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불편해? 마음을 가져와 무위태극선 교실

민웅기의 무위태극선 28/공을 이루어도 이름을 갖지 않는다/ 좌하세 左下勢    

 

 

오른손이 오른쪽 대각선 위 방향에서 종 모양을 만들고, 왼손은 오른쪽 어깨 앞에서부터 하단전 앞 지점까지 내려가며 허리를 왼쪽으로 돌아서 허벅지 선을 지나 올라오는데, 이와 동시에 오른손은 권으로 바뀌어 돌아나오는 왼손을 만나 그 아래로 질러 들어간다. 이것이 하세다. 하세下勢는 위에서 아래로 자세를 낮추고, 그리하여 맨 아래의 위치에 도달해 방향을 전환해 나오는 품새가 일품이다.

 

하세는 첫째, 허리의 전환이 매우 유연한 것이 특징이며 둘째, 위의 높은 위치에서 아래의 가장 낮은 자세로 내려와서 다시 돌아나오는 동작이 일미一味. 하세란 이름의 뜻은 글자 그대로 낮은 자세라는 뜻이다. 미려가 땅에 닿을 듯싶게 상체를 반듯하게 유지한 채 낮추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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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생의 측면에서 하세下勢의 수련은 골반을 풀어주고, 허리의 유연성을 증장시키며 하체를 튼튼하게 해준다. 태극선은 그 수련의 특징이 허리의 전환에 따른 사지의 움직임을 추구함에 있다. 허리를 반듯이 하여 좌우로 도는 운동은, 허리의 대맥(기경팔맥 중의 하나)을 발달시킴으로써 인체생리의 중심인 하체의 기혈순환과 위, 대소장, 신장, 방광의 기능을 증진시킨다. 그런 까닭에 남성의 경우에는 정력을 강화하고, 여성의 경우에는 자궁과 난소의 기능을 활성화시키고 원활하게 하는데 크게 기여한다. 인체 내의 에너지의 중심은 하체에 있다. 그러므로 하체를 단련하는 일은 건강을 지키고 장수하는 데에 귀하다.

 

하세는 자세를 낮춤이니, 인간사의 성주괴공成住壞空의 순환의 도를 드러내는 초식이 된다. 태어나고 머물다가 무너져 내리면 공한 곳으로 되돌아가게 되는 것이 인간사일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현재의 우리의 즐거움이나 혹은 고통이 항상되리라는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

잘못된 믿음이란 무엇인가? 불가에서는 그것을 상, , , 의 네 글자로 간단히 줄여서 말한다. 이 세상 모든 것이 항상된다고()’ 여기고, ‘즐거운 것()’이라고 생각하고, ‘가 실재한다고() 믿으며, 이런 청정하다고()’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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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자세를 낮추어 아래에 처해서(下勢)’ 보면, 이러한 믿음은 근거 없는 믿음이라는 것이 곧 드러난다. 높은 자리나 높은 이름도 한순간의 일로 돌아가고, 고급 룸살롱이나 요정의 환락도 술이 깨면 허망한 고통 뒤로 사라지고 만다. 평생을 두고 와 내 가족밖에 모르고 살아온 인생도 한순간의 갈림길에 들어서면,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가고 만다. 나와 내 몸이 소중하고 깨끗한 줄 알아서, 수시로 닦고 씻어내며 거울 들여다보기에 오만 정성을 다하나, 몸속을 들여다보면 깨끗한 건 보이지 않고, 똥오줌에 탁한 것들만 잔뜩 들어차 있음이다.

 

하세下勢는 낮추어 전환하는 자세를 말하는 뜻이 되니, 우리의 지혜가 자라나고 밝은 눈이 열리게 되면,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게 되고, 거꾸로 뒤바뀌었던 것들(顚倒)이 바르게 보이게 된다. 그러므로 밝은 등불 아래서 다시 보니, , , , 이라는 것도 전도된 견해일 따름인 것이다.

 

하세는 하심下心에서 나온다. 마음을 내려놓는다는 뜻이니, 하심이란 선에서 즐겨 말하는 방하착方下着이다. 무엇 때문에 마음을 내려놓고 말고 하는가?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고통은 마음에서 온다. 고통으로 신음하는 마음이야말로 화탕지옥의 마음이다. 온갖 탐진치貪嗔痴로 가득 차 있으니 지옥이 따로 없게 된다.

