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다리로 위엄있고, 견고하게 무위태극선 교실

민웅기의 무위태극선/자기를 아끼되 높이지 않는다/일각장천 一脚長天   

 

운수의 자세를 돌아나와 오른손이 일지一指를 만들고 동시에 왼손과의 대칭과 협조 속에 오른손의 일지一指가 아래 땅 쪽으로 나사가 돌아들어가듯 일직선으로 내리꽂히는데, 오른손의 손목이 자유롭게 돌아가는 동작이 현란하다. 아래로 향했던 일지一指는 다시 위로 솟아나와 오른쪽 어깨방향으로 주욱 뻗어 있는데 손바닥이 하늘 방향이다. 왼손은 왼쪽 옆구리 옆선에 정렬해 들어와 있고 손등이 하늘 방향이다.

 

일각장천一脚長天의 다리는 오른발이 오른 무릎과 수평으로 들려서있고, 왼발이 체중을 지탱하고 있는데, 그 모습을 본떠서 일각장천一脚長天이라 했다. 장천長天이란 큰 하늘이라는 뜻이다. 우주 공간이 큼을 일컬어 장천이라 한다. 노자도 하늘은 크고 땅은 오래다.(天長地久. 7)”고 노래하는데 바로 그 하늘이 장천長天이다.

일각장천一脚長天의 형상은 지극히 단정하고 멋스럽다. 지극히 고준한 인품을 안에 담고 있으나 겉으로는 염담하다. 일각장천의 멋스러움은 일각一脚과 일지一指에 있다. 일각一脚으로 뛰어난 기예를 연출하는 듯하면서도, 위엄있고 견고하다. 일지一指로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보여주면서 바깥 기운을 제압하는 기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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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심자들이 하기에 매우 난해한 식이 이 일각장천이다. 왼발로 학의 다리처럼 단단하고 균형있게 몸무게를 지탱해야 하는 것도 어려운 까닭이지만, 오른발을 수평으로 접은 채 들어 올리는 것이 실제로 더 어렵다. 자주 연습하여 숙련하면 외다리로 기품있게 서서 일지를 내뻗고 있는 품새가 한결 수월해지고 재미있게 될 것이다.

일각장천을 능수능란하게 할 수 있으면 이미 고수로 통한다. 그만큼 허리의 자유자재한 운용이나 이에 조응하여 잘 방송되어 나오는 손목의 민활한 움직임 등이 받쳐주지 않으면 잘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일각장천을 수련하는 이의 자태는 스스로 대단히 방정方正하다. 기예가 출중하나 자기를 엄격히 다스리는 수양이 잘 된 선비가 한 편의 시를 읊조리며 먼 산을 응시하고 있는 것 같다. 산천초목을 떨게 할 듯한 예리한 눈매를 가졌으나 밖으로 날카로움을 들이대지 않는 어진 품성을 지녔다. 출중한 학식과 지혜를 지녔으나 사사로운 명리를 탐하는 일에 함부로 쓰지 않는다. 스스로를 아는 참된 견해를 가졌으므로 잘 드러내지 않으며, 자기 자신을 아껴 사랑함이 지극하나 온우주를 알고 모시듯 하므로 자신을 높이거나 빛내지 않는다. 이상이 높으나 지금 여기의 삶에 충심으로 임한다.

 

성인은

자기를 알면서도 스스로 본다고 여기지 않고,

자기를 아끼면서도 스스로 높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聖人自知不自見, 성인자지부자견

自愛不自貴, 자애부자귀

故去彼取此 고거피취차 (72)

 

지금의 시대는 앎이 곧 무기이고, 앎이 곧 재산인 시대이다. 눈만 뜨면 앎의 바다로 빠져 들어간다. 보고 듣고 헤아리고 재단하고 기억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그렇게 많을수록 좋은 것으로 여기는 것 같다. 그렇게 많은 지식과 정보를 얻고 쌓기 위해서 막 태어난 갓난아기 때부터 뭔가 중압감에 시달린다.

 

몇 해 전만 해도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치게 하거나, 한 가지 악기를 배우고 익히는 일, 그림을 그리거나 예술적 표현능력을 기르는 일에, 그리고 시적인 감수성을 키운다거나 고전을 읽히는 데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어찌됐건 감성지수를 키우는 일과 같은 것에 대해서도 좋은 생각이 많았다. 영어와 수학을 하는 것 말고도 다른 쪽에 왠지 모를 중요사가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문학과 역사와 철학은 밥벌이를 위해서 할 것은 아니라고 여기는 것이 세간의 상식처럼 되어버렸다. 대학진학에서 문(문학역사철학)과목은 누구의 이목을 받지도 끌지도 못한다. 그래서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뜻있는 지식인들 가운데 회자回刺되기도 한다. 극단적인 지식 정보추구 시대의 뒤안길에 순수학문이 노골적으로 괄시와 천대를 받고 퇴출되어가는 꼴이다.

