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만족함의 위대함이여 무위태극선 교실

민웅기의 무위태극선/그침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사비식 斜飛式  

 

사비식斜飛式은 몸을 측면으로 기울여 날을 듯이 취한 자세를 일컫는 말이다. 도련후의 끝 동작으로부터 다리를 벌려 마보 자세를 거치고, 계속해서 상체가 오른쪽 대각선으로 기울어지면서 허리가 왼 방향으로 살짝 돌아 취한 형세가 바로 사비식이다. 오른손은 어깨너머 대각선에서 장심이 귀를 향해 있고, 왼손은 왼쪽다리 허벅지 앞쪽에 장심이 아래쪽으로 향해 놓여있다.

상체가 곧게 서서 죽 내리뻗은 자세(松沉直垂)를 위주로 세를 취하는 방식이 무위태극선의 주된 특징이다. 그래서 상체를 옆으로 기울이는 사비식斜飛式은 그 모양이 매우 특이하다. 보폭을 크게 한 상태에서 상체를 오른쪽으로 기울여서 마치 미그럼틀 모양이 된다. 오른손과 오른발이 실하고 왼손과 왼발이 허하다.

 

기울어있는 모습이 마치 일곱 색깔 무지개가 떠있는 것 같다. 비가 개인 뒤에 다가올 날들에 대한 희망을 보여주는 약속의 징표 같다. 자전거 곡마단이 자전거를 기울여서 달리는 모양을 닮은 것 같다. 속도와 높낮이가 정도를 넘어서면 위태롭게 될 것인 바, 사비식의 기울기가 위태로워 보인다. 그치지 않으면 위험한 지경에 직면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 출중한 기예 덕분에 이미 충분히 얻은 바 되었다. 이름도 재물도 다 얻었으나, 그칠 줄 모르는 다람쥐의 쳇바퀴가 계속 돌아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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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고바위에 올라서서 저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 같다. 내려다보니 그 비롯됨이 아득하여 천길만길이다. 여기서 만족할 줄 알게 되면 여태 쌓아놓은 것들이 보존될 것이나, 그렇지 않고 욕망의 크기를 더 키우고 정도正道를 벗어나게 되면 어느 순간 다 무너지게 되어 결국 욕됨만 남게 될 것이다. 많이 쌓고 너무 가득 채우면 언젠가 큰 대가를 치루고 말게 된다. 눈덩이 같이 증폭하는 욕망의 크기를 따라 더 많은 재물, 더 높은 이름, 더 강한 권력을 탐하게 되면 자칫 건강과 행복, 사랑하는 사람들마저 다 잃고 떠나가게 된다. 인색함의 정도가 지나쳐서 베풀지 않으면, 원망과 분이 쌓여 언젠가 돌화살이 되어 돌아와 자신의 발등을 찍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높은 것은 낮은 것과 서로 의지함으로써 기울어 있고(高下相傾), 귀함은 천함을 근본으로 해서 존재하고(貴以賤爲本), 높음은 낮음을 기초로 삼아 존재한다(高以下爲基).

 

마음은 고요하고 기운은 조화로와야 하네

형태와 정신이 합일되네

 

心靜氣和 심정기화

形神合一 형신합일 (태극구결)

 

마음이 고요함에 들어있으면 기도 조화로운 상태가 된다. 고요함에 처한다는 것은 마음의 깊이에 도달하여 그 경계에 머무름을 뜻한다. 마음이 여러 일과 사업, 관계들에 휘둘리면 번다하게 된다. 번뇌가 들끓 듯하고 생각이 오리무중에 빠져 산란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마음은 본성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므로, 하늘에 드리운 먹구름처럼 뿌옇게 오염되고 만다.

 

당신의 마음이 오뉴월에 팥죽 끓듯 하게 되면, 당신의 기도 사납게 그 팥죽 끓는 마음을 따라 울퉁불퉁하게 된다. 혹시 화가 치밀어오르는 순간에 당신 자신의 호흡을 들여다본 적이 있는가? 마음이 널뛰기를 하면 호흡도 따라 널뛰기를 하고, 마음이 파도에 휩쓸려 분탕질을 하면 호흡도 따라서 그렇게 분탕질을 친다.

