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없는 두루미 1K4, 1K5 들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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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원 두루미

겨울이면 일주일의 반은 집을 떠나 강원도 철원에서 지냅니다. 이유는 하나, 전라북도 남원 땅에서는 두루미를 만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흑두루미(Hooded Crane)와 재두루미(White-naped Crane)와 다르게 두루미(Red-crowned Crane)는 철원 주변의 민간인 통제구역이 유일한 월동지며 다른 지역에는 분포하지 않습니다. 하여 두루미를 만나려면 누구든, 어디에 살든 무조건 철원 쪽으로 향해야 합니다. 왕복 1,000Km의 거리를 매주 오가는 것은 어쩔 수도 없거니와 감내할 만합니다. 하지만 영하 20℃를 장난처럼 넘나드는 철원의 혹독한 추위를 견디는 것만큼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대로 잘 버텼는데 결국 몸살이 나고 말았습니다. 왜 그리도 물질과 몸을 혹사하며 무리를 하냐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하지만 전 세계에 2,000여 개체 밖에는 남아있지 않은 멸종위기의 두루미를 어찌하면 지켜낼 수 있는지를 아는 것이 지금은 그 무엇보다 우선일 뿐입니다.

엉덩이에 주사까지 한 방 뻐근하게 맞고 주사실을 막 나설 때였습니다. 지인으로부터 경상남도 함안에 두루미 2 마리가 있는데 어찌 된 일이냐는 연락이 왔습니다. 경상남도 함안? 두루미가 출현할 수 없는 지역이지만 있다니 바로 출발합니다. 함안까지는 약 두 시간이 소요됩니다. 이상합니다. 네비게이터는 목적지에 도착해 안내를 종료한다는데 도무지 두루미가 있을 곳이 아닙니다. 들녘인 것은 틀림없지만 온통 비닐하우스가 들어앉아 빈 논을 찾기 힘들 정도입니다. 주소를 잘못 입력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차에서 내려 잠시 두리번거리니 농로 사이로 지인이 보입니다.

분명 두루미가 맞습니다. 빼곡하게 들어선 비닐하우스 사이로 군데군데 간신히 남아 있는 논 한 구석에서 두루미 2마리가 열심히 벼 이삭을 주워 먹고 있습니다. 철원은 너무 추워 비닐하우스를 운영하기 어려운 지역입니다. 덕분에 추수가 끝난 철원평야는 고스란히 빈 들녘이 되며 두루미는 드넓은 들녘에 떨어진 낙곡을 주요 먹이로 삼아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친구들은 어찌 비닐하우스 단지에 자리를 잡은 것일까요? 또한 철원에서도 두루미가 주로 생활하는 지역은 민간인 통제지역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그만큼 두루미는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각별한 친구들입니다. 하지만 이 두루미들은 사람을 아예 무시하고 있습니다. 접근해 몸을 만져도 가만히 있지 않을까 싶을 지경입니다. 이 친구들은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발에 달려있는 흰색 가락지가 단서입니다. 가락지의 흰색은 러시아에서 부착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한 두루미는 1K4, 또 한 두루미는 1K5라는 일련번호가 적혀있습니다. 1K4와 1K5에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한국환경생태연구소장이신 이기섭 박사님께 자문을 얻기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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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루미 1K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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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루미 1K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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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루미 1K4와 1K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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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웃 먹이터로 이동하는 두루미 1K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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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루미 1K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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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루미 1K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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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루미 1K4와 1K5

1K4와 1K5는 부모가 없는 두루미입니다. 러시아 아무르강 유역의 킨간스키 자연보호구에 있는 두루미 인공부화센터에서 2011년 인공부화를 통해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1년 정도 적응훈련을 통해 2012년 4월 24일 방사하였으며, 그 때 방사한 친구가 1K4, 1K5, 그리고 1K6이었다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1K6의 행방은 알 수 없지만 1K4와 1K5가 무사히 우리나라에서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엄청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킨간스키 두루미 인공부화센터에서 방사한 두루미는 200여 개체에 이르지만 성공 사례가 거의 없는 형편이기 때문입니다.

1K4와 1K5는 지난 해 가을 아무르강 유역에 견딜 수 없는 추위가 시작되었을 때 다른 두루미들과 함께 우리나라를 찾아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철저히 가족 중심의 두루미 세상에서 부모의 각별한 돌봄이 있어도 험난하기 짝이 없는 수 천 킬로미터의 여정을 저들은 스스로 늠름히 극복한 친구들인 셈입니다. 처음에는 다른 두루미들과 함께 철원에 도착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치열한 먹이터 다툼에서 정상적인 두루미 가족을 이겨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탐문을 해보니 1K4와 1K5가 처음 나타난 것은 지난 해 추수가 끝난 뒤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두루미가 우리나라에 도래하는 시기와 일치합니다. 그러니 저들은 철원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밀려났다는 뜻입니다. 그렇더라도 어떻게 이 남녘 함안까지 오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비닐하우스가 촘촘히 들어선 지역에 자리를 잡은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비닐하우스 지역은 낙곡 자체를 구하기 힘들고 사람이 수시로 왕래하기 때문에 낙곡을 주요 먹이로 삼는 오리 종류나 기러기 종류마저 피하는 지역입니다. 지역 전체를 두루 살펴보니 다행히 두루미 2 개체가 겨울을 날만한 낙곡은 충분해 보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두루미의 서식지로 황당해보였지만 사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저들에게는 차라리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듭니다. 또한 멀지 않은 곳에 강이 있고 삵과 너구리같은 천적의 습격을 피해 안전하게 잠을 잘 수 있는 공간도 여러 곳 눈에 띕니다.

1K4, 1K5.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남은 겨울 잘 지내고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딱 한 가지입니다. 간섭하지 않는 것입니다. 정확히는 저들을 괴롭히지 않는 것입니다. 저들은 사람을 경계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는 저들을 괴롭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누구라도 저들의 믿음을 깨는 첫 번째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두루미는 한 번 찾아와 겨울을 난 곳을 정확히 기억했다 다시 찾아오는 습성이 있습니다. 게다가 수명도 깁니다. 앞으로 수십 년 동안 경상남도 함안에서 두루미를 보는 일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더 이상 부모 없는 두루미를 만들지 않아도 되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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