 

이런 판국에 웬걸 미국과 구라파에서는 동양학과 수행을 배우는데 열풍이란다. 그들은 그들이 선택하고 추구해온 것들의 결과에 썩 만족스러워하지 않아 보인다. 지식 정보에 의지한 문명, 과학과 이성을 극단적으로 숭배한 자신들의 문명의 한계를 직시하고서, 이제 돌아서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이 다시 주목하고 사유하며 수행하는 공부가 바로 동서양의 지혜 전통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중국과 인도와 티벳의 영적 수행 전통으로부터 현재의 문명의 한계를 돌이키려 하는 것 같다. 그리고 새로운 미래의 틈을 엿보는 것 같다. 그들이 도의 문 앞에 서성거리고 있다. 문 없는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그들의 발뒤꿈치를 붙들기 위해 매달리고 있다. 그들을 따라잡는 일에 몽땅 걸고 나선 길이니, 우리 것이라든가 우리 전통의 지혜라든가, 하는 것은 안중에도 없다. 혹시 이 다음에 그들이 동양의 지혜를 잘 섭수하고 나서, 이를 다시 잘 정립해놓은 후가 되어서야 ,우리가 정신을 차릴지도 모르겠다. 그때 다시 하버드에 유학가서 동양학을 배워와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때 가서 한의학을 역수입해 와야 될지도 모르겠다.

 

지혜라고는 하지만 정작 중요한 지혜는 자신을 아는 지혜다. 나를 알지 못하고서 무엇을 알 수 있을까? 그런 뜻에서 노자가 자기를 알면서도 스스로 본다고 여기지 않는다.”라고 했다(自知不自見). 자기를 보지만 보는 자기도 아는 자기도 없다. 도의 거울에 자신의 본바탕이 밝게 비춰 환히 드러날 뿐이다.

자기를 아는 사람은 우주를 아는 사람이다. 자기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갈 것인지를 안다면 온우주 안의 만 가지 것들의 소식을 알 수 있다. 가장 작은 것에서 가장 큰 소식을 들을 수 있다. 노자는 도는 크다.”고 했고 또 한편으로 도는 미하고 세하다.”고 했다. 그러므로 절대의 세계에서는 지극히 작은 것이 지극히 큰 것을 포괄한다. 겨자씨 한 알에 우주가 담겨있는 뜻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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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아끼면서도 스스로 높이지 않는다.(自愛不自貴)”고 한 뜻은 무엇인가? 보통사람들도 스스로를 아끼고 사랑한다. 아끼고 사랑하는 방식과 내용이 다를 뿐이다. 우리는 자기를 아끼고 사랑함의 표현을 스스로를 드높이는데서 찾는다. 자기를 빛나게 하는 것이 자기 사랑의 방법이라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성인은 스스로를 아끼나 스스로를 드높이지는 않는다. 그래서 장자는 성인은 이름이 없다.(聖人無名)”라고 했다. 아끼기 때문에 이름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 이름을 높이려 하고 귀하게 여기는 순간, 그 이름에 집착하고, 그 집착으로 인해 고통이 비롯된다.

 

오늘날은 이름()에 죽고 이름에 사는 시대이기도 하다. 노자나 장자가 자주 이를 언급하는 것을 보면 옛적에도 그랬던 모양이다. 그런데 문명이 발달한 오늘, 우리에게도 이름이란 참 귀한 것 같다. 이름이란 남이 나를 인정해주는 표식이 된다. 누군가로부터 인정을 받고 사랑을 받고있다는 사실은 적이 안도하게 해주는 일이 된다. 이와 반대의 경우를 말해 고독하다고 하고 소외된다고 말한다. 현대인은 고독이나 소외를 지독히도 싫어하는 것 같다. 홀로 있는 것은 누군가로부터 사랑과 지지를 받지 못한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홀로 있음에 온전할 수 있다면 사정은 전혀 달라진다. 진실로 나 자신의 내면의 신성에 접속하여 충만하게 현존할 수 있다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홀로 영의 깊이에 들어가서 온 존재와 내밀한 대화를 주고받는 기쁨은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런 기쁨과 내적 충만을 표현한 일갈이 싯달타 붓다의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에 잘 나타나있다. ‘지극한 홀로됨속에 온우주가 충만하게 존재하므로, 온우주적 존재로서의 충만감을 그렇게 표현한 것일 테다. 그런 뜻에서 붓다의 깨달음 후의 일갈이 결코 오만과 독선 따위의 그런 것들과는 거리가 먼 것일 수밖에 없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은 진정한 의미에서 온우주와 하나됨의 기쁨을 노래하는 게송이 된다.

 

일각장천의 수행자는 스스로를 참으로 아낌으로써 천하를 위해 그 쓰임을 넓게 하는 덕성을 갖춘 사람이다. 자기를 사랑하고 아끼기 때문에 그 아낌의 덕이 널리 베풀어진다. 그것이 스스로를 다스리고 세상을 떠받드는 길이 된다(治人事天莫若嗇). 다 쓰지 않고 아끼는 미덕은 노자의 삼보三寶 중 하나이다. 아끼게 되니 일찍 도를 회복하게 되고, 일찍 도를 회복함이 덕을 두텁게 쌓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早服謂之重積德. 59).