당신의 마음과 호흡은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니, 이를 뜻하는 말이 심식일여心息一如. 고요한 명상상태에서는 호흡도 역시 그윽하고 깊어진다. 명상이 깊어져서 삼매의 경지에 이르면 그 미세하던 호흡조차 멈춘 듯이 끊기게 되니, 이를 두고 적적寂寂하다고 한다. 이렇게 고요함의 근본에 도달해 적적寂寂함을 마음의 본성이라 한다.

 

몸과 마음은 생명체 안에서 하나다. 마음은 몸을 의지해 일어나고, 몸은 마음의 인도함으로 영위된다. 그 마음이 오장육부를 떠나서 존재하지 않고, 그 몸이 번뇌와 사량思量의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도 없다. 형신합일形神合一이 바로 그런 뜻이다. 당신이 일하다가, 혹은 사람들과 부딪쳐서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당신 마음이 받는 상처는 그대로 몸에 전해지고, 그 스트레스로 인한 흔적은 몸과 마음 어느 구석엔가 차곡차곡 쌓이게 된다. 그러므로 몸 따로 마음 따로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생명이고 인생이다. 마음을 여유롭게 쓰는 사람은 몸도 넉넉하고 유연하다. 마음을 꼬치꼬치하고 까실까실하게 쓰면 몸도 따라서 그렇게 까시럽게 될 수밖에 없다.

 

이름과 내 몸,

어느 것이 나에게 가까운 것이냐?

내 몸과 재화,

어느 것이 더 소중한 것이냐?

얻음과 잃음,

결국 어느 것이 병이냐?

이런 까닭으로

심히 아끼다간 반드시 큰 비용을 치루게 되고,

많이 간직타간 반드시 크게 망하게 되리.

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침을 알면 위태롭지 않으리.

그리하면

머리가 되고 또 오래가리.

 

名與身孰親, 명여신숙친

身與貨孰多, 신여화숙다

得與亡孰病, 득여망숙병

是故甚愛必大費, 시고심애필대비

多藏必厚亡. 다장필후망

知足不辱, 지족불욕

知止不殆, 지지불태

可以長久 가이장구 (44)

 

노자가 지금 우리에게 묻는다. “이름과 내 몸, 어느 것이 나에게 가까운 것이냐?(名與身孰親)” “내 몸과 재화, 어느 것이 더 소중한 것이냐?(身與貨孰多)” ()은 무엇인가? 하늘이 부여한 생명체다. 자연이고 도의 분신이다. 그리고 물의 실상이다. 그러면 이름()은 무엇인가? 명은 바로 나의 사량으로 나누어 조작한 개념이고 표상이다. 가공된 이념체계이다. 그리고 재화()란 무엇인가? 오늘날로 치면 돈이다. 돈이 되는 상품이나 물건이다.

 

몸은 실상實相이며 실질實質이고, 명이나 재화는 허상이고 허구이다. 그러므로 얻음과 잃음, 결국 어느 것이 병이냐?(得與亡孰病)”에 대한 대답은 자명해진다. 몸의 실질을 잃고 이름과 돈을 얻을 것인가, 혹은 이름과 돈이라는 허상을 버리고 몸이라는 실질을 얻을 것인가?

 

언뜻 보면 우문이다. 몸을 버리고 이름을 좇을 자가 어디 있으랴? 그런데 그렇지도 않은 것이 세상살이다. 역사 속에 숱하게 많은 이들이 이름을 좇고 돈을 좇다가 자기 목숨을 희생했다. 버리고자 해서 버린 것이 아니다. 불나방처럼, 명예와 이익을 좇아서 불속으로 뛰어들어간 것이다. 같은 뜻의 말을 예수도 했다. “당신들이 세상을 얻고도 목숨을 잃으면, 무슨 유익함이 있겠습니까?”

 

욕망의 바다란 끝없는 대해처럼 넓고도 넓은 것 같다. 만족을 모르고 커져가는 것, 아무리 채워도 바닥없는 물항아리처럼 채울 수가 없는 것, 그런 것이다. 있는 자들, 가진 자들은 더욱 만이 가지려하고, 없는 자들도 기회만 되면 추구하는 것, 그것이 욕망이다.

