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를 해체시켜 새 씨앗을 심어 무위태극선 교실

민웅기의 무위태극선교실/미묘현통微妙玄通한 도인/주저간추 肘底看捶   

 

주저간추肘底看捶는 단편에서 이어져 나오는 식이다. 허리가 왼쪽으로 감아돌면서 오른손이 권으로 변화되어 오른 가슴 앞쪽으로 나오고, 이어서 다시 허리가 반대편으로 역회전하듯 돌아나와, 오른손의 권이 왼손의 팔꿈치 아래에 받치듯 단정하게 정면을 향해 있다. 왼손은 수도날의 자세로 가슴 앞 정면으로 들려 세워져 있는데 무게중심은 오른 발에 다 있다.

주저간추肘底看捶는 팔꿈치 아래에 권이 들어간 모양을 본떠 붙여진 이름이다. 왼 팔꿈치와 오른손의 권이 어울려 만든 둥그런 원의 형상 위에 치켜든 왼손의 손날이 흡사 또아리를 틀고 서있는 코브라를 연상시킨다.

 

전열을 재정비한 모양이다. 위압적이지는 않으나 한치의 빈틈도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 나아갈 듯하나 중심은 뒤에 있고, 왼손이 실한 자리에서 허하나 오른손의 권이 허의 위치에서 실한 기세다. 고요함으로 안정되어 있으나, 뜻을 동에 두고 있어 그 변화를 예측할 수 없는 형세다.

 

음 중에 양이 있고,

양 중에 음이 있네.”

 

陰中有陽 음중유양

陽中有陰 양중유음

음 중에 음이 있고,

양 중에 양이 있네.”

 

陰中有陰 음중유음

陽中有陽 양중유양

 

실로 말미암아 허로 변하며,

허로 말미암아 실로 변하네.”

由實變虛 유실변허

由虛變實 유허변실

 

허와 실이 서로 상대편으로 삼투해 들어가니,

홀연히 숨고 홀연히 나타나네.”

 

虛實滲透 허실삼투

忽隱忽現 홀은홀현 (태극구결)

 

태극선의 식과 세는 끊임없이 움직여 변화함을 특징으로 한다. 한번 동하면 시종이 여일하게 동함이 그치지 않는 것, 그것이 움직이는 선법(動禪)’인 태극선의 특징이다. 그 동 속에서 정을 추구하니 동중구정動中求靜이라 한다. 음양이론으로 보면 동은 양이고 정은 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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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중유음陽中有陰이란 움직임 안에 감추어진 고요함이다. 수법手法으로 보면 지금 위주로 활동하는 손은 양이 되고 그렇지 않은 손은 음이 된다. 양인 손, 즉 활동하는 손은 반드시 그 안에 음을 내재하고 있어서 양이 극양이 되면 음으로 전화한다. 양 안에 이미 음의 씨앗이 자라고 있다는 말과 같다.

음중유양陰中有陽도 마찬가지의 원리로 음속에 이미 양을 배태하고 있어서, 그 음이 극음이 되면 반대편인 양으로 전화하고, 이미 대세는 양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태극은 무수히 많은 음양의 기운과 세력으로 이합집산한다. 한번 양하고 한번 음하며, 한번 동하고 한번 정한다. 그렇게 일음일양이 변화하여 상대편으로 해체해 들어가고, 다시 그 속에서 새로운 씨앗을 잉태하여 생멸을 반복하는 것, 그것이 태극권의 기운과 형세, 그리고 형상을 나타낸다.

음중유음陰中有陰과 양중유양陽中有陽도 같은 원리이다. 은 동이고 개이며 실로 나타나는 바, 그 동작이 크고 강건하며 빠르다. 음은 정이고 합이며 허로 나타나는 바, 그 동작이 작고 부드러우며 느리다. 식과 세의 안과 밖에서도 음양의 이법이 똑같이 나타나므로, 음속의 음과 양속의 양이 있게 된다. 다시 말해 작고 긴주된 동작과 자세 안에서도 음이 있고, 크고 개전된 동작과 자세 안에서도 양이 작용하고 있음을 설명하는 말이다.

