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개가 오줌을 싼다 무위태극선 교실

민웅기의 무위태극선 33/도타움에 처하라/천구산뇨 天狗橵尿  

하늘의 개가 오줌을 싸는 모습을 본떠서 붙인 이름이 천구산뇨天狗橵尿이다. 왼발은 땅에 딛고 있는 채로 오른발을 허리 높이까지 들어 뒤로 빼고 있고, 왼손은 손등이 위를 향한 채 손끝을 수평으로 찌르고, 오른손은 종 모양을 한 채 뒤쪽으로 향해 있다. 눈은 왼손의 끝을 주시하고 있다.

 

한 발로 땅을 딛고 서서, 나머지 한 발을 들어 뒤로 주욱 빼고 왼손은 앞으로 뻗어 있는 모습이니, 영락없이 오줌을 싸는 수캐의 모습이다. 개는 매우 용감하나 또한 매우 조심성 있는 동물이다. 철저히 경계를 하며 자신의 영토를 지킨다. 하늘개天狗는 하늘의 영토를 지키는 천사와 같은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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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천사가 단비를 내린다. 이 단비는 하늘의 법으로부터 지상에 내리는 비, 즉 법우法雨이다. 우주의 법이 내린 감로수이다. 달콤한 이슬과 같은 수액이 입안을 적시고 그 감로수가 목젖을 통과해서 오장육부로 흘러들어감이다. 명상에 젖어 적적한 경계에 들어서니 몸과 마음에 감로수가 촉촉이 젖어드는 것 같다. 몸속에서 환희의 호르몬이 분비되고 이 호르몬이 몸속 구석구석까지, 겉과 속의 기관과 세포들까지 촉촉이 배어들어가는 것 같다. 갈급한 마음이 진리의 단비를 만나 기쁨에 젖어든다. 성령의 단비로 몸과 마음이 씻어내려 간다. 법의 기쁨(法悅)이 충만하다.

 

온우주적 사랑이 베풀어짐이다. 그 사랑은 한계가 없다. 상대적 세계에서 주고받는 사랑은 조건적이다. 거래를 하듯, 받는 만큼 준다. 그러나 온생명으로부터 낱생명들에게 젖어들어오는 사랑은 조건에 매이지 않은 무한한 사랑이다. 이 사랑이 땅에 가득한 생명과 그 속의 인간을 충만하게 한다.

 

나보다 못한 이에 대한 연민의 마음, 역시 근원적으로 일자一者가 다자多者에로 손짓하는 내밀한 사랑의 은총으로부터 나온다. 신성한 잔치에로 초대하는 일자가 다자에게 베푸는 은총, 그것은 일자의 무한의식에 동참하도록 간절히 부르는 연민의 마음에 다름 아니다. 생명있는 존재가 직면한 고통에 동참하고 공감하여, 그들 안의 무한의식을 일깨우도록 끊임없이 그들 안에서 그들을 향해 속삭이며 손짓하는 내면의 신성, 그것이 바로 연민의 마음인 것이다. 그 연민 안에서, 서로의 존재를 향해 따스한 손을 내밀고, 따뜻한 가슴으로 안아들이는 것, 그것이 생명 있는 것들의 존재방식이 된다.

 

지금 이 순간, 내면의 신성함으로 귀의해 들어가 본래의 적적함의 깊이에 도달하게 되면 평정심을 얻게 된다. 평정심은 곧 평등심이다. 평등심은 곧 자재심이다. 과거에도 미래에도 머물지 않고, 지금, 여기에 머물러 허무적적하게 된 마음이다. 어느 바람에도 흔들림이 없는 부동의 마음이다. 부동의 마음은 버릴 때 얻어진다. 무엇을 버리는가? 차별의 상을 버린다. 그 상에 집착하는 마음을 버린다. 그러므로 평정심은 사의 마음이다. 나를 버리고 나의 소유를 버리고, 나의 상을 버릴 때, 평화가 찾아온다. 나를 버림으로써 오히려 나를 완성하게 된다.

 

법의 단비를 촉촉이 적시어 내면의 신성함에 도달하게 되니 무한의식의 바다로 인도된다. 무한의식은 온우주의 본성에서 일어나는 의식이므로, 조건적이고 제한적인 상대적 의식과는 구별된다. 그리고 이 무한의식은 지극히 작은 시간과 지극히 작은 공간 속에도 충만하고 온전히 배어 있다. 지극히 작은 시간은 다름 아닌 지금 이 순간이다. 지금 이 순간이 과거로 통하고 미래를 행헤 열린 통로가 된다. 그런 까닭에 지금 이 순간은 지극히 큰 시간, 즉 무량원겁의 시간으로 통한다. 무량원겁으로 통하는 지금, 여기에깨어있음으로 현존하는 것, 그것이 바로 무한의식에 계합하는 일이 된다.

