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든 길 우물터 노숙, ‘카자흐’를 만나다 정종호의 자전거 세계일주

[정종호의 자전거 세계일주] ⑬ 카자흐스탄 입국/08.7.30~8.5

 

양떼·소떼도 들르고 처녀 총각들 ‘소곤소곤’

한국 유학한 모텔 딸 덕에 공짜로 자고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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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 입국장을 통해 카자흐스탄 땅에 첫발을 내딛었다. 마주친 사람들은 키가 크고 코도 큰 서양 사람의 모습이었다. 국경 하나 차이로 얼굴과 사용하는 말이 달라졌다. 며칠간의 여행에서도 중국과 카자흐스탄의 느낌은 많은 것들이 달랐다. 지도상에 표시된 도시라고 해도 주민이 몇 가구만이 사는 마을에 불과한 곳이 많았고, 아스팔트는 우툴두툴할 정도로 거칠었으며, 자전거 타는 사람은 거의 볼 수가 없고 말을 타고 가는 사람들이 자주 보였다.

 

세계에서 9번째로 큰 나라…광활한 들판 곳곳 양·말·소떼

 

하루 이동은 보통 60㎞에서 100㎞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도시를 목표로 하는데, 막상 도착해 보면 모텔이 없는 곳이 많았다. 심지어 어떤 곳은 상점 하나 없는 마을도 있었다. 도로에 자동차는 비교적 많은 편이었다. 가다 보면 광활한 들판으로 몰려다니는 양, 말, 소, 염소 떼를 늘 볼 수 있었다. 이들은 방목되거나 야생상태였으며, 방목된 가축들은 저녁이 되면 인도하는 사람 없이 스스로 집으로 찾아가는 장면도 자주 보였다.

 

이런 차이점들은 세계에서 9번째로 큰 나라인 카자흐스탄의 인구가 1500만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었다. 또 아시아와 유럽의 중간에 있는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혼혈계 카자흐 민족이 된 배경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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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을 넘어 첫날 도착한 곳이 판필로프(FANFILOV)라는 도시였다. 먼저 카자흐스탄 돈(텡게)이 필요했다. 만나는 사람에게 영어로 "뱅크"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는데, 3번째 만난 사람이 위치를 알려 주었다.

 

"저기 십자로에서 오른쪽 길로 가세요." 그는 러시아말로 말했다. 나는 손짓으로 대강의 위치를 파악하여 은행으로 찾아갈 수 있었다.

 

모텔을 찾는 것도 마찬가지로 몇 사람에게 물어서 그 도시에 하나뿐인 모텔로 찾아갈 수 있었다. 다행인 것은 주민들이 간단한 영어 단어는 알아듣는다는 점이었다. 러시아말을 못해도 카자흐스탄에서 생존하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이란 판단이 섰다.  

 

판필로프시는 작았지만 도시가 깨끗하고 상가와 카페도 여러 개 있었으며 작은 시장도 있었다. 비교적 잘 갖춰진 제법 큰 도시란 것을 다른 도시를 방문하면서 알게 되었다. 나는 모텔에서 간단한 샤워 뒤 버너로 저녁밥을 지어 먹고 내일 여행을 위한 부식 준비를 위해 시장으로 나갔다. 저녁 8시였는데도 시장은 철문이 내려져 있었다. 이곳에서는 보통 8시면 상점들이 문을 닫는다고 하였다.

 

GPS 따라 30㎞쯤 가니 비포장, 여기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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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판필로프에서 18㎞ 떨어진 콕탈(KOKTAL)이란 마을의 로터리에서 길을 잘못 들어 30㎞쯤 진행하였다. GPS에서는 이 길로도 계속 가면 내가 가고자 했던 길과 만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30㎞를 넘어선 지점에서 길이 비포장으로 바뀌어 있어서 이 길이 자전거가 계속 갈 수 있는 길인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 때, 내가 멈춰 섰던 곳 옆집에서 한 사람이 나왔다. 그리고 다짜고짜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카자흐스탄 사람들은 누구든 만나면 악수부터 했다.

 

"점심이나 들고 가시죠."

 

그는 내 손을 잡아끌고 무작정 집으로 들어가더니 10여명의 식구들에게 나를 소개시켰다. 그리고 식탁에서 고령자인 할머니 옆의 상석 자리를 내주었다. 카자흐스탄에선 손님에게 상석을 내주는 관습도 있다고 한다. 식탁엔 빵, 버터와 꿀, 차이, 설탕, 과자와 캐러멜 등이 차려져 있었다.