 

따라서 태극선의 식과 세가 펼쳐지고 사라지는 일련의 연속된 과정 속에서, 음과 양, 정과 동, 합과 개, 허와 실은 끊임없이 자기를 상대편으로 넘겨주고 상대편으로 전화하며, 그 안에서 자기를 실현해간다. 그리하여 음과 양은 자기 스스로의 안에 더 많은 음과 양을 혹은 반대편의 양과 음을 내포하고, 생성하며, 전화해감으로써, 태극의 큰 기운을 형성하고 전개하게 된다.

는 뜻과 기운과 형태(, , )가 비어있어 아직 드러나지 않음이요, 은 그것들이 드러나서 기와 세와 형을 이미 펼치고 있음이다. 허가 허로써 존재하지 못하고, 실이 실로써 존재하지 못하며, 반드시 상대방을 매개로 하여 숨고 나타남을 말한 것이 유실변허由實變虛, 유허변실由虛變實의 요결이다.

 

이렇게 허실 상호간에 상대방을 매개로 하여 변화함으로써, 서로에게 삼투되어 나타나는 원리를 들어 허실삼투虛實滲透라 한다. 이토록 허실의 변화가 홀연하니 그 무쌍한 것을 말해 홀은홀현忽隱忽現이라 한다. 다시 말해 허가 없으면 실도 없고 실이 없으면 허도 없다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한번 양 하고 한번 음 하는 것이 도(一陰一陽之謂道)”라고 설한 주역의 명제는 수련을 하거나 삶을 살거나, 한번 나고 한번 죽는 우리에게 깊이 음미해 보아야 할 필생의 화두가 될 것이다. 우리가 사는 현상세계는 이 음양의 이법理法을 피할 길이 없다. 왜냐하면 이 음양의 이법을 통해서 도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주저간추肘底看捶는 뜻으로 보면, 공부하는 선비가 삶의 중대한 기로에 서서 기회를 엿보는 것이 된다. 상대를 아는 지혜가 있어 경거망동하지 않고, 나를 돌아보는 밝음이 있어 백을 알면서도 흑을 지킨다. 나아갈 때를 엿보나 물러설 곳을 먼저 찾는다. 중심을 지킴이 확고부동하고 사지四肢가 강건하며 오궁五宮이 합일하니, 주변을 경계함에 조금도 소홀하지 않다. 하늘의 강건한 기운을 훔치고 땅의 안정됨에 기대니, 건곤乾坤(건은 순양純陽, 즉 하늘을 말하고 곤은 순음純陰, 즉 땅을 상징한다.)이 여일하다.

 

무성한 여름기운이 온 대지에 가득 차있다. 산은 짙은 녹음으로 하늘의 푸르름과 겨루는 듯하고, 개울은 대지의 아들딸들에게 청량한 생수를 나르느라 우당탕퉁탕 분주하다. 언덕 너머로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태양이 손짓하고 있어 젊은 피를 뛰게한다. 농부들이 쟁기를 손질하여 들로 쟁기질 나가는 것 같다. 녹슨 보습을 갈아끼우고 소를 몰아 땅을 갈아엎고 앞으로 나아가니, 잠자리들만 속절없이 까분다. 한낮의 매미소리 여치소리 풀벌레 울음소리들이 늘어진 개똥이의 단잠을 깨우니, 부시시 눈 비비고 일어나서 꼴망태 하나 달랑 걸머지고 낫과 새끼줄 주섬주섬 챙겨 채등너머로 일 나가는 뒷모습이 한가롭다. 재너머 산골 도랑에 가재 잡으러 나간 아이들은 해 기울자 빠알간 노을을 둘러쓰고 집으로 돌아온다.

