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두고 버스와 기차를 타다 정종호의 자전거 세계일주

[정종호의 자전거 세계일주] ⑩ 유엔~우루무치~유엔~하미/6월27일~7월8일

 

10여일 걸릴 길 16시간만에 가며 ‘자전거’ 되새겨

사막 저편 구름 속 톈산산맥 만년설이 위용 뽐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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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두 번째 비자 연장을 위해 유엔에서 우루무치로 가야 했다. 기차는 입석표만 남아 있었다. 버스편을 알아보니 다행히 둔황~우루무치를 운행하는 관광버스를 160위안에 탈 수 있다고 했다. 

 

비자를 연장하는 데 여러 날이 걸리므로 그 동안 자전거와 짐을 보관하는 문제를 풀기 위해 파출소를 찾았다. 유엔 파출소 사무실에 들어서니, 먼저 뒤쪽의 철창이 눈에 띄었다.

 

"니하오, 자전거 여행자인데…, 며칠간만 자전거를 좀 보관할 수 있을까요?"

 

경찰은 패스포트를 검사하고는 흔쾌히 내 부탁을 들어줬다. 파출소는 어려울 때마다 나에게 고마운 존재였다.

 

자전거와 짐을 서류보관 사무실에 맡겨 두고, 그날 저녁 8시에 출발하는 2층 침대형 관광버스를 탔다. 차는 새 차였고 하얀 시트도 깨끗했다. 기차로는 10시간 걸리는 우루무치까지 16시간이 걸렸다. 가는 도중 도로변, 식당, 과일 행상 앞에서 몇 번인가 정차하였다. 우리나라와 달리 도로에 휴게소 같은 곳은 없었다. 소변도 대부분 도로 가에서 해결했다.

 

'이 도로가 내가 자전거를 타고 갈 도로구나!'

 

목적지 향해 달리기보다 과정의 연속에서 세상 만나는 일

 

버스로 16시간이면 가는 거리를 나는 10여일에 걸쳐 언덕을 넘고 다리를 건너 수없이 페달링을 하며 갈 것이다. 참 바보 같은 짓이다. 160위안에 침대차에 누워서 이동할 수 있는 교통수단을 놔두고 숙식비를 쓰면서, 뒤에서 달려오는 트럭의 거리를 재며 그늘 없는 사막의 땡볕 길을 한없이 달려가야 한다.

 

자전거는 도대체 무엇인가? 말을 타거나 소달구지를 끌고 다니던 시대에 대한 향수의 산물인가?

 

나는 '자전거 여행'이란 방식을 왜 선택한 것일까? 자전거로 여행하면 허벅지가 조금 굵어지기도 하고, 마을 어귀의 정자나무 그늘에서 쉬며 그곳에서 짧은 인연을 얻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은 결과만을 지향하는 초스피드 시대이고, 여행도 목적지를 지향하는 패키지 여행이 자리를 잡은 지 오래다.

 

자전거 여행은 그러나 목적지를 지향하지 않는다. 목적지를 향해 달린다기보다는 길이라는 과정의 연속 속에서 세상을 만나는 일이다. 자신의 힘으로 페달을 밟아 도착한 마을과 산과 들이 남의 땅 같지 않고, 모두 내 땅이요 내 식구들로 느껴지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햇살과 바람 속으로 들어갈 때, 자연 속에서 한 점이 되어 대자연의 일원임을 느껴 보라! 나는 자전거 여행이, 이 땅에 태어나 내 힘으로 세상의 땅들을 둘러보는 멋진 경험이요, 감동임을 알기에 다시 우루무치로 가는 이 길을 갈 것이다. 그리고 걷는 것보다는 쉬우니까!

 

우루무치에 도착해, 시 정부 공안사무소에 들러 란주에 이어서 두 번째로 비자 연장 신청을 하였다.

 

"언제까지 처리될까요?"

"오늘이 6월 말일이므로 7월4일에 받을 수 있습니다." 

"란주에서는 하루 만에 처리됐는데…내일까지는 안될까요?"