 

식사가 끝나자 그는 나에게 가는 길을 설명해 주었다. 내가 미덥지 않았던지 두 아들을 아스팔트길 입구까지 전송하게 하였다. 그가 알려준 길은 역시 짐작대로 내가 잘못 들어선 뒤 30㎞나 달려온 길이었고, 다시 돌아나갈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 지역은 사막지역으로, 온 길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맥이 빠지는 일이었다. 오후의 뜨거운 햇살에 맞바람까지 불어 나는 쉽게 지쳐버렸다.

 

가면서 물을 많이 마셔버렸기 때문에 물을 보충해야 했다. 한 집 앞에서 담소하고 있는 한 아주머니에게 물을 청했다.

 

"안녕하세요? 물 좀 얻을 수 있습니까?"

"저 길로 들어가 보세요."

 

좀 야박한 대답처럼 들렸지만 가보기로 하였다. 그곳은 지하수를 개발해 만든 물터로, 시원한 물줄기가 직경 20㎝ 정도의 원통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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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실 수 있는 물인가요?"

 

커다란 알루미늄 물통에 물을 받던 사람이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최고의 물입니다."

 

나는 시원한 물을 꿀꺽꿀꺽 삼키며 문득 이곳에서 텐트를 치고 하루 묵어가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을 건넸던 주민에게 물터 옆 빈터에 텐트를 쳐도 좋은가를 물었다. 그는 좋다고 하였다. 그에게 권한이 있건 없건, 한 마을 주민에게 승낙을 받은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졌다. 나는 바로 텐트를 쳤다. 치고 있자니 동네 꼬마들이 모여 들었다. 그들은 자전거를 타고 온 나의 행색을 다른 이들에게 알렸고 소문은 순식간에 동네에 퍼졌다.

 

한 청년이 말을 타고 나타나더니 나보고 타 보라고 권하였다.

"여기 짐이 있어서 말을 탈 수가 없습니다."

그는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가다가는 돌아와서 끝내는 나를 태우고 물터 주위를 한 바퀴 돌아 주었다. 그리고 몇 번 다른 말들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자랑하듯 보여주고 가버렸다.

땅에 그림 그려 소통…우리네 옛 우물터같은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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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은 부식거리 준비가 제대로 안 되어 있어서, 있는 것이라곤 쌀과 점심을 대접한 집에서 챙겨준 둥근 빵이 전부였다. 나는 주위에서 계속 나를 지켜보던 엘로만이라는 소년에게 사과, 포도, 복숭아 그림을 땅에 그려 보였다. '나는 지금 이런 게 먹고 싶단 말이야'라고 속으로 말하면서. 밥에다 시원한 물을 부어 먹을 때, 눈치 빠른 엘로만은 조그만 오이 2개를 가져와 말없이 주고 갔다. 

 

'녀석이 그래도 내 마음을 알아주네.' 잠시 뒤 그는 다시 오이 한 개를 더 가지고 왔다.

"엘로만 같이 먹자!"

 

그는 사양의 표시로 고개를 흔들며 갔고, 잠시 뒤 다 큰 언니를 데리고 나와 물터에 앉아 웃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때 물터로 맥주병을 실은 조랑말 마차가 다가왔다. 나는 맥주 한 병을 사서 물 흐르는 곳에 담가두었다.

 

물터는 온갖 동물들의 생명줄이었다. 저녁이 가까워지자 한 번은 양떼가, 한 번은 소떼가, 한 번은 말들이, 한 번은 염소 떼가 와서 물터를 점령하였다. 양들이 물을 먹으려 할 때 어디선가 절름거리는 개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양들을 몰아내고 물터를 독차지했다. 양들은 멀찍이 물러나 기다렸다. 개가 물을 마시고는 물가 주변을 크게 한번 휘돌며 왕처럼 돌아가자, 기다리고 있던 양떼들이 다시 물가로 몰려들었다.

 

동네 청년들이 모여들어 담소를 하고 처녀들이 모여들어 쑥덕거렸다. 소년들은 당나귀를 앞세운 마차를 타고 나타나 물통들에 물을 가득 채워갔다. 여자들이 도르래 밀대 물통에 물을 담아갈 때는 옆에 있던 청년들이 거들어 주었다. 나의 텐트 위로는 느티나무 가지 그늘이 길게 늘어졌고,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물줄기는 평화스럽게 반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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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한 중년 사내가 말을 타고 나타났다.

