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방이라도 일전을 겨룰 자세 무위태극선 교실

무위태극선 교실/네 자신을 아는 것이 밝음/제수상세 提手上勢  

 

 

 

몸을 왼쪽으로 살짝 회전하여 가볍게 돌아 나와서 두 손이 정면을 향해 겨누고 있는 자세이다. 무게중심은 왼쪽에 다 있고 오른쪽은 비어 있는데, 금방이라도 두 손을 출수해 일전을 겨룰 태세다.

제수상세提手上勢손을 들어 올려 앞으로 나가는 자세라는 뜻이다. 이제 세상을 향해 진출해 보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 싸움으로 말하면 한번 해볼테면 해보자는 품새다. 그래서 그 기세가 자못 등등하다. 한마디로 빈틈이 없다. 몸자세는 매우 간결하고 단정하며 두 손은 가슴 앞쪽에 가볍게 전진 배치되어 있는 형세다. 밀어낼 듯 잡아올 듯, 막을 듯 칠 듯, 밖의 기세를 들으며 나의 세를 점검하고 있다. 앞을 보고 있는 듯하지만 뒤를 놓치지 않으며, 눈길이 상대를 향해 있으나, 보는 듯 마는 듯 무심하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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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이 단전을 지키나 밖의 기세에 환히 열려있다. 적막한 가운데 한 뜻이 동할 태세이다. 정중동靜中動의 상태로 안팎을 엿보는 자세이다. 여태껏 세상을 향해 갈고 닦아온 기량과 지혜를 써먹겠다고 벼르고 있다. 바야흐로 열린 문으로 밖을 향하니 물상物象들이 엿보인다. 이 다가온다. 기세氣勢가 몰려온다. 이 보이고 상이 보인다. 인심이 출렁거리듯 내 앞으로 물결쳐오는데 나의 알 바는 무엇인가? 나의 갈 길은 어디인가? 나의 방편은 무엇인가? 한번 내놓으라 한다. 한번 내보이라 한다. 한번 해보자고 한다.

 

타인을 아는 자를 지혜롭다 하나

자기를 아는 자는 밝다.

타인을 이기는 자를 힘세다 하나

자기를 이기는 자는 강하다.

족함을 아는 자가 부자이고

억지로 행하는 자는

뜻이 있다고 한다.

자기의 자리를 놓치지 않는 자가

오래 가고

죽어서도 잊혀지지 않는 자가

장수하는 사람이다.

 

知人者智, 自知者明. 지인자지 자지자명

勝人者有力, 自勝者强. 승인자유력 자승자강

知足者富, 强行者有志. 지족자부 강행자유지

不失其所者久, 死而不亡者壽. 불실기소자구 사이불망자수(33)

 

네가 세상을 알고자 하는가, 먼저 자신을 아는 지혜(밝음)를 계발하라!

네가 남을 이기고자 하는가, 먼저 자신을 이기는 힘(강함)을 기르라!

네가 세상을 갖고자 하는가, 족함을 아는 자가 부자이니라!

그리하여 스스로의 설 자리에 서는 자는 오래갈 것이고, 죽더라도 잊혀지지 않는 자가 진정 오래도록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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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知人- 승인勝人- 강행强行의 길은 세상 사람들이 누구나 다 아는 길이다. 모두 다 그리 몰려 있는 길이다. 그쪽 길은 우선 더 빠르고 더 쉽고 더 효율적으로 보인다. 지인知人, 남을 안다는 것은 중요하고 지혜로운 일이다. 그러나 남을 안다는 것은 결국 밖에 보이는 대상을 보고 들어서 아는 것일 뿐이다. 그것은 우리의 감각에 반영되어 나타나고, 우리의 마음에 투사되어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남을 잘 알기 위해서도, 그 남 혹은 외물을 아는 바로 의 문제(自知)로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된다.

 

한편 자지自知- 자승自勝- 지족知足의 방식은 더 느리고 더 답답하고 덜 효율적으로 보이니, 세상 사람들은 이쪽 길을 기피하는 것 같다. ‘자신을 아는 것(自知)’은 오랜 철학의 주제이기도 하려니와 무릇 수행하는 이들의 근본 물음이다. “이 뭐꼬?”, “부모 미생전의 당신의 본래면목은 무엇인가?”의 선의 화두가 다 나를 아는문제를 두고 깨달음의 알갱이로 삼았다는 것은 그러므로 의미심장하다.

