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윤기 품은 갯벌에 ‘사람’이 산다 마을을 찾아서

초겨울, ‘꼬막의 고장’ 전남 보성군 벌교와 앞바다 작은 섬 장도 여행

00500037_20161201.JPG
여자만 벌교갯벌은 꼬막·낙지 등 해산물의 보고다. 벌교 앞바다의 섬 해도 주변에서 어민들이 뻘배를
밀며 꼬막을 채취하고 있다.

초겨울 찬바람에 몸이 움츠러드는 이맘때, 벌교 앞바다 기름진 갯벌은 소란스러워진다. 갯벌이 품은, 졸깃졸깃한 조개 맛의 대명사 꼬막 채취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꼬막은 사철 채취하지만, 추워질수록 제맛을 내는 까닭에 한겨울 꼬막을 최고로 친다. 전남 보성군 벌교는 소설 <태백산맥>의 배경이 된 곳이자, 이름난 꼬막 생산지다.

벌교 갯벌은 순천만 갯벌과 이어지는, 해안 생태가 잘 보전된 습지다. 2006년 람사르 습지(‘물새 서식지로서 중요한 습지 보호에 관한 협약’인 람사르 협약에 등록된 습지)에 이름을 올린 순천만 연안습지의 일부로, 여수반도와 고흥반도 사이 여자만의 북부 연안이다.

벌교 홍교(보물).
벌교 홍교(보물).

겨울철 제맛 참꼬막

벌교 꼬막이 유명한 건, 이런 기름진 갯벌에서 자라는 꼬막이 대량으로 생산되고 유통·소비되기 때문이다. 벌교읍 한 상인은 “최근 생산량이 줄긴 했지만, 남해안 꼬막의 70%가 여자만·득량만에서 나오고, 이 중 절반가량이 벌교 앞바다 일대에서 나온다”고 자랑했다. 꼬막은 참꼬막, 새꼬막(똥꼬막), 피꼬막(피조개)으로 나뉜다. 껍질이 두껍고 표면의 골이 깊은 것이 참꼬막, 껍질이 얇고 골이 얕은 것이 새꼬막이다. 피꼬막은 이들보다 배 이상 큰 대형종이다.

맛은 참꼬막을 제일로 쳐 옛날부터 제상상에도 올려왔다지만, 사실 큰 차이는 없다는 게 벌교 식당 주인들의 말이다. 다만, “새꼬막은 갓 삶아낸 뜨거운 것이 더 맛있고, 참꼬막은 식어도 맛있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 하지만 값 차이는 배 이상 난다. 지난 주말, 벌교읍내 수산물시장에서 참꼬막은 1㎏에 1만8000원, 새꼬막은 9000원이었다.

뻘배는 왼쪽 무릎을 나무판에 올리고 오른쪽 발로 뻘흙을 밀어내며 이동한다.  사진 강제윤 제공
뻘배는 왼쪽 무릎을 나무판에 올리고 오른쪽 발로 뻘흙을 밀어내며 이동한다. 사진 강제윤 제공

참꼬막과 새꼬막이 가격 차이를 보이는 건, 맛과 선호도 말고도 채취 방식이 다른데다 최근 참꼬막 생산량이 크게 줄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새꼬막은 배를 타고 나가 수심 2~8m 바닥에서 그물을 끌어 잡지만, 참꼬막은 주민들이 갯벌로 1인용 뻘배(널·뻘차)를 밀고 나가 수작업으로 채취한다. 성체가 되기까지 3~4년 걸리는 참꼬막은 2년이면 다 자라는 새꼬막보다 성장속도가 느리다. 또 새꼬막은 물속 뻘에 살며 추위에 잘 견디지만, 노출된 갯벌에 사는 참꼬막은 추위에 약하고 오염에 민감해 폐사하는 일이 잦다고 한다. 한 식당 주인은 “이상기온 때문인지, 10여년 전부터 참꼬막이 크게 줄고 있다”고 했다. 한 동네 주민도 “15년 전엔 어촌계별로 하루 500~600통씩 잡아냈는데, 요즘은 하루 30~40통에 그치는 날도 있다”고 말했다.

