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손은 회오리바람의 눈 무위태극선 교실

민웅기의 무위태극선 교실/면면히 이어지니 있는 듯도 하네/운수 雲手

 

운수雲手108식 태극선에서 네 번이나 나온다. 단편으로부터 허리가 왼쪽으로 감아 돌고, 왼쪽의 극에서 다시 오른쪽으로 역회전하면서 오른손의 종 모양은 권으로 바뀌는데, 오른손의 권이 오른쪽 이마 전면에 오고, 왼손은 오른손과 대칭을 이루어 아래쪽 단전 앞에 장을 펼친다. 다리는 궁보의 보법을 취하며 오른 무릎이 굽혀져 오른 발이 실하고, 오른손의 권이 양중양陽中陽의 위치에 서고, 왼손의 장은 음중양陰中陽을 펼친다.

계속해서 다시 오른손의 권이 장으로 변화하여 허리와 함께 왼 방향으로 돌아내려오는데, 왼손의 장과 오른손의 장이 대칭을 이루면서, 허리의 좌우 선전운동과 함께 전사轉射하여 위아래를 번갈아 도는 것이, 마치 물레방아가 돌고 돌아 왼쪽으로 이동하듯 한다. 두 발은 십일 자의 형세를 취해 왼 방향으로 옮겨가는데, 그 기세가 가벼우나 진중하고, 영활하나 머뭇거리듯 하고, 끊길 듯하나 이어진 듯하다. 왼 방향으로 세 걸음을 옮겨 천녀산화의 자세에서 단편으로 바뀐다.

 

운수雲手구름의 손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구름이란 기의 구름이다. 기의 구름을 만들어 두 손으로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듯 돌리는 기세다. 안의 내기內氣를 돌림으로써, 밖의 외기外氣에 화답한다. 안과 밖이 한데 어울려 돌아가니, 기의 바람이 회오리바람처럼 휘몰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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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이 단전을 지키나, 손끝에 닿는 실바람에도 깨어 있다. 온몸의 피부를 통해 내기와 외기가 환히 통하는 데에 뜻을 둔다. 안의 기운이 고탕鼓湯되어, 발끝에서부터 척추를 통과해서 머리끝까지, 그리고 어깨를 통과해서 손끝까지 도달한다. 밖의 기운이 한편으로는 손끝에서 손목, 팔꿈치, 어깨, 대추혈을 타고 내려와 단전으로 모이고, 또 한편으로는 전신의 피부를 통해 안으로 흡입되어 중의 자리인 단전에 모인다.

 

의 오관이 다 열리고, 임독맥 양맥과 중맥이 함께 열림으로 전신의 경혈락맥經穴絡脈이 타통되는 데 뜻을 두고 기를 운행한다. 기를 운행하는데 결코 억지를 부려서는 안 되니, 호흡이나 자세 등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오직 무심無心으로 이를 행해야 한다. 관상명상을 하듯 해야 하는 것이니, 서두르지 말고, 욕심내지 말고, 무심으로 숙달시켜 나가야 한다. 몸이 바람결에 나는 나뭇잎처럼 느껴질 때까지 그렇게 오랫동안 순숙純熟시켜 나가야 한다.

 

운수는 초식을 행하는 자세가 지극히 단정하고 진중하다. 변화무쌍한 초식을 전개하면서도 일말의 빈틈도 보이지 않는 듯 차분하다. 하면서도 실하고 실하면서도 허하다. 그 유연함은 나긋나긋 돌아가는 봄처녀의 유연한 자태를 빼닮았고, 그 강인함은 휘몰아치는 돌풍과 파도의 기세를 닮았다. 느린 듯 빠른 듯 왼쪽으로 옮겨가는 품새가 바닷가의 게걸음 같다. 다람쥐 쳇바퀴 돌아가는 것 같다.