"여기는 내 땅이다. 텐트를 칠 수 없으니 나가라!"

 

나는 당황스러웠다. 옆에서 지켜보던 한 청년이 작은 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돈, 담배." 나는 담배 한 갑을 그에게 주었다.

 

그는 담배를 주머니에 넣으며 "텐트는 안돼…" 하고는 가버렸다. 물론 그 뒤로 그는 더 이상 그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날 그 동네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나를 본 사람들은 모두 나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근처에 집이 있는 한 아저씨는 다가오더니 자기 집에서 자라는 권유도 하였다. 처녀들도 나와 멀찍이 서서 나를 살펴보고 들어갔다. 그 곳은 아이달리(AYDARLY)라는 작고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또다시 텐트 숙박하려는데 “민박하시겠어요?”

 

다음날 출발 전 자전거 바퀴를 보니 바퀴 2개가 모두 펑크가 나 있었다. 나무 밑에 수풀이 우거져 있었는데, 수풀 속 바닥의 가시들이 바퀴에 파고든 것이었다. 튜브를 교체한 뒤 출발을 위해 안장에 올라앉아 물터를 돌아보았다. 엘로만이 어느새 나와서 나에게 이별의 악수를 청했다.

 

마을을 빠져나가는 동안 마차를 타고 가던 노인 부부가 나를 보고 손을 흔들어주었고, 집에서 장작을 패던 청년도 손을 흔들었다. 길을 잘못 들어섰던 로터리로 돌아와, 제 길로 들어선 뒤 MP3 음악을 들으며 달렸다. 길은 점차 오르막길로 변했고 해발 1200m 위치에 있는 코니롤렘(KONYROLEM)이란 마을에 도착하였다. 도로 옆의 한 카페에 들어갔다. 음료수 한 병을 마시고 이 곳에 모텔이 있는가 물어보니 없다고 하였다. 다음 마을까지는 너무 멀어 그 날에 갈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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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자고 가면 안 될까요?"

 

카페에는 일하는 여성 4명이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카페 구석의 긴 의자를 가리켰다.

"감사합니다. 저기라도 좋습니다."

 

이 종업원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나를 카페 뒤에 있는 한 광 같은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그곳엔 침대가 하나 놓여 있었다.

 

"3시간만 여기서 조용히 쉬세요. 8시가 되면 문을 닫을 시간이니까요."

 

나는 다소 허기가 졌지만 잠시 쉬다가 저녁을 지어먹기로 하고 조용히 쉬고 있었다.

 

주방에 가보니 딸기로 잼을 만들고 있어서, 집어주는 딸기 몇 알을 먹었다. 좀 사겠다고 하였더니 안 된다고 했다. 딸기는 작지만 맛은 달콤했다.

 

8시가 가까워지자 나는 식사 준비를 하였고 주방 종업원들은 나를 보고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밥을 먹으려 할 때, 고참 종업원이 찾아왔다.

"이제 문 닫을 시간이니 가세요!"

 

이런, 무슨 말인가? 나는 영업시간이 끝나는 8시까지 조용히 있다가 그 뒤에 편하게 지내라는 소리로 들었는데, 그녀는 8시까지 여기서 쉬다가 가라는 뜻이었다. 손짓 발짓으로 이뤄진 커뮤니케이션의 오류였다. 나는 약간 떼를 써보았다.

"나는 여기서 자고 가야 합니다."

그녀는 자기 목이 잘린다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럼, 옆의 개울가에 텐트를 치겠습니다."

 

그녀는 좋다고 하였고, 나는 어둠이 내리는 시간에 풀어헤친 짐을 다시 챙기고 개울가로 가려고 할 때, 고참 종업원과 두 사람이 왔다.

"민박하시겠어요?" 하며 손가락 두 개를 보였다.

"그럼요, 좋습니다." 물론 나는 OK다.

 

말 그대로 1700m 고도 가파른 지그재그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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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된 밥이 든 코펠을 종업원 아주머니가 들고, 나는 자전거를 끌고 비포장길을 따라 민박집으로 향했다.

 

그 집의 세 딸과 두 아들 등 일곱 식구들과 인사를 하고 난 뒤 나는 밥을 먹었고, 그들은 빵과 차이로 저녁을 먹었다.