 

주저간추肘底看捶 초식은 미묘한 가운데 현통한 변화를 갖춘 초식이다. 이를 운용하는 선비의 마음 깊은 것이 속 깊은 연못을 닮았다. 옛날의 도를 잘 닦은 선비의 얘기를 들려주는 노자의 담담한 표정이 주저간추를 닮았다.

 

예부터 도를 잘 실천하는 자는

미하고 묘하며 현하고 통한다.

너무 깊어 헤아릴 길이 없다.

무릇 오로지

헤아릴 길이 없기에

억지로 다음과 같이 형용한다.

머뭇거리네

겨울에 살얼음 내를 건너는 것 같고

신중하구나

사방의 주위를 두려워하며 살피는 것 같다.

근엄하도다

그것이 손님의 모습과 같고

풀어지도다

녹아가는 얼음과 같다.

도탑도다

그것이 질박한 통나무 같고

텅 비었도다

그것이 빈 계곡과 같네.

혼돈하구나

그것이 흐린 물과도 같도다!

누가 능히 흐린 가운데서 고요함으로써

서서히 맑아지게 할 수 있겠는가?

누가 능히 안정된 가운데서 움직임을 일으킴으로써

서서히 생동하게 할 수 있겠는가?

이 도를 보존하는 자는

드러냄을 좋아하지 않는다.

무릇 오로지

드러냄을 좋아하지 않기에

그러므로 능히 안의 것을 감싸고 있을 뿐

새롭게 이루려 하지 않는다.

 

古之善爲士者, 고지선위사자

微妙玄通, 深不可識. 미묘현통 심불가식

夫唯不可識, 故强爲之容 부유불가식 고강위지용

豫兮, 若冬涉川 예혜 약동섭천

猶兮, 若畏四鄰 유혜 약외사린

儼兮, 其若客; 엄혜 기약곡

渙兮, 若冰之將釋. 환혜 약빙지장석

敦兮, 其若樸, 돈혜 기약박

曠兮, 其若谷. 광혜 기약곡

混兮, 其若濁, 혼혜 기약탁

孰能濁以靜之徐淸? 숙능탁이정지서청

孰能安以動之徐生? 숙능안이동지서생

保此道者, 不欲尙呈. 보차도자 불욕상정

夫唯不呈, 故能蔽不新成. 부유부정 고능폐불신성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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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는 노자 할아버지가 살았던 그 시기조차 헤아릴 길 없이 예스러운데, 여기 노자가 술회하는 옛날 옛적의 선비 이야기는 그야말로 예스럽기 그지없다. 그렇게 예스러운 말이 지금, 여기에더 그리운 이유가 뭘까? 옛날에 도를 잘 닦아 실천하는 선비는 미하고 묘하고 현하고 통했다고 한다.

 

는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고(視之不見, 名曰夷), 들으려 해도 들을 수 없고(聽之不聞, 名曰希), 붙잡으려 해도 붙잡을 수 없는(搏之不得, 名曰微, 14) 바로 그 이, , 의 미로 이해된다. 그리고 아직 드러나지 않음 가운데서 기미를 보는 밝음’(微明, 36)의 미와도 같다. 그러므로 미는 은미함, 희미함, 극미함, 세미함의 의미로 쓰여 인간의 오관으로 인식할 수 없는 그런 초미의 미시세계의 경계를 일컫는 것으로, 또 그러한 초미의 경계를 넘나드는 선비의 도술의 경지를 일컫는 것으로 이해된다.

 

는 항상 무욕함으로써 그 ’(常無欲以觀其妙. 1)함을 본다. 뭇 묘함이 출입하는 문(衆妙之門. 1), 우리들 안에 깊숙이 간직한 미묘함(要妙. 27) 등에서 술회한 그 이다. 이 묘역시 미와 함께 무계열의 도의 오묘함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된다.

