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을 떠난 생명들 들녘에서
2011.06.28 13:30 김성호 Edit
논이 벼를 키우는 공간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논에서 벼만 자랐던 것은 아닙니다. 다양한 생물들이 어우러져 함께 숨을 쉬는 하나의 습지였습니다. 하지만 그 많았던 논의 생명체들은 살충제와 제초제를 비롯한 농약의 독성을 더 이상 견뎌낼 길이 없어 논을 떠나고야 말았습니다. 논에 벼만 외롭게 서있다면 그 것은 녹색의 사막과 다르지 않습니다. 다른 생명체들은 좀처럼 살 수 없는 공간에서 홀로 버티고 살아남아 맺은 나락의 그 얇은 껍질만 벗겨낸 것이 바로 우리의 주식인 쌀이 되는 꼴입니다. 근래 농약의 사용을 자제하는 유기농법이 확산되고 있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지만 그렇더라도 아직은 안타까움이 앞서는 것이 사실입니다.
한 톨의 쌀이라도 더 얻기 위해 우리가 논에서 쫒아낸 친구들의 숫자는 다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논을 떠나지 않고 간신히 버티고 있는 생명체가 있다 하더라도 그 개체군의 크기는 이미 급격히 감소한 상태입니다. 이제 정말 우리의 논을 어찌 해야 하는 것이 옳은지 논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친구들 중 몇몇의 이름을 떠올리며 생각해 보겠습니다.
“뱁새가 황새를 쫓아가려면 가랑이가 찢어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황새는 키 120cm, 부리 길이 30cm, 날개폭은 3m에 이르는 우리나라의 텃새 중 가장 큰 새였습니다. 뱁새는 참새보다 약간 작은 크기의 텃새입니다. 그 큰 황새가 성큼성큼 넓은 보폭으로 논에서 먹이를 찾아 걷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기에 생긴 속담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텃새로 우리 곁에서 내내 살았던 황새는 끝내 멸종하고 말았습니다. 그 많았던 황새의 숫자가 급격히 감소하다 결국 멸종에 이른 이유는 경지 정리로 인해 둠벙과 자연형 수로가 사라진 것도 한 몫을 했지만, 농약의 대량살포로 논에서 미꾸라지, 개구리, 그리고 논우렁이 같은 황새의 먹이가 사라지거나 줄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땅에서 황새가 완전히 멸종한 것은 그리 오래 전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마지막 황새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이 남아있습니다. “1971년 4월 4일, 충청북도 한 마을의 창공을 순백색 몸에 검은 날개깃을 지닌 새 한 쌍이 유유히 날고 있었다. 그 순간, 정적을 깨는 밀렵꾼의 총성과 함께 한 마리가 땅에 떨어졌다. 홀로 남은 과부 황새는 해마다 무정란을 낳아 품으며 둥지를 지켜 주민들의 안타까움을 사다가 1983년 마침내 쓰러지고 말았다. 원인은 농약중독이었으며, 서울대공원으로 옮겨져 외로운 나날을 보내던 과부 황새는 1994년 9월 23일 끝내 숨을 거뒀다.” 결국 우리나라의 텃새로 살아가던 황새의 마지막은 밀렵꾼과 동물원이 거둔 셈이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천수만, 순천만, 주남저수지, 우포 늪 등에 극소수의 황새가 겨울철새로 잠시 찾아와줄 뿐입니다.
황새는 전 세계에 약 2,000 개체 밖에는 남아있지 않은 국제적 멸종위기종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황새가 살 수 없는 환경은 인간도 살 수 없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1996년 황새복원센터가 문을 열고 복원사업을 시작한 것은 정말 고맙고 다행스런 일이었습니다. 그동안의 애씀으로 2010년 현재 황새는 98 개체로 늘어났으며, 2011년에는 4개체를 시범적으로 방사할 계획이라는 보도가 있습니다. 하지만 황새의 복원에 성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복원센터는 새로운 고민에 빠져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처구니없게도 방사를 할 곳이 마땅치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논의 현실입니다.
