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꽃을 터트려 수련의 절정에 이르다 무위태극선 교실

민웅기의 무위태극선 36/길을 구하는 자는 길과 같아진다/전신파련 轉身擺蓮  

 

전신파련轉身擺蓮은 몸을 돌려서 연꽃을 터트린다는 뜻의 이름이다. 퇴보과호에서 왼발을 뒤로 빼서 몸을 360도 회전하고 회전이 완료되는 순간, 허리가 왼 방향으로 틀면서 오른발을 들어서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앞 돌려차기와 같은 방식으로 살짝 튕겨 차듯이 한다. 마지막의 튕겨 차듯 하는 동작이 연꽃을 터트리는 동작이다. 누군가를 기격하는 것이 아니라, 연꽃의 개화를 돕는 줄탁동시茁啄同時가 된다.

 

암탉이 알을 낳아 모아지면 품기 시작한다. 제 몸의 따스한 온기로 품어 3주가 되면 병아리가 깨어나온다. 병아리는 암탉의 품 속에서 알맞은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게 되면 부화할 만반의 준비가 되고, 그리하여 마지막 21일째가 되면, 알 속에서 자신의 부리로 껍질을 깨고 나온다.

그런데 아직 힘이 미약한 병아리가 알에서 깨어나오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 어미닭은 깨어나는 알마다 일일이 그것의 껍질을 정성스럽게 밖에서 쪼아주는데, 이것을 줄탁동시茁啄同時라 한다. 병아리와 어미닭이 안과 밖에서 동시에 쫌으로써 신비로운 생명탄생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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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파련은 연꽃의 개화를 돕는 초식이다. 그 뜻이 줄탁동시茁啄同時와 통한다. 개화를 위한 연꽃의 산고에 일점을 찍는 화룡점정畵龍點睛과 같다. 해탈의 산고를 겪는 수련자가 의식을 붙들고 있는 마지막 끈을 놓아버림이다. 번데기로부터 옷을 벗고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오름이다.

 

장엄하다고나 해야 할까? 모든 탄생의 신비가 그러할 것이나, 연꽃의 개화는 동서양의 수련 전통에서 깨달음의 완성이라는 매우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어있다. 꽃봉오리를 터트려서 연꽃의 개화를 완성하고, 바로 그 꽃 속에 연꽃좌를 하고 앉아있음이니, ‘연꽃을 터트림(擺蓮)’의 행공을 통해서 연꽃으로 변화(化蓮)’한 삶이 된다. 그러므로 연꽃을 터트려 깨달음의 꽃을 개화시키는 전신파련은 같은 맥락에서 우리의 태극 수련의 길에 경험할 수 있는 절정의 순간이 된다.

산 아래에 터를 잡고 맨 먼저 떠오른 아이디어가 연못을 만들어 연꽃을 키우는 것이었다. 마을에 이사 들어온 몇 집이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즉시 실행에 옮겼다. 터를 닦는 길의 처음을 연못 만드는 것으로부터 시작했고, 몇 달 후에는 연뿌리를 구해 와서 심었다. 연을 심게 된 동기나 목적은 조금씩 다를 것이나, 연꽃을 좋아하는 마음은 한가지였다.

순백색의 꽃을 피우는 백련이 모두의 기호에 부합했으나, 다채로운 색깔과 모양의 수련들도 심었다. 머잖아 이 연꽃들과 함께 더불어 습지생태의 살림을 꾸릴 친구들도 생겨날 것이다. 우렁이와 미꾸라지와 개구리와 뱀과 물방개와 소금쟁이와 붕어들과 청둥오리와 두루미들도 이 연꽃 마을을 찾을 것이다. 연꽃의 개화를 돕고 함께 만개할 습지의 친구들이 해와 달의 축복을 받으며, 여기 산 아래 연못의 주인과 손님으로 자리를 잡을 것이다.

 

연꽃은 매우 아름답다. 아름다운 연꽃은 진흙 속에 뿌리를 내리고 흙탕물을 먹고 자라난다. 그리고 그 연꽃을 키우는 연못은 산 아래에 위치해 있다. 아래에 있음으로 여러 윗줄기의 물길이 흘러들어온다. 맑은 물, 탁한 물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 연못은 혼연함의 도에 비유된다. 노자는 이것을 도에 비유해서 말했다. “연못처럼 그윽하구나! 온갖 것의 종가 같도다!(淵兮! 似萬物之宗)” “깊구나! 있는 것 같도다!(湛兮! 似或存. 4)”

연못은 혼연함, 깊고 그윽함, 가라앉아 맑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그러한 가운데 연꽃을 길러내니, 연꽃의 뿌리는 혼탁한 진흙탕 속에 있고, 잎과 꽃은 수면 위로 떠서 맑고 깨끗하게 피운다. 더러움 가운데서 깨끗함을 꽃피우니 깨달음의 꽃(覺華, 혹은 佛華)’으로 비유된다. 그래서 마음꽃이라고도 한다. 더러움()과 깨끗함()이 함께 있는 것, 중생과 보리가 함께 있는 것, 그것이 연꽃의 의미가 된다.

