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메랄드빛 에게해, 생선이 금값 “에계계?” 정종호의 자전거 세계일주

이즈미르~보드룸 08. 09.09-16

손바닥만한 작은 도미 요리가 쇠고기값 두 배

이탈리아·터키·독·영어 쓰는 노인 ‘해변 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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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미르에서 보드룸까지의 300㎞의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는 데 6일이 걸렸다. 가는 길은 굴곡이 심했다. 간혹 바닷바람이 불어 숨이 가빴지만, 숲과 바위 아래로 바다를 바라 보며 달리는 아름다운 길이었다. 50~200m 정도 되는 급경사 길을 넘어가자 에게해의 바다가 펼쳐졌고, 아담한 해수욕장이나 흰색의 주택가들이 나타나곤 하였다.

 

마니사에서 30㎞ 거리인 이즈미르로 가는 길에 해발 500m의 언덕을 넘었는데, 그곳에 유난히 소나무가 많아서 한국에 돌아온 느낌이었다. 언덕 중턱에 정자가 있는 쉼터도 있었는데 그곳에는 샘물이 나와서 목을 축이고 갈 수 있었다.

 

Untitled-5 copy.jpg언덕을 넘자 바로 에게해의 진주라고 불리는 항구도시인 이즈미르시로 진입했다. 시가지는 차량이 많고 복잡했다. 나는 이곳에 머물 생각이 없어져 그대로 통과해 한적한 바닷가가 나올 때까지 달렸다. 30㎞쯤 더 가니 해안 도로가에 호텔 두 곳이 눈에 띄었다. 그중 가격이 저렴한 한 오텔(터키에서는 오텔, 호텔, 모텔이란 용어를 섞어 썼다)의 바다가 보이는 3층 방에 들었다. 숙박비는 30리라였다.

 

숙소 수돗물에선 짠맛이 났다. 나는 늘 하던 대로 숙소에서 땀에 젖은 옷을 빨고 샤워를 한 뒤 근처의 마켓에서 간단히 쇼핑을 하여 저녁을 지어먹었다. 그날은 빨래를 여러 번 헹궈도 비눗물이 잘 안 빠졌고 옷이 마른 후에 보니 허연 얼룩이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소시지, 감자, 양파로 끓인 찌개도 찝찔해져서 맛이 형편없었다. 그래도 허기진 배는 전과 마찬가지로 한 코펠의 밥과 국물을 남기지 않았다. 대신 그날 저녁은 생수 1리터를 마셔야 했다.

 

손님이 주인 행세하고 관리인은 우물쭈물

 

다음 날도 해안을 따라 작은 언덕들을 넘어서 셀쿡시 외곽에 위치한 캠프장으로 들어갔다.

 

관리인이 반갑게 맞이했다.

“하루 이용료가 얼마입니까?” “10리라입니다.”

 

돈을 지불하자 관리인은 나를 데리고 시설들을 안내하며 텐트 칠 곳을 지정해 주었다.

 

캠프장에는 철 지난 해수욕장처럼 쓰레기가 군데군데 있는 모래사장과 식탁, 샤워실, 화장실 등이 있었고 그런대로 규모는 제법 컸다. 그곳에는 한 팀이 먼저 와서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3명의 나이 든 노인들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서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에서 왔습니다” 하고 인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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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내고 들어왔지요?”

 

그 중 안경 낀 한 남자가 인사말 대신 말을 받았다.

 

“예? 10리라 줬습니다만.”

“10리라면 저녁 8시까지 나가야 되고, 여기서 숙박하려면 20리라를 내야 해요!”

 

그때 관리인이 왔다. 나는 그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고 그는 우물쭈물하였다. 안경 낀 남자가 말했다.

 

“돈을 다 내지 않고 여기서 자겠다는 거라면 10리라를 돌려줘요!”

 

관리인은 내가 지불한 10리라를 나에게 돌려주려고 돈을 꺼내고 있었다. 나는 기분이 상하여 그냥 가버릴까 하다가 한번 더 관리인에게 항의를 했다.

 

“나는 여기서 숙박할 것이라고 말했고 당신이 10리라라고 하지 않았나요?”

 

좌우지간 뭔가 뒤죽박죽이 된 느낌이었다. 손님은 주인 행세를 하고 있었고 관리인은 우물쭈물했다.