"처리 기간이 정해져 있어서 안됩니다. 그럼 7월3일 오후에 들러 보세요. 혹시 나와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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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행정처리까지 동부와 서부의 차이 절감

 

중국 여행중에 안 것 중의 하나가, 땅이 넓기 때문인지 지역에 따라 행정처리 방식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우루무치에서는 비자 처리 기간이 란주와 달랐다. 우루무치가 있는 신장자치구에서는, 외국인이 거주할 수 있는 숙소도 따로 지정하고 있었다. 또 도시 지역의 여관에서는 신분증을 확인하고 여권 내용을 기재하지만, 일부 변두리 마을에서는 이를 거의 생략하였다. 피시(PC)방도 신분증이 없으면 입장을 거부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돈만 내면 입장시키는 곳이 있었다.

 

일상생활 모습도 중국의 동·서부 지역간 차이가 많았다. 동부에서는 주민들이 대부분 아침식사를 거리에서 해결하였다. 서부로 오면서 거리에서 식사하는 모습은 없어지고, 동네 한두 식당에서 면이나 만두로 아침식사를 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이는 서부의 인구가 동부에 비해 적기 때문(6대94 비율이라고 함)일 것이다. 꼬치구이만 해도 동부에서는 손톱만한 고기 4점을 꼬챙이에 끼워 구워서 파는데, 서부로 오면 손가락 한두 마디 정도로 그 크기가 커졌다. 과일의 종류는 서부 지역이 더 다양했다.

 

서부 지역은 마을이 수십 ㎞씩 떨어져 있었고, 마을 규모도 10~20가구의 소규모 마을이 많았다. 이들 작은 마을들 주민들은, 장거리를 오가는 트럭 운전자들에게 음식을 팔거나 숙박료를 받아 생계를 유지하는 것 같았다.

 

서부의 작은 마을에서는 좋은 숙소는 기대하지 않는 게 좋다. 한 방에 여러 개의 침상이 놓인 단체숙소가 대부분이었다. 이런 숙소에서 자야 할 경우에 나는 안전 문제로 방 전체를 빌려서 묵곤 하였다. 만약 물건 하나라도 분실하게 되면, 돈을 떠나서 여행에 큰 지장을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동부에서는 물건 값을 부를 때 약간 높여 부르는 경향이 있었고, 서부 쪽은 물가가 상대적으로 비싼 편이지만(과일은 더 저렴함) 값을 높게 부르는 바가지 상혼은 거의 없었다. 주민들은 한족보다는 회족이 더 많이 살고 있었다.

 

공안사무소에 여권을 찾으러 가자, 담당자는 접수증을 확인하고 14번, 15번 창구로 가라고 하였다. 14번 창구에서 수수료 160위안을 낸 뒤 바로 옆의 15번 창구로 갔다. 15번 창구 담당자는 나에게 번호표를 뽑아 오라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대기하고 있는 사람도 없었는데…. 번호표를 뽑아 와서 그 여직원을 째려보니 그 직원은 미안한 듯 작은 목소리로 말하며, 나에게 접수장에 번호표 숫자를 쓰게 하였다. 이곳에선 한 가지 일을 세 사람이 달라붙어 한 가지씩 처리하고 있었다. 아니, 며칠 전 접수할 때 여권을 복사하는 일도 복사실 담당자에게 가서 처리했으므로 네 사람을 거쳐야 했다.

 

앞서 란주에서는 한 사람이 돈을 받고 서류에 적고 복사한 뒤 바로 여권을 내주었었다. 우루무치에서의 행정 처리방식은 과거 우리나라 공무원들의 관료적 사고와 일처리를 보는 듯했다. 우루무치와 란주 두 지역의 사무처리 방식의 차이는, 행정 위주 일처리에서 고객 위주 일처리 방식으로 바뀌어 가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근무시간 끝나자마자 곧바로 닫힌 매표창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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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을 받자 바로 기차역으로 향했다. 우루무치 역은 표를 사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고, 표를 사려는 대기 줄이 꽤 길었다. 나는 30분 정도 줄을 서서 기다렸다. 내 앞에 3명이 남았을 때 매표창구의 작은 문이 닫히고 담당 직원은 서랍 속의 돈을 세며 서류에 뭔가를 적고 있었다.

