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루한 인간이 입에 옥(玉)을 물고 있는 까닭은? 무위태극선 교실

민웅기의 무위태극선 교실 32/남루한 차림에 을 품고 있음이여/십자퇴 十字腿  

 

 

고탐마 식으로부터 왼손이 가슴 위쪽으로 치밀어 올라와 손바닥이 하늘을 향한 채, 손끝이 입에서 쏘옥 빠져나온 듯한 모양으로 내밀어있다. 오른손은 손바닥이 아래를 향한 채, 왼 팔꿈치 아래에 놓이고, 왼쪽 무릎이 굽혀 있으며 오른 다리는 펴있어 궁보의 보법으로 왼발이 실하고 오른발이 허하다.

십자퇴十字腿는 뱀의 혓바닥이 쏘옥 나온 것처럼 내밀어진 왼손과 팔꿈치 아래의 오른손, 그리고 왼다리가 어울려 십자 모양을 이루고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용이 여의주를 입으로 토해 내어 손바닥에 올려놓고있는 모양이다. 진귀한 옥으로 된 구슬을 쟁반에 받쳐 내밀고있는 모습이다. 왼 무릎을 굽혀서 나의 가장 귀한 것을 끄집어내어 상대에게 바치는 사랑과 헌신의 모습을 보이고 있음이다. 지극한 정성으로 뭇 생명을 섬기어 모시는 태도를 내보임이다. 깨달은 자가 안의 보배를 끄집어내어 신표를 보여주는 것 같다. 지도자가 말없는 모습으로 온 백성들에게 믿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꺼지지 않을 밝은 빛으로 옷 입은 영적 스승이 그 빛을 돌이켜 중생들의 어리석음을 환히 비춰주는 것(廻光返照)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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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는 완전한 숫자이다. 무량원겁無量遠劫의 모든 시간을 다 포함하고,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시방세계十方世界의 모든 공간을 다 포괄하고, 물질과 생명과 마음과 혼과 영의 의식 진화의 모든 계단을 다 뛰어넘고 내포하는 완전한 의식이다.

모든 낱생명과 한데 어울리고 통할함으로써 존재하는 온생명이다. 주관과 객관, 개인과 공동체, 물질과 마음을 온전하게 통섭한 온우주를 말함이다. 진리()와 도덕()과 아름다움()을 두루한 참마음이다.

 

모든 가유假有를 깨고 나온 진여眞如이고, 모든 환상을 떠난 바른 깨달음이다. 생멸을 벗어난 열반涅槃이요, 그 열반의 적정寂靜함이다. 상주불변常住不變한 마음의 본성을 말함이니 다시 상, , , 이 된다.

 

어느 날 공자가 노자를 만나고 와서 한숨을 길게 내쉬고 있었다. 곁에 있던 제자가 공자에게 물었다.

선생님! 오늘 만나신 분이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그렇게 한숨만 내쉬고 계십니까?”

공자가 말했다.

오늘 내가 만난 그 분은 도대체 너무 깊어서 알 수가 없는 분이다. 네 발 달린 동물이라면 잡을 수 있고, 날아다니는 새라면 낚아챌 수 있고, 물속에 사는 물고기라면 그물을 쳐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분은 다르다. 마치 같은 사람이다.”

 

용은 바다의 깊은 곳, 용궁에 산다. 바다를 지배하는 용이 여의주를 얻으면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다. 여의주如意珠란 용이 입에 물고 있는 보배 구슬이다. 이 여의주를 얻으면 뜻대로(如意) 하지 못할 바가 없다. 여의주는 그러므로 풀어쓰면 진기眞氣이다. 태극太極이다. 진심眞心이다. 진지眞智이다. 용이 바다 속 한가운데서 참 기운과 참 지혜를 얻는다는 말이 여의주를 얻은 것의 의미가 된다.

잠룡이 물 가운데 숨어있다. 아직 힘을 키우지 못한 잠룡은 힘과 지혜를 길러 여의주를 얻으면 물속을 뛰쳐나와 하늘로 날아오른다. 그리하여 항룡恒龍이 된다. 항룡이 되면 더 이상 생멸의 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말하자면 무생법인無生法印을 증득한 셈이다. 더 이상 생사윤회의 바퀴를 돌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래서 하늘과 땅의 주인이 된다.