뜸부기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제/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기럭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귀뚤귀뚤 귀뚜라미 슬피 울건만/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이 노래는 나라를 잃은 슬픔을 제대로 가눌 수 없는 시기에 일제의 강제징용을 피해 서울로 또 만주로 떠나야 했던 오빠를 그리워하는 누이동생의 애절함이 담긴 오빠생각입니다. 최순애(1914 ~ 1998) 선생님께서 12살의 나이에 쓴 동시에 박태준(1900 ~ 1986) 선생님께서 곡을 붙여 1925년에 지은 것입니다. 노랫말의 속뜻을 제대로 안 것은 아니었지만 어린 시절 퍽 좋아했던 동요입니다. 대학 때 농촌활동을 가게 되면 서로 등을 기대고 멍석에 모여 앉아 하룻밤에 서너 번은 불렀던 기억이 있습니다. 오십 줄에 들어선 지금도 오랜 벗들을 만나면 돌림노래로 부르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었지만 부를 수 있는 동요가 있다는 것이 고마운데 게다가 나이가 들수록 오히려 가슴을 더욱 절절하게 만드는 노래입니다. 시대적 아픔뿐만 아니라 이 동요를 생각할 때 한 가지 더 안타까움이 있다면 논에서 우는 것으로 되어 있는 뜸부기입니다. 오빠생각이 지어졌던 1925년은 말할 것도 없었겠고, 나의 중학교 시절이었던 1970년 중반까지만 해도 우리의 논에는 뜸부기가 제법 많았습니다.
큰 바람이 불지 않았는데 발길이 잦지 않은 구석진 논에 벼 여러 포기가 누워 있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뜸부기의 둥지였습니다. 번식기에 맞춰 우리나라를 찾는 여름철새 뜸부기는 수컷의 경우 머리에 닭처럼 붉은 볏이 솟아있고, 부리는 노란색이며, 몸은 검은 색을 띠고 있습니다. 논 주변을 급하게 걷는 모습을 보면 다리와 목이 조금 긴 검은색의 닭을 보는 듯합니다. 뜸부기를 한자로는 수계(水鷄)라고 하며, 영어로는 ‘watercock’이라고 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입니다. 암컷은 수컷보다 크기가 조금 작고 부리는 역시 노란색이지만 머리에 붉은 볏이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노랫말에는 뜸부기가 ‘뜸북뜸북’우는 것으로 나와 있으나 실제 뜸부기가 ‘뜸북뜸북’소리를 내며 울지는 않습니다. 뜸부기가 우는 모습을 보면 정말 우는 것처럼 보입니다. 처음에는 무척 힘겹게 기침을 하듯 목을 털며 ‘컥, 컥, 컥, 컥’ 하는 소리로 시작하다 ‘컥’ 소리가 ‘뜸’ 소리로 바뀌며 ‘뜸, 뜸, 뜸뜸뜸…’ 그렇게 웁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의 논에서 뜸부기를 만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 되었습니다. 천수만 일대나 민통선 안쪽의 극히 일부 논에서만 만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먹이가 되었던 육상곤충, 수서곤충, 물달팽이, 우렁이 등이 먼저 논을 떠난 데다 정말 어이없게도 뜸부기가 몸에 좋다는 소문까지 퍼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우리의 논을 떠나고 또한 없어졌습니다. 뜸부기는 결국 2005년 3월 17일 천연기념물 446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기에 이르는 우리 땅의 또 다른 슬픈 생명체가 되고야 말았습니다.
