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를 뚫어 신장을 강하게 만든다 무위태극선 교실

민웅기의 무위태극선/세 가지 보배/쌍풍관이 双風貫耳    

 

쌍풍관이双風貫耳 초식은 등각의 여세를 몰아서 양손의 권이 상대 얼굴의 태양혈을 족집게로 집듯이 취한다. 궁보의 보법을 취해 왼발이 실하고 오른발이 허하며, 양손의 권이 동시에 실하다. 양손의 권이 기풍氣風을 내어 상대방의 귀를 관통해서 뚫어줌이다. 그래서 쌍풍관이双風貫耳의 이름이 붙여졌다. 무술의 뜻으로 쓰일 때는 상대의 태양혈을 점혈하는 일격을 의미했으나, 양생의 뜻으로 쓰일 때는 상대방의 귀, 즉 이근耳根을 기풍으로 타통하여 정화시켜주는 뜻으로 푼다.

 

이근은 안眼耳鼻舌身의 오관 중에서 청각을 담당하는 감각기관이다. 청각은 시각과 함께 우리 몸의 가장 주요한 지각 기능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귀는 동양의학(황제내경)에서는 오장 중 신장의 구멍으로 여겨지므로, 귀가 막히거나 귀에서 소리가 울리는 현상(이명현상) 등은 신장과 연관된 원인이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를테면 정력이 부족하다거나 피곤하게 되면 귀에서 환청과 같은 이명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왜냐하면 신장은 정의 저장소이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으로 이근을 청정하게 하는 것은 우리 인식의 뿌리 중 하나인 이근을 정화하여 맑은 상태로 진실을 듣게 하는 효과를 갖게 할 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는 신장의 공능과 연관되어 있는 구멍을 잘 통하게 하고 그 기능을 좋게 함으로써 정을 강화시키는 양생 효과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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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풍관이双風貫耳는 그 모습으로 보아, 상대를 귀하게 여김으로 나의 온 마음과 정성을 들여 모심과 섬김을 다하는 자세이다. 상대방의 필요에 전적으로 부응함으로써 사랑과 헌신을 드리는 자세이다. 나의 힘과 기를 모아 상대의 막힌 기혈을 풀어주고 통하게 해줌으로써, 나와 상대의 기운이 소통하게 하는 자세이다. 그런 뜻에서 쌍풍관이双風貫耳는 자타불이自他不二의 경계에 드는 묘용妙用을 드러낸다.

 

관이貫耳는 귀가 뚫림이니 세상의 소리를 들음이다. 세상의 소리를 듣고 보는 마음을 갖은 이가 불가의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다. 세음世音이란 세상의 모든 소리들이. 하늘의 바람소리와 계곡의 물소리와 바다의 파도소리와 새소리들과 해와 달의 속삭이는 소리들, 그리고 사람들의 웃는 소리와 우는 소리와 괴로워 까무라치는 소리와 싸우는 소리와 행복에 겨워 덩실덩실 춤추는 소리들, 그리고 염불소리와 목탁소리와 기도소리와 침묵과 내면의 울림과 마음속 한줄기 고독함으로부터 울리는 소리들, 세간의 소리들이 이와 같다.

 

관세음觀世音은 관이貫耳의 상태에서 온갖 소리를 듣고 보는 것이니, 그 소리와 계합하여 소리의 본성에 도달하는 깨달음을 뜻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능엄경의 이근원통耳根圓通수행이 그것인데, 이근을 열어 원만한 도에 단박에 통하게 한다. 그 소리들에 대한 일체감과 합일의식의 지경에 나아감으로써 그 소리들에 대한 근원적인 자비의 마음을 내는 것을 아울러 의미한다.

 

귀가 뚫리면 세음만 듣는 것이 아니고, 하늘의 소리도 듣는다. 하늘의 소리란 내면의 본성에서 울려나오는 소리이다. 그 내면의 본성을 통해서 울려나오는 온우주의 소리이다. 그 소리는 참으로 신령하며, 그 소리는 참으로 공하며, 그 소리는 참으로 고요하다. 그 고요함의 한 가운데서 묘음妙音을 듣는 것이 참된 귀 뚫림이 된다.