21세기는 정보화시대이다. 정보가 힘이고, 정보가 돈이고, 정보가 경쟁력이고, 정보가 성공의 열쇠로 통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너도나도 보다 빠르고, 보다 정확하고, 보다 많은 정보를 접속하고 얻기 위해서 열광하고 분주하다. 무엇이 정보이던가? 노자의 언어로 하면 세상을 아는 것이니 지인知人이요, ‘세상을 이기는 것이니 승인勝人이다.

 

그런데 그렇게 빠름의 진원지요, 경쟁의 산실이라 여겨지던 서구사회가 변하고 있다. 느림의 미학을 예찬하는 일은 이미 특별한 것이 아니다. 슬로우 라이프, 슬로우 시티운동은 이제 서구로부터 역수입해서, 우리의 정책으로 채택된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동양적 사상과 수행을 배우고 연구하고 실천하는 일에도, 동양인보다 더 진지하고 열정적인 것 같다. 그들은 이제 세상을 아는 지식과 과학의 문제가, 근원적으로 나를 아는 것(自知)’으로부터 비롯되고 완성됨을 알기 시작한 것 같다. 나아가서 그들은 행복의 문제를 에서 찾기보다 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 같다. “행복의 씨앗이 내안에 이미 다 갖추어 있다.”는 명제는 동양적 수행전통에서는 오랜 보편적 진리다. 노자의 말로 하면 자승自勝이요, 지족知足이다.

 

진정 오래도록 서기 위해서는 제자리를 꿋꿋이 지켜야 하고, 진정 오래도록 살기 위해서는 죽어서도 잊혀지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는 노자의 법문이 동시대를 살았던 위대한 철인 소크라테스의 금언을 꼭 닮았다.

 

먼저 네 자신을 알라.”

 

자신을 알고 자신을 이기는 기술이 가장 차원 높은 기술이요, 가장 어려운 도술道術이다. 만족을 아는 것은 다 아는 것과 같으니 행복으로 가는 가장 빠른 문이다. 문밖을 나서 길을 가는 이에게 들려주는 노자의 고언을 더 들어보자.

 

밝은 길은 어두운 것 같고,

나아가는 길은 물러나는 것 같고,

평탄한 길은 울퉁불퉁한 것 같고,

윗 덕은 아랫 골 같고,

큰 결백은 욕된 것 같고,

너른 덕은 부족한 것 같고,

홀로 서 있는 덕은 기대 있는 것 같고,

질박한 덕은 엉성한 것 같다.

큰 사각은 각이 없으며,

큰 그릇은 이루어 진 것 같지 않고,

큰 소리는 소리가 없고,

큰 모습은 모습이 없다.

길이란 늘 숨어 있어 이름이 없다.

 

明道若昧, 명도약매

進道若退, 진도약퇴

夷道若纇, 이도약뢰

上德若谷, 상덕약곡

大白若辱, 대백약욕

廣德若不足, 광덕약부족

健德若偸, 건덕약투

質眞若渝, 질진약유

大方無隅, 대방무우

大器免成, 대기면성

大音希聲, 대음희성

大象無形. 대상무형

道隱無名, 도은무명(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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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철대오確徹大悟라는 말이 있다. 한마디로 제대로 깨닫는다는 말인데 명도明道가 바로 이런 큰 깨달음을 말한다. 그래서 그것은 활연관통豁然貫通한다. 막힘없이 통하니 걸림이 없다. 그래서 밝다()’라고 한다. 노자는 참된 지혜를 표현하는 말로 늘 밝음()’을 쓴다. 그런데 밝은 도는 어둑어둑한 것 같다.(明道若昧)”는 것은 무슨 말일까? 이런 걸 두고 갈수록 태산이라고 하는 것 같다. 확철대오하고 활연관통하면 그야말로 환하게 밝아 어두운 구석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생각인데 말이다.