 

영원으로 통하는 문은 지금, 이 순간에 우리 안에 활짝 열려있다. 그 영원한 현재에 머물러 무한한 법의 단비 가운데 충만히 젖어들도록 인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우연히 깨닫고, 우연히 진화하고, 우연히 만 가지 것들이 어울리게 되는 그런 법은 없다는 것이 지혜전통의 의미심장한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대승의 전통은 이러한 네 가지 무한의식을 귀하게 여긴다. 이른바 사무량심四無量心이다. 사랑()과 연민()과 기쁨()과 평정(), 이 넷은 사람에게만 귀한 것이 아니고, 하늘과 땅에서도 귀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온우주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네 가지 무한의식은 유정무정, 각양각색의 모든 존재의 바탕에 편만히 깔려있음으로써 비밀스럽게 그들 각각의 존재들을 이끌어가는 목적인이 된다. 각각의 낱생명들을 온생명의 빛 가운데로 인도하고, 그 밝음 안에서 스스로의 어둠을 밝히도록 추동하는 목적인이 된다. 그러한 목적인을 일러 우리는 무한의식의 자연성이라 한다.

 

하늘의 천사는 말로 사랑을 베풀지 않는다. 하늘 아래 다종다양한 존재들의 칭찬과 비난, 감사와 원망, 믿음과 불신, 그리고 각양각색의 아우성과 신음소리들에 일일이 응하나, 고요한 가운데 처할 따름이다. 세상의 모든 소리들을 귀담아들어서 그 소리들과 하나가 되어 머물면서도 간섭하지 않고, 단지 연민의 정을 도탑게 쌓고 있을 따름이다. 말을 아끼는 것, 그것이 스스로 그러한 자연의 소리가 되기 때문이다.(希言自然)

 

큰 사람은

그 도타움에 처하지

그 엷음에 살지 아니한다.

그 열매에 처하지

그 꽃에 살지 아니한다.

 

大丈夫處其厚, 대장부처기후

不居其薄; 불거기박

處其實, 처기실

不居其華. 불거기화 (38)

 

도탑다는 뜻의 후, , 은 같이 쓰인다. 돈후하다, 돈독하다로 쓰여 뜻을 가볍게 쓰지 않음을 의미한다. 묵은 김치가 삭을 대로 삭아서 맛이 깊은 것과도 같다. 오랫동안 제대로 묵힌 와인에서도 그런 맛이 날 것이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퇴비에서 향그러운 냄새가 나는 것과도 같다. 이익을 따라 철새처럼 이리저리 기웃거리지 않는 뚝심의 사업가들도 이러할 것이다. 지난 선거 때에는 야당으로 나왔다가 이번 선거에는 여당으로 나오는 철새 정치인처럼 얇은 데 처신하지 않는다.

 

하늘이 늘 하늘이듯이, 땅이 늘 땅이듯이, 사람도 늘 그러한 사람인 것, 도타움의 덕은 항상스러움을 따른다. 땅심을 믿어 지렁이 한 마리도 소홀히 여기지 않고, 그들을 살리는 것이 곧 땅을 살리는 것임을 철석같이 믿어 의심치 않아서, 어느 한때 수확이 줄고 타산이 맞지 않더라도 항심을 유지하며, 가던 길 곁눈질 아니하니, 농부의 도타움이 바로 큰 사람의 그것과 같다.

 

몸과 마음의 길은 돈후하지 않으면 가기가 쉽지 않다. 돈후함은 밖의 눈부심에 처하지 않고 안의 고요함에 처하는 길이고, 꽃의 화려함에 눈 돌리지 않고 열매의 실함에 뜻을 두는 길이다. 바람 부는 대로 제멋대로 나부끼는 잎새와 같이 처신하지 않고, 밤과 낮, 사시사철을 한결같이, 잎새 무성한 나무둥치를 든든히 받쳐주는 뿌리와 같이 처한다.

돈후함은 장자가 말한 그 노거수의 쓰임새에 비유된다. 기둥으로도 쓰지 못하고, 가구로도 쓰지 못하고, 그릇을 만드는 재료로도 쓰지 못하므로 목수로부터 사용가치를 외면당했던 노거수가, 수백 년 묵은 세월 덕에 하늘을 덮을 정도로 크고 오래된 그늘을 제공함으로써, 오가는 사람들의 쉼터가 되고 안식처가 되어줄 수 있었으니, 예로부터 도타움의 덕을 잘 보여주는 비유가 된 것이다. 목수의 도끼에 찍혀 쉬이 이용되었다면 결코 그토록 후덕한 쓰임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노자가 배를 위하되 눈을 위하지 말라(爲腹不爲目)고 했던 것과 같은 맥락으로 통하는 경구가 본문의 그 열매에 처하지(處其實), 그 꽃에 처하지 말라(不居其華)”이다. 겉꾸밈과 밖에 드러나는 외양에 치중하는 세태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건만, 노자의 이 말이 오늘 우리에게 더 뼈아프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바탕을 보고

통나무를 껴안을지니,

사사로움을 적게 하고

욕심을 적게 할지니.