 

그런 의미로 보아 쌍풍관이双風貫耳는 자애의 마음의 바탕에서 일어난 기의 바람으로 나의 귀를 뚫고, 동시에 상대의 귀를 뚫어주는 관이貫耳의 행공이 된다. 관이를 통해서 관음觀音을 이루는 자비행이 된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사랑의 요가가 된다. 노자가 말한다. “나에게 세 가지 보배가 있으니 그것이 사랑이고, 검약이고, 겸퇴謙退이다.”

 

나에겐 세 보배가 있는데

이를 늘 지니고 지킨다.

첫째는 사랑이다.

둘째는 아낌이다.

셋째는 하늘 아래 앞서지 않음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용감할 수 있고,

아끼기 때문에 널리 베풀 수 있고,

하늘 아래 앞서지 않기 때문에

온갖 그릇 중에 으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사랑을 버리고 용감하려고만 하고,

아낌을 버리고 널리 베풀기만 하려 하고,

뒤를 버리고 앞서려고만 한다면,

그것은 죽음의 길이다!

무릇

사랑으로써 싸우면 이길 것이요,

사랑으로써 지키면 견고할 것이다.

하늘이 장차 사람을 구원하려고 한다면

사랑으로 그를 지켜줄 것이다.

 

我有三寶, 아유삼보

持而保之, 지이보지

一曰慈, 일왈자

二曰儉, 이왈검

三曰不敢爲天下先, 삼왈불감위천하선

慈故能勇, 자고능용

儉故能廣, 검고능광

不敢爲天下先, 불감위천하선

故能成器長, 고능성기장

今舍慈且勇, 금사자차용

舍儉且廣, 사검차광

舍後且先, 사후차선

死矣, 사이

夫慈, 부자

以戰則勝, 이전즉승

以守則固, 이수즉고

天將救之, 천장구지

以慈衛之 이자위지 (67)

 

세 가지 보배라는 뜻의 삼보三寶는 그 연원을 따져 보면 노자로부터 나왔다. 불교는 불법승佛法僧을 삼보라 하여 기독교의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의 신관처럼 핵심적인 교리로 여긴다. 불교가 중국에 들어올 때 이미 유사한 사상체계인 도가사상이 자리잡고 있었으므로, 불교의 교학의 언어체계가 자연스럽게 노장의 언어를 빌어 번역되었으니, 삼보도 그런 연유로 노자의 삼보가 어원이 된다.

 

첫째는 사랑()이다. 모성애적인 사랑을 자애慈愛라 하고, 여기에 연민()’의 뜻이 보태어지면 자비慈悲가 된다. 공자의 인도 같은 뜻이다. 노자의 자와 예수의 사랑(), 그리고 불교의 자비慈悲와 유가의 인이 다같이 사랑이라는 말로 핵심을 삼았다.

 

노자의 도는 겉보기에는 무미건조한 것 같은데 속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노자는 하늘과 땅은 어질지 않다(天地不仁)”고 하고 성인도 어질지 않다고 했다.(聖人不仁. 5) 얼핏 보면 무정한 말이고 무정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 무정함의 근저에는 자연自然이라는 말이 깔려있다. 인위적인 베품, 특정인이나 특정물에 대한 편파적인 사랑을 하지 않는 것이 자연의 도라는 말로 읽어야 한다.

 

노자가 보기에 하늘 아래 유정무정有情無情의 모든 존재는 우주의 도 안에서 다 겹겹이 쌓인 그물망처럼 서로서로 얼키고 설켜있어서, 서로를 원인()과 조건()으로 하여 병작竝作하고 연생緣生한다. 그리하여 하늘의 도(天之道)는 싸우지 않아도 잘 이기고(不爭而善勝), 말을 하지 않아도 잘 응답하고(不言而善應), 부르지 않아도 스스로 다가온다(不召而自來). 하늘 그물은 얼기설기 잘 짜여있어(鱓然而善謀) 듬성진 것 같으나,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天網恢恢, 疏而不失, 73)

