영광의 칠산 바다와 함께 연평도 근해는 황해 최대의 조기 어장이었다. 그때는 동해의 명태만큼이나 황해에도 조기가 지천이었다. 해마다 봄이면 연평도는 조기떼 우는 소리에 잠을 설쳤다. 바다에는 조기가 ‘버걱버걱’ 했다. ‘조기 한 바가지, 물 한 바가지’는 은유나 과장이 아니었다. 1960년대 후반까지 연평 바다는 수천 척의 배들로 성황을 이루었다. 어선들이 몰려오면 연평도에는 파시가 섰다. 조기떼의 이동을 따라 임시로 형성되는 바다의 시장이 파시(波市)다. 파시 때면 선구와 생필품을 파는 상점들이 들어서고 어선을 쫓아온 ‘물새떼’가 어부들을 유혹했다. 한창 때는 색주가만 100여 곳이 생겼고 ‘물새’라 부르는 작부들이 500명도 넘었다. 파시 동안 작은 섬 연평도는 수 만 명의 사람들로 밤낮없이 흥청거렸다. 10톤 남짓 되는 중선(안강망 어선) 한 척이 한 번 조업에 참조기를 100동(10만 마리)씩 잡는 것도 예사였다. 1910년에 벌써 황해, 경기, 평안도 등지에서 300여척 이상의 중선 배들이 몰렸다. 당시 <매일신보>는 파시가 절정에 달한 1943년 4월 말, 연평도에 어선 2000척과 운반선, 상선 등을 합해 무려 5000여척의 배들이 몰려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44년에도 연평도의 조기 어획량은 97억 마리나 됐다. <동아일보>는 1946년 봄, 연평 바다에서 무려 2백97억 마리의 조기가 잡힐 것 같다는 예상 기사를 내보냈다. 1947년 파시 때 연평도 어장에 동원된 어부들은 연인원 9만 명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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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의 등이라도 타고 시간의 바다를 건너야 할지…
 
하지만 어느 순간 그 많던 조기떼가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연평 바다에서 조기떼가 사라진 것은 1970년 무렵이다. 비슷한 시기 칠산 어장에도 조기가 나타나지 않았다. 오랜 세월 대규모 선단이 어린 새끼들까지 잡아들인 남획의 결과였다. 무차별 포획이 계속되자 어느 순간 멸종의 위험을 감지한 조기떼는 더 이상 사지를 찾아 들지 않고 바다 깊숙이 숨어버렸다. 혹시나 돌아올까 기다리는 어부들도 있었지만 몇 해가 지나도 조기떼는 소식도 없었다. 조기가 떠나자 배도 사람도 더 이상 연평도를 찾아오지 않았다. 조기떼의 소멸과 함께 구한말 시작된 연평도 조기파시도 끝났다. 조기들은 모두 어디로 떠나간 것일까. 4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여전히 연평도 어장에는 조기떼가 돌아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세월 따라 사람은 늙어가고 조기 파시에 대한 기억도 점점 희미해져 간다. 그 시대를 경험했던 노인들마저 이승을 떠나고 나면 연평도의 황금시대는 흔적도 남지 않을 것이다. 한 시대의 문화가 허망하게 사라지는 것은 애석한 일이다. 더 늦기 전에 조기파시의 기억들을 복원해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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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조기들은 동지나해에서 출발해 한반도 서해안을 회유하던 습성을 바꿔 추자도나 흑산도, 가거도 근해까지만 회유한다. 그 사이 조기의 어획량은 대폭 줄었고 굴비는 서민들이 접하기 어려운 고가의 음식이 돼버렸다. 수조기나 부서, 백조기 등이 노란 물감을 먹고 조기나 굴비로 둔갑하기도 했다. 그런데 근년 들어 다시 조기가 대량으로 잡히고 있다 한다. 조기들은 대부분 아주 작은 씨알들이다. 조기는 제주와 추자도, 가거도와 흑산도, 홍도 근해에서 어획된다. 영광만이 아니라 추자도와 제주에서도 자체 건조한 굴비를 시장에 내놓고 있다. 이번 여행의 최종 목적지는 ‘연평도 조기파시’다. 하지만 ‘파시’는 더 이상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지상에는 없는 곳, 이미 사라진 목적지를 찾아가는 여행. 여행은 필연적으로 시간여행이다. 시간여행자가 과거로 돌아가려면 타임머신을 타고 타임터널을 통과해야 할 터, 대체 어디서 찾을 것인가. 노인들, 과거에서 온 조력자들의 도움만으로 가능할까. 조기 파시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조기의 등이라도 타고 시간의 바다를 건너야 하는 것은 아닐까. 목포와 군산, 부산, 여수 등지로도 조기배가 들어온다는 풍문이 떠돈다. 그러나 새로운 조기잡이의 메카는 제주 한림과 추자다. 나는 타임터널을 찾아 제주행 비행기에 서둘러 몸을 실었다.
 
강제윤(시인, ‘섬을 걷다’ 저자)  블로그 http://blog.naver.com/bogil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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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반갑습니다. 한겨레신문 이병학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