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하나 버릴 것 없는 길, 구경 삼아 ‘싸득싸득’ 강제윤 시인의 섬 기행

   [강제윤 시인의 섬기행] 도초도, 비금도(하)
 들판길 해변길 염전길 고갯길…, ‘삶의 혈관’
   끝 없는 ‘시금치 바다’로 죽지않은 겨울 들판
 

강8.jpg

 송치마을 끝자락 해변은 비금 들판의 수로가 바다와 합류되는 지점이다. 수문 밖 갯벌 웅덩이에 노인 한 분이 낚시를 드리우고 있다. 노인은 요즘 농어촌의 유행인 사발이(사륜오토바이)에 앉아 있다. 
 “뭐 낚으세요?”
 “문절이나 잡지.”
 그러고 보니 이제 본격적인 문절이(망둥어) 낚시 철이다. 물 위로 툭툭 튀는 것은 숭어들이다.
 “숭어는 안 잡으세요?”
 “숭어는 꽉 찼어. 숭어 낚어서 뭣에 쓰게. 바닥엣것도 안 묵는디, 숭어는 안 묵어.”
 “왜요?”
 “해금내 나서 안 묵어, 비렁내도 나고.”
 “저 우에 지방에서는 숭어도 먹던데요?”
 “그런 디는 알아준디, 이런 디는 안 묵어. 여그 사람들이 안 묵는다는 거제.”
 “여기 사람들은 숭어는 아주 안 먹나요?”
 “다 똑같은 디, 바닥엣것은 겨울에는 묵는 디, 여름에는 안 묵어. 히린내 나서, 해금내 나서 안 묵어.”
 이런 수로에서 나는 숭어나 여름 숭어는 흙냄새와 비린내가 심해 안 먹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겨울바다에서 잡히는 숭어는 먹는다.
 
 “근디 머 하러 여그 왔능가?…돈만 아깝제”

 

강1.jpg

 “바다에 나가서는 주로 무얼 낚으세요?”
 “잡을 때도 있고 못 잡을 때도 있고 그라제.”
 “주로 뭘 낚으세요?”
 “집이는 몰라. 그런 거 갈쳐줘도.”
 “낚시 미끼는 무얼 쓰세요?“
 “갈가시”
 “갯지렁이요?”
 “그라제. 그란디 거세는 붕어 낚시에나 쓰제. 거세라 하먼 갈가시 안주제.”
 여기 사람들은 지렁이를 거세라 한다. 지렁이는 흙에 사는 지렁이. 갈가시는 청거시라고 하는 푸른 갯지렁이다.
 “문절이는 여기서 주로 어떻게 요리 해 드시나요?”
 “인자 등 타가꼬 몰려서 해 묵제. 그냥은 못묵어. 죽어부럿쓰께. 쌩으로 회해 묵어야 한디, 못해 묵으면 그냥 등 타가꼬 몰리제.”
 “탕으로는 안끓여 드세요?”
 “문절이는 여그서 끓여 노면 누가 묵도 안해. 말려노면 묵은디.”
 “맛 없어서요?”
 “그냥 안묵어.”
 “근디 머 하러 여그 왔능가? 누구 알음 있능가?”
 “아뇨. 그냥 왔습니다.”
 “그런 돈 있으면 집이서 묵고 살어. 이런 데 섬 구겡 해서 머 한다고. 돈이 아깝제.”
 “할아버지는 비금이 고향이세요?”
 “비금이 고향이여.”
 “어디 마을이신데요?”
 “여그 가까.”
 노인의 오토바이 뒤에는 낚싯대가 여러 개다.
 “민물 낚시도 하세요?”
 “바닥에서도 할람 하고, 여그서도 하고. 민물에서는 안 해.”
 “여기 사람들은 민물고기는 안 먹나요?”
 “붕어는 묵는디, 붕어는 묵지. 다른 거슨 안 묵어. 냄시 나서. 붕어도 비렁내나. 그래도 존 거시께 묵어.”
 “놀러 다니지 마리고 괴기배 타등가 염전이나 대녀.”
 노인은 낚시를 드리우고, 나그네는 구경하고, 둘은 한참을 말이 없다. 노인이 불쑥 말을 건다.
 “염전에나 다니게. 염전 대니면 돈 벌제.”
 “염전에서 일하면 일당 많이 준답니까?”
 “소금 가매니로 얼마 묵제.”
 “…?”
 “갯수로 묵는다, 이 말이여, 뭔 말을 알아묵도 못하고.”
 “어떻게요?”
 “갯수로 나나 묵으께. 열가마니 내면 염전 다닌 사람들끼리 여섯개 가꼬 시니 나눠. 한 앞에 두가마니씩이나 되것제. 염전 임자는 니개 묵제.”
 