 

연꽃은 봉오리와 꽃과 열매를 동시에 맺는다. 그래서 연꽃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나타내는 뜻을 담고 있다. 의식이 피워낸 꽃 속에 그 꽃의 씨앗과 열매가 함께 담겨있으니, 원인과 결과가 서로 갈마들어있음이다.

지금, 꽃이 활짝 핀 이 순간, 과거나 미래는 없다. 오직 진행형의 현재(當念)만 찬연히 빛나게 된다. 지금(), 여기에는(當念) 과거도 미래도 현재도 찾아볼 수가 없고, 시간 없는 시간, 영원한 시간만 오로지하게 된다. 그것이 바른 깨달음(正覺)’의 체와 용이다.

 

끝없는 순간들의 세계 속에서 나와 타인이(無邊刹境自他),

터럭 끝에도 막힘이 없으니(不隔於豪端),

영원한 시간, 옛날과 지금, 시작과 끝이(十世古今始終),

지금, 이 순간에서 떠나지 않는다(不離於當念).”

 

인도 전통에서 연꽃은 의식의 수준을 나타내며, 완전히 피어난 연꽃은 붓다를 비롯한 다른 대부분의 불보살의 자리로 여겨진다. 연꽃 위에 앉거나 선다는 것은 붓다의 자리에 앉거나 선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매우 특별한 뜻으로 여긴다. 그것은 그들이 인간의 속성을 넘어선 지고한 존재임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힌두교와 불교에서 연꽃은 영적인 성취와 잠재력의 개화를 상징하는 매우 특별한 꽃이 된다.

대지는 이따금 우주의 바다에 떠있는 연잎에 비유되고, 육체는 의식이 성장할 수 있도록 여건을 제공하는 대지로 불린다. 이 대지로부터 자양분을 빨아올려 깨달음의 연꽃이 개화하게 되는 것이다. 연꽃의 신성함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 인간이 내면에 지니고 있는 본성을 말함이다. 이 마음의 본성으로부터 깨달음의 꽃이 피어나온다고 말해진다.

이천 년이 지나도록 휴면 상태로 있던 연의 씨앗이 물을 만나자 싹이 텄다. 이 놀라운 사실로부터 우리는 어떤 영감을 받을 수 있을까? 연의 씨앗이 잠들어있던 상태에서 깨어나와 싹을 틔우듯, 우리 안에 잠들어 있는 내면의 신성한 영의 씨앗도 물주고 가꾸면, 언젠가는 반드시 깨어날 것이라는 믿음과 희망을 약속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몸을 돌려 연꽃의 봉오리를 살짝 건드리니, 아름답고 순결한 연꽃이 꽃망울을 터트린다. 전신파련轉身擺蓮은 요가로 말하면 연꽃좌(padmasana)에 해당할 것이다. 활짝 핀 연꽃 속에 연꽃좌를 하고 앉아있음이다. 두 다리를 안으로 겹쳐서 꼬부려앉는 결가부좌가 이 연꽃자세이다.

연꽃좌는 요가에서 완전한 자세로 불린다. 목과 허리, 다리와 무릎, 그리고 발바닥의 기혈을 통하게 하고 오장육부의 한기를 배출하고 정화시키는 데 더없이 좋은 효과를 낸다. 좌선을 하기에 매우 안정적이고 흔들림이 없는 자세이다. 연꽃좌는 앉아서 명상에 들어가는 자세이니 바로 좌선坐禪이다.

 

[유마경, 제자품]에 나오는 참된 좌선에 관한 이야기다.

유마거사가 말했다.

 

사리불이여! 앉는 것만이 꼭 좌선은 아닙니다.

무릇 좌선이란, 삼계 어디에도 몸과 마음을 나타내지 않는 것을 좌선이라 합니다.

멸진정에서 나오지 않으면서도, 일상의 행동거지를 나타내는 것을 좌선이라 합니다.

성자의 깨달은 경지를 버리지 않으면서도, 범부의 온갖 성품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을 좌선이라 합니다.

마음이 안에도 머무르지 않고, 밖으로도 행하지 않는 것을 좌선이라 합니다.

삼십칠보리분법에 머무르면서도, 일체의 소견들을 벗어나는 것을 좌선이라 합니다.

생사를 버리지 않는데도 번뇌가 없고, 열반을 증득했더라도 그 열반에 머물지 않는 것을 좌선이라 합니다.

 

무거움은

가벼움의 뿌리가 되고,

고요함은

움직임의 머리가 된다.

 

重爲輕根, 중위경근

靜爲躁君. 정위조군

 

가벼이 하면

그 뿌리를 잃고,

움직임을 능사로 하면

그 머리를 잃는다.

 

輕則失根, 경즉실근

躁則失君. 조즉실군 (26)

 

연꽃은 고요함의 상징이다. 고요한 연못 위에 한가로이 떠있는 연꽃을 바라보노라면 보고 있는 이의 마음조차 따라서 고요해진다. 모든 생명은 그 고요함으로부터 움직여 나온다. 그 고요함의 뿌리로부터 생명의 역동이 시작된다. 고요하고 캄캄하여 어두운 가운데 한줄기 빛이 찾아드니 생명의 싹이 트게 된다.