 

참으로 밝은 길(明道)’밝다는 말이나 생각의 자취도 없는() 경계, 어두움과 대비된 밝음이라고 한정짓는 상대적 세계를 끊는() 경계, 아니 밝음도 어두움도 넘어서 있는() 경계를 들어 말하고 있지 않는가. 그래서 그 밝음()은 깊은 어두움() 가운데서 나오고, 그 어두움과 함께 있고, 그리고 어둑어둑한() 것 같다. 밝은 지혜가 깊은 명상(冥想)으로부터 얻어진다는 사실도 같은 이법이다. 명상冥想이란 어두움()가운데서 하는 사유()이므로 밝음은 어두움과 동거하며 마치 서로가 서로를 통해서만 자기를 드러내는 이치를 담고 있게 된다.

 

명도약매明道若昧, 진도약퇴進道若退, 이도약뢰夷道若纇 모두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전진하는 도는 마치 후퇴하는 것 같다.(進道若退)”평탄한 도는 마치 울퉁불퉁한 것 같다.(夷道若纇)”는 말도 마찬가지의 이법으로 풀어진다. 우리가 대립되는 것처럼 인식하는 것들이 도안에서는 상반되는 것으로 녹아들어가고, 상반되는 것과의 관계 속으로 해체되어 들어가고, 그래서 상반되는 것들과 동거하며 그것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자기존재의 정당성과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불교의 연기법과도 다르지 않다. 이것이 있음으로써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음으로써 이것이 있음이니, 이것이나 저것의 독립적인 본질이나 정체성이라 할 만한 것은 애초에 있지 않고, 오로지 서로가 서로에 기대어서 존재할 뿐이라는 말이다.

 

상덕약곡上德若谷의 상덕이란 가장 높은 덕을 말하고, 그렇게 높은 덕은 마치 골짜기와 같다는 말이다. 노자의 덕은 한마디로 풀면 도의 내재성을 말한다. 도의 체는 텅 비어 있어 무이고 무명無名이고 무위無爲하나, 도의 용은 천지자연에 가득 차있어 무불위無不爲하다. 는 도의 초월성을 의미하고, 는 도의 내재성을 말하는 것이니, 바로 하지 못함이 없는도의 용이 노자의 이라 말해진다.

골짜기()는 노자가 최고로 찬사하는 말이니, 도를 은유함이다. 골짜기는 텅 비어있어 신령스러움으로 가득 차며, 골짜기는 자기를 비움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그러므로 모든 것을 창조하는 어머니와 같고, 그래서 골짜기는 텅 비어있음으로 본체를 삼아 신령함이 가득 찬작용을 그치지 않으니 영원히 죽지 않는다.(谷神不死, 是謂玄牝, 綿綿若存, 用之不勤. 6)

상덕上德이란 그러므로 자기를 비움으로 신령해지고, 신령함으로 모든 만물을 창조해내는 현묘한 암컷(玄牝)’의 덕을 말하게 된다. ‘무위하여 무불위함(無爲而無不爲)’을 지시하는 또 다른 표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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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정말 결백한가? 진정한 결백은 마치 오욕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과 같으니(大白若辱)

당신이 넓은 품으로 모든 것을 감싸 안는 덕을 지녔는가? 넓은 덕은 늘 스스로 부족한 것처럼 여기는데 있는 것이니(廣德若不足)

당신이 진정 홀로 건재하는 덕을 과시하는가? 하늘아래 홀로 섬이란 마치 기대어 있는 것 같음이니(健德若偸)

당신이 질박하여 참된 덕을 갖추었는가? 참된 덕은 마치 아닌 듯 하는 것이니(質眞若渝)

 

노자의 역설적 화법은 계속된다.

 

대방무우 大方無隅 큰 사각형은 각이 없고

대기면성 大器免成 큰 그릇은 완성됨이 없고

대음희성 大音希聲 큰 음악은 소리가 들리는 바 없고

대상무형 大象無形 큰 모양은 형태가 없고

도은무명 道隱無名 그러므로 도는 이름 없음의 상태로 숨어 들어간다.”

 

노자는 대를 도의 별칭으로 부르자고 했다.(字之曰道, 强爲之名曰大, 25) 그래서 큰 사각형이나 큰 그릇, 큰 음악, 큰 모양 등은 모두 우주적 차원의 그것들을 지시한다. 그런 우주적 차원에서 무슨 각이랄 게 있을까(大方無隅). 지축이 울리며 자전과 공전을 하는 소릴 들을 수 있는가(大音希聲). 태양과 별들, , 구름, 바람에 이르기 까지, 그 모두를 다 포함하는 온전한 하늘의 모양을 당신이 본적이 있는가(大象無形). 아니 형용할 수가 있는가. 우주는 시시각각으로 변화하고 생성하며 창조되고 있는 바, 그 우주라는 큰 그릇의 완성이라는 것이 말해질 수 있는가(大器免成).