 

한데 어울려 있음을 말해 현하다고 한다.”(同謂之玄, 1) “현덕은 심원함이다.”(玄德深矣遠矣, 65) ‘현동玄同’(56), “골의 신은 죽지 않는다. 이것을 일러 현빈이라 한다.”(谷神不死, 是謂玄牝. 6) 의 현이다. 현은 도의 작용이 가물가물함을 묘사하는 말인데, 그 작용은 본디 도의 본체인 무에서 나왔다. 무에서 나왔으나 그 쓰임이 있으므로 유라 하고, 그 유를 도가 낳고, 덕이 자라게 한다.”(道生之, 德畜之, 51)는 뜻에서 풀면 덕의 현묘함을 묘사하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현은 유무有無가 상생相生하는 도의 작용()을 나타내는 말이 된다.

 

은 막힘없이 통한다는 말이다. 도의 체인 허무虛無를 체달한 도인은 그 허무를 매개로 사통팔달하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으니, 이 통 역시 도의 용적인 차원을 말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미묘微妙함은 무계열의 도를 형용함이요, 현통玄通함은 유계열의 도를 지시함이다. 미묘현통微妙玄通은 따라서 도인의 도가 온전하고 지극함을 아울러 표현한 수사가 된다. 그러한 도인의 도의 깊은 정도가 헤아릴 수가 없다(深不可識)고 했다. 그래서 억지로 형용해서 들려준 도인의 행색이 재미있고 낯설기까지 하다.

 

먼저 머무거리네! 겨울에 살얼음 내를 건너는 것 같고(豫兮, 若冬涉川), 신중하구나! 사방의 주위를 두려워하며 살피는 것 같다(猶兮, 若畏四鄰).”고 했다. 는 코끼리를, 는 원숭이(혹은 개)를 묘사하는데, 둘 다 의심이 많고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동물들이다. ‘유예猶豫라는 말로 할까 말까 망설이는 모습을 그리고 있음이다.

 

도인은 어떤 확증이 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강력히 밀어 붙이거나, 하나의 신념체계나 이데올로기를 전면에 내세워 일사불란하게 결정하고 추진하는 그런 유형의 사람이 아니다. 보다 근원적이고 전체적이며 그리고 현실의 역동적인 변화에 이르기까지 한눈에 읽고 한 마음으로 보기 때문에, 오히려 늘 머뭇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근엄하도다! 그것이 손님의 모습과 같고(儼兮, 其若客), 풀어지도다! 녹아가는 얼음과 같다(渙兮, 若冰之將釋).” 고 한 것은 스스로 매우 엄격하고 겸허함으로 주인의 처분을 기다리는 손님의 모습을 들어 도인의 겸허하고 엄중한 태도를 형용하고 있음이다. 우리는 낯선 이 세상의 손님처럼 늘 우리를 존재하게 해준 유무형의 모든 것들과 인연들에 대하여 자기를 엄격히 단속하고 낮춤으로써, 상대를 인정하고 더불어 조화롭게 살도록 노력해야함을 역설하고 있는 것과 같다.

 

그리고 녹아가는 얼음과 같은 도인의 모습은 바로 자신의 경계선을 녹이고 해체시킴으로써, 전체의 관계망 속으로 갈마들어가는 뜻을 담고 있는 것으로 읽는다. 다시 말하면 얼음이 녹듯 얼음을 녹이듯, 도인은 이웃과 중생들과 하늘 아래 모든 만유만생들과 함께 스스로를 녹여 하나 됨으로써 현묘한 하나 됨’(玄同, 56)을 이룰 뿐만 아니라, 꽁꽁 얼어붙어 있는 상대방들로 하여금 경계를 해체하고, 갈등의 상황, 경쟁의 상황, 전쟁의 상황을 해체하고, 녹아들어오도록 손짓하는, 따뜻하고 비밀스런 사랑(혹은 자애)’의 속삭임과 같은 그런 모습으로 읽는다.