잘 짜인 그물망은 성긴 듯하나 빠져나갈 수가 없다. 하늘의 그물이 그렇다는 것이다. 우주의 그물이 그렇다는 것이다. 우주 안에서, 자연 안에서 어느 한 가지의 일탈도 허용되지 않는다. 모두 다 있는 그대로 자연의 법에 의해 존재한다는 말이다(道法自然). 이것을 화엄경의 말로 바꾸니, ‘다할 바 없이 겹겹이 쌓임(重重無盡)’이다. “작은 티끌 안에 시방세계가 들어있고, 모든 티끌 안에도 역시 마찬가지라 한다.(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 우주의 존재방식과 그 안의 도(질서)를 설명하는 매우 적절한 표현이 된다.

 

이렇게 우주 안에서는 어느 한 가지도 불필요한 것도 없고, 어느 한 가지도 부족함이나 남음이 없다. 자연의 도 안에서 어느 한 가지도 자기의 역할이 없는 것이 없다. 그대로 완전하다. 그러하니 어느 한 편을 들어 편애함이 있을 것인가? 권투선수가 링 위에 올라서서 상대를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축구선수가 골을 넣어서 기쁜 나머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한다. 보편적인 사랑을 벗어나는 편애는 도의 세계에서는 들어설 여지가 없다. 노자의 천지불인天地不仁은 바로 이런 뜻을 담고 있음이다.

 

그런데 이렇게 잘 짜인 자연의 도 안에서 사랑한다()는 것은 무슨 뜻으로 읽어야 할까? 그것은 자연이 사랑의 원리에 의해서 생겨났다는 말로 이해된다. 자연은 하나이고 혼연함 가운데 연생緣生한다. 각기 다른 듯이 보이는 만유만생이 우주 안에서 한 가지로 맞물려 돌아가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우연이라는 말은 정확한 말이 아니다. 우연이란 인간의 인식이 미치지 못함을 핑계되는 말일 뿐이다. 우주 안에서 우연히 존재하거나 우연히 이루어진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의 성서에서는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태초에 사랑이 있었다.” 라고 하는 것이다. 우주 안에서 일점일획도 어긋나지 않고 존재하는 자연성, 그것이 바로 사랑이고, 만유만생은 그 사랑 안에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이다.

 

불가의 은 깨달음을 뜻하는 말이다. 깨달음이란 참된 존재상태를 깨닫는다는 말이다. 나의 참 존재, 우주의 참된 존재를 깨닫는다는 말이다. 고금의 깨달은 이를 일컬어 성인聖人이라, 도인道人이라, 각자覺者, 하거니와 이들의 지혜에 의지해서 들어가 본 도의 경계는 참으로 단순하고 소박하다. 그 단순함을 언설하여 이라 이라 사랑이라 지혜智慧라 한다. 지극한 도의 경계를 표현하는 말이니 참나의 존재가 바로 그렇고 참우주의 존재가 바로 그렇다는 뜻이다.

 

나누어 말해서 지혜사랑이라 하는 바, 이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불가분리의 하나가 된다. 지혜란 현상 속의 다자多者일자一者로 귀환하는 것이다. 다자가 스스로의 내면의 본성을 찾아 하나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의 길은 하늘의 본성으로 되돌아가는 상승의 길, 즉 에로스의 길이다. 일자인 온우주의 공함으로, 함으로 안기는 복귀復歸의 길이다. 그러므로 지혜의 길은 색즉시공色卽是空이 된다.

사랑의 길은 아가페, 즉 하강의 길이다. 일자가 다자에로 현현顯現하고 하강下降하는 길이다. 아가페는 모든 형상()을 다정함, 자비, 연민으로 대등히 취급함을 의미한다. 일자는 자비와 자선의 무한한 사랑의 행위를 통해 다자로 현현하고, 이러함으로 공즉시색空卽是色이 된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방향의 길이라는 것도 기실, ‘지혜따로 사랑따로가 아니고 한 존재의 양면성을 동시에 설명하는 말이다. 지혜는 이고 사랑은 이다. 지혜가 진공眞空에 대한 깨달음이라면, 사랑은 묘유妙有이다. 지혜가 도의 체라면, 사랑은 도의 용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묘용妙用이 되고, 사랑은 현묘한 하나됨(玄同, 56)을 이루는 묘약妙藥이 되고, 도가 스스로를 만천하에 전개하는 에너지()가 된다.

