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를 껴안으며 常足의 행복을 느끼시라 무위태극선 교실

민웅기의 무위태극선 35/‘이 얼마나 다른가?/퇴보과호 退步跨虎   

 

 

상보칠성의 초식으로부터 오른발을 뒤로 물려 왼발의 반 보 뒤에 놓는다. 동시에 허리가 오른쪽으로 돌아서 허리의 극으로부터 다시 왼쪽으로 회전하며, 왼손은 왼 방향으로 돌고 오른손은 오른 방향으로 돌아나오니, 가슴 앞쪽에 양손의 권이 마주 보는 형세를 이룬다. 오른발에 무게가 실려있어 오른발이 실하고 왼발이 허하다.

 

발을 뒤로 후퇴하여 호랑이의 목을 껴안는 형상의 초식이라 해서 퇴보과호退步跨虎라 부른다. 지상의 왕인 호랑이와 흡사 포옹을 하는 것 같다. 호랑이를 대결의 대상이나 살상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호랑이가 바로 나의 존재의 바탕이고 조력자인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동물의 왕국의 제왕인 호랑이를, 지상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파트너로 인정하고, 그에 걸맞는 대우를 해주는 포옹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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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역사는 인간이 만 가지 것들에 이름을 부여하고, 이름을 체계화하여, 그 이름을 지배한 역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작명을 하고, 명부를 만들고, 명부에 적힌 것들을 관리하고, 지배하고, 수탈하고, 착취한 역사가 되었으니, 그렇게 보면 인류사는 이름의 역사나 다름 없을 것이다.

아담이 작명을 하고 이브가 부추겼다. 물론 작명의 대상은 자기 자신들이 우선이다. ‘의 이름을 정하지 않고 상대방의 이름을 정할 수는 없다. 이름은 섞여있어 구별할 수 없는 것들을 나누고 다르게 분류하기 위한 장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장치는 매우 유용하기 때문에, 이것을 사용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유익함이 많다. 이름을 짓고 이를 이용하는 즐거움은 인간에게 대단히 차원 높은 지적 수준에 도달하게 하고, 높은 기술과 문명을 구가하게 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그런 까닭에 작명에 능한 인간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전지전능한 신과도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신의 이름까지도 짓게 되었으니 말이다.

 

를 이름지우니 의 이름이 생겨났다. 이름을 부르기 전에는 둘 사이에 벽이 없었으나 서로의 이름이 생긴 다음에는, 왠지 모르게 상대방이 와는 다른 존재로 보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름은 물론 언어쓰기를 통해서 매우 정교하고 세밀하게 만들어졌다.

작명의 즐거움은 참으로 좋았다. 움직이는 것들을 동물이라 하고, 움직이지 않는 것들을 식물이라 했다. 물론 동물에 속한 건지 식물에 속한 건지 모를 것도 있었으나, 그때마다 편리한 대로 구분해 놓았다. 발이 네게 달린 것과 두 개 달린 것들을 구분하고, 등뼈가 있는 것들과 있지 않은 것들을 나누었다. 물속에 사는 것과 하늘에 사는 것, 날개 달린 것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필요한 만큼 일일이 나누어, 그 다름을 따라 이름을 짓고 명부에 넣었다.

 

숫자도 육안으로 보이는 것을 중심으로 하나, , 을 세어 넣고, 각각의 모양도 지각되어진 대로 그려 넣으니, 실물 같은 도감이 완성되어 갔다. 직선과 곡선, 삼각형과 사각형, 사다리꼴과 원형, 그런 도형들이 실재와 다름없다고 믿기 시작했다. 거리와 넓이와 높이를 재고, 내 땅과 네 땅을 정밀하게 분리하고, 혹시라도 침범하면 나쁜 것()으로 여기니, ‘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름 하여 선악과善惡果를 먹게 된 셈이다.