 

누군가에게 자리를 양보하고서 옆자리로 슬그머니 피해 일어서는 수줍은 소녀의 모습 같고, 바람결에 떠도는 나그네 같기도 하다. 이런 일 저런 일, 날일들을 찾아서 공사판을 옮겨 떠도는 일꾼들 같고, 놀이판에 떨떠름하게 앉아 있는 관객들을 박장대소하게 하여, 걸판진 마당 이끌어내는 입담 좋은 놀이꾼 같다. 로우터리 치며 돌아가는 경운기 같고, 바닷가의 철새떼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오는 것 같다.

 

두 손은 회오리바람의 눈이다. 안의 바람과 밖의 바람이 한 타래의 물레 돌 듯 돌아가는데, 처음엔 안 바람이 바깥 바람을 껴입고 돌아가는 것처럼 운행하나, 나중엔 바깥바람과 안 바람이 켜켜이 새끼 꼬듯 말아가고, 그리고 종국에는 안도 밖도 없고, 바람을 일으키는 이도 바람도 없이, 하나의 떨림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만다.

안의 소리가 밖의 소리를 업고 돌아가다가, 나중엔 소리들의 이중주만 울리는 듯하고, 종국엔 그 소리조차 사라진 채, 마알간 하늘에 구름 한 점만 나부낀다.

 

몸도 마음도 우주적 파동 속으로 빨려 들어간 듯 사라지고 없다.

 

유사한 송은 송이 아니네

유사한 유는 유가 아니네

 

似松非松 사송비송

似柔非柔 사유비유 (태극구결)

 

운수를 행공함에 있어 관건은 송이고, 송의 성패는 뜻에 있는데, 그 뜻이 무심함이 요체다. 뭘 의도해서 욕심을 부리는 순간, 마음에 의지가 들어가게 된다. 노자의 말로 하면 마음이 기를 부린다고 한다. 마음이 기를 부리려고 의도하는 순간, 몸과 기가 강장强壯하게 되니(心使氣曰强. 55) 참된 송에서 벗어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유사한 송으로는 참된 부드러움(眞柔)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 또한 참된 유라고 할 수 없다.

 

그 마음을 비우고, 그 배를 실하게 하라.

그 뜻을 부드럽게 하고, 그 뼈를 강하게 하라.

항상 백성들로 하여금 무지무욕하게 하라.

무위를 실천하라.

다스리지 못함이 없을지니!

 

虛其心, 實其腹; 허기심 실기복

弱其志, 强其骨. 약기지 강기골

常使民無知無欲, 상사민무지무욕

爲無爲, 위무위

則無不治. 즉무불치 (3)

 

참된 송은 마음을 텅 비워서 무지무욕無知無欲한 상태로 만들어야 나온다. 마음이 무지무욕하지 않으면, 마음 안에 망상, 망념이 가득 차게 되고, 이렇게 마음이 망동妄動된 상태에서는 결코 참된 송에 이르지 못하니, 참된 유도 있을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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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마음 안에 욕심이 생겨서 이를 성취하려는 의지와 목표가 강하게 되면, 오히려 뼈와 골수가 약하게 된다. 왜냐하면 원래 의지는 신장이 주관하고, 신장은 뼈와 골수를 담당하는 장기이므로, 결국 강한 의지가 뼈를 약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마음을 비우고(虛其心), 배를 실하게 하며(實其腹), 뜻을 약하게 하고(弱其志), 뼈를 강하게(强其骨) 하라고 수련하는 이들에게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알음알이에 집착해서 망동妄動하지도 않고(無知), 과도한 욕망을 비워서 무욕(無欲)하게 되면, 무위의 자리에서 행공함으로써(爲無爲), 다스리지 못함이 없게 된다는(則無不治) 수련의 대명제를 얻게 된다.

마음이 기를 부리는 것을 강장하다고 한다.

만물이 강장해지면 바로 노쇠하게 되는 바,

이를 도에서 벗어남이라 한다.

도에서 벗어나면 일찍 끝나버리게 될지니!