 

다시 말해서 참된 도는 이판사판理判事判이 된다. 가 이상을 추구한다면 사는 현실을 직시한다. 이상은 지고하고, 현실은 냉혹하다. 냉혹한 현실을 이기는 것은 따뜻한 사랑이다. 그러므로 눈은 차갑게(지혜) 하고, 가슴은 따뜻해야(사랑) 하는 것과 같은 이치가 된다. 그래서 이판理判, 즉 사판事判이 된다. 이런 까닭으로 지혜와 사랑은 도의 두 얼굴이 된다.

 

두 번째는 아낌()이다. 노자는 사랑하기 때문에 능히 용기있게 되고(慈故能勇)”, “아끼기 때문에 능히 널리 베풀 수 있다.(儉故能廣)”고 함으로써 아낌의 미덕이 널리 베풀어짐에 있음을 술회했다. 노자가 아낌의 뜻으로 쓴 말이 검, , 이다. 절약함으로써 아끼기 때문에 이요, 사랑해서 아끼기 때문에 (自愛不自貴, 72), 사람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기 위해서는 아낌()’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아낌이 보배이다.(治人事天莫若嗇)

 

노자가 아끼는 것은 물질이나 자원뿐만 아니라, 사람을 포함한 하늘아래의 모든 생명이다. 하늘이 명해 부여받은 생명을 아낌으로써, 모든 것이 일찍 회복되는 것(是謂早服)이다. 일찍 회복되는 것, 그것을 일컬어 덕을 거듭 쌓는다고 한다(早服謂之重積德). 덕을 거듭 쌓으면 못 이루는 것이 없고(重積德則無不克), 못 이루는 것이 없으면 그 다함을 알지 못한다(無不克則莫知其極). 그 다함을 알지 못하면 나라를 얻을 수 있다(莫知其極, 可以有國). 나라를 얻는 그 어미는 길고 오래가는 것이니(有國之母, 可以長久), 이것을 일컬어 뿌리 깊고 단단한 길, 오래 살고 오래 보는 길이라고 한다(是謂深根固, 長生久視之道. 59).

아낌의 도가 뿌리 깊고, 단단하며, 오래 살고, 오래 보는 길이라고 말한 대목은 오늘날 참으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거꾸로 말하면 아끼지 않으면 일찍 끝나버릴 것이니(不道早已)라고 말하는 것 같다.

 

세 번째는 하늘 아래 앞서지 않음이다(不敢爲天下先). “감히 세상에 앞서지 않기 때문에 온갖 그릇 중에 으뜸이 될 수 있다.(不敢爲天下先, 故能成器長)”는 구절은 노자의 아래에 처함(處下)’의 사상을 잘 나타내는 요목이다. 노자는 강과 바다가 온갖 시내의 왕이 될 수 있는 까닭은 자신을 잘 낮추기 때문이다.(江海所以能爲百谷王者, 以其善下之, 66)”라고 했다. 그리고 성인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지만 오히려 앞서게 되고, 자신을 도외시하지만 오히려 자신이 보존된다.(聖人後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 7)”고 말해 일관되게 겸퇴謙退의 사상을 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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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풍관이双風貫耳는 나의 귀를 뚫고, 나와 함께 길 가는 이의 귀를 뚫어주고, 그리고 하늘 아래 모든 사람들의 귀를 더불어 뚫어줌으로써, 귀가 뚫려 서로 간에 소리로써 통하는 세상을 간절히 염원하는 수련인의 마음이 담겨있다. 휘파람만 불어도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세상, 눈빛만 보아도 눈치로 통하는 그런 세상 말이다.

    

글 사진/민웅기(<태극권과 노자>저자,송계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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