 모처럼 들어보는 진짜배기 전라도 말 허천나게…

 

강3.jpg
 나그네는 모처럼 들어보는 진짜배기 전라도 말들을 허천나게 받아 적는다. 노인이 딴죽을 건다.
 “그런 거 적지 마. 이녘 필요없는 것 적어갓꼬 대니면 형무소 가. 필요없는 것 적지 마. 근디 여그가 누구 형제간 있능갑제.”
 “아니요.”
 노인은 아무 연고도 없이 섬마을을 찾아와 배회하는 나그네가 끝내 미심쩍다. 노인은 끝내 나그네의 아픈 곳을 콕 찌른다.
 “게을러 갖고 일 안해 묵을라면 돈 쓰지 말고 집이서 가만 있어야 돼.”
 “집이 없거든요.”
 “그라면 괴기 배 타등가. 염전이나 대녀.”
 한동안 입질이 없다. 노인은 드리웠던 낚시를 거둬들인다.
 “물도 안하네. 물도 안해. 에이 쓰벌 도로 가야 쓰것다. 본 자리로.”
 노인은 사발이를 몰고 자리를 옮긴다. 수문 중간쯤에 앉아 낚시를 던진다.
 “점심은 어쨌능가?”
 “아직 안했습니다.”
 “그라먼 여그는 식당도 없고. 도초도까정 가야 할턴디. 아님 쩌그 사거리까장 가야헌디.”
 “잠은 어디서 잤능가?”
 “도초서요.”
 “그람 걸어 왔능가?”
 “예.”
 “자식들이랑 같이 사세요?”
 “농사도 없고 하께 나가서 살라고 해부렀어. 나가서 즈그들끼리 멋대로 살라고 하제.”
 노인이 낚시대를 잡아챈다.
 “문절이 온다. 문절이.”
 비료를 싣고 가던 트럭 한 대가 노인 옆에 멈춘다.
 “많이 나깟소.”
 “잉.”
 “밥도 안 자고 그라고 낚으요?”
 “밥을 늦게 묵어놔서.”
 트럭은 농로를 따라 떠나고 노인은 다시 낚시를 던진다. 노인의 오토바이에는 낡은 목발 두 개가 실려 있다.
 “많이 잡으세요. 할아버지.”
 “조심해 가게잉.”
 
 거름 안 되게 하려고 논바닥 태운다?
 