 

시간이라는 것도 만들었다. 해가 뜨면 뜬 대로 살고, 해가 져서 어두우면 어두운 대로 살아서 지금, 이 순간에 오로지 머물던 의식이, 시간이 만들어진 다음에는 그 시간에 얽매이게 되었다. 지나간 것은 어제와 그제, 그리고 과거로 하기로 했다.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것은 내일과 모래, 그리고 미래로 하기로 했다.

과거와 미래를 만들다 보니 현재가 없어져갔다. 시간이 있기 전에는 늘 현재였으나, 시간이 생긴 다음에는 과거와 미래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시시각각으로 생각은 현재에 머물지 않고, 과거를 기억하고 후회하고 원망하는 쪽으로 달아나버렸다. 그리고 또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고 대비하는 쪽으로 자꾸만 떠돌게 되었다. 과거와 미래를 나눈 틈바구니에 끼여, 현재의 자리는 점점 더 줄어들게 되었다.

 

이름과 숫자와 모양을 만들어 도감을 작성했던 인간의 즐거움은 매우 컸다. 그리고 스스로 지은 이름(), 숫자(), 모양()은 언어로 쓰여 그 체계가 매우 정치하게 이루어지고, 그 체계에 대한 인간의 신뢰는 말할 수 없이 컸다.

이제 이름이 없으면 살 수도 없을 것이다. 만약 이름이 없다면 숨이 막힐 것이다. 이름이 없다면 존재가치도 없을 것이다. 이름을 만들고, 이름을 이용하고, 이름을 지배했으나, 오히려 그 전지전능한 이름()의 신에 노예가 되고 만 것이다.

 

퇴보과호退步跨虎는 이렇게 인간 본위로 모든 질서와 가치를 매기던 태도로부터 한 발 물러섬을 의미하게 된다. 인간이 하늘 아래의 주인으로 군림하게 됐다고 생각했으나, 오히려 자신이 만든 덫에 제 스스로 걸려있는 꼴이 되어있음을 알아차리고, 그로부터 한 발 물러섬을 의미하게 된다.

스스로 작명한 것들이 자신의 소유물이나 되는 냥, 지배하고 착취하고 멸절시키며, 그것들을 정당화시켰던 이데올로기와 패러다임과 그에 따른 태도를 전면적으로 돌이킴을 의미하게 된다.

 

그리하여 퇴보과호退步跨虎는 여태껏 인간 자신들이 지배하고 착취하고 무시했던 식물과 동물과 미생물과 유정무정의 존재들을 껴안아서 더불어 사는 파트너로, 공생의 한 축으로, 온생명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낱생명들로 인정함을 의미하게 된다.

나아가서 인간 스스로가 온우주적 존재를 담지한 담지체로서, 온우주의 신성함을 내재한 영적 존재로서의 자기의 존재성을 고백하고, 아울러 온우주적 존재로서의 책무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하는 그런 뜻으로도 읽혀진다.

 

인류가 복되게 하리.”

청정한 나라를 실현하리.”

 

造福人類 조복인류

實現淨土 실현정토 (태극구결)

 

태극선은 태극의 기운과 태극의 의식으로 돌아가는 수련을 통해서 나와 인류, 그리고 우리가 몸담고있는 이 세계가 지복至福의 문에 들어서도록 하는 수련법이다. 지복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서로 간에 나뉘어있는 경계를 허물고, 서로 간에 놓여있는 장벽을 부수어서, 소통하며 기쁨과 행복을 나누는 그런 지경일 것이다.

동서東西 간에, 좌우左右 간에, 남북南北 간에, 고하高下 간에, 생명들 간에 경계를 허물고 사랑을 소통하여, 조화로움과 평화로움이 서로에게 지극한 기쁨이 되는 그런 지경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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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한 국토는 우리의 마음속에서 자라고, 우리의 몸에서 체달하며, 우리의 의식이 도달하게 되는 모든 경계를 이르는 말이다. 청정은 인간이 쌓은 모든 상으로부터 스스로 해방됨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하늘로부터 품수 받은 본성을 회복함을 의미한다.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상으로부터 벗어나서 본성을 자각하게 되면, 청정한 국토는 혼연한 상태로 빛을 발하게 되니, 과 속,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 하늘()과 땅()이 둘이 아니게(不二) 된다.