어느 한 시대, 어느 한 공간, 어느 한 사람이 이 욕망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가? 욕망이 그저 행복으로 안내하는 전도사쯤 된다면 문제될 게 없을 것이다. 욕망을 따라잡는 데 한목숨 걸고서라도 도전해볼 가치가 있다면 그도 괜찮을 것이다.

 

욕망을 문제 삼는 것은 그 욕망이 자연스런 욕구의 수준을 넘어서는 데 있다. 그리고 그 욕망의 크기가 결코 충족시킬 수 없을 만큼 커진다는 데 있다. 문제는 욕망은 외부적 대상을 목표로 추구하는 것이어서 그것이 설령 충족된다하더라도 내면의 결핍은 오히려 더 깊어진다는 데 그 근본적 한계가 있다.

그리고 이것이 갖는 더욱 본질적인 문제는 욕망은 아무리 충족되어도 만족할 줄 모른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욕망의 문제는 결국 마음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러므로 욕망을 말할 때 그것은 결국 마음 밖의 어떤 외부적 대상이나 조건, 혹은 물질의 문제로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데에 우리의 관심의 초점이 있게 된다.

욕망을 그치고 자족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당신에게 지금의 상태로 자족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우문일 수밖에 없다. 지금, 여기에 자족할 수 있는 사람이 참으로 있는가? 그렇다면 그 사람은 행복할 것이다. 지금 당신이 누리고 있는 것, 당신의 가정과 직급과 직종과 사업의 종류와 사업의 크기와 그리고 학력과 지식과 권력과 이름, 그것들에 진정 만족하는가? 만족을 알면 이미 자유롭다. 해탈의 문을 통과했음이다.

그리고 지금 그칠 수 있는가 하고 묻는다. 무엇을 그치는가? 이름의 한계를 넘지 않도록 그친다. 그릇은 각각이 제 몫의 용량과 용도와 그만큼의 에너지를 가지고 만들어진다. 그릇이 자기 분수를 넘어서는 순간, 그 그릇의 존재는 더 이상 용납되지 않는다. 그것이 도이다. 그래서 그 이름을 넘어서는 순간, 그 용량을 초과하는 순간, 그 용도를 다하는 순간, 그릇의 수명은 끝나게 되어 있다. 그것이 자연이다. 그러므로 도에서 벗어나면 일찍 끝난다(不道早已).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그 어떤 것도 도를 벗어나서 존재할 수는 없다. 마치 사과나무의 열매가 아래쪽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사람들이 땅을 딛지 않고 설 수 없는 것처럼. 숲의 식물들이 제공하는 산소를 인간과 동물들이 마시고 살아야하는 것처럼. 북극의 빙하가 녹으면 지구촌에 재앙이 오리라는 것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인 것처럼. 몇 십 년이 못가서 석유가 고갈될 것이고 그에 기반한 문명의 위기도 함께 동반되리라는 것처럼.

 

우리가 누리고 있는 화려한 명품 옷도, 멋진 세단도, 아파트도, 도시문명과 도시적 생활양식도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시 노자가 우리에게 묻는다. “얻음과 잃음, 결국 어느 것이 병이냐?”

만족을 아는 사람, 만족을 아는 체제, 만족을 아는 문명은 욕됨이 없다(知足不辱)고 했다. 그리고 역시 그침을 아는 이는 위태롭지 않을 것이고(知止不殆), 나아가서 지도자()가 되고, 오래갈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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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 살긴 했으나 방학 때만 되면 멀미나는 버스를 타고 몇 시간씩 가야 겨우 도착하는 곳이 남도의 땅끝에 있는 고향땅 해남이었다. 지금은 차길이 좋아져서 한 시간 남짓 가면 쉽사리 도착하는 그곳이 그땐 왜 그리도 멀었던지. 버스가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따라 달리다가 아무 이유도 없이 서면, 그저 30분이고 1시간이고 기다려야 했다. 아마 낡은 버스들이라 고장이 나서 그랬겠지만 운전사 아저씨나 차장의 친절한 설명은 기대할 수도 없는 시절이었다. 그렇게 정류장엘 도착해서 다시 30분 이상을 걸어 해찰 부려가며 마을 앞 채등을 넘어서야, 몇 아름드리가 될 고목나무와 사장나무가 어울린 마을의 쉼터가 나오고, 바로 옆에 있는 큰댁에 도착한다.