강2.jpg

 많은 논들에 이미 시금치 씨앗이 뿌려져 있다. ‘섬초’라는 브랜드를 가진 비금도의 겨울 시금치는 명성이 자자하다. 한겨울에도 하우스가 아니라 노지에서 자라는 시금치는 달고 고소하다. 시금치는 염전과 함께 비금도의 가장 큰 소득원이다. 시금치를 갈지 않은 논은 드물다. 수문 근처 논은 논바닥 태우는 연기로 자욱하다. 할머니 한 분이 불을 붙이는 중이다. 병충해를 없애려는 것일까?
 “할머니 뭣 때문에 불을 태우세요?”
 “거름 안 되게 할라고.”
 거름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거름이 안 되게 하는 것이라니. 무슨 뜻일까.
 “거름 되는 게 좋지 않은가요?”
 “못써, 부글부글 끓어서. 나락 심어노면 끓어갔고 벼가 다 죽어부러.”
 “논에 시금치는 안 심으세요?“
 “안 심어.“
 “왜요?”
 “못 해내께.”
 벼농사보다 몇 배 소득이 큰 것을 알지만 노인은 일손이 부족하고 힘에 부쳐서 시금치 농사를 못 짓는 것이다.
 “시금치는 손이 많이 가서. 겨울에 계속 캐내야 하니께 고생시럽기도 하고.”
 농수로를 따라 걷는다. 나락을 베던 초로의 내외가 점심을 먹으러 간다. 들일을 해도 들밥을 내올 사람이 없다. 내외는 나락 베던 낫을 내려놓고 승용차에 오른다. 집이 아니라 식당으로 갈지도 모른다. 농수로는 넓고 물은 풍성하다. 이 먼 섬의 수로까지 서울 낚시꾼들이 더러 붕어낚시를 오기도 한다. 스프링클러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가 들판을 적신다. 시금치를 키우는 것은 절반이 물이다. 신안의 들판은 겨울에도 죽지 않는다. 시금치가 자라는 들판은 겨울 내내 푸르다. 작은 풀들로 인해 들판은 생명력 넘치고 작고 사소한 것들의 은덕으로 사람의 삶도 이어진다. 발가락 하나라도 아프다면 나그네는 이 가을 들판을 걸을 수 없을 것이다. 하찮고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 내 몸의 가장 작고 더러운 것들까지도 소중하다. 재빠르게 자라는 손톱과 느리게 자라는 발톱, 흰 머리카락과 고질적인 기침, 똥, 오줌까지도 살아 있음의 증거 아닌 것은 없다

 

강4.jpg

 

“내가 김일성이 아들이요”…“예?…아, 네!”
 
 섬이란 무엇일까. 1996년 서남문 대교의 완공으로 비금·도초는 하나의 생활권이 됐다. 다리로 연결된 후부터 두 섬은 더이상 두 개의 섬이 아니다. 비금·도초는 하나의 섬이다. ‘어느 마을 사람’이라 이르지 더 이상 도초 사람, 비금 사람이라 구분하지 않는다. 섬사람들은 두 섬을 구분지어야 할 까닭이 없다. 섬을 가르고 분열시키는 자들은 특정 시기에만 나타난다. 선거철. 지방의원, 단체장, 농수협 조합장 따위의 선거 때면 후보자들은 사욕을 위해 주민들을 갈라놓으려 안간힘을 쓴다. 그로 인해 섬사람들은 상처받고 정치꾼들은 큰 이익을 얻는다. 논둑길을 걸어오던 사내 하나가 말을 건다.
 “아저씨, 김일성이가 죽었다 하요.”
 “예?”
 “내가 김일성이 아들이요.”
 “아, 네!”
 사내는 취한 듯 안취한 듯 도시 알 수 없다.
 “근디 말이요. 북쪽에 내 형들 하고 누나가 있단 말이요. 정일이 형이랑, 평일이 형이랑, 경희 누나랑.”
 “그러세요.”
 사내는 진지하게 횡설수설 한다.
 “광주 5·18을 폭도라고들 안했소. 지금은 민주화라 해갔고 공동묘지도 쓰고.”
 사내는 우물우물 혼잣말처럼 한동안 말들을 쏟아내더니 자기의 논으로 간다. 사내에게는 어떤 상처가 있었던 것일까.
 
 “오매 여그까장 걸어 왔소?”