 

병가의 속담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나는 감히 주인 될 생각을 아니하며

손님이 될 뿐이요,

나아갈 때는 감히 촌으로 함도 삼가고

물러날 때는 척으로 한다.

 

用兵有言, 용병유언

吾不敢爲主而爲客, 오불감위주이위객

不敢進寸而退尺, 불감진촌이퇴척 (69)

 

싸움터에서 주인이 된다 함은 공격을 위주로 한다는 말이다. 노자는 혹 싸우더라도 감히 주인이 되지 않고, 손님과 같이 방어를 위주로 해야 할 것이라고 한다(吾不敢爲主而爲客). 전쟁의 주인이 된다는 말은 침략자가 된다는 말이요, 살인자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하니 전쟁에 임하더라도 나아감을 저어한다. 물러날 때는 과감히 물러난다(不敢進寸而退尺). 살상을 피하는 뜻을 담아 그러할 것이다.

물론 싸우지 않음이 가장 좋은 일이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잘 이기는 것이기 때문이다(不爭而善勝). 그리고 그 싸움의 대상이라는 것도 다 인간내부의 문제들이 외화된 것들이다. 노자가 하고 이 그 거리가 얼마나 되느냐고 묻는 뜻이 바로 거기에 있다.

 

배움을 끊으면 근심이 없을지니!

네와 응이

얼마나 서로 다른가?

좋음과 좋지 않음이

얼마나 서로 다른가?

 

絶學無憂. 절학무우

唯之與阿, 相去幾何? 유지여아 상거기하

善之與惡, 相去若何? 선지여악 상거약하 (20)

 

노자가 보기에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서로 싸우는 이유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는가, 혹은 ()’하는가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사소한 것들에 목숨을 거는 것이 동서고금에 통해있음이다. 그리고 이어서 좋음()’좋지 않음()’이 도대체 얼마나 큰 차이가 있기에 거기에 목숨을 걸고 싸우느냐 고 묻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싸우는 것이 결국, 시비是非와 선악善惡과 호오好惡를 벗어나지 않으니, 이 둘 간의 거리가 도대체 얼마나 되는데 그토록 목숨을 걸고 다투게 되느냐 고 묻고 있다.

 

족함을 모르는 것만큼

인간에게 큰 화는 없다.

욕망을 계속하는 것만큼

사람에게 큰 허물은 없다.

그러므로

족함을 아는 만족이야말로

늘 족한 것이다.

 

禍莫大於不知足, 화막대어부지족

咎莫大於欲得, 구막대어욕득

故知足之足, 고지족지족

常足矣 상족이 (46)

 

늘 족함(常足)’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다. 욕망을 계속하는 것은 언젠가 큰 화를 불러온다. 족함을 모르기 때문에 욕망이 계속 자란다. 그렇게 계속해서 바라는 것이 종국에 허물()’이 된다고 말한다.

 

요즘의 시대는 오히려 욕망이 없는 것을 허물로 여기는 시대인지도 모른다. 욕망의 새로운 목표를 끊임없이 경신하고, 능력을 개발해서 이에 도전하는 것을 최고로 치는 것 같다. 그렇게 해서 혹 그 목표가 성취되더라도 더 큰 목표, 더 원대한 목표를 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늘 그런 식으로 배우고 듣고 하기 때문에, 욕망이 없는 것, 도전할 새로운 목표가 없는 것은 오히려 허물이 되는 것 같다.

 

인생에 가을이나 겨울 같은 건 없는 게 더 좋다는 식으로 말이다. 잘 여물고 잘 갈무리하고 그것으로 늘 족함의 상태로 존재하는 것, 그것이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노자의 오래된 법문이 된다.

 

민웅기(<태극권과 노자>저자,송계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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