 

장자의 소요유의 대붕의 이야기가 그 의미맥락에서 상통한다.

북명에 물고기가 있었다. 이름은 곤이다. 곤은 크기가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이 물고기가 변해 새가 되었는데 새의 이름은 붕이다. 붕의 등 길이도 몇 천리에 달하는지 알 수 없었다. 붕이 힘차게 날아오르면 그 날개는 하늘을 가득 뒤덮은 구름을 연상시킨다. 붕은 바다 기운을 타고 남명으로 옮겨가려 한다. 남명은 바다이다.

<제해齊諧>는 기이한 일이 기록된 문헌이다. 이 책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붕이 남쪽 바다로 옮아갈 때 파도는 삼천리나 솟구치고 붕새는 회오리바람을 타고 위로 구만리까지 날아오르는데, 6월의 바람()을 타고 간다.”

물고기가 변해서 대붕이 된다. 대붕이 되어 하늘에서 내려다본 세상은 물고기 시절에 바라본 세상과는 판이하다. 개구리가 되니 올챙이 시절의 안목이 우스꽝스럽다. 온갖 분별상에 갇혀 아웅다웅 다투는 것으로 세월을 보냈다. 칼날 같은 무기를 들이대며 서로 간에 이전투구했던 기억조차 아스라이 사라지고 없다.

상대적 세계에서 양분되었던 이분법적 경계는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혼혼混混돈돈沌沌하여 밀밀密密관관關關하니, 그대로 여여如如한 실상의 세계만 찬란하게 드러난다. 붕새는 양기가 가장 무르익은 시기의 바람, 6월의 호흡을 타고 남쪽 바다로 날아간다. 남쪽 바다로 나아감은 세상으로 직접 나아감을 상징한다. 성인이 되어 세간으로 거처를 바꾸고 천하를 다스린다는 뜻으로 읽는다.

 

잠룡이 여의주를 얻어 항룡이 되어 하늘을 날아오르는 것처럼, 물고기가 하늘 가득한 구름 같이 커다란 날갯짓과 호흡(바람)의 힘으로 붕새가 되어 날아오른다. 두 이야기에는 각각 전회의 과정이 상징으로 깔려있고, 그 전회를 통해 각각 항룡과 대붕이 되어 새로운 차원의 경계로 비상하게 된다는 스토리가 역시 닮아있다.

 

히말라야 산정을 오른 성인의 겉모습은 남루하기 짝이 없다. 하늘 아래 모든 것들로부터 빌어먹는 신세가 되니 만유만생으로부터 빚진 자 되었다. 이제 그 빚을 갚는 길에 나섰으니 하산길이 그러하다.

길을 가는 여정에 닳고 닳은 신발이며 옷가지며 하나도 성한 것이 없지만 그의 얼굴은 맑고 밝은 신성의 빛으로 가득하다. 그의 속에는 보배를 품고 있으니(是以聖人被褐懷玉. 70) 그것이 바로 뭇 길들을 걸으며 통한 큰 길이다. 비상도非常道를 넘고 넘어서, 덜고 덜어서 도달한 상도常道이다. 무위자연의 도이다. 큰 길은 홀로 서서 변치 않는다(獨立不改. 25).” 그러므로 그 길은 이름이 없다.(道常無名. 32) 이름이 없으므로 변함도 없고 변치 않으므로 항상된 길이다. 그 항상됨을 아는 것이 밝음(知常曰明)이라 술회했다.

 

혼돈되이 이루어진 것이 있었으니

하늘과 땅보다도 앞서 생겼다.

적막하고 모습이 없네!

홀로 서서 변하지 않는다.

가지 아니하는 데가 없으면서도 위태롭지 아니하니

가히 하늘 아래 어미로 삼을 만하다.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해,

그것을 글자로 나타내어 도라 하고,

억지로 그것을 이름 지어 크다고 하네.

큰 것은 가기 마련이고,

가는 것은 멀어지기 마련이고,

멀어지는 것은 되돌아오기 마련이네.

그러므로 도는 크다.

하늘도 크고

땅도 크고

사람의 주인 또한 크다.

너른 우주 가운데 이 넷의 큼이 있으니

사람의 주인이 그 중의 하나이다.

사람은 땅의 법칙을 따르고,

땅은 하늘의 법칙을 따르고,

하늘은 도의 법을 따르는데,

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따를 뿐이로다.