할머니를 따라 모퉁이 밭엘 간다. 밭이 제법 너르다. 너른 밭에 온갖 작물이 자라고 있다. 고추를 심은 사이사이엔 무며 배추가 심어져있고, 콩들이 자란 곳에는 키가 큰 수수가 군데군데 함께 어울려있다. 그리고 밭가로 무성한 옥수수가 마치 담장 모양처럼 둘러서있다. 자세히 보면 밭 안에는 당근이며 고구마며 호박들이 더불어 자라고 있다. ‘더불어 작물의 숲이다.

올해 고추를 심은 자리엔 다음 해 고추를 심지 않고, 콩이나 배추나 무 등을 심는다. 같은 작물을 같은 곳에 해를 거듭하여 심으면 연작의 피해를 입게 된다는 것쯤은 경험으로 알고 있어서 그러할 것이다. 그래서 해마다 작물의 종을 바꿔가며 심는다. 그런 걸 윤작이라 했다. 뿐만 아니라 한 곳에 한 가지 작물을 집중적으로 심는 것도 피했다. 단작을 하게 되면 연작에서 일어나는 것과 유사한 폐해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럴 것이다. 한 곳에서 한 가지 작물만 대량으로 집중해서 재배하게 되면 그 작물을 좋아하는 병해충이 집중적으로 공격하게 되고, 여러 다양한 식물군이 고루 분포되어 있을 때와 비교하면 생태적으로 훨씬 열악한 조건에 놓이게 되므로, 그 피해의 정도가 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혼작을 했다. ‘더불어 숲을 이루게 되니 생태적으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게 된다.

 

지금은 할머니의 모퉁이 밭에서 보았던 그런 밭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혼작이 사라진지는 이미 오래다. 지역 특화작물이 예전의 혼작 농법을 대체한 지 오래다. 일손이 부족한데다 경제적, 상업적 효율성을 고려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현대적인 과학농법으로 연작이나 단작의 부작용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 근거 없는 믿음도 한몫했을 것이다. 고추 농사를 짓는 농민들의 말을 들어보았다. 퇴비를 충분히 주지 않고 화학비료에 의존하게 되니 고추가 약해질 수밖에 없다. 더욱 강력하고 많은 양의 농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 농약이라는 것이 그리 대단한 것이 못된다. 수없이 살포해도 한번 발병하면 잘 잡히질 않는다. 같은 장소에서 단작에 연작을 거듭하게 되니, 현대적인 과학농법이라도 별 수 없다. 강력한 농약에 강력한 바이러스가 출현하는 것도 그러한 악순환의 표식으로 읽힐 따름이다.

 

가축사육도 작물의 재배를 꼭 닮았다. 작물 재배 시 나타나는 단작과 연작의 문제가 땅의 산성화와 생태계의 파괴에서 그 원인을 찾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가축의 질병과 관련된 문제들도 집단 사육과 공장형 사육 방식, 그리고 사료의 문제 등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마땅하다. 가축이라 해봐야 소, 돼지, , 오리 등이다. 한 가구에 소나 돼지 한 마리와 거기에다 닭오리 몇 마리 쯤 키웠던 예전의 농가의 풍경을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소는 농가당 수백 마리에서 수천 마리를 사육하고, 돼지는 기본이 수만 마리에 이른다. 닭은 최소 수만에서 수백만 마리다. 농장이라고 할 수가 없다. 가축을 생산하는 공장이다. 이렇게 대량으로 사육하는 것을 저들은 규모의 경제라 부른다. 그것을 서구의 과학적 축산 이론이 뒷받침하고 있다. 물론 이 모든 배경에는 인간의 탐욕이 자리하고 있지만.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나, 최근 전 국민적 관심사 중의 하나가 구제역 문제다. 소가 죽어가서 묻을 곳이 없다. 수백만 마리의 소 돼지가 죽거나 살처분 당해서 땅속에 묻힌다. 인간에게 제 맛있는 살을 바쳐서 존재가치로 삼기라도 했을 소 돼지들이,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고통을 받고 살처분을 당한다. 원인은 구제역 바이러스라고 한다. 온갖 대책을 내놓은들 근본적인 처방이 될 수 없는 것이 더 슬프고 가슴 아프다.