어디든 제철 꼬막 ‘푸짐한 밥상’
장도는 구멍가게조차 없지만
억새밭, 20년 섬 지킨 소와
‘한평생 바다’ 어르신 어우러져

수확이 줄었어도, 벌교읍내 30여곳에 이르는 꼬막요리 전문식당에 가면 두 종의 꼬막을 함께 맛볼 수 있다. 새꼬막은 꼬막전이나 무침, 비빔밥용으로 나오고 참꼬막은 삶아내 직접 까먹도록 한다.

꼬막정식에 곁들여지는 참꼬막. 식탁에 마련된 도구로 꽁무니를 벌려 까먹는다.
꼬막정식에 곁들여지는 참꼬막. 식탁에 마련된 도구로 꽁무니를 벌려 까먹는다.

벌교 앞바다 갯벌에, 보성군 소속의 가장 큰 유인도인 장도가 있다. 장도와 주변의 해도·지주도 일대 드넓은 갯벌이 다 꼬막을 비롯해 낙지·짱뚱어·바지락·맛조개·게 등 풍미가 좋은 온갖 해산물의 창고다. 벌교 갯벌의 중심 섬이자 ‘꼬막 섬’으로 불리는 장도는 어떤 섬일까. 장암리의 작은 포구 상진항에서 장도를 오가는 차도선(차량을 실을 수 있는 배)을 탈 수 있다.

‘볼 것 하나 없다’는 섬의 보석들

배에 오르면 30여분 만에 장도 신경포구에 닿는다. 배 타고 가면서도, 섬에 도착해서도 주민들에게 줄기차게 들은 말은 “볼거 암껏도 읍소”였다. 섬 지형이 노루를 닮아 노루 장(獐)자를 쓰는 장도는, 대촌마을(신경·개거리·새터 포함)·부수마을 2개 마을에 190여가구 340여명이 사는 아담한 섬이다. 정작 노루는 없고, 고라니만 엄청나다고 한다. 그래서 장도엔 바다뿐 아니라 밭에도 그물이 깔렸다. 거의 모든 밭이 고라니를 막기 위한 그물에 둘러싸인 모습이다. “밭을 다 쑤셔놔부러. 작년에만 한 40마리 잡아치웠는디, 지금도 겁나 많아요.”(대촌마을 50대 주민)

직접 둘러보니,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 실감 났다. 특별한 경치도, 문화재도 체험거리도, 그리고 민박집도 식당도 없었다. 심지어 구멍가게도 하나 없는 섬이다. 편하게 여행하기엔 부족한 섬이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이런 섬도 드물지 않을까 싶다. 개발이 능사인 시대에, 이런 섬이야말로 몇 안 남은, 말 그대로 섬다운 섬이 아닐까.

볼 것 없다는 섬을 무심히 둘러보니, 오히려 보이는 것마다 특별한 풍경으로 다가왔다. 신경포구에서 부수포구까지 30~40분 걸으면 되는 작은 섬, 야트막한 언덕들로 이뤄진 섬, 걸어서 구석구석 천천히 둘러봐도 두 시간이면 족한 섬이다. 가장 높은 곳인 북두산 정상도 해발 76m다. 특별할 것은 없어도 한 굽이 돌면 다른 마을이 나오고, 마을 골목길을 지나 언덕을 넘으면 또 다른 표정의 갯벌이 나서는 섬이다. 뻘배 오간 자리 또렷이 남아 굽이치는 드넓은 갯벌도, 언덕마다 뽀얗게 무리지어 흔들리는 억새도, 이른 아침 부수포구의 소도 옆으로 떠오르는 해돋이도 아름다웠다.

장도 부수마을 포구에서 맞은 해돋이.
장도 부수마을 포구에서 맞은 해돋이.