 

때로 가볍고 때로 무거우며, 때로 활기차고 때로 한가로우나, 그 뿌리는 무거움에 있고(重爲輕根) 그 근원은 고요함에 있다(靜爲躁君). 그러하니 가벼움을 능사로 처신하면 그 뿌리인 무거움의 바탕을 잃고(輕則失根), 움직임에 취해 한가로움을 잃으면 그 자신의 고향을 잃게 된다(躁則失君)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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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따라 섬기는 자는

알아야 할 것이다:

길을 구하는 자는

길과 같아지고

얻음을 구하는 자는

얻음과 같아지고

잃음을 구하는 자는

잃음과 같아진다.

 

故從事於道者: 고종사어도자

道者同於道, 도자동어도

德者同於德, 덕자동어덕

失者同於失 실자동어실 (23)

 

우리 마음의 경계는 참으로 넓다. 우리의 마음 씀씀이에 따라서 그 경계는 달라진다. 그 경계를 따라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기도 하고, 나의 가족을 지키는 울타리가 되기도 하고, 지구촌 구석구석까지 사랑과 연민과 기쁨과 평화의 무한한 마음을 보내는 삶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넓은 우주의 마음도 내가 쓰기에 따라 달려있다는 것이 우리의 스승 노자의 말씀이다. 도를 닦고 이를 따르는 사람들은(故從事於道者) 반드시 명심해야 할 명제가 있으니 잘 들으라고 운을 뗀다. 내가 나를 도와 동일시하면, 내가 도가 될 것이고(道者同於道), 내가 나를 덕과 동일시하면, 내가 덕과 같아져서 덕을 얻을 것이며(德者同於德), 내가 도도 덕도 나와 상관없는 일로 여김으로써 그것을 잃어버리면, 나의 경계는 그 잃어버림()과 동일시되어 그 속에 갇혀버리게 된다(失者同於失)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 광대무변한 우주 속에 존재하면서도 저 몇십 평의 아파트 한 칸을 나의 집이라 여기면 그것이 나의 전부가 되고, 높은 산 위에 올라서서 산 아래를 바라보니, 시선이 닿는 이웃들과 산하가 나와 나의 집이라 여기면 또 그만큼의 경계가 지워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만일 하늘과 땅과 그 속에 있는 만유만생과 온생명을 나의 의식이 머무는 도량道場으로 여기게 되면, 나 역시 그토록 광대무변한 온우주로 존재하게 된다는 말이다.

 

가 통나무()라면 덕은 그로부터 만들어져 나온 그릇()이며, 잃어버림()은 통나무로부터 나온 그 본성조차 스스로 잃어버리고 부정해버림을 뜻하는 것이 되니, 나의 의식이 무엇과 를 동일시하느냐 하는 것이 곧 나의 경계를 규정하게 된다는 뜻이 된다. 참으로 오묘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석가세존이 영취산모임에서(靈山會上) ‘연꽃 한 송이를 들어서 거기 모인 군중들에게 보여주었다. 군중들이 아무도 무슨 뜻인지 알 길이 없어 침묵을 지키고 있는데, 다만 제자 가섭만이 빙그레 웃었다(破顔微笑). 그때 세존이 말했다.

나에게 정법안장政法眼藏, 열반묘심涅槃妙心, 실상무상實相無相, 미묘법문微妙法門,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이 있는데, 그것을 마하가섭에게 직접 전해주겠다.”

 

진리는 상징을 쓴다. 언어나 문자로는 제대로 표현할 수 없고 전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연꽃은 깨달음의 법을 상징한다. 연의 꽃은 아름답고(,) 줄기는 곧으며(), 잎은 좋고(), 열매는 참되다(). 연꽃에는 진, , , 의 모든 가치가 구족되어 있음이다.

 

석가세존의 미소에 제자 가섭이 미소로 응답했다. 세존이 연꽃을 활짝 피우니 가섭이 함께 연꽃을 피운다. 제대로 된 깨달음의 법은 말로, 문자로, 전하는 것이 아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전한다. 마음이 통하면 법도 통하는 법이다. 우주의 큰마음에 통해서 미소를 지으니 산천초목이 다 그 미소에 화답한다. 온생명이 활짝 피어나는 연꽃의 개화에 동참한다. 천지사방이 연꽃으로 환하게 미소 짓는다.

 

연꽃이 개화하는 사건은 한 개인의 사건이 아니다. 온우주적 사건이다. 온우주에 깨달음의 미소가 누룩처럼 번져가는 사건이다. 불국토가 마음이 닿는 경계로 확장되어가는 사건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에 강림하는 사건이다.

 

천지사방에 하얀 눈이 내린다. 세상이 흰눈으로 덮히게 되니, 알록달록하게 채색되었던 하늘 아래의 동네마다 온통 하얀 바탕의 도화지로 바뀌어 버린다. 따라서 마음도 하얀 바탕으로 돌아왔다.

민웅기(<태극권과 노자>저자,송계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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