 

생명체들을 마음대로 죽이는 것도 문제지만, 한꺼번에 수백만 마리나 되는 것들을 도대체 어디다 묻는단 말인가? 말이 수백만 마리지 사람으로 치면 1~2천만 명에 해당되는 무게가 된다. 땅에 파묻기를 능사로 하나, 훗날 발생하기라도 할 2, 3차 바이러스 감염의 문제들은 또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땅속의 지하수 오염의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이라도 해봤는가? 우선 보이지 않으니 때우고 보자는 식이다. 내가 보기엔 정치권이나 농업당국, 그리고 동물의학자들이 아무리 나서도 이 신종 바이러스의 공격에 당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저들은 그것을 바이러스 전쟁이라 한다. 드디어 바이러스가 인간들을 공격해왔다. 바이러스의 창궐은 지금의 일만은 물론 아니다. 역사적으로 페스트나 장티푸스, 콜레라가 유행해 세계적으로 희생된 인구가 얼마였던가. 현대과학이 적어도 세균과의 싸움에서 완승이나 한 것처럼 샴페인을 터트리고 있을 때 다시 도발된 바이러스와의 전쟁은, 구제역이 앞장서고, 벌바이러스와 돈콜레라와 조류독감과 A.I, 그뿐 아니고 광우병과 신종플루와 해마다 더 강력해지고 새로워지는 독감바이러스 등으로 확전되고 있다. 전문가들의 말에 따르면 계속해서 새로운 변이종이 출현하고, 이 변이종들은 백신을 계발할 틈도 주지 않기 때문에 그 위험이 더 심각하다. 그리고 급기야는 인간에게 치명적인 변이종의 바이러스가 생겨날지도 모른다.

 

인간들의 탐욕과 독선과 아집이 불러온 총체적 모순이 눈앞의 현실이 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우리들이 발 담고 있는 산업문명과 도시문명과 이에 기반한 생활양식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음이여! 바이러스가 어디서 나온 것이던가? 어찌하여 그 많은 소, 돼지 등을 사육하게 되었단 말인가? 소에게 동물사료를 먹이면 훨씬 더 빠르게 성장이 된다. 초식동물인 소가 동물사료를 먹으면 어떻게 될까, 뻔한 이치를 놓고도 그 대단한 권력과 과학이 속수무책이다.

 

이제 참회하는 마음으로 식탐을 줄여야겠다. 게걸스런 육식문화가 더 이상 바이러스로 하여금 공격의 빌미를 주지 않도록 해야겠다. 지구 곳곳의 울창한 원시림을 불사르고 거기에 셀 수도 없는 마리의 소들을 움직이지도 못하게 가두어놓고, 살충제를 살포하여 파리 모기들의 접근조차 불허한 채 비육하니, 바이러스가 공격하기에 딱 좋을 수밖에 없다. 거대한 축산자본들이 현대적 사육방법이라 자신한 그 대단찮은 사육방법들을 그만두어야 한다. ‘그치지 않으면 위태로울 것이라는 노자의 애정 어린 권고를 더 이상 흘려듣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에서 벗어나면 일찍 끝나버릴 것이다.

 

인간과 동물과 식물과 바이러스가 원래의 혼돈한 속에서 그대로 하나가 되어 공존하는 그런 하늘 아래가 되도록 말이다. 사자가 어린 양과 뛰놀고, 어린애도 함께 뒹구는 참 평화와 행복의 세상이…….

이제 속히 오기를 빈다!!!

 

민웅기(<태극권과 노자>저자,송계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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