섬을 둘러보며 만난 어르신들의 마음과 말씀도 따뜻하고 아름다웠다. 부수마을 갯벌에 앉아 굴을 까고 있던 김연심(74)씨는 ‘갯벌 기술자’였다. “나가, 낙지 하난 겁나 잘 잡는 기술자랑게. 호호.” 뻘배를 타고 갯벌로 나가 낙지 13마리와, 굴 한보따리를 채취해 막 돌아온 참이다. “널(뻘배) 타면 맘 묵은 대로 다 가요. 구녁 찾아. 갯벌에 구녁 안 있소. 낙지 들어앉은 구녁이. 구녁에 손을 넣으면 질(길)이 훤히 보여. 질을 따라 쑤시믄 손이 훤히 다 알제라. 그랑게 선수제. 팔이 여까정 다 들어가뿌요.” 김씨는 “잘 잡을 땐 하루 50마리는 잡는다”며 금방 깐 굴을 한사코 입에 넣어주었다.

장도 부수마을 갯벌에서 뻘배 타고 나가 채취해 온 굴을 까고 있는 주민 김연심(74)씨.
장도 부수마을 갯벌에서 뻘배 타고 나가 채취해 온 굴을 까고 있는 주민 김연심(74)씨.

대촌마을 도로변 갯바위에서 낚시질을 하던 강쌍동(73)씨는 ‘운저리(망둥이) 낚시 전문가’였다. “10월에 겁나 나오제. 넣다 하믄 나와부러. 인자는 뜸하고.” 그러면서도 강씨는 연신 퍼덕이는 ‘운저리’를 낚아올렸다. 고무통을 들여다보니 20㎝는 돼 보이는 것들이 10여마리 들어 있다. “구워도 먹고, 끓여도 먹고, 회로도 먹고…. 소일거리로 좋응게.” 갑자기 나타난 말동무에게 강씨는 갯지렁이를 바늘에 꿰며 말을 계속했다. “꼬막 양식도 해보고, 땅콩농사, 벼농사도 해보고, 다 했어라. 여그 논이 읍서 보여도, 여서 나온 쌀 갖고 주민이 먹고도 남아요. 참꼬막은 잘 안돼부러. 옛날엔 뻘에 자연산 종패가 지천이었는디, 인자 거의 없어져부렀소. 이름? 나가 쌍둥이요. 동생은 아조 어릴 때 죽고. 갸도 이름이 쌍동이었제라.”

장도 대촌마을 주민 강쌍동씨(73)가 낚시로 잡아낸 ‘운저리’(망둥어).
장도 대촌마을 주민 강쌍동씨(73)가 낚시로 잡아낸 ‘운저리’(망둥어).

청년예술가들 ‘섬 가꾸기 작업’ 눈길

이 조용하고 한적한, 섬다운 섬으로 지난 주말 붓과 종이, 페인트, 카메라를 든 청년예술가들이 2박3일 일정으로 찾아들어왔다. 전남도 후원으로 ㈔섬연구소가 진행하는 ‘2016 청년 예술 섬 캠프’에 참가한 20~40대 젊은 예술가들이다.

이들은 도착하자마자 부수마을 골목의 낡은 담벽을 새로 칠하고, 바닷가에서 조개껍질을 몇 보따리씩 날라다 벽에 붙이며 골목을 멋지게 치장했다. 일부는 마을회관에서 어르신들의 초상화를 그리고, 주민들 손으로 직접 장도 지도와 마을, 뻘에서 채취하는 해산물 등을 그리도록 해 마을회관 실내에 내걸었다. 마을회관을 섬미술관으로 가꾸는 작업이다. 청년예술가들 틈에 끼어 마을회관에서 받은 밥상은 정말 꿀맛이었다.

부수마을 부녀회에서 청년예술가들을 위해 차린 밥상.
부수마을 부녀회에서 청년예술가들을 위해 차린 밥상.