 

心使氣曰强, 심사기왈강

物壯則老, 물장즉로

謂之不道, 위지부도

不道早已 부도조이(55)

 

만약에 마음속에서 강함을 추구하는 욕심을 내게 되면, 그로 말미암아 몸의 기는 강장强壯해지고, 몸의 근육과 뼈에 힘이 들어가게 된다(心使氣曰强). 이렇게 순리와 자연을 버리고, 인위적이고 억지스러운 마음을 써서 기를 부리면, 기가 강장强壯해지고 노쇠하게 되는 것이니(物壯則老), 노자가 말하기를 도에서 벗어남(不道)’이라 한 뜻이다. 도에서 벗어나면 일찍 끝나버리게 된다(不道早已).

 

그래서 태극수련인은 늘 나와 자연, 수련자와 외부의 기운이 항상 조화롭게 되도록 유의해야 한다. 그렇게 조화로운 기운을 충기沖氣(텅 비운 기운, 의 기운)’라 했거니와(沖氣以爲和, 42), 조화로움만이 자연성에 부합하며, 충돌하지 않고(不爭), 상생하게 된다. 조화를 이룸으로써 부드럽게 되고, 부드러움을 지키면, 우리 자신에게 재앙이 없게 된다.

 

작은 것을 볼 줄 아는 것을 밝음이라 하고,

연약함을 지킬 줄 아는 것을 강함이라 한다.

그 빛을 사용하여

다시 그 밝음으로 되돌려라!

네 몸에 재앙을 남기지 아니할 것이다.

이것이 곧 항상됨을 익히는 것이라 하는 것이다.

見小曰明, 견소왈명

守柔曰强. 수유왈강

用其光, 용기광

復歸其明, 복귀기명

無遺身殃, 무유신앙

是爲習常. 시위습상 (52)

 

대개 사람들은 큰 것은 중시하나, 작은 것은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양적 지표를 중시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노자는 작은 것을 보라(見小)”고 권유한다. 작은 것을 보라는 뜻은, 우리가 세상을 보고 재는 잣대, 즉 양적 크기를 중심으로 가치를 매기는 그런 물량적 세계관, 물신주의적 패러다임을 놓으라는 말로 이해된다. 나아가서 그러한 물량적 지표가 빠뜨리기 쉬운 삶의 질적 기준이나 행복등을 바로 보라고 권하는 것과 같다.

 

감각의 대상으로서 실험되어지고 관찰되어지는 세계가 전부는 아니라는 말과도 같다. 감각적 인식으로서 도달되어지는 세계와 그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는 족히, 참된 지혜와 행복한 삶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작은 것을 보는 것(見小)은 진실의 세계, 혹은 구경의 세계를 보는 것과 같고, 이러한 구경의 세계는 크고 작음으로 나눌 수 없는 세계, 상대적 세계를 안고 넘어서는 그런 초월적 세계를 말하는 뜻으로 읽는다.

 

화엄경에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라는 말이 있다. 한 개의 작은 먼지 속에 시방세계가 들어있다는 말이다. 겨자씨 한 알에 온우주가 들어있다는 말이다.

 

작은 것을 보는 지혜를 기르기 위해서는, 상대적 세계, 물질적 세계, 현상적 세계를 보는 데 초점이 맞춰져있는 그 감각의 구멍들과 욕망의 문을 닫아야 한다(塞其兌, 閉其門). 외부세계와 접촉하고 감각하고 이를 통해 그 세계를 인식하고 분별하고 욕망하는 구멍들과 문을 닫고 자기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와야 한다.

그 안에서 진정한 밝음이 열리고 진정한 에너지가 생기生氣하게 되는 것이니, 죽을 때까지 위태롭지 않게 된다.(終身不殆. 52) 그리하여 진실하고 밝은 지혜는 작은 것을 보는 것이 되고, 우리의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 되고, 그 작은 것에 담겨있는 우주적 사건을 바로 보는 것이 된다.(見小曰明)

 

그리고 그 작은 것을 보는 밝은 지혜는 우리의 마음이 어떤 사심이나 욕망으로 채워져 있지 않아서 허심하게 되어있을 때 생긴다. 그 허심한 상태로 몸과 마음을 지키면 바로 그것이 부드러움을 지키는 것이 되고(守柔), 그렇게 부드러움을 지키면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는 진정한 의미의 강함, 즉 조화로움()과 에너지()가 나오게 되는 것이니(曰强), 이를 두고 수유왈강守柔曰强이라 했다.

