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년 태평육아

연말이다. 연말이 되면 안팎으로 분주하다. 송년회, 후원의 밤이 주당 1건씩은 잡혀있고, 친정 아버지에서 시작하여 큰 어머니, 동생, 예수님 생일에 이어 올해부터 조카 생일까지 추가됨으로써 12월 한 달은 아예 특별 파티주간을 선포해야 할 판이다. 게다가 그동안 벌려만 놓고 수습하지 못한 일들이 12월 달력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내 딱한 사정을 우리 딸이 헤아려 적극 협력해준다면 얼마나 고마울까마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낮잠도 서너 시간씩 길게 자고, 내가 집중해서 할 일이 있을 때는 옆에서 얌전히 놀아도 주고 그랬는데, 이제 그런 호시절은 지나갔다. 우선, 낮잠 시간이 짧아진다. 예전엔 재워놓고 음악도 듣고, 커피도 마시고, 글도 쓰고, 할 일도 하면서 꽤 여유를 부렸던 것 같은데, 이제는 재워놓고 뭔가 하려고 하면 깬다. 그리고 깨어있는 시간엔 온통 자기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야 한다. 말을 배우면서 요구, 반항, 잔소리가 늘어나고, 행동 반경도 넓어지고 많이 움직인다. 늘 나와 놀고 싶어하고, 저만 바라보게 하니 딴 짓을 하기가 힘들다, 밤에 애 재워놓고 나서 해야지, 생각은 그런데, 아이가 잠들면 나도 곯아 떨어진다. 집중할 수 있는 절대적 시간, 체력, 집중력 모두 부족한 상태.

고육지책으로 구름빵 카드를 꺼내 들었다. 구름빵은 구름으로 만든 빵을 먹으면 하늘을 날 수 있는 홍비와 홍시 이야기로, 우리 애가 가장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이다. 애니메이션에 대해 꼿꼿하게 굴던 나는 한층 공손한 자세로 홍비와 홍시에게 우리 애를 맡기기 시작했다. 한두 시간은 괜찮겠지? 처음엔 한 시간으로 시작했지만, 나는 점점 구름빵에 의존하게 되었고, 홍비와 홍시는 몇 시간이고 우리 애의 베이비시터가 되어 주었다. 늦바람이 무섭다고, 또래 아이들보다 뒤늦게 애니메이션에 입문한 소율이는 빛의 속도로 구름빵에 몰입해갔다. 어느덧 한 번 보기 시작하면 세 시간을 넘길 때도 있었다. 집중 학습결과, 우리 애는 구름빵 스토리를 달달 욀 뿐만 아니라 현실과 가상의 세계를 마구 혼동하는 구름빵 폐인이 되어갔다. 마치 홍비와 홍시가 자기에게만 보이는 투명인간이라도 되는 듯 늘 홍비와 홍시를 불러냈고, 아무렇지도 않게 허공에 대고 대화를 했다. 그것도 대화라고 '어버버버'하던 우리 딸의 어휘력은 일취월장해갔다. 나중에 깨닫게 된 사실이지만, 소율이의 모든 말과 행동은 구름빵 내용과 연관이 있었다. 이렇게 우리 딸의 세계는 구름빵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었다.

문제는 들어가긴 쉬운데, 나오는 게 안 된다. 구름빵을 틀 때는 세상을 다 얻은 양 좋아하면서, 끌 때가 되면 안돼~’라고 소리 지르고, 몸부림을 치곤 했다. 이 모습에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했다. 급히 비상대책위원회를 소집했다. 남편과 나는 어린이집을 보내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마음에 드는 어린이집을 찾는 게 만만치 않았다. 급하다고 당장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주위에서 누가 봐줄 수 있는 사람이 없을까 수소문해보았지만, 이것도 금방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역시 최후의 보루는 만만한 친정엄마. 엄마에게 SOS를 보냈다. 사실 친정엄마는 눈이 안 좋기 때문에 아이를 봐줄 수 있는 형편은 아니다. 그래서 엄마와 아빠는 바늘과 실처럼, 함께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아빠가 일을 하고 계셔서 올라와 계실 수는 없었다. 아빠는 엄마를 우리에게 인도하고, 다시 내려가셨다. 산후조리 이후, 엄마, 아버지의 두 번째 생이별 사건이다.

엄마는 손녀딸 재롱 보는 재미나 있지, 아빠를 홀아비로 만들어놓은 건 아무래도 미안하다. 그러나 그 미안함도 잠시, 엄마가 옆에서 아이를 봐주니 너무 편하고 좋다. 새삼스럽지도 않은 도둑년 심보다. 아빠는 홀로 외로운데, 나는 신났다. 엄마에게 애를 맡겨놓고 몇 시간씩 외출을 하기도 하고, 머리를 하러 가기도 하고, 하루 종일 방에 처박혀 밀린 일을 하나씩 마무리하고 있다. 우리 딸은 나를 아무런 미련 없이 나를 보내주었고, 할머니와 급속도로 결속해갔다. 할머니와 있으면서 가상세계에서 현실 세계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동안 그렇게 죽고 못 살던 구름빵 홍비, 홍시도 아예 찾지도 않는다. 그런 거 보면 아이 중심으로 생각하면 대가족이 맞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부모님과 같이 산다면, 얼마든지 다둥이 엄마가 되고 싶다.

참 신기하고 고마운 건, 엄마가 소율이를 돌보기도 하지만, 소율이도 잘 안 보이는 엄마를 돕는다고 한다. 예를 들어, 전화가 울리면 전화를 찾아와 할머니 손에 꼬옥 쥐어주는 식이다. 어린 나이에도 그 정도는 아는 거다. 이렇게 할머니는 할머니 대로, 소율이는 소율이대로, 나는 나대로 너무 행복하고 좋다. 내 도둑년 심보를 눈치라도 챈 걸까? 딸의 편리함을 위해 대가를 치르고 있는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를 빨리 원위치시키라고. 막판 스퍼트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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