 

바람소리, 파도소리 들으며 고독한 바다와 하룻밤

 

그때 한 할머니가 차이를 권하며 앉으라고 했다. 마지못해 차이를 마시자 이번에는 닭고기 바비큐와 구운 야채들을 한 접시에 담아서 빵과 함께 점심이라고 주었다. 좀 어색한 상태로 그들과 한 테이블에서 포도주까지 먹으면서 식사를 하게 된 셈이었다.

 

“나는 이탈리아 사람으로 가비노 마르셀리노이고, 이 사람은 터키 사람으로 하릴 알바스, 여기 집사람은 독일 사람으로 하릴 알바스와 가족관계지요.”

 

안경 낀 이탈리아 노인이 복잡한 그들의 관계를 설명했다. 세 사람이 한동안 쑥덕거리더니 할머니가 터키어로 말했다.

 

“10리라를 안줘도 돼요. 타맘(OK)?”

 

나도 따라서 “타맘!”이라고 말해줬다.

 

갑자기 세 사람의 웃음이 터져 나왔고 한동안 배꼽을 잡고 웃었다. 탱큐로 대답할 것을 “타맘(OK)?”으로 말을 받은 것이었다.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들은 깔깔대고 웃었다. 나는 그들의 웃는 모습을 바로 카메라에 담아 보여주니 또 한번 웃음바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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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남편은 마피아에요! 빠방! 시칠리아섬 아시죠?” 그 말에 또 한번  다같이 웃었다.

 

“나는 이태리어, 독일어, 터키어, 영어를 하느라고 골치가 아파, 그 뭐지? 코..코.. 오 코뮤니케이션, 그게 몇 개 말들이 섞여 버려.”

 

유일하게 영어를 하는 이탈리아 노인이 말했다.

 

어느새 그들과 친해졌다. 저녁에는 그들과 자연스럽게 해수욕도 같이 했다. 저녁 7시쯤 그들이 차를 타고 캠프장을 떠날 때는 차창 밖으로 안 보일 때까지 서로 손을 흔들었다. 나는 그들이 떠난 고요한 캠프장에서 바람소리, 파도소리를 들으며 고독한 바다를 지켜 보았다.

카페 겸업하는 옷가게 주인 ‘나만을 위한 패션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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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에페스란 곳을 지날 때 큰 가죽의류 매장 건물 옆에 작은 카페가 눈에 띄었다. 거기서 카페 여주인에게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커피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네스카페가 아니라 원두커피가 나왔다.

“한 잔 더 하시겠어요?”

 

사양할 내가 아니다. 한 잔을 더 마셨다. 계산하려고 하니 “돈은 안주셔도 되요. 여기는 가죽의류매장이니 한번 구경이나 하고 가세요” 한다. 그녀는 그 매장의 사장이었다.

 

매장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한 젊은이가 따라와 조명을 켜주었고 가죽의류 모피 등이 전시된 매장은 규모가 꽤 컸다. 내가 대충 둘러보고 나가려 하자 그가 잠시 옆방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옆방은 패션쇼장이었고 들어서자 갑자기 경쾌한 음악소리가 터져 나왔다. 막 패션쇼가 시작된 것이었다. 나는 얼떨결에 맨 앞자리에 앉아 나를 위한 패션쇼를 감상하였다. 10분 정도 보다가 더 이상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부담스러워 나는 밖으로 나왔다. 내가 밖으로 나가자 패션쇼는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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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구경을 했습니다.” 나는 나에게 커피를 준 여사장에게 감사 표시를 했다.

“여기는 제 아들이고 여기는 제 동생입니다.” 아들은 나를 안내해준 젊은이였고 모델이었다.

“한국과 일본 등도 거래를 하고 있으니 필요하면 연락을 주세요.”

 

영어를 유창하게 말하는 여사장은 마케팅도 잊지 않았다. 그녀는 전에 여기를 지나가던 한 자전거여행자가 써놓고 간 종이를 보여주었다. 종이에 자전거 그림과 사인한 것이 보였다.

“밤에는 자전거를 타지 마세요. 얼마 전에 한 이탈리아 자전거여행자가 사고를 당했답니다.”