참거머리
예전 힘들었던 시절에는 이것저것 학교에 가져가야 할 것이 많았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폐지를 모아 가져가야 했었고, 한 달에 한번쯤은 고철을 가져가야 했는데, 마땅한 것이 없으면 아직 쓸 만한 연탄집게마저 억지를 부려 들고 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모내기철이 시작되면 빠지지 않고 가져갔던 것이 올이 풀려서 신지 못하는 스타킹이었습니다. 스타킹의 용도는 논에서 일을 할 때 쉴 사이 없이 달라붙어 피를 빠는 거머리를 피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무 것에나 척척 잘도 달라붙는 거머리 빨판의 위력도 미끈미끈한 스타킹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거머리는 참거머리, 말거머리, 그리고 돌거머리입니다. 참거머리는 예전에 논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던 거머리며, 말거머리는 주로 둠벙에서 살던 거머리로 녹색과 갈색의 두 종류가 있는데 우리나라의 거머리 중 가장 큰 거머리에 해당합니다. 돌거머리는 깨끗한 냇가의 돌에 붙어 살아가는 적갈색의 거머리입니다. 말거머리와 돌거머리는 흡혈을 하지 않지만, 참거머리는 세 개의 톱니 같은 이빨을 이용하여 피부에 상처를 내고 흡혈을 합니다. 그런데, 참거머리가 발에 달라붙어 상처를 내고 흡혈을 한참 하더라도 우리는 그 상황을 거의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뭔가 붙어 있는 것 같은 야릇한 느낌과 함께 간지러움이 느껴질 때면, 거머리는 이미 충분히 피를 빨아들인 뒤입니다. 이러한 일이 가능한 이유는 거머리의 침 속에 있는 마취 성분 때문입니다. 피부에 국소마취를 한 다음 상처를 내는 것이라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거머리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필수적인 생존전략에 해당합니다. 흡혈을 할 대상에 달라붙고 피부에 손상을 가하는 과정에서 통증이 발생하게 한다면, 그에 대해서까지 넉넉한 관용을 베풀 대상은 없을 테니 말입니다. 자연 상태에서 거머리가 흡혈을 할 수 있는 기회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한 번 최대한 흡혈을 하면 1년은 생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니 한 번 기회가 오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한 모든 준비를 하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거머리의 침에는 마취 성분 말고도 혈관확장 성분과 혈액응고방지 성분이 있습니다. 혈관확장 성분은 상처를 낸 부위의 혈관을 확장시켜 가능한 많은 혈액이 흐르게 해주며, 혈액응고방지 성분은 혈액이 굳는 것을 막아주어 거머리가 계속해서 피를 빨아들이는 것을 도와줍니다. 이러한 성분들 때문에 거머리는 짧은 시간에 피를 최대한 빨아들일 수 있으며, 거머리가 흡혈을 마치고 스스로 떨어져 나가거나 그 전에 거머리가 붙어 있는 것을 미리 알아차려 떼어낸다 하더라도 상처부위에서는 계속 피가 흐르게 됩니다. 또한, 참거머리는 흡혈 대상을 알아차리는 감각이 뛰어납니다. 물에 아주 작은 파동이 일어도 그 파동의 발생 중심점을 향해 정확히 접근할 수 있으며, 다른 동물이 체표면을 통해 분비하는 다양한 화학물질과 호흡을 통해 발생하는 극소량의 이산화탄소마저 바로 감지해 냅니다. 현재 거머리는 마취제, 혈전치료제, 그리고 항생제 등을 얻는 소중한 자원입니다.
그러나 거머리는 이미 우리의 논을 떠났습니다. 이제 모내기철이 시작되었다 해도 학교에 스타킹을 가져가는 일은 없어졌으며, 논에 들어간다 해도 거머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논에서 거머리가 고스란히 사라진 것에 대한 대가의 전부라면 너무 가혹합니다.
논우렁이
어린 시절, 외가댁 주변에는 잡을 것이 참 많았습니다. 메뚜기, 잠자리, 매미, 물고기, 물방개 등을 잡으며 노는 것이 하루 일과의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논우렁이는 잡는 것도 아니고 거의 줍는 수준이었습니다. 논둑을 따라 걸으며 눈만 열심히 움직여 찾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 큰 광주리 하나를 채우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 날 저녁 밥상에는 구수한 우렁이 된장찌개가 올라왔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만 논우렁이를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논우렁이는 백로과의 새들이 가장 즐겨 찾는 먹이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한 논우렁이도 슬금슬금 논을 벗어난 지 오래며, 백로들 또한 논을 멀리한 지 오래입니다.