 

달마가 9년 면벽을 하는 도중에, 혜가가 찾아왔다. 혜가는 스승인 달마에게 하소연을 한다.

제 마음이 편치 못합니다.(我心不安) 제발 제 마음을 편케 해주실 수 없습니까?”

달마가 말했다.

네 마음을 가지고 오너라.(將心來)”

제 마음을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覓心不可得)”

마음이 있어야 편하고, 편치 않음이 있을 텐데, 마음을 찾을 수 없으니 찾을 것도 없게 된다. 혜가가 스승에게 넙죽 절하고 고마워한다. ‘마음이 비어있는 그 자리를 알았다(心空及第)’는 뜻이다.

 

하세下勢를 하니 무심無心하게 된다. 무심하게 되니 무의 자리를 얻게 된다. 무의 자리에서 세상을 보니 가지각색의 것들이 다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다채로운 색깔과 향기로 어우러지고 각양각색의 유물들로 시공時空을 가르며 아웅다웅, 오목조목, 형형색색 스스로의 자태를 한껏 뽐낸다.

 

그리고 온갖 모양의 그릇들이 제 잘난 멋을 내고 있으나, 그 그릇의 쓰임새는 그릇의 빈 공간에 있다(當其無, 有器之用). 그릇이 비어있지 않으면 그릇의 쓰임이 없기 때문이다. 서른 개의 바큇살이 하나의 바퀴통에 모인다. 그 바퀴통의 빔에 수레의 쓰임이 있다(當其無, 有車之用). 문과 창을 뚫어 방을 만든다. 그 방의 빔에 방의 쓰임이 있다(當其無, 有室之用). 그러므로 노자가 말했다. 있음()이 이로움이 됨은, 없음()의 쓰임이 있기 때문이다.(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 11)

 

당나라의 도사 성현영이 풀어쓰기를, “없음은 있음에 의지해서 이로움을 주고(無賴有以爲利), 있음은 없음의 인도함을 받아서 그 쓰임이 있다(有籍無爲用).”라고 했다. 있음만이 쓰임이 될 뿐, 없음이 그 배경으로 작용하거나 없음에 적을 둠으로써 있음의 효용이 있다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뿐만 아니라 없음이 작용하는 것은 반드시 있음에 바탕하고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술회한 노자의 통찰이, 매우 오묘한 중도中道의 도, 혹은 균형잡힌 어울림(中和)’의 도를 설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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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곳에서 제2장의 유무상생有無相生의 도리가 더욱 명료해진다. 바로 의 이치가 그러하다.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닌(非有非無)’ 도의 가물함()이다. 그러므로 승찬 선사가 있음() 가운데서 없음()을 보는 것이 깨달음의 요체라고 한 것은 매우 통찰력 있는 일갈이 된다.

하세下勢를 통해서 큰도가 강물처럼, 바다처럼 넘쳐나는 것을 보고 경험한다. 그러한 큰 길은 범람하는 홍수처럼 위쪽과 아래쪽, 왼쪽과 오른쪽을 가리지 않고 넘쳐흐른다. 갈 길이 따로 있는 줄 알았는데, 홍수가 범람해오니 모두 다 하나가 된다. 넘쳐나는 홍수 속에 상, , , 타의 경계가 쓸려가 버렸다. 혼돈混沌 가운데 합류해 들어온 것이다.

 

큰 길은

범람하는 물과도 같다.

좌로도 갈 수 있고 우로도 갈 수 있다.

만물이 이 길에 의지하여 생겨나는데도

그 길은 잔소리하지 아니하고,

공이 이루어져도 그 이름을 가지려 하지 않는다.

만물을 입히고 먹이면서도 주인 노릇하려 하지 않는다.

늘 바람이 없으니 작다고 이름할 수도 있다.

만물이 모두 그에게로 돌아가는데 주인 노릇하지 않으니

크다고 이름할 수도 있다.

끝내 스스로 크다 하지 않으니

그러므로

능히 그 큼을 이룰 수 있게 된다.