 

도인은 그렇게 ()’()’이니 하는 것들을 다 초월하고, 녹여서, 분간할 수가 없는 무르녹은 세계에 산다. 봄에는 꽃이 피고, 여름에는 폭우가 쏟아지고, 가을에는 청천하늘에 별빛이 투명하고, 겨울에는 백설이 하얗게 온 세상을 덮은 세계다. 사람도 무르녹아 아무 걸림이 없으면,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서 자유자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평상심平常心이다. 도인의 마음 없는 마음이다.

 

도탑도다! 그것이 질박한 통나무 같고(敦兮, 其若樸), 텅 비었도다! 그것이 빈 계곡과 같네(曠兮, 其若谷).”에서 도인의 모습은 아직 손질이 가해지기 이전의 통나무의 질박하고 도타운 이미지를 연상하게 한다. 그릇으로 나누어지기 이전의 원형의 통나무는 이름이 없고, 하나이고, 전체이므로, 도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역시 텅 비어있는 계곡도 도체道體를 은유하고 있다. 비어있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비어있어 신령함이 가득하고, 비어있어 모든 것이 그로부터 들고 난다. 비어있는 계곡은 그러므로 낮은 곳에서 자기를 비움으로써 모든 것을 아우르고 포용하는 큰 가슴의 도인의 모습을 갖고 있게 된다.

 

혼돈하구나! 그것이 흐린 물과도 같도다.(混兮, 其若濁)”은 미묘현통微妙玄通한 도인의 분별심 없는 무지無知의 경계, 혹은 연못 속의 흙탕물에 발을 딛고 그 흙탕물과 현묘한 동거(혹은 합일)를 이루고 있는 도인의 혼연한 모습을 형용하고 있다.

 

누가 능히 흐린 가운데서 고요함으로써, 서서히 맑아지게 할 수 있겠는가(孰能濁以靜之徐淸)? 누가 능히 안정된 가운데서 움직임을 일으킴으로써, 서서히 생동生動하게 할 수 있겠는가(孰能安以動之徐生)?”고 묻고 있다. 도인은 혼돈混沌한 가운데 처한다. 시비是非, 선악善惡, 호오好惡를 택일함이 없이 그 분별심의 근원에서 무심함으로 대하기 때문에, 탁함에 대하여 탁하다는 생각도 없이 흐린 가운데 동거하고 그 속에 하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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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혼탁함은 움직임과 함께 있다. 움직임이라는 것은 뭇 생명들의 자기보존과 유전을 위한 활동을 말하고 이러한 활동에너지의 근본 동기는 바로 모든 생명체의 사와 욕이다. 그리고 뭇 생명체들의 사와 욕을 추구하는 모든 움직임은 혼연渾然함으로 나타난다. 그 혼연함 속에서 맑음을 추구하는 것, 그것은 뿌리, 즉 고요함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니, 바꾸어 말해 움직임 속에서 고요함을 추구하는 동중정動中靜이라 할 수 있다. 움직임 가운데서 고요함을 추구하나 종국에는 움직임도 고요함도 둘이 아니다. 그 혼탁함 가운데서 고요함으로 들어가 그 탁함을 서서히 맑게 가라앉히는 능력을 가졌으니, 현통하도다!

 

불가의 색즉시공色卽是空의 공부가 이와 같다. 도가의 연신환허煉神還虛의 경지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히말라야 산꼭대기를 한번 올라가보아야 한다. 그렇게 올라가봐야 도를 알고 도를 통한다. 도의 체를 경험해 보는 것 그것을 도통道通한다고 한다. 도를 통해야 뭇 길이 다 한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차별이 동일해지는 존재의 세계를 맛보게 된다. 그것이 바로 무의 세계요 공의 세계다. 차별이 동일이 되는 존재의 세계이다. 지극히 높은 세계이다. 상대를 넘어선 절대의 세계인 것이다.