 

강5.jpg비금도의 마을들은 아직 난개발의 침입을 덜 받아 마을의 풍경은 단정하다. 농로는 포장되지 않은 흙길이라 걷기에 편하다. 수로 옆으로 난 농로. 어느 길 하나 버릴 것 없이 걷고 싶은 길들이다. 들판 길, 해변 길, 염전 길, 마을 안길, 고갯길 등 실로 다양한 삶의 길들이  혈관처럼 퍼져 있다. 해변을 따라 송치, 외포 내포, 월포, 마을이 있고, 선왕산 밑으로는 죽치, 임리, 외촌 내촌 마을이 터 잡고 있다. 월포 마을 수로변에서 아주머니 한 분이 콩타작중이다. 검정콩의 작황이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
 “오매 여그까장 걸어 왔소.”
 “예, 들판이 아주 넓던데요.”
 “그래라우. 서울 사람들은 여그가 바단 줄 알고 왓다가 놀래라우. 육지라고.”
 “콩 농사를 많이 지으셨어요?”
 “비가 많이 와갔고 다 썩어 불고 남은 게 벨로 없어라우.”
 “수고 하세요. 아주머니.
 “더 걸어 가실라우.
 “예.”
 “구경삼아 가씨오. 싸득싸득.”
 나그네는 싸득싸득 들길을 걷는다. ‘싸득싸득’ 그 말이 참 좋다.
 

강7.jpg

차 얻어 탈 생각 버리니 다시 당당한 길의 주인이 되다


 도초도에서 건너오는 비금도 초입 삼거리에는 웅장한 기념탑이 서 있다. 탑 꼭대기에는 독수리상이 조각되어 있다. 무슨 탑일까. 독립운동 기념탑처럼 당당하게 서 있다. 하지만 대단한 위세의 탑은 ‘공공근로사업 기념비’다. 대체 누가 무슨 생각으로 저런 기념탑을 세운 것일까?
 “우리 군은 98.5.1-2001.12.31까지 73억8천3백만 원의 사업비로 26만6천8백여 명을 참여시켜 14개 읍면에 안길 포장, 농로 보수…공공근로 사업으로 성공리에 추진한 보람을 오래도록 기억하기 위하여 2001년 전라남도에서 수상한 우수군상 사업비로 기념비를 세우다.” 2001.12.31 신안군수 최00.강9.jpg
 공공근로 사업은 IMF 사태로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기 위해 시행한 한시적 사업이었다. 일종의 실업자 구제 사업이고 빈민 구제 사업이었다. 사업의 적절성 여부를 떠나 어려운 사람들에게 임시방편의 도움을 주었던 사업이기도 하다. 논란의 여지야 없지 않지만 그 사업 자체를 탓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저토록 웅장한 기념탑을 세울 만한 일은 아니지 싶다. 더구나 우수 군 사업비가 나왔다면 그 돈으로 공공근로 사업을 조금이라도 더 연장하여 생활형편이 어려운 주민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 공공근로사업의 참뜻을 기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군수는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것이 더 중요했던 모양이다. 국가 돈을 들여 군수 스스로 세운 공덕비. 봉건 왕조 시대 탐관오리들이 세우던 억지 공덕비와 무엇이 다르랴.
 이제 또 벌써 저녁의 시간이다. 한낮의 햇살은 여전히 뜨겁지만 저녁 해는 노루꼬리처럼 짧아져만 간다. 오늘은 30㎞를 걸었다. 관절염이 있는 오른쪽 무릎이 시큰거린다. 숙소가 있는 도초항까지는 아직도 5㎞가 남았다. 아침에 걸어왔던 길이니 다시 걸어야 할 이유는 없다. 무릎 아픈 것을 핑계로 차를 얻어 탈 생각을 한다. 네 대째, 지나가는 차에 손을  들었지만 아무도 세워주지 않는다. 여러 번 거절당할수록 자꾸 자동차 앞에서 비굴해진다. ‘무릎 좀 아프다고 이러면 쓰나.’ 퍼뜩 정신이 되돌아온다. 그래 천천히 쉬엄쉬엄 가자. 급히 가야 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차 얻어 탈 생각을 버리니 나그네는 다시 당당한 길의 주인이 된다. 풍경의 주인이 된다.
 
 글·사진/강제윤(http://blog.naver.com/bogilnara)

Leave Comments


profile반갑습니다. 한겨레신문 이병학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