그런 역설이 우주적 도를 언설하기에 편한 것 같다. 그러므로 역설의 도는 우리 인식의 지평을 넘어서 본래 이름 없음의 상태로 숨어들어가고 만다(道隱無名).

 

젊었을 때 실험실에서 사고를 당해 맹인이 된 이웃동네 형님을 찾아갔다. 죽염 가마에 불을 사르는 날이면 형님은 늘 우릴 초대했고, 그 자리엔 평소와 달리 묵잘 것도 많아, 소주며 맥주, 막걸리 등에 돼지고기 장작구이는 기본이고, 과일이나 오징어, 김치 등이 풍성했다. 이런 마실을 즐겨 찾았던 것도 벌써 십여 년 전의 일이 되어 버렸으니, 참으로 오랜만의 마실 출정이나 되는 것 같다. 형님은 이제 환갑을 바라보는 중년의 나이일 테다. 배가 예전보다 좀 더 나온 것 말고는 별로 변해 보이지 않았다. 그 자리에 같이 얼굴이나 보자며 장흥 골짝에서 먼 마실을 온 친구와 가족들은, 예전 한 때는 그 가마 일을 맡아 죽염 굽는 일을 도왔었다.

좁은 골짜기 작은 마을에서 소박하게 토종벌을 키우며 마을 사람들과 살풋하게 사는 그 산골친구의 근황을 물었다. 근황이래야 최근 몇 달 전 수술했던 경과를 묻는 것으로부터 아이의 학교 진학 얘기며, 애초기에 다친 마누라 다리 상처는 어떤가 등이 전부다. 그런데 오늘 뜻밖의 소식이 충격이었다. 벌 바이러스가 찾아와서 근심이 크다는 말이었다. 친구네와 그 산골마을 사람들이 한봉을 키우는 방식은 매우 특별하다. 이를테면 설탕을 먹이지 않고 키우는 자연양봉법 같은 것인데, 평소 우린 그런 양봉법에 대해 매우 신뢰할 뿐만 아니라, 존경의 마음까지 갖고 있었지 않았던가. 그런데 느닷없는 벌 바이러스 소식이라니 잘 믿겨지지 않았다. 전국 방방곡곡에 벌 바이러스가 창궐해서 토종벌들이 전멸해가고 있다고 했고, 경기도 강원도 경상도 지리산 등도 이미 다 벌 농사가 끝났다고 했다.

자기네는 설탕을 전혀 주지 않고 키우는데도 바이러스 피해가 있다며 한숨을 쉬었다. 순간 나의 뇌리를 스친 것은 그놈의 설탕양봉법이다. 벌에게서 꿀을 빼앗고 설탕만 먹여 키운다더니, 아니 벌은 아예 꿀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오로지 태국산 설탕찌꺼기를 먹고 그것을 모으면서 일생을 보내야 했으니, 그랬다. 구제역과 광우병이 그랬고, 돈콜레라가 그랬고, 조류독감과 AI가 그랬다. 그러다가 신종플루로 난리법석을 피우고, 해마다 더 지독한 독감바이러스에 세상이 다 떠들썩한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 않았던가.

 

옆집 김 선생님은 그래서 이제 바이러스가 우리 인간에게 보복하는 것 같다고 장탄식을 하더라. 인간의 욕망과 그놈의 반자연적인 현대적 대량생산 농법 때문에 빚어진 불행이다. 그것이 농부들만의 문제이고 그것이 어찌 소비자들만의 문제이랴. 설탕만 먹어 산성화된 벌이 면역력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 그렇게 다 아는 문제를 눈감고 아웅한 것은 바로 우리자신 아니었던가.

 

모든 사물은 강장하면 늙어지나니,

이것을 일컬어 도가 아니다 고 한다.

도가 아니면 일찍 끝나버릴지니.

 

物壯則老, 물장즉로

是謂不道. 시위부도

不道早已. 부도조이 (30

 

글 사진 민웅기(<태극권과 노자>저자,송계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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