 

그런데 그것으로 그치면 반쯤밖에 못간 것이다. 이 세상의 작동원리는 고요함()을 뿌리로 하지만 움직임()이 없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그 안정된 속에서 움직임을 일으켜서 생동하게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절반의 도가 된다. 고요함 속에서 움직임을 일으켜서 생기生氣하게 하는 것이니 정중동靜中動이라 한다. 만물만생의 세계는 역동적인 세계이다. 낳고 자라고 창조하고 진화하는 무성한 생명력으로 가득 차있다. 이것이 도의 작용이다. 이러한 생동함을 낳게 하는 것, 즉 생기를 일으키는 것은 우리네 인생살이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하다.

에서는 깨달음 후에 일상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으로 말해진다. 힌두교 베단타 전통의 비이원론, 즉 불이不二(‘창조의 신브라흐만과 참나인 아트만의 합일)의 의미이다. 도가의 귀근복명歸根復命, 연허합도煉虛合道도 같은 맥락이다.

 

히말라야 산꼭대기를 올라갔으면 다시 산에서 내려와야 된다. 산을 내려오면 세계는 하나이면서도 또 제각각이다. 존재의 세계에서는 차별이 동일해지나, 인식의 세계에서는 동일이 차별이 된다. 그것이 산을 내려오는 길의 일이다. 그렇게 하나에서 둘이 나오고 둘에서 셋이 나와서 만물이 생동해 나오게 되는데,(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42) 지금 여기에 도인의 모습이 홀은홀연忽隱忽現하게 된다.

 

생기의 원천은 무엇이던가? 그것은 사랑이다. 만유에 대한 사랑, 그것은 에너지다. 이렇게 에너지의 흐름을 타고 생동하다가, 그 이름이 다하면 다시 본원으로 돌아가는데, 그것이 바로 고요함()인 것이니, 은 동의 체요 동은 정의 용이다. 그리하여 동중정動中靜과 정중동靜中動이 둘이 아니게 된다.

 

이렇게 미묘현통한 도를 지니고 있는 도인은 자기의 도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保此道者, 不欲尙呈) 그것을 안으로 감추고 있으면서 새로 이루려 하지 않는 것이다.(能蔽不新成) 내 안에 이미 다 갖추고 있으니 새로 이룰 것이 따로 없다는 뜻으로 읽는다.

 

[무문관]無門關을 쓴 무문혜개 선사(남송 효종 때 사람)는 소주 만수사에서 조주무자趙州無字의 숙제를 받고 자나 깨나 없다는 것이 무엇일까?”하고 생각하고 생각하기를 6, 어느 날 법당 근처에서 식사를 알리는 종소리에 활연대각豁然大覺했다. 그는 6년 동안 불철주야 화두話頭 삼았던 조주무자에 대하여 이렇게 썼다.

 

無無無無無 무무무무무 無無無無無 무무무무무

無無無無無 무무무무무 無無無無無 무무무무무

 

유명한 무의 오언시다. 어떻게 읽어야 할까? 다른 도리가 없다. 그냥 무무무하고 밀고 나가는 수밖에. 일체를 부정하고 또 부정하고, 마치 안개가 벗겨지듯 인간의 고정관념과 망상이 모두 벗겨져서 진리의 태양이 빛나는 생명의 실상을 보았을 때, 그리하여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함이 없이 자유롭게 되었을 때, 바로 그때 드러나는 것이 불성(혹은 본성)이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불성을 갖고 있다는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다.

 

어느 날 조주화상에게 어느 중이 찾아와서 물었다.

강아지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는

라고 대답했다.

 

불성이란 생사를 벗어나 진리를 깨닫게 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 부처가 될 수 있는 덕성을 말한다. 불성은 본래 무형無形이고, 무상無相이고 무성無聲이고 무색無色이다. 개유불성皆有佛性(누구나 다 불성이 갖추어져 있다)이라 했으니, 강아지에게도 불성이 있다는 것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도 조주는 라고 했다.

그래서 자 화두이다.

    

글 사진/민웅기(<태극권과 노자>저자.송계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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