 

'자기 일 처리하느라고 고객은 뒷전이군….'

 

대기 줄의 맨 앞사람이 기다리다 못해 항의를 하였다.

"기차표 좀 주시오!"

 

매표소 여직원은 "흥!" 하며 코로 유리창에 쓰여 있는 글씨를 가리켰다.

 

'근무시간: 08:00~12:00, 14:00~17:00, 19:00~21:00"

 

지금은 17시가 지났으니 근무시간이 끝났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기차표를 사기 위해 기다리던 긴 줄은 흩어져야 했고, 이 때 한 경찰이 와서 질서 정리를 했다. 나는 다시 옆 창구의 근무시간을 확인하고는 아까보다 더 길어진 줄 뒤로 가서 서 있어야 했다.

 

우루무치까지 올 때 16시간의 버스 이동시간이 좀 지루했기 때문에, '돌아갈 때는 편하게 가자'는 생각으로 가장 비싼 연와(軟臥, 침대칸, 320위안 정도) 기차표를 구입했다.

 

기차를 타기 위해 대기실로 들어설 때 적외선 짐검사를 했는데 한 검사원이 내 가방을 지적했다.

"가방을 풀어봐야겠습니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아마 내 가방 속에 든 카메라와 노트북을 이상하게 본 것 같았다.

 

그러나 내가 한국인임을 밝히면서 "다시 한번 검사대에 가방을 통과시켜 보라"고 부탁하자, 검사원은 다시 통과 시킨 뒤 별도의 짐검사 없이 보내줬다.

 

승강장에 들어서자 열차 칸마다 승무원들이 일렬로 정렬해 승객을 맞고 있었다. 승무원은 침대칸의 방으로 안내해 줬다. 아래·위로 4개의 침상이 있었고, 내부는 호텔 못지않게 깨끗했다. 그 방에는 다른 손님이 없어서 편하게 잠을 자며 유엔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승무원은 내 패스포트와 기차표 검사를 하고 기차표를 다른 플라스틱 카드로 바꿔준 뒤, 도착 전에 그 승무원이 다시 와서 그 카드를 회수해가며 가져간 기차표를 돌려주었다. 사회주의 나라는 일을 만들어서 한다는 얘기를 들었었다. 그래야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할 수 있으므로.

 

수십㎞ 혹은 1백여㎞마다 트럭운전사 위한 마을 한 곳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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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기차로 유엔에 도착하자마자 파출소에 들렀다. 아침 6시30분, 이른 시간이어서 그런지 철문이 잠겨 있었다. 나는 근처 식당에서 국수로 아침식사를 한 뒤 전화를 걸어 짐을 찾으러 가겠다고 말했다. 짐을 맡아준 경찰이 파출소 안에서 나와 철문을 열어줬다. 나는 감사의 표시로 오렌지주스 한 상자(9개들이)를 사서 선물했다. 물론 경찰은 안받겠다고 했지만, 떠넘기다시피 했다.

 

자전거를 찾아서 곧바로 싱싱샤(성성협)을 향해 출발했다. 비자 문제로 잠시 멈췄던 자전거 여행이 다시 시작됐다.

 

장예 이후 풍경의 큰 변화는 없었다. 대부분 황무지같은 사막이었는데, 모래만 있는 사막이 나타나기도 했다. 붉은 황토색을 띄다가 때로는 불에 그을린 듯 검은색을 띈 사막이었다. 길은 사막을 절반으로 가르며 지평선 끝에서 사라졌다. 가끔 사막이라는 바다를 가른 모세의 길을 가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싱싱샤에 도착해 여사(旅舍)에서 짐을 풀었다. 싱싱샤는 트럭 운전자들이 숙식을 해결하기 위해 쉬어 가는 마을이다. 10여 가구의 집이 있었는데, 대부분 식당이거나 작은 소매점 또는 숙소였다. 서부에는 이런 작은 마을들이 수십㎞ 혹은 1백여㎞마다 하나씩 있었다. 보통 이런 곳은 물이 귀한 편이라, 드럼통의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로 몸을 씻어야 했다. 화장실은 몇 집에서 같이 쓰는 커다란 공동변소가 집 뒤쪽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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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싱샤에서 하미(哈密)까지는 200㎞에 이르는 먼 길이었다. 싱싱샤에서 약 100㎞ 정도까지는 바람을 등지고 가는 신나는 주행길이었다. 가벼운 내리막길에 바람이 뒤에서 밀어주니, 시속 30~50㎞의 속도가 나왔다.