근래 우렁이를 이용한 유기농법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제초제를 사용하는 대신 우렁이를 방사하여 논에서 잡초를 제거하는 친환경농법이니 우선 귀가 솔깃하며, 실제로 잡초방제 효과가 높은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또한 쉽게 다가설 일이 아닙니다. 잡초를 제거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우렁이가 토종의 논우렁이가 아니라 왕우렁이이기 때문입니다. 왕우렁이는 남미 아마존강 유역의 얕은 호수와 늪지대에 서식하는 종으로 토종의 논우렁이와는 형태만 비슷할 뿐 완전히 다른 종입니다. 왕우렁이는 식욕이 왕성하며 연한 풀을 가장 좋아합니다.
하지만 수면에 접하거나 물속의 풀만을 먹을 수 있고 수면 위로 올라온 풀은 먹지 못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물 위로 서 있는 벼는 그대로 놔두고 물속에서 크고 있거나, 수면에 떠있는 잡초는 모두 먹이치우니 그것만 본다면 잡초방제 생물로 최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왕우렁이가 우리의 바람대로 점잖게 논에만 있어주지는 않는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이미 왕성한 식성과 번식력으로 무장한 왕우렁이가 자연 생태계로 많이 유출되어 하천 생태계를 위협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논우렁이의 새끼는 알로 태어나 어미의 몸속에서 부화하여 성장한 다음 밖으로 나오는 것과 달리, 왕우렁이는 몸 밖으로 알을 낳아 번식을 합니다. 눈여겨보시면, 하천의 수초 줄기나 바위에 선홍색의 알 덩어리가 붙어있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전에는 없던 모습입니다. 모두 왕우렁이의 알입니다. 정말 산 넘어 산입니다.
벼메뚜기
논과 함께 떠오르는 것을 꼽을 때 벼메뚜기가 빠질 수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70년대 이전에 태어난 분들이라면 어린 시절 벼메뚜기를 잡아 강아지풀에 끼워두었다가 구워 먹었던 추억 하나쯤은 가슴에 담겨있을 것입니다. 길가나 들녘 어디라도 잘 자라는 강아지풀은 이삭이 강아지의 꼬리를 닮아 개꼬리풀이라고도 하며, 이삭을 반으로 잘라 코 아래에 붙이면 영락없이 콧수염이 되기도 했습니다. 강아지풀의 줄기를 잡아당기면 줄기를 둘러싸고 있는 엽초(葉鞘)라는 부분으로부터 분리되며 쏙 빠져 나오게 되는데, 줄기의 끝을 벼메뚜기의 목 부분을 덮고 있는 덮게 사이로 밀어 넣고 이삭 쪽으로 내리면 잡은 벼메뚜기를 보관하기로 그 보다 좋은 것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강아지풀은 여전히 무성하건만 벼메뚜기는 이제 우리의 논에서 멀어져있어 안타깝습니다. 단지 추억 거리 하나 쌓을 것이 없어져서 안타까운 것만은 아닙니다.
벼메뚜기는 벼과식물의 잎을 주로 먹고 습한 환경을 좋아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경우 가장 대표적인 서식지는 논이었습니다. 그러나 벼메뚜기 역시 논을 등지고 습지나 하천 가장자리의 초지로 그 터전을 옮겼으며 개체수도 상당히 감소한 상태입니다. 살충제와 제초제를 비롯한 농약의 남용이 가장 큰 이유였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벼 잎을 갉아 먹는 해충인데 무슨 상관이냐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벼 잎을 갉아먹어 생산성을 떨어뜨리니 해충이고, 해충은 없애야 한다는 생각이 정말 옳은 것인지 한 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곤충을 해충과 익충으로 구분하는 것 자체가 인간만이 하는 일이니, 그 기준 또한 인간에게 해가 되느냐 이익이 되느냐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은 꾹 참고 인정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준에 따른다 할지라도 벼메뚜기가 해충인지를 구분하려면 적어도 두 가지의 기초자료가 필요합니다. 먼저 벼메뚜기가 논의 생산성을 얼마나 감소시키는지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자료가 있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벼메뚜기가 벼 잎을 갉아먹는 것 말고 또 무엇을 하며, 그것이 생태계에서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한 정확한 자료가 있어야합니다. 하지만 생산성에 관한 자료도 없고, 벼메뚜기가 생태계에서 수행하는 역할에 관한 자료 역시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벼메뚜기를 해충이라고 말할 자격조차 없습니다. 모두 다 살 수도, 모두 다 죽을 수도 있는 생태계의 문제를 느낌이나 기분으로 다룰 수는 없습니다. 또한, 백보 양보하여 벼메뚜기가 해충이라 할지라도 그 것을 없애도 좋다는 결론까지 이르려면 정말 복잡한 검증의 과정을 수도 없이 거친 뒤라야 할 것입니다. 벼메뚜기뿐만 아니라 이 땅에 깃들어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에 대해서 우리에게 아직 그렇게 할 시간은 있습니다.