 

有物混成, 先天地生. 유물혼성 선천지생

寂兮寥兮, 獨立不改. 적혜요혜 독립불개

周行而不殆, 可以爲天下母. 주행이불태 가이위천하모

吾不知其名, 오부지기명

字之曰道, 자지왈도

强爲之名曰大. 강위지왈대

大曰逝, 逝曰遠, 遠曰反. 대왈서 서왈원 원왈반

故道大, 天大, 地大, 王亦大. 고도대 천대 지대 왕역대

域中有四大, 而王居其一焉. 역중유사대 이왕거기일언

人法地, 인법지

地法天, 지법천

天法道, 천법도

道法自然. 도법자연 (25)

혼돈되이 이루어 있는 그것(有物混成), 천지보다 먼저 나온 그것(先天地生), 적막하여 모습이 없는 그것(寂兮寥兮), 홀로 서서 변치 않는 그것(獨立不改)은 이름이 없다(吾不知其名). 이름이 없으므로 그냥 라 쓴다(字之曰道). 억지로 말해 크다라고 한다(强爲之名曰大). 편만히 운행되므로 멈추지도 않고 위태롭지도 않다(周行而不殆). 천지를 이루고 만물이 그로부터 나왔으므로 하늘 아래 어머니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可以爲天下母).

그것은 크기 때문에 가기 마련이고(大曰逝), 가기 때문에 멀어지기 마련이고(逝曰遠), 멀기 때문에 되돌아오기 마련이다(遠曰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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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네 인생살이도 이렇게 큰 길 안에 있는 작은 낱길이다. 온생명 안에 있는 낱생명이다. 상주불변하는 도의 큰 운행 가운데 있다. 큰 길은 모든 낱생명들을 통섭하고 한길로 나 있으니, 두루 운행하는 큰 도란 바로 낱낱의 생명들이 그에 의지하여 가는 길이다. 그 길은 크므로 가다 보면 멀어진다. 멀어지면 다시 되돌아온다. 그러므로 도는 크고, 하늘도, 땅도, 사람의 주인도 크다(故道大, 天大, 地大, 王亦大). 너른 우주 가운데서 큰 것이 네 개가 있어 이를 사대四大라 부른다.

 

사람은 땅에서 태어나고 땅의 법칙을 따라서 산다(人法地). 땅은 공기와 물과 숲과 먹을 것과 누울 곳과 입을 것을 준다. 사람은 지구의 중력을 받고, 지기를 받고, 땅의 따스함과 땅의 서늘함과 땅의 바람과 땅의 생명체에 의지해 산다. 땅으로부터 떨어져서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사람은 땅에 붙어서 땅의 법칙을 준수하며 살아야 한다.

땅은 하늘의 태양과 달과 뭇 별들, 하늘의 밝음과 어두움, 그리고 하늘의 돌아감에 의지해 존재한다(地法天). 낮과 밤이 하늘의 법에 따르고, 사시사철도 마찬가지로 그러한다. 그리고 하늘은 도를 따라 운행되며(天法道), 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따른다(道法自然).

스스로 그러함(自然)’이란 무엇일까? 상주불변하는 도체의 존재 상태를 형용해서 말하는 뜻으로 읽는다. 그러므로 자연은 상도常道의 존재방식이 된다.

 

불가에서 을 설하는 방식은 두 가지로 갈린다. 첫째 파상破相, 상을 깨트림을 위주로 설하는 방식이다. 초기불교는 무상無常, , 무아無我를 말해서 진리의 3대 명제(三法印)로 삼는다. 우리 인생이 집착하는 것이 무엇이던가? ‘라는 것이다. 가 항상할 것()이라고 거기에 집착하고, ‘가 즐거운 존재()라고 거기에 집착하고, ‘가 실재한다()고 믿어 거기에 집착하며, ‘가 깨끗하다()고 여겨 거기에 집착한다.

그러나 가만히 관찰해보니 우리가 믿는 는 참으로 무상無常하고, 고통뿐이고, 실재하는 나의 정체성이나 본질 같은 것이 없다. 이렇게 근거 없는 상, , , 에 집착하기 때문에 인생이 고통의 바다에서 헤어나기 어렵다는 것이다. , , , 의 상을 깨트림이 깨달음의 관건이 된다. 그러므로 이렇게 무상無常하고, 이고, 무아無我에 대한 집착을 바로 보고, 그 집착의 끈을 놓아버림으로써 해탈의 문으로 들어설 수 있다고 가르친다.