 

그러나 사막의 길이 늘 쉽게 열리는 건 아니었다. 정오도 되기 전에 강력한 역풍이 불어닥쳤다. 나는 자전거를 멈춘 채, 뜨거워지는 태양 아래서 30분 가량 바람이 잔잔해지기를 기다려야 했다. 이럴 때는 가끔 두려운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런 강풍이 하루 종일 불면 나는 사막 한가운데 갇혀서 어떻게 되는 것인가?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없는 상황에서 목이 자꾸 타들어와 물을 계속 마셨다. 남의 속도 모르는 트럭운전자들이 지나가며 손을 흔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바람이 다소 잔잔해졌고 다시 페달을 밟을 수 있었다. 출발하자마자 맞은편에서 바람을 등지고 쏜살같이 다가오는 두 사람의 라이더가 있었다. 하미에서 짜유꽌으로 가는 중국인 여행자들이었다. 그들과 인사를 나누고 기념촬영을 했다. 자전거 여행자는 늘 그렇듯 만나면 그냥 반갑고 친구 같았다. 그들은 나에게 조그만 더 가면 점심식사를 할 만한 식당이 있다는 정보를 주고는 멀어져 갔다. 

 

식당집 큰딸은 이것 저것 갖다주며 내 주위 맴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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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미 못 미쳐 50㎞ 지점, 사막 저편 구름 속에서 천산산맥이 만년설의 위용을 드러냈다.

 

아직도 불고 있는 잔잔한 맞바람에 기진하여 눈앞에 보이는 주유소로 들어가 그늘을 찾았다. 주유소 직원은 나에게 수돗물을 쓰라고 권했다. 이 부근에 머물 숙소가 있는지 물으니, 그는 바로 옆에 여사가 있다고 알려줬다. 나는 곧장 식당 간판만 걸려 있는 그 집으로 가서 방을 정하고 침대 위에 누워버렸다.

 

잠시 누워 있다가 밖으로 나가 마을 이름을 물어보니 '이무창(一牧場)'이라고 하였다. 식당에선 트럭 운전자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몇 번씩 사양했는데도 끝내 나를 자리에 앉히고는, 캔맥주 하나를 주며 '건배'하며 마시게 했다. 그들은 핸드폰으로 연신 내 사진을 찍으며, 내가 자전거를 타고 온 경로와 가는 곳을 물었다. 이럴 때 자전거 여행자는 행복하다.

 

Untitled-11 copy.jpg그 집에는 다 큰 딸이 있었다. 그녀는 외국에서 자전거를 타고 온 내가 신기한지 의자도 갖다주고, 물도 갖다주며 내 주위에 머물러 있었다. 그녀는 운전자들이 사진 찍자고 부를 땐 대꾸도 한하더니, 나의 손짓에 바로 다가와서 사진을 찍어줬다. 상점 주인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한국 사람이래" 하며 내 얘기를 했고, 여러 사람들이 나를 들여다보고 갔다.

 

다음날, 하미까지는 가까운 거리여서 여유롭게 주변 경관을 살피며 오전 중에 하미로 들어설 수 있었다. 하미는 '하미과'란 과일로 잘 알려져 있는 곳이다. 하미시 입구에 지구 위를 달리는 말 동상이 있었다. 내 자전거 이름인 천마와 통하는 모습이어서 그 동상과 함께 자전거의 사진을 찍었다.

 

'천마야, 지구 위를 달리는 너의 동상이 여기 하미에 있었구나!'

 

'하미과'와 수박은 산지라서 값도 쌌지만 달면서 맛이 좋았다. 이곳에서는 과일 파는 수레를 나귀들이 끄는 모습이 이채로웠다.

 

글·사진 정종호(http://cafe.daum.net/bicycle.world.t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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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반갑습니다. 한겨레신문 이병학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