 

알마티에서 메디칼 대학을 다니는 큰 딸이 영어를 조금 하여 의사소통은 가능하였다. 나는 그 집의 거실에서 잠을 잤고 둘째 딸은 방 안의 소파에서 잠을 잤다. 나는 하루 더 묶으며 2000텡게를 지불하였다. 저녁에 큰 딸이 와서 2000텡게를 더 달라고 하였다.

 

"모텔에서도 1500텡게에 숙박하였습니다. 그러니 3000텡게로 하겠습니다."

"그러세요." 그렇게 타협이 되었다.

 

카자흐스탄에 온 지 3일밖에 안 되어서 나는 그동안 적응된 중국 물가가 머리 속에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곳 물가 사정을 몰랐다. 손가락을 2개 보일 때 나는 2000텡게로 생각하였고 재워 줘서 고맙다는 뜻으로 하루에 1000텡게를 나름대로 후하게 생각하여 주었던 것이었다. 며칠 여행하다 보니 이곳 물가는 한국 못지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2000텡게도 싸다는 것을 알았다.

 

저녁에는 큰 딸이 양고기 갈비살을 다져서 수수 같은 곡식과 함께 큰 접시에 볶음밥 같은 음식을 만들어, 그 집 식구들과 함께 먹었다. 떠날 때 그 집 주인은 1500㏄ 탄산수 한 병과 감자, 양파, 빵을 챙겨주었다.

"오늘 가는 길은 매우 가파릅니다. 잘 먹으며 가십시오."

 

떠나는 나를 전송하기 위해 그 집 주인은 아침 일찍 일어나 장작을 패어 차이를 끓여주고 빵을 내주었다. 나는 그와 굳게 악수한 후 안장 위에 올랐다. 날씨는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했다.

 

가는 길은 말 그대로 1700m 고도의 가파른, 지그재그 언덕이었다. 언덕길에는 야생의 말과 소들이 무리지어 있어서 보기가 좋았다. 가끔 운전자들이 손을 흔들거나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보였다.

 

밤 늦은 시간에 누군가 문을 두드려 열어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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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을 넘어, 목표로 했던 이메니키로바(IMENI KIROVA)란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은 도로가에서 떨어져 있었는데, 상점 하나 없는 작은 마을이었다. 나는 거기서 40㎞ 떨어진, 제법 큰 마을인 사료제크(SARYOZEK)까지 가서 모텔에 묵을 수 있었다.

 

모텔에서 머무는 동안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가를 사장에게 물으니 자기 집에서 인터넷이 가능하다고 했다.

 

근처의 사장집은 내부 인테리어가 잘 되어 있는 2층 집이었다. 인터넷은 한글 사용이 불가능했고, 속도는 더디었다. 나는 인터넷 접속을 포기하고 그와 GPS 지도를 보며, 모텔이 있는 도시와 없는 도시를 구분하고 비포장도로에 대한 상의를 하였다.

 

알마티로 향하면서 구름 위에 떠 있는 톈산산맥을 보며 아름다운 캄차카이 호수를 지나 캅차가이(KAPCHAGAY)란 마을에 도착했다. 그 마을의 한 모텔로 들어갔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한국에서 왔습니다."

 

종업원은 나에게 숙박료가 3000텡게나 하는 큰 방으로 안내하였으나 나는 2000텡게의 중간 방으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그녀는 숙박비를 받지 않았다. 음료수와 몇 가지 간식을 샀는데도 돈을 받지 않았다.

 

Untitled-1 copy.jpg'퇴실할 때 한번에 계산하려고 하는구나' 하고 나름대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밤늦은 시간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어 보니 모델같이 늘씬한 여염집 처녀가 서 있는 것 아닌가. 더 놀란 건 그녀가 나에게 한국말로 인사를 한 것이었다.

"저는 아이다입니다. 늦게 와서 미안합니다. 한국에서 오셨다는 얘기를 듣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녀는 20살 난, 모텔 사장의 딸이었다. 한국의 연세대와 외대에서 몇 개월 동안 경영학을 공부하였다고 말했다.

 

그녀는 "여기에서의 모든 비용은 무료로 해주겠다"면서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든 전화해 달라"고 전화번호까지 적어 주었다. 그녀는 "내일 아침식사는 꼭 들고 가시라"고 당부한 뒤 돌아갔다.

 

'나는 역시 행운아인가?' 편안한 기분으로 침대에 누우며 단잠을 청했다.

 

글·사진 정종호(http://cafe.daum.net/bicycle.world.t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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