장도 부수마을 박복수(가운데) 이장과 박보수(왼쪽) 어촌계장이 마을회관에서 장도 소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장도 부수마을 박복수(가운데) 이장과 박보수(왼쪽) 어촌계장이 마을회관에서 장도 소개 그림을 그리고 있다.

갯벌에서 잡은 재료로 마을 부녀회가 차려낸 것이다. 장도에 딸린 작은 섬인 목섬 들머리에서 만난 늙은 소 한 마리도 인상 깊었다. 장도에서 기르는 유일한 소다. 주민 윤점수(81)씨와 20년을 함께 살며 나이 들어온 암소인데, 그동안 송아지 20마리를 낳으며 윤씨와 함께 마늘밭·콩밭·고구마밭·땅콩밭을 갈아왔다고 한다. 집을 비운 윤씨는 만나지 못하고, 목섬 들머리 길옆에 매어놓은 소를 만났다.

장도 윤점수씨댁의 20살 된 ‘어르신’ 암소.
장도 윤점수씨댁의 20살 된 ‘어르신’ 암소.

웅크린 들고양이 한 마리와 함께 갯벌을 바라보던 늙은 소와 눈이 딱 마주쳤다. 깊이 모를 소의 순하고 맑은 눈망울. 갯벌가에 역광을 받아 빛나는 물억새처럼 그윽하고 따스했다. 소가 다시 천천히 고개 돌려 바라보는 쪽, 막 밀물이 들기 시작한 갯벌을 환하게 비추며 해가 저물고 있었다.

벌교(보성)/글·사진 이병학 선임기자


벌교·장도 여행정보

00500038_20161201.JPG

벌교~장도 배편 장도행 배는 2곳에서 탈 수 있다. 벌교읍 장암리 상진항에서 장도 신경포구까지 차도선 ‘장도사랑호’가 하루 2차례 운항(40분 걸림)하고, 벌교읍 철다리 옆 갯골에서 소형 여객선 ‘수미호’가 하루 1차례 부수마을 포구까지 운항(1시간 걸림)한다. 상진항 차도선은 물때에 따라 매일 운항 시각이 달라지므로 해양경찰 벌교 상진항 사무소(061-840-2435)에 문의하는 게 좋다. 상진항엔 매표소가 따로 없어 승선 뒤에 뱃삯을 치른다. 차량은 승용차 기준으로 4~5대밖에 싣지 못하므로, 차를 대놓는 순서대로 태운다. 특히 장도에서 나올 때는 선착장에 미리 차를 대놓아야 낭패를 피할 수 있다. 뱃삯은 1인 편도 3000원, 차량은 뱃삯 포함 편도 2만원. 수미호도 물때에 따라 매일 출항 시각이 다르다. 특히 한달에 6차례 정도, 물이 많이 빠지는 조금 때엔 운항하지 않는다.

먹을 곳 벌교읍내 곳곳에 꼬막정식과 회·무침·전 등 꼬막요리를 내는 전문식당이 30여곳 있다. 꼬막정식(1만5000원)을 시키면 새꼬막무침과 삶은 참꼬막 등이 함께 나온다. 참꼬막은 식탁마다 매달아놓은 도구를 이용해 까먹으면 된다. 장도엔 식당은 없지만, 박복수 이장을 통해 예약하고 가면 주민들이 차려주는 식사를 할 수 있다.

묵을 곳 벌교읍에 시드니모텔 등 모텔이 몇 곳 있다. 1박 4만~5만원. 장도에 공식 민박집은 없으나, 예약하면 마을회관이나 주민들 집에서 묵을 수 있다. 장도 부수마을에선 내년 봄부터 식사가 가능한 민박집들을 마련하고 뻘배 체험, 해산물 채취 체험 등 다양한 갯벌 체험행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여행문의 벌교읍사무소 (061)850-8066, 장도리 부수마을 박복수 이장 010-3666-5017, 보성군청 (061)852-2181.

Leave Comments


profile반갑습니다. 한겨레신문 이병학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