 

또한 일각장천의 수행자는 방정함을 모범으로 한다. 그러나 자신의 방정함을 잣대로 세상을 함부로 나누어 재단하지 않는다. 바로 성인이 그러한 것처럼 한다.

성인은

모나면서도 가르지 아니하고,

날카로우면서도 자르지 아니하며,

곧으면서도 뻗대지 아니하며,

빛나면서도 튀어나지 아니한다.

 

是以聖人方而不割, 시이성인방이불할

廉而不劌, 염이불귀

直而不肆, 직이불사

光而不燿 광이불요 (58)

 

성인은 반듯하다. 스스로의 반듯함은 대개는 남을 가르는 예리한 무기가 되나, 성인은 그것으로 남을 가르지 않는다(方而不割). 선과 악, 옳고 그름, 이쪽과 저쪽, 나와 타인 등의 편가르기를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성인은 스스로 청렴하다. 청렴하나 그 청렴함의 무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들이대어 자르지 않는다.(廉而不劌) 스스로 곧으나 함부로 뻗대지 않고,(直而不肆) 스스로 빛나지만 그 빛이 다른 사람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빛을 감추어 튀어나지 않게 한다.

 

가을 하늘이 파랗다. 무등산에 들어와 터를 잡고 땅을 고르던 중 하늘을 올려다본 적이 있다. 어떤 표현으로도 그 높고 푸르름을 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청명한 하늘 속에 내 마음을 비추어 보면 마음이 보일 듯도 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하늘색을 잃어버린 것 같다. 늘 우중충한 회색빛깔로 뒤덮인 시내의 하늘은 에 물든 우리 마음을 들킨 것 같다. 오존층이 엷어지고 뚫어진 하늘은 거르지 못한 살인적인 자외선이 막 쏟아져 나오는 출구가 되어 버렸으니, 예전의 그 낭만적인 싯구들에서 찬미되는 가을 하늘도 이제는 공포의 대상으로 변했는가 싶다.

 

오랜만의 하늘빛이 그리도 맑고 깨끗한 것이 청량한 한 모금의 생수를 먹은 듯 했다. 아직은 덜 익은 나락이며, 수수며, 조와 같은 곡식들이 풍성한 가을 들판을 수놓고 있다. 잠자리떼들이 무리지어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풍경도 일색이다. 다람쥐들이 바지런을 떨면서 참나무들을 오르내리며 다가올 수확철을 탐색한다. 솔개는 내내 하늘을 나는데 아직 그 행적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려지지 않았다. 흰두루미들이 오래된 노송 위를 날아오르며 무논에서 건져올린 것들은 무엇일까. 우렁이 농법을 위해 투입된 우렁이들이 그들의 한 끼 식량이 되는가.

 

어렸을 적, 재 너머 논에 낫 들고 지게지고 여럿이 어울려서 가을철 수확을 위해 출정했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땐 신작로 길도 나지 않았던 시절이라서 가을 출정은 참으로 고되고 힘들었다. 낫으로 나락을 일일이 베어서 말리고 뒤집어서 며칠 후에 묶고 그리고 나서 지게로 등짐을 져나른다. 집에 나르고 나서 볏단을 쌓아올리면 마당 한가운데 노적봉이 생기는데, 날씨 좋은 날을 받아 타작을 하면 온 마당에 멍석이 깔리고, 그 위에서 홀태로 나락을 일일이 한줌씩 홅은다. 그렇게 소중하게 알알이 수확해서 한 해의 살림이 되었다.

 

나락이 베어진 들판에서 이삭을 줍는 아낙과 아이들이 한가롭게 잡담을 나누며 일하는 풍경이 정겹다. 메뚜기를 잡느라 속없는 아이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뛴다. 뀀지에다가 잡은 메뚜기들을 일일이 꿰어서 집으로 가져오면 짚에 불을 지펴서 구워먹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재밋거리였다. 가을 아이들은 하릴없이 분주했다. 빈 논의 물꼬 수렁을 뒤져 미꾸라지를 잡아오면 추어탕이 별미였다. 물 빠진 논에서는 우렁이 잡는 일도 즐거운 일이다. 한 소쿠리에 가득 주워온 우렁이를 된장을 풀어넣고 삶아서, 온 식구들과 이웃들이 함께 모여 탱자나무 가시로 빼먹는 것도 이제 아스라이 사라진 추억의 한 장면이 되었다.

 

가을은 결실을 맺는다. 성숙한 과실의 과육이 크고 빛깔 곱게 여물어오듯, 가을은 성숙함으로 결실을 맺는다. 그렇게 성숙하면 다시 되돌아갈 것이다. 좋은 씨앗을 품어 다음 생을 기약해야 하므로…….

    

글 사진/민웅기(<태극권과 노자>저자, 송계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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