 

大道氾兮, 其可左右. 대도범혜 기가좌우

萬物恃之而生, 而不辭. 만물시지이생 이불사

功成不名有, 공성불명유

衣養萬物而不爲主. 의양만물이불위주

常無欲, 可名爲小; 상무욕 가명위소

萬物歸焉而不爲主, 可名爲大. 만물귀언이불위주 가명위대

以其終不自爲大, 이기종불자위대

故能成其大. 고능성기대 (34)

 

마음을 내려놓으니 큰 길에 들어서 있다. 작은 길에 집착해있던 마음을 방하착하니 대도가 눈에 보인다. 그 길은 범람하는 물과 같다(大道氾兮). 오른쪽의 길만이 살 길이라고 고집하던 마음도 쓸어가고, 왼쪽의 길이 절대적인 길이라고 우기던 마음도 쓸어가버린다(其可左右).

비로소 만 가지 길이 그 큰 길에서 비롯됨을 알게 된다(萬物恃之而生). 작은 길들이 잘났다고 우기고 뽐내고 싸울 때조차도 큰 길, 바로 종가길은 아무 잔소리도 하지 않는다(而不辭). 나무라지도 않고 싫다고 하지도 않는다. 돌아온 탕자를 품어주는 아버지처럼 자애로울 뿐이다.

 

유정무정의 뭇 갈래길들이 다 하나로 통하도록 인도하고, 그들로 하여금 바야흐로 창조가 무성하게 넘실대는 생명의 바다를 이루게 한다. 그렇게 큰 길의 공은 크고도 크나, 그 공이 이루어지고 난 뒤에는 이름을 갖지 않는다. 큰 길은 공을 이루더라도 스스로 그러함(自然)’에 의지할 뿐, 누가 공을 세웠다거나, 어떤 공을 이루었다거나, 그 공의 수혜를 받은 대상들이 누구라거나 하는 마음조차 없다. 그러므로 이름이 없게 된다.(功成不名有)

 

만물을 옷 입히고 자라게 하지만, 큰 길은 그 만물들의 주인 행세를 하지 않는다. 오로지 만물 스스로가 스스로의 주인이 되게 할 뿐이다.(衣養萬物而不爲主) 큰 길은 항상 무욕함으로써만 존재한다. 큰 길은 사사로움이 없어서 크다.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마음이 없어서 온생명의 마음이 된다. 그러니 무욕無欲한다. 무욕하므로 작다고 이름할 수도 있다(常無欲, 可名爲小).

그리고 이러한 만물은 스스로의 할 바가 끝나면 제자리로 돌아간다. 큰 길에 의지해 나왔으니 큰 길로 귀의해 들어간다. 만물이 모두 그에게로 돌아가는데도 주인 노릇을 하지 않는다.(萬物歸焉而不爲主) 그래서 크다고 이름할 수도 있다(可名爲大). 끝내 스스로 크다고 하지 않으니(以其終不自爲大) 그러므로 능히 그 큼을 이룰 수 있게 된다.(故能成其大)

 

내가 크다, 큰일을 했다고 하는 사람은 위대한 사람이 아니다. 그냥 하게 되니까 하고 큰일이라, 작은 일이라는 생각이 없이 해서 위대한 사람이다. 큰 길에 들어서면 큰 것이 작은 것이 되고, 작은 것이 큰 것이 된다. 상대적 차별심을 내려놓은 자리에 서면 크고 작음, 많고 적음, 높고 낮음, 왼쪽과 오른쪽, 앞과 뒤가 없게 된다. 수량으로나 크기로나 그 무엇으로도 다름도 없고(不異), 같음도 없다(不一). 능엄경의 작은 것에 큰 것을 수용하는 도리가 있다.

 

하나가 헤아릴 수 없음이 되고(一爲無量),

헤아릴 수 없음이 하나가 되면(無量爲一),

큰 것 가운데 작은 것을 나타내며(大中現小),

작은 것 가운데 큰 것을 나타낸다(小中現大).

한 터럭 끝에(於一毛端)

보배로운 깨달음의 땅을 나타내고(現寶王刹),

하나의 작은 티끌 속에(在一微塵)

큰 법의 수레바퀴를 굴린다(轉大法輪).

 

민웅기(<태극권과 노자> 저자,송계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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