 

대승의 금강경이나 반야경도 역시 파상破相을 위주로 설한다. 금강경은 무주無住를 설해서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릴 것을 강조한다.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應無所住而生其心)”

모든 법이 상 아닌 것으로 보게 되면, 곧 여래를 볼 수 있다.(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무주無住, 머물지 않음은 무상無相이요 파상破相이다. 어떤 상에도 머물지 않는다는 말이다. 심지어 깨달음에 대한 집착까지도 놓아버리는 것, 그것이 무주요, 무상이다.

반야경은 공을 설하고, 나가르주나(용수)8부중도설八不中道設을 말해서 현묘한 의 도리를 설파한다.

 

발생하는 것도 없고, 소멸하는 것도 없으며(不生不滅),

항상하는 것도 아니고, 단절된 것도 아니며(不常不斷),

서로 같지도 않고, 서로 다르지도 않으며(不一不異)

어디서 오는 것도 아니고,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다(不來不去).”

 

이렇게 하여 대승의 세 가지 해탈의 문은 무상無相, , 무원無願이 된다.

 

둘째, 현성顯性, 성을 드러냄을 위주로 설하는 방식이다. 열반경에서는 깨달음의 본성은 상주한다(佛性常住)고 설한다. 그러므로 여래는 열반에 들지 않는다(如來不入涅槃)고 말한다. 여래는 원래 여여한 그 자리에 항상 있을 뿐이어서 열반에 들고말고가 없다는 것이다. 마음속의 고요하고 밝은 자리가 바로 적멸寂滅의 자리이고 상이라는 말이다. 그 상이 바로 여래인 것이다.

아울러 열반의 네 가지 덕을 말한다. 그것이 상, , , 의 덕이다. 을 깨트리기 위해 전면적으로 부정했던 것들이 덕이 되어 돌아왔다. 열반은 상주불변()하고, 열반은 기쁨()이고, 열반은 실재()하고, 열반은 청정() 그 자체라는 것이다.

 

화엄경은 마음의 본성이 바로 불성佛性이며 상주불변하는 진리임을 말한다. 나아가서 불성은 유정有情(생명 있는 것), 무정無情(생명 없는 것)의 모든 존재가 다 차별 없이 본래 갖고 있는 것이라고 설한다. 세계의 국토에 있는 낱낱 경계 가운데 작은 티끌안에도 부처의 몸이 출현하고, 서로서로 갈마들어가서 같지 않기도 하고 다르지 않기도 하며, 온전히 같고 온전히 다르기도 해서, 더러운 세계와 깨끗한 세계가 걸림이 없고 장애가 없다. 그러므로 유정과 무정을 논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개에게도 불성이 있느냐의 논쟁을 뛰어 넘는다. 작은 티끌 하나에까지도 불성, 즉 깨달음의 알갱이가 있고, 그것이 다 서로서로 사무쳐서 더불어 부처의 몸을 이루고 있다는 지경에 이르러선 참으로 감동적이다.

 

파상破相과 현성顯性도 진릴설하는 두 가지 방편에 불과하다. 오로지 망상을 깨트리고 진실을 밝히는 데(破妄顯眞)에 목적이 있을 뿐이다. 집착을 깨트리고(破執), 집착을 떠나고(離執), 이치를 드러내어(顯理) 밝은 지혜(明智)를 얻기 위함이다. 손바닥을 뒤집으면 손등이 되는 이치다.

 

날아가는 꽃과 떨어지는 잎사귀를 보고서,

무상과 무생의 진리를 단박에 깨닫는다.”

 

看飛花落葉 간비화낙엽

直悟無常無生 직오무상무생

 

십자퇴는 앙상한 가지만 남아 찬바람에 떨고 있는 겨울의 초입에 서서, 겉은 남루한 갈옷을 입고 속에는 을 간직하고 있는 참사람의 모습이 된다. 안에 상도常道를 품고, 밖은 낙엽마저 져버린 갈색의 자연미를 풍기는 자연인의 모습으로 말이다.

 

민웅기(<태극권과 노자>저자.송계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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