 

그 빛을 사용하여(用其光) 원래의 밝음으로 되돌아오면(復歸其明), 자기 자신에 재앙이 없다(無遺身殃)고 했다. 이 경문을 잘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 에 대해 잠깐 사유해보기로 하자.

 

이 외부의 세계를 비추는 것이라면, 은 내면의 세계를 비추는 것이고, 이 너무 밝아 눈부시므로 우러러 볼 수는 있으나 간직할 수는 없는 것이라면, 은 허공처럼 맑아 모든 티끌들을 스스로 드러나게 비추어주는 내면의 거울같은 것이다. 노자가 광을 어떤 뜻으로 썼는지 한번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빛나되 눈부시지 않는다.”(光而不燿. 58)

그 빛을 부드럽게 감춘다.”(和其光. 56)

그 빛을 사용하되 명으로 되돌아간다.”(用其光, 復歸其明. 52)

 

을 사용하여 명으로 되돌아가고(用其光, 復歸其明), 그 항상됨을 몸에 익혀 증험하게 되니 이것이 경문의 습상習常이다(是爲習常).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노자의 은 항상됨, 영원함 등을 지시하는 도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므로 습상習常의 도는 빛을 내면에 감추어서 잘 드러나지 않게 비추고, 그 빛을 이용해 항상됨을 익히게(習常) 됨으로써, 몸과 마음에 재앙이 없게 되는(無遺身殃) 그런 경지로 읽혀진다.

 

몸과 마음에 상의 도를 닦아 익히면() ‘건강지혜의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 항상된 도를 몸에서 익히니(習常), 건강하게 되고 장수한다. 항상된 도를 마음에서 익히니(習常), 밝은 지혜의 눈이 열려서 세상살이의 굴곡에 찌들리거나 고통스럽지 않고 행복하게 된다.

 

그러하니 운수의 초식이 면면히 이어지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그렇게 있는 듯 없고, 없는 듯 있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방식은 억지로 짜내서 힘을 쓰지 않고, 원래의 자연성에 맞게 순리대로 살아가기 때문에 지치거나 힘들지 않는다. 써도 써도 다함이 없다. 마치 골짜기가 자기를 텅 비우기 때문에 온갖 신령함으로 충만하고, 그 신령함으로 인해 뭇 생명들을 자기의 품안에 들고 나게 하는 창조력을 갖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다.

골의 신은 죽지 않는다.

이를 일컬어 가물한 암컷이라 한다.

가물한 암컷의 문은

바로 하늘과 땅의 뿌리라 한다.

이어지고 또 이어지어

있는 것 같다.

아무리 써도

마르지 않는다.

 

谷神不死, 是謂玄牝. 곡신불사 시위현빈

玄牝之門, 是謂天地根. 현빈지문 시위천지근

綿綿若存, 用之不勤. 면면약존 용지불근 (6)

 

운수의 초식은 하늘 아래 만물들의 생명력이 끊길 듯하면서 이어지고, 있는 듯하면서 없고, 없는 듯하면서 있는 모습을 닮았는데, 이것이 면면약존綿綿若存의 의미이다. 그리고 이렇게 면면히 이어져 나오는 생명력은 써도 써도 다함이 없다고 했다(用之不勤). 그러면 도대체 이러한 생명력은 어디서 나올까? 그냥 우연히 그러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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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아래 만물만생이 서로를 원인과 결과로 일점일획의 오차도 없이 조화롭게 존재할 수 있는 근원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에 대한 노자의 사유법이 바로 곡신불사谷神不死, 시위현빈是謂玄牝에 담겨있다.