 

나는 그의 가족에게 감사 인사를 하며 찍은 사진은 이메일로 보내주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다음에 들른 도시는 휴양도시인 쿠사다시로 많은 관광객들로 붐비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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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산물 한 번 실컷 먹어보리라는 소망이 실망으로

 

몇 개월 동안 내륙지역에서만 자전거를 탄 나는 바닷가에 가면 해산물을 실컷 먹어보리란 작은 소망이 이었다. 그러나 터키 서남부 해안을 따라오며 식당에 가 봐도 생선을 먹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간판에 생선이 그려져 있는 식당에서 사람들은 모두 닭이나 쇠고기 요리를 먹었고 수족관이란 것은 아예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나는 피쉬앤칩이란 메뉴를 보고 한 식당에 들어가 손바닥 반 만한, 바싹 튀겨서 나온 생선살을 씹으며 ‘다음부터 생선 생각은 아예 지워버려야지!’ 하고 생각했다.

 

다음날, 간판에 생선이 그려진 바닷가의 한 레스토랑에 들러서 물어보았다.

 

“생선 요리가 있습니까?”

 

종업원은 나를 주방으로 데려가더니 냉동 보관된 생선을 보여주었다. 생선이 있기는 있었다. 본 김에 손바닥 크기 정도 되는 작은 도미 한 마리를 주문해 먹었다. 그는 무게를 재더니 도미 값만 15리라를 받았고 샐러드나 차값이 추가돼 22리라나 했다. 여기서 2리라를 할인받아 20리라를 줬다. 쇠고기 요리의 2배 값이었다.

 

바다에는 어선이나 양식장이 보이지 않았다. 에메랄드 빛의 깨끗한 바다인 이유가 거기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쿠사다시를 빠져나오다가 바닷가 막다른 길로 잘못 들어섰다. 막다른 길에는 레스토랑이 있었고 그 밑은 아담한 해수욕장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레스토랑으로 들어가던 사람이 힐끗 나를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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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도해라는 뜻의 바다…코앞의 섬이 그리스 땅

 

“한국 사람 아니세요? 2002년에 서울에 간 적이 있어요. 축구를 보려고요.”

 

그는 레스토랑 지배인 아딜이었다. 그는 한때 축구선수였다고 했고 축구만큼 한국을 좋아한다고 했다. 터키 사람들은 참 축구를 좋아했다. 인터넷 카페에 가보면 대부분 사람들이 축구게임을 하고 있었고 가판대 신문에서도 축구 기사가 늘 앞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카페의 TV에서도 대부분 축구방송을 틀어주었다.

 

그는 나에게 차와 콜라를 주며 식사를 하겠느냐고까지 물었으나, 아침을 먹은 지 얼마 안돼 식사는 사양했다.

 

“이곳은 해수욕장에 사람도 많고 경치가 좋습니다.”

“아름다운 곳이지요. 저기 보이는 섬은 그리스 땅이랍니다.”

 

다도해란 뜻의 에게해에는 수많은 섬들이 있었다. 그 섬들은 그리스와 터키 영토로 나눠져 있었다. 나는 아딜의 기념사진을 찍은 뒤 몇 개의 바닷가 언덕들을 넘어 보드룸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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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5일 드디어 이스탄불을 출발한 지 17일 만에 GPS거리 924㎞인 보드룸에 도착했다. 야자수가 많은 보드룸에 도착하자 한눈에 바다 한가운데의 보드룸성(15세기 초에 십자군이 세운 교도소로 세인트 피터성이라고 함)이 눈에 띄었다. 그 성을 중심으로 하얀 건물들로 이뤄진 도시가 빙 둘러싸고 있었다.  

 

터키에서의 목적지까지 온 것이었다. 나는 보드룸에서 이틀간 휴식을 취하며 다시 이스탄불로 돌아가는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먼저 버스터미널에 알아본 결과 자전거는 버스에 실을 수 없다고 했다. 다음으로 배편도 알아보았으나 보드룸 주위의 섬들을 유람하는 배편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갈 수 있는 교통수단은 비행기였으나 비행기를 타고 갈 마음이 없어서 육로로 자전거를 타고 가기로 결정하였다.

 

글·사진 정종호(http://cafe.daum.net/bicycle.world.t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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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반갑습니다. 한겨레신문 이병학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