그 많던 벼메뚜기를 악착같이 논에서 쫒아 냈으면서 다른 한 쪽에서는 유기농법을 이용하여 벼메뚜기가 바글대는 논에서 얻은 쌀이라며 벼메뚜기쌀이 나와 큰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그리고 벼메뚜기의 인공부화에 성공해 그 수를 늘릴 수 있는 길이 열렸다며 좋아하고 있습니다. 정말 어지럽습니다.
이 지구상에 존재의 의미가 없는 생명체가 존재할 리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 알아차릴 수는 없지만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는 모두 서로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으며, 인간은 생태계라는 그 거대한 존재 사슬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일 뿐입니다. 생태계라는 무대에서는 인간이 주인공이 아닙니다. 인간이 주인공이 되려고 하면 할수록 그 무대는 점점 엉망이 될 뿐입니다. 논에 대한 인간의 욕심이 도를 넘어서면서 우리 논의 현실은 정말 암담해졌습니다. 그렇다고 수십 년 전으로 완전히 시간을 되돌리자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 논을 떠난 생물들을 다시 불러오기 위해 지혜를 모아야 할 때인 것은 분명합니다. 시간이 아무리 오래 걸리고 또한 어떠한 대가를 치루더라도 꼭 해내야 하는 일입니다. 논을 포함하여 생태계에 관한 한 우리에게 마지막 기회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생명체가 더불어 사는 공존의 길을 찾는 것입니다. 그 공존의 길을 찾아야 우리도 삽니다.
Trackbacks 0
Comments 3
-
봄부터 가을 추수하기 전까지 난 참 좋아했다.
하지만 거머리만은 좋아할수가 없었다
논두렁을 달려가다 행여나 논바닥에 내 발이 빠질라 치면 얼른빼곤 했다.
봄 모내기를 한 논두렁의 아침을 참 좋아했다.
아침식전 아빠를 부르러 논두렁을 달려 가면 아빤 나를 무등을 태워 집에 오셨다.
그 무등위에 있는 나는 "세상을 가지고 하늘을 가지고 ,아빠 엄마의 사랑을 가졌다.
하지만 거머리는 정말 싫었다.
여름 벼 대가 올라오면 학교를 마치고 논으로 아빠에게 인사하러 가다보면
논우렁이가 나를 맞이한다. 꼬물꼬물 집을가지고 움직이는 논우렁이를
오빠가 잡아서 아빠 고무신에 넣어주면 한참을 그 아이와 좁은 고무신 안을 함께 다녔다
가을로 갈쯤 논 바닥에 물이 마를쯤 벼메뚜기는 온 논이 자기 뜀뛰기장으로 삼아 움직인다
여기도 저기도 천지가 그 아이들의 운동장이다 . 우리 친구들은 여자 남자 할것없이
강아지 풀을 쭉~뜯어서 메뚜기를 꽤기 시작한다.
난 그저 그 아이들의 뒤를 따라 다닐뿐 ㅋㅋㅋ 난 잡지 못했다.
까끌까끌한 느낌도 싫고 으으으 난 내 친구들이 뛰어다니는 곳으로 졸졸졸 ㅎㅎ
참 그립게 만드는 곳입니다.
교수님의 사진으로 제 추억이 이리 살아 남을 감사하네요
지금쯤 그 때였으면 한참 논에 물을대고 올챙이도 보이고 송사리도보이고
우렁이도 보이고 하지만 잡아 보질 못했네요
오빠나 친구들이 잡아줘야 봤던 그 아이들 ,그리고 아버지 ````` 어머니 `````` 참 그립습니다
정말 마음 아픕니다...
흔하던 것이 사라진 세상,,,
사람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