 

노자는 골짜기(谷神)와 여성성(玄牝)을 들어서 도의 존재와 작용을 설명하고 있다. 골짜기()는 도의 텅 비어있음과 낮게 처해 모든 것을 포용함을 뜻하는 것으로 도의 체를 은유하고, 은 모든 것에 관통해 기능하는 도의 신령한 작용을 은유하는 것으로 읽는다. 그리고 또 하나의 노자 사유의 특징으로 나타나는 여성성은 현빈玄牝이라는 말에 담겨있다.

 

현빈玄牝은 노자가 도를 묘사하는 말로 자주 사용하는 암컷이 결합된 말로서 현묘한 암컷, 혹은 가물한 암컷의 뜻이다. 골짜기와 암컷은 그 형상과 기능에 있어서 닮아 있다. 이를테면 자신은 텅 비어 있으면서도 무궁무진한 작용을 하는 골짜기나, 갈라져 있으면서 지속적인 생명력과 창조력을 가진 여성의 생식기가 노자가 보기에는 도와 매우 닮아있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도덕경 안에서 곡은 각별한 의미가 주어져 있게 된다.

자연의 골짜기는 텅 비어 있어서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고, 뿐만 아니라 그 가물한 공간에서 뭇 생명들이 갖은 형상과 기운을 타서 낳고, 자라며, 무성하게 되는, 무한한 창조의 원동력을 간직한 곳으로 여겨지므로, 노자는 이것을 여성적인 생명력과 창조력의 공간의 의미를 담아 현빈玄牝이라 부르고 있다.

 

도체道體의 비어있음으로 인해 충만한 영성, 바로 그것이 곡신谷神이고, 이 곡신의 무궁무진한 창조력과 생명력이 불사不死한다고 말한 것이다. 그것이 우리 수련자의 몸과 마음에 체달되면 곡신불사의 생명력은 우리 자신의 생명체 안에 발현되어 나타날 것이며, 우리가 관계하고 있는 자연과 사회에서 발휘되면 생명과 평화, 행복의 공동체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불사의 문, 생명과 평화의 문, 행복으로 들어가는 문이 현빈의 문(玄牝之門)’이고, 바로 도의 문이다. 1장의 중묘지문衆妙之門과도 같은 말이다. 와 유, 암컷()과 수컷(), 와 요가 가물하게 동거하고 상생함으로써 창조적 영성을 발휘하는 그 곳을 일러, ‘현빈의 문이라 하는 것이다.

현빈의 문으로 출몰하는 온갖 생명력과 창조력은 꽉 차 있으면서도, 그 작용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으니, 이를 들어 천지의 뿌리(天地根)라 했다. 현빈의 문(玄牝之門)이 여성의 생식기를 상징하는 것으로 읽히는 것처럼, 천지의 뿌리(天地根)는 여성의 생식기를 드나드는 남근男根을 상징하는 것으로도 읽혀진다. 온 천지간에 가득 찬 생명력과 창조력을 빗대서 쓴 말이 된다.

 

곡신과 현빈의 영성은 끊김 없이 이어진다. 마치 우리 인생이 유전하듯이 말이다. 태극권의 식과 세도 끊길 듯 끊기지 않고 면면히 이어진다. 아침과 한낮, 저녁을 반복하며,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반복하며, 생로병사를 반복하며, 있는 듯 없는 듯하다.

 

누가 조주선사에게 물었다.

부처가 무엇입니까?”

조주선사가 말했다.

차나 한 잔 하고 가시게!”

 

살면서 기로에 설 때가 많다. 공부할 때도 그렇고, 사업을 할 때도 그렇다. 몸이 갑자기 아프게 되거나, 사고가 나서 가까운 사람을 잃게 될 때도 있다. 그럴 때 우리는 묻는다.

 

도대체 인생이란 무엇일까?”

나는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조주선사가 대답한다.

차나 한 잔 하고 가시게!”

글 사진/민웅기(<태극권과 노자>저자,송계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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