 

見素抱樸, 견소포박

少私寡欲. 소사과욕 (19)

 

는 바탕이다. 희디흰 밑바탕이 소이다. 바탕이 있어 그림을 그리니 작품이 되고, 바탕이 있어 음악을 배우니 피아니스트가 되고, 바탕이 있어 수행을 하니 참사람이 된다. 바탕이 없이 어떤 예술도 문학도 작품도 만들어지지 않으나, 그 바탕을 보려고 하지 않는 것이 또한 어제와 오늘이 닮았던 모양이다. 흰 바탕이 없이 그림이 그려질 수가 없다.

 

은 통나무가 쪼개어져서 그릇으로 만들어지기 이전의 그 통나무의 원목을 말한다. 그릇이 만들어지고 나면 아무도 원래의 그 통나무를 주목하지 않는다. 다양한 그릇들의 이름과 모양과 용도와 가격만 눈에 띈다. 그릇을 눈앞에 두고서 통나무의 원래의 원형을 상상하기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므로 목전의 그릇들을 보면서 그 그릇들이 태어난 본원과 같은 통나무를 알아볼 수 있다면 그들은 태극을 본 것이다. 도의 본래의 자리를 본 것이다. 이름이 생기기 이전의 그 자리를 본 것이니, 당신이 태어나기 이전의 소식을 들은 것과 같게 된다.

바탕을 보고(見素) 통나무를 껴안는다(抱樸)는 말은 소박素樸을 보고 소박素樸하게 살아라는 말과도 같다. 하늘 바탕에 그려진 우리의 마음을 보고, 그 마음이 바탕을 닮았는지 한번 들여다볼 일이다. 태어나기 이전의 소식을 간직하고 있는 원형의 이름 없는 통나무를 껴안아 볼 일이다. 그리고 지금 쓰이고 있는 그릇들의 다양한 이름과 용도를 한번 점검해 볼 일이다.

 

소사과욕少私寡欲사사로움을 적게 하고, 욕심을 적게 하라의 뜻으로, 견소포박見素抱樸과 함께 많은 이들의 삶의 이정표가 되어온 경구이다. 인구에 회자되어온 만큼이나 인구의 의식과 삶으로부터 동떨어져 있으니, 그 뜻은 알기 쉬우나 그 실천은 어려운 까닭일 것이다.

이번 겨울은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린다. 게다가 춥기가 90여년 만에 처음이란다.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강추위가 마음까지 꽁꽁 얼어붙게 한다. 산중의 토굴은 으스스하다. 물이 얼어 벌써 며칠째 안 나왔다. 작년이라면 일 년 내내 쓰고도 남을 장작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밖으로 통한 샛길이 막혀 차가 못 다닌 지 한 달이 넘었다. 가스도 떨어질 때가 되었는데 큰일이다.

온난화의 영향으로 숲의 생태가 변하기 시작해서 소나무 숲도 더 이상 보기 힘들지 모른다고 걱정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번엔 시베리아로부터 매서운 추위가 몰아쳐오니 어리둥절할 뿐이다. 원인인즉슨, 북극의 빙산이 녹아내리면서 거기에서 생긴 차가운 바람이 시베리아 벌판의 북서풍을 타고 한반도를 강타하고 있다는 것이다. 수십년 전에 세계의 과학자들과 환경당국에 의해 심각하게 경고되었던 내용들이 이제 현실이 되어 눈앞에 나타났다. 말은 많고 무성한데 결국 세월만 보내고 말았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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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지도자들과 글로벌 리더들이 알아서 잘 대처해줄 것이라고 믿을 정도로 그렇게 순진한 사람들은 이제 없는 것 같다. 그렇다고 민간기구나 단체들이 이 일을 떠맡아서 하기에는 힘이 부칠 것이다. 사람들은 지구적 차원의 심각한 문제까지는 잘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알더라도 제 갈 길이 바쁠 것이므로 그런 문제는 뒷전이 될 수밖에 없다.

만약 이대로 계속 늦추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겠다. 지진이나 해일 등의 지구적 차원의 재난이 일어나서 헤아릴 수 없는 인명과 재산이 희생되는 일도 이제 비일비재하다. 인류가 스스로 알아서 자연스럽게 대처하지 못하게 되면, 아마 우주가 직접 조정에 나서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매우 자연스럽게도 인류와 인류가 세운 문명에 돌이킬 수 없는 커다란 재앙이 떨어질지도 모르니…….

 

가물한 덕이여!

깊도다!

멀도다!

이 세계와 반대로 돌아가는구나!

그런 뒤에야 다시

큰 따름에 이를지니.

 

玄德深矣遠矣, 현덕심의원의

與物反矣, 여물반의

然後乃至大順. 연후내지대순 (65)

 

현덕玄德은 깊고도 멀어서, 이 세상의 물정과 반대로 돌아간다. 그리고 나서야 큰 따름(大順)에 이른다고 했다.

 

큰 따름(大順’)에 이르는 길이 참으로 험난하구나

민웅